5·16쿠데타의 진실
- 다섯 번의 쿠데타와 박정희 그리고 미국 -
새날희망연대 180105
김상구
가.《5·16청문회》소개
시민들의 촛불항쟁의 결과로 박근혜는 파면되었고 문재인 정부가 새로이 출범하였다. 그리고 지난 정권의 비리와 부정부패, 각종 이권개입 등은 "적폐"라는 단어로 정리되었고, 그 결과의 하나로 박근혜, 최순실, 김기춘, 이재용, 우병우 등이 구속되었다.
박근혜 적폐의 뿌리는 박정희의 쿠데타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5·16쿠데타의 기원’을 정확하게 알아야할 것이다. 지금까지 5·16에 대한 평가는 ‘혁명’이냐 ‘쿠데타’인가라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쿠데타 주체에 대한 시비도 육사8기·5기, 해병대, 공수부대 등이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5·16청문회〉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대부분 폐기할 것을 요구한다. 조작된 5·16신화,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광신, 지금도 우방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맹신 등을 버리고 역사의 진실을 찾을 것을 강요한다. 그러면, 박정희 군부집단과 미국 군산정복합체가 그렇게 숨기고자했던 5·16의 진실 즉 쿠데타의 목적, 배후, 군인 박정희의 정체는 무엇일까?
사후승인이든 사전기획이든 미국이 박정희의 쿠데타를 승인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장면 정권을 버렸을까하는 의문이 남게 된다. 흔히들 장면 정권의 유약함과 무능함을 든다. 하지만 잊고 있는 사안이 몇 가지 있다. 2대 악법 즉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추진했던 정권이 장면 정권이었으며, 장면 정부 출범 이전부터 쿠데타가 계획·추진되었음을 기억하면, 지금까지 거론되고 있는 담론들이 모순에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본다.
미국의 지난 정권이었던 아이젠하워의 뉴룩정책에 기반을 둔 감군 정책을 추진했던 것이 장면 정권 몰락의 원인임을 〈5·16청문회〉는 규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무부와 국방부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군부가 승리했다는 점이다. 미국 군부는 오래 전부터 한국의 군부가 정권을 장악해야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1952년, 이종찬·이용문·박정희를 부추겨 쿠데타를 준비하게 선동한 것이 그 시초였다. 10년 후 결국 그들은 성공했다. 박정희의 승리가 아니라 미국의 군·산·정 복합체가 승리했다는 뜻이다. 이 책은 이러한 과정을 세밀하게 추적하여 5·16쿠데타의 기원을 밝히고 있다. 한편, 〈5·16청문회〉는 기존의 책들이 거의 다루지 않았던 아래의 사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첫째, 박상희 및 박정희가 정말 남로당 당원이었는가 하는 의문
둘째, 광복 후 8개월 동안 북경·천진에서의 박정희의 활동내역 특히 ‘후 광복군’이 북경과 천진 지역의 동포들을 학살한 ‘흥한단 사건’에서 김구와 박정희의 역할
셋째, 생도 및 초급장교시절 박정희가 저질렀던 살인미수·살인방조 등의 범죄행각에도 무사했던 이유
넷째, 별 연고도 없던 김창룡·김안일·백선엽·하우스만 등이 숙군과정 중 박정희를 살려낸 이유(※특히 민간인 학살에 이용되었던 국방경비법의 문제점과 위법성)
다섯째, 결혼 혹은 동거했던 세여인(김호남·이현란·육영수)과의 인연과 결별과정
여섯째, 한국전쟁시기 박정희의 공과 및 전쟁터를 드나들던 육영수에 대한 의문
일곱째, 쿠데타 과정에서 서울신문 사장을 역임했던 장태화와 전 마사회장 김덕승의 역할
여덟째, 네 번의 미수를 거쳐 다섯 번이나 쿠데타를 시도할 동안 박정희가 무사했던 이유
아홉째, 미 군부가 장도영·이한림 등을 포기하고 대신 박정희를 선택한 이유
열 째, 장면의 수도원 도피에 관한 진실
열한째, 박정희가 은인이었던 장도영·송요찬 등과 동지였던 박임항·방원철 등을 배신했던 이유
열두째, 쿠데타 셋째날인 1961년 5월18일 저녁 박정희가 하우스만의 집을 방문했던 이유
열셋째, 5·16관련 공로로 하우스만이 미 국방장관으로부터 장문의 공적서와 함께 공로표창을 받은 이유
열넷째, 케네디가 박정희 군부집단을 최종적으로 승인한 이유
열다섯째, 박정희·김종필 등이 무리하게 한일회담을 추진한 이유
열여섯째,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설계한 로스토우의 등장
등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그리고 일생을 통하여 진정한 친구가 단 한명도 없었던 박정희의 교유관계, 형 박상희에게 몽둥이찜질을 받고 난 뒤 도피 수단으로 군관학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한 사연, 이현란에 대한 집착, 박정희의 성격과 술버릇 등에 대한 소개는 이 책의 조미료로 보면 될 것이다.
나. 하우스만의 증언
: 하우스만은 박정희가 5·16 이전에 적어도 두 번 쿠데타를 시도했다고 한다. 첫 번째 음모는 부산 정치파동으로 시국이 어수선하던 1952년 무렵 이용문 장군을 업고 계획한 것으로 보고 있다. 두 번째는 진해 육군학교에 입교한 1957년부터 싹을 키웠다. 육군학교 입학동기생인 최주종 등 일부 장군 그리고 전두열 등 영관장교들과 토론을 하면서 쿠데타의 뼈대를 잡아 갔다고 전한다. 그 후 1960년 4월 경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4·19혁명의 발발로 인해 무산되었다는 것이 하우스만의 주장이다.
다. 1952년, 이종찬·이용문·박정희의 쿠데타 미수사건
1. 원인
1) 1950년 5·30선거의 결과
1> 전체 210석 가운데 민주국민당 24, 대한국민당 24, 국민회 14, 대한청년당 10, 일민구락부 3,
대한노총 3, 사회당 2명, 무소속 126명
2> 야당인 민국당의 중진들 그리고 이승만 친위세력이 대부분 낙선
3> 친여당 세력은 대한국민당을 포함하여 57명 정도
2) 이승만의 친위 쿠데타
1> 1952년 1월, 직선제 개헌안 부결(출석의원163명 중 찬성19, 반대143, 기권1)
2> 야당의 내각제 개헌추진
3> 1952년 5월 23일 이승만, 귀국인사차 들른 무초 대사에게 계엄령 선포 예고
4> 라이트너 약 10일간 대리대사 역할
5> 5월 25일 자정 이승만, 부산지역 계엄령 선포. 영남지구 계엄사령관 원용덕 소장
(당시 신태영 국방장관 보좌관) 임명
3) 원용덕의 폭거
1> 5월 26일, 출근하는 50여 명의 국회의원들을 버스에 태운 채 크레인으로 끌어다가 헌병대에 억류
2> 5월 27일, 일부 의원 석방, 이석기·정헌주 등 12명의 의원 체포·구금, 이들이 국제공산당의
비밀공작비와 관련 있다고 공표
3> 5월 28일 국회, 계엄령 즉각 해제와 구속의원의 즉각 석방 결의, 이승만 묵살
4)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의 항명
1> 국방장관 신태영의 판단, 계엄유지를 위해선 최소 2개 대대의 병력이 필요
2> 계엄령, 미군(유엔군)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선포
3> 참모총장, 작전국장 그리고 차장마저 국방장관의 전화를 받지 않음
4> 육군본부 군 차출 거부, 5월 27일 육군훈령 제217호 발표→ 참군인 이종찬 신화
5> 훈령의 기초 박정희 작성(군의 정치적 중립 강조)
2. 미국의 개입
1) 5월 28일, 이승만·이종찬·밴플리트 3자 회담
1> 이승만, 이종찬에게 반역자라고 칭함
2> 이종찬, 사표 제출 및 반려
3> 벤플리트, “본직은 한국의 내정에 관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군의 지휘권을 위탁받고 (1950.7.14.) 있는 입장에서 말하면, 이번 일에 제일선의 한국군 병력은 한 명도 투입할 여유는 없습니다.”
2) 대리 대사 라이트너의 증언과 역할
1> 5월말, 이종찬의 ‘무혈쿠데타’ 제안, “미국은 ‘못 본 체’하고만 있어 달라”
2> 라이트너, 워싱턴(국무성)에 이를 받아들일 것을 권고
3> “이승만과 국무회의의 전면적인 협조를 요구하고 수락을 보장받기 위해 필요한 감시를 시행할 것. 만일 거부하는 경우 대통령을 보호연금.”
4> 플림솔 UNCURK(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의장, 밴플리트 8군사령관의 부산 대표인 헤렌 소장 등과 협의
3) 극동군 사령관 클라크의 반응(6월 5일, 미 합동참모본부에 한국 문제 보고)
a. 이승만을 서울이나 다른 지역으로 초대하여 부산에서 벗어나게 한다.
b. 유엔군 사령관이 부산지역으로 들어가, 독재적 행동을 한 5-10명의 지도자를 체포하고 한국기관을 보호한다.
c. 이승만에게 위와 같은 행동을 통고하고 계엄령 해제, 국회활동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승인할 것을 요구한다.
d. 만약 이승만이 이를 거부하면 보호감금하고, 장택상 국무총리에게 이를 요구한다.
e. 만약 장택상도 거부하면 유엔군 과도정부를 수립한다.
f. 만약 이승만·장택상이 동의하는 경우, 불가피하게 유엔군이 개입하여 불법적인 행위를 한 몇몇 개인을 제거했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한국 정부는 계속 활동을 지속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4) 미 합동참모본부의 대응방안
1> 첫째는 종전과 같은 정치적 압력을 가하여 문제 해결을 추구하라
2> 이것이 불가능할 때 한국군으로 하여금 쿠데타를 실행하라
3. 미수로 끝난 쿠데타
1) 1952년 6월 초 육본 심야회의
1> 유재홍(육본 참모차장, 소장) 회의 주재
2> 원용덕의 헌병대를 견제하기 위해 전남에 주둔하고 있던 이용 연대에서 1개 대대, 거창의 박경원 연대에서 1개 대대 등 2개 대대를 부산시내에 파견
3> 박정희 대령의 발언, “그 문제는 상부에서 결심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한다고 결정되면 지장이 없게끔 수배되어 있습니다.”
4> 주요인물(이종찬, 이용문) 불참
5> 참석자들에게 미군의 허락이 있었다는 확신을 주지 못함
6> “군이 정치 불개입을 선언한 5월 27일 현재의 입장엔 변함이 없다”라고 결론
2) 회의 전 있었던 일, 총장비서실장 안광호 대령의 증언
1> 미국의 지지가 중요한데 밴플리트가 이 총장을 자주 찾아오긴 했다. 그러나 이 총장은 “미군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진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2> 5·16 성공 후 안광호, “이왕이면 그때 했을 걸” 하고 운을 떼다가 이종찬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4. 결과
1) 국무부-합참합동회의(1952년 6월 4일, 애치슨 장관이 주재)
1> 장면·신익희·허정·이범석·이종찬 등을 검토, 전시하에 이승만을 대체할 자원으로 낙점하기엔
무리라고 판단
2> 이승만의 직선제와 야당의 내각제를 일부 혼합하는, 즉 장택상 총리가 제안한 발췌개헌안이
정치적 해결이라고 결론을 내림
2) 1952년 7월 이종찬, 총장직 박탈, 1953년 진해 육군대학총장 전출
3)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이용문 준장
1> 5월 14일 밤, 장면 총리 비서실장 선우종원 방문
“우리는 이 박사를 엎어 버릴 쿠데타를 하자는 거야. 너희 쪽 사정은 어떤가?”
선우 씨는 ‘우리’란 표현에 주목했다.
“우리라니? 선배님 말고 많은 장군들이 가담하고 있습니까?”
“아니야… 자넨 왜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쓰는가? 너희들이 찬성하면 장면박사 추대하고 곧 혁명 일으키겠어.”
“이 박사는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죽여야지.”
“죽여요? 난 못합니다. 민주주의란 수단과 절차가 중요한데 아무리 목적이 좋더라도…. 더구나 우리 집안은
3대째 천주교 신자입니다.”
“야 이 사람아, 이런 판국에서 페어플레이가 있을 수 있나? 조금도 주저 말고 거사하세. 참모총장도 알고,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의 묵계도 받아 두었어.”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은 두 시간쯤 열띤 토론을 벌였다. 후배인 선우 씨가 설득당하지 않자, 이 장군은 탁자를 쾅 치면서 일어났다. 희끄무레 동이 터 오는 바깥으로 나가는 이 장군에게 선우 씨가 말했다.
“선배님, 오늘 일은 내 목숨 다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자네는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야.”
2> 1953년 6월 24일, 남부지구경비사령관으로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 작전을 지휘하였으며,
재임 중 전라북도 남원군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
라. 1960년, 두 번째 음모와 4월 혁명
1. 콜론보고서 파문
1)「사상계」 ‘콜론·어쏘시에이츠 보고서’ (1960년 1월호∼5월호)
2)「새벽」1960년 1월호 ‘주목되는 콜론보고’ (1960년 1월호∼3월호)
3) 군인 바보론, 쿠데타필연론 대두
2. 조직의 확대
1) 1956년 7월 육군대학
1> 육군대학입교 장군: 임선하, 최홍희, 소병기, 박정희, 김득모, 최주종, 강태민, 이용 등 15명
2> 영관급: 전두열, 교관: 박태준
2) 김종필을 축으로 한 육사8기 그룹
3) 김재춘이 중심이 된 육사5기
4) 비선조직: 장태화, 김덕승 등
5) 김동하, 방원철 등 만군 출신 그룹
6) 유원식의 경우
1> 유원식의 주장, 자신이 먼저 쿠데타를 기획했으며 박정희를 포섭
2> 1959년 1월 2일부터 의견교환
3> 1960년 정초: 5월경 이승만의 진해 휴양 때 거사 결행 합의
4> 쿠데타 무기 연기(이종찬의 압력)
3. 박정희의 쿠데타 준비과정
1) 군수기지사령관 소장 박정희
1> 1960년 1월 27일,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임명
2> 군수기지 사령부 참모진: 참모장 황필주 → 김용순 준장, 인사참모 박태준 대령, 작전참모 김경옥 대령, 헌병부장 김시진 대령, 비서실장 윤필용 중령, 공보실장 이낙선 소령
2) 동래온천장 ‘백록관’ 회합
1> 1960년 2월초
2> 김동하 준장(해병 제1상륙 사단장), 이주일 소장(제2군 참모장), 홍종철 중령(재부산 제33고사포 대대장), 전두열(육군본부) 등 초청
3> 전두열의 증언,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이 미국으로 떠나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4월 17일 부산으로 내려가 제가 직접 작성한 혁명공약을 전달”
3) 거사 준비
1> 1960년 2월 한 달 내내 해운대 호텔, 백록관, 박정희 숙소 등에서 거사 준비
2> 2월 하순경 박정희와 김동하, 경주 등에서 거사시기와 병력동원 문제 등을 논의
3>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의 도미 시기 중에 거사할 것, 김동하·홍종철 산하의 부대와 부산 주둔 육군 병력을 동원할 것 등을 대략 검토하였으나, 부산을 중심으로 거사하는 것에 고민
4> 제2군사령관 장도영 중장, “이승만의 건강 상태가 안 좋으니 금년 내 이기붕이 집권할 듯하다. 그때 군이 비상수단을 쓰는 것이 어떠냐.”→ 참여 포기
5> 3·15부정선거 후의 전국적 봉기→ 쿠데타계획단, 거사 일 4월 초 잠정 결정
4) 쿠데타 계획단의 회담과 결의사항
1> 유원식 대령, 박창암 대령, 이석련 대령 그리고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육사8기생
a. 첫째, 거사 시기는 이승만이 진해로 휴양을 가는 5월 초로 내정한다. 이때 이승만을 체포, 구금하고 거사를 행한다.
b. 둘째, 송요찬을 부산으로 유인하여 혁명 참여를 설득해 보고, 여의치 않을 경우 그를 연금하고 거사를 단행한다.
c. 만일 송이 도미하지 않을 경우에는 송요찬과 장도영을 부산으로 유인·연금하고 즉시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최종 합의
2> 송의 도미 날짜가 5월 5일로 발표됨, 거사 날짜는 자연스레 5월 8일로 결정
3> 쿠데타의 주요 가담 인물과 담당 임무
a. 서울지구: 최주종 준장(육본 전사감), 유원식 대령(육본), 전두열 대령(육본), 김종필 중령(육본), 정석윤 중령(인천주둔 제505고사포대대장, 거사 시 서울로 출동), 육본 영관급 장교(결사대 조직, 요인체포)
b. 부산지구: 군수기지사령부 전 병력, 홍종철 중령(부산주둔 제33고사포대대장)
c. 대구지역: 장도영 중장(포섭예정, 2군사령관) 이주일 소장(참모장, 예하 병력 동원)
d. 영천지구: 윤태일 준장(안동주둔 제36사단장, 대구지구 문제가 있을 시 대구도 담당)
e. 야전군, 육군대학: 동지 포섭 공작 중
f. 기타: 송찬호 준장을 박정희가 포섭했으나 실패함
4> 5·8쿠데타에 동원 예정된 병력(약 5,000명의 병력 동원)
a. 육군본부결사대: 약 30명 b.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약 1,000명 c. 부산 제33고사포대대: 약 500명
d. 인천 제505고사포대대: 약 500명 e. 안동 제36사단: 약 1,000명 f. 포항해병상륙사단: 약 1,000명
g. 대구 제2군사령부예하부대: 약 500명
4. 결과
1)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모든 계획 중지, 미수로 끝남
2) 김동하의 운명
1> 1960년 6월 26일, “해군준장 김동하 면-해병제1상륙사단장, 임-해군 소장(임시), 명-예비역
편입.” 김동하 예편(6월 26일)
2> 자신의 예편이 부당함을 항거하며 행정소송 제기
3> 김동하의 변호인 이병필 변호사 “피신청인 허정 국무총리가 신청인 김동하 씨를 예비역으로 편입(1960.6.25)한 것은 3·15부정선거를 관리했다는 허무맹랑한 누명을 씌워 중앙위원회의 심사도 거치지 않고 불법적인 예편조치를 한 것이며 1.징계처분을 받지 않았고 2.과오가 없고 3.정원이 초과되지 않았으며 4.당사자의 사전 승낙 없이 예비역으로 편입조치한 일은 없으므로 김 씨는 당연히 현역으로 복귀되어야 한다.”고 주장
4> 법원은 “이유 없다” 기각 결정→ 5·16쿠데타 발발로 재판 무산
3) 송요찬의 경우
1>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발표된 다음 날인 1960년 4월 27일, 경무대를 거쳐 육군본부를 방문한 김정렬(당시 국방장관)은 송요찬 장군을 수반으로 한 미국의 계획이 담긴 미8군 공문을 접함
2> 김정렬, 미8군 사령부 사령관 매그루더를 만나 민간지도자가 정부의 수반이 되어야 함을 설명
3> 4월 28일 아침 “미 국무성이 허정을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옹립하는데 동의를 하였다”는 소식이 매카나기로부터 옴
4> 1960년 5월 7일, 미 국무장관이 허정을 공식적으로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인정함
5> 이종찬·김정렬·박정희 일본 육사 출신, 송요찬 일본육군 하사관 출신
6> 국방장관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을 무시하는 월권(6관구사령관의 임의발령, 교체한 지 한 달도 못 된 정보국장과 CIC대장의 해임, 헌병감·감찰감·HID대장의 교체, 청렴결백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한신 장군의 보직 해임, 육군 법무감의 관례를 무시한 임용 등)
7> 송요찬, “당신이 총장까지 다 해먹으시오.” 하고 항의를 한 다음 사표 제출
4) 박정희의 경우
1> 자신의 은인인 송요찬을 배신하기로 결심(두 번의 군기 문란사건 무마)
2> 1960년 5월 초순경, 직속상관 송요찬에게 퇴임하라는 편지발송(초유의 항명죄)
마. 1961년 4월 19일, 비둘기 작전을 도용하라, 세 번째 시도
1. 정군을 빙자한 쿠데타 명분 찾기
1) 허정, 군의 3·15부정선거 관련을 인정하면서도 일체 불문에 붙이기로 결정
2) 연판장 사건의 진실
1> 박정희, 송요찬의 반격이 있기 전 자신의 친위부대 출동
2> 5월 8일, 김종필의 집에서 김형욱·길재호, 옥창호, 신윤창, 석정선, 최준명, 오상균 등 8명의
8기생이 회합을 가짐, 연판장 제출일자 5월 18일로 결정
3> 비밀누설, 보안사령부 요원에 의해 전격적으로 체포, 혐의사항은 쿠데타 음모와 국가반란죄
4> 5월 19일 밤, 송요찬의 일장훈시 후 8명 전원 석방, 누구도 처벌받지 않음
5> 다음 날 아침 송요찬 사임
3) 박정희의 보직 이동
1> 7·29총선 이틀 전인 7월 27일 1관구 사령관으로 전보
2> 9월 10일, 요직이라고 할 수 있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임명
4) 정군파들의 국방장관 현석호 방문
1> 1960년 9월 10일, 현 정부의 구체적인 정군계획을 듣겠다는 목적으로 시도
2> 참석자: 김형욱, 김종필, 오치성, 길재호, 옥창호, 석정선, 김동환, 이택균, 김달훈, 석창희, 신윤창 등 11명
3> 면담 실패 후 쿠데타를 모의하기 위해 한 음식점으로 발길을 돌림
5) 충무장 결의
1> 1960년 9월 10일 밤, 충무로에 있는 화식(和食)집인 충무가 2층
2> 김종필, 오치성, 김형욱, 김동환, 길재호, 옥창호, 정문순, 신윤창, 우형룡 등 9명
3> “이제 미온적인 정군(整軍)운동은 그 방법을 전환하여 무력수단에 의한 정국(整國, 쿠데타)으로 방법이 결정되었다”고 선언
4 박정희를 비롯하여 육사8기생들이 정군을 빙자한 항명을 했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모험이
성공했다고 그들은 확신
5> 5·8쿠데타 진행 과정에서 조연에 머물렀던 육사8기들이 이제부터는 주연이 되겠다는 의지
6> 동지들에 대한 검증, 석정선·석창희·최준명·이택균 등 네 사람을 포기(성격문제·김형일·백인엽·
최영희 장군 등과의 관계 이유)
2. 16인 하극상 사건
1) 파머발언
1> 미 국방성 해외군원 국장 파머 대장, 9월 중순 군원업무 시찰차 내한, 3일간에 걸쳐 한미 군 수뇌와 접촉
2> 9월 21일 하오 4시, 이한 시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
3> 감군정책 비판,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고급 장성들의 퇴역에 대한 우려 첨언
4> 육참총장 최경록, ‘노골적인 내정간섭이며 국가 주권을 유리하는 행위’라고 비판
2) 장교들의 연합총장 최영희 방문
1> 파머 장군 전송 때 최 중장이 곁에 서 있던 것을 문제로 삼음
2> 구속된 장교: 김동복, 김명환, 한주홍, 한국찬, 유승원(이상 대령), 길재호, 옥창호, 우형룡, 이석제, 황영일, 장수영, 조병호, 권정용, 정래창, 황청, 이종학(이상 중령) 등 16명(김형욱, 김종필, 석정선 등 3인은 현장에서 도피함)
3) 김동복의 경우
1> 재판 도중 최영희에게 “각하는 행운아이십니다. 사단장, 군단장, 군사령관을 거쳐 참모총장까지
역임하고 연참총장직에 올랐으니 다른 장성들처럼 국방장관이나 외국대사로 영전하여 후진에게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2> 15인 무죄, 김동복만 “상관불경죄”로 구속 재판
3> 징역 1개월·파면·전 급료몰수 최종 언도
4> 김동복, 배후 폭로 결심→ 김종필, 석정선 예편
5> 예비역기갑장교 반혁명사건(사형 구형 무기징역형 언도)→ 1963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
1966년 8월, 자살
※ “16인 하극상 사건을 마지막으로 끝나게 된 정군사건은 사실은 혁명계획 편린의 극소한 일모(一貌)로, 이 사건의 발생이 사직당국의 주목을 흐리게 하여 혁명의 준비는 쉽게 진행할 수 있었다. 정군 문제의 종결은 혁명으로 전개되었다.”
3. 신당동 회합
1) 1960년 11월 9일 밤, 충무가 결의 후 약 2개월이 된 시점에 박정희 소장의 신당동 집에서 두
번째로 모임
2) 김종필, 김형욱, 길재호, 옥창호, 신윤창, 오치성, 김동환, 정문순, 우형룡, 이석제, 유승원 등 11인
3) 합의 사항:
첫째, 2군사 관하 각 예비사단 및 그 부대장급의 포섭은 박 소장이 맡기로 하고,
둘째, 9명의 동지들은 중앙에서 재경 각 부대의 동지들을 목표로 포섭을 담당
4. 비둘기 작전 도용하기
1) 육군수뇌부의 이동
1> 1960년 8월 최영희 합참총장 퇴임(10월 합참 고문. 1961년 2월 육군중장 퇴역)
2> 1961년 2월 최경록 임기만료 전 총장 해임, 2군사령관 전보
3> 장도영 사표 반려 후 1961년 2월 17일 육군참모총장 취임
4> 박정희, 1960년 7월 30일 제1관구사령관, 1960년 12월 15일 2군부사령관 전보
2) 사월위기설
1> 1961년 2월 22일 신현돈 내무장관, 사실이다, 조련계와 접선한 불순 세력이 각종 단체를 중심으로 세포조직을 끝낸 후 이를 선동하고 있다.
2> 2월 23일 상오 장면 총리, 그러한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다.
3> 23일 하오 조재천 법무장관, 3월 봉기설 근거가 있다.
4> 대처방안, 내부적으로 제6관구 사령관 지휘하 폭동진압 훈련(비둘기 작전)
3) 쿠데타 세력들의 움직임, 〈데모유치 공작〉
1> 비둘기 작전 시행 도중 쿠데타로 전환
2> 김종필, 사전에 대대적인 데모를 일으키도록 학생들을 포섭하여 유치공작을 하자
3> 예산 3백만 환, 퇴직금 백여만 환과 부인의 곗돈까지 동원, 김용태의 도움
4> 3월 초순, 공작인물 박종규 소령 선정
5> 3월 7일 저녁8시경, 7명의 학생들 신당동의 조용한 외국인 집에서 첫 토론회
6> 건국대 정치과 조병규(조웅 목사)·이두현·고려대 정외과 김수길 등의 학생회 간부. 이들의 대화는
은밀하게 모두 녹음함
7> 3월 9일, 두 번째 토론회, 서울대·고대·건대 등 10명의 학생들이 참석
8> 4월 19일 직전에는 약 500여 명의 학생들을 조직
9> 삐라 내용 “학생이여 궐기하라! 4·19의 피가 헛되었다.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피를 흘렸던가!”
10> 1961년 4월 19일, 너무나 조용한 학생 시위
11> 애써 준비했던 삐라 2만 장을 한 장도 뿌리지 못함. 그때부터 학생들의 연락도 끊기고, 모두들 잠적하고 맘
5. 결과
1) 장태화의 보고,
1> 4월 19일에 예상처럼 그런 폭동은 없을 것 같다
2> 시국정화위원회 운동본부 측에서 상당한 자금(약 2천만 환)을 푼 것으로 보임
2) 박정희의 반응
1> 비둘기 작전 명령이 떨어지면 김재춘 대령은 지체 없이 대구로 연락바람
2> 4월 19일이 안 되면 여러 주체 동지들의 긴장이 풀어지기 전에 5월 초순에 해치웁시다.
3) 장태화와 김종필
1> 화신 근처 희 다방에서 조우
2> “장형…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요….”
3> “울지 맙시다. 다음에 우리들 스스로가 모든 것을 다 끝마치고 난 다음에 마음껏 울어 봅시다.”
4) 쿠데타 동원 세력의 움직임
1> 육본, 6관구, 1공수, 33사단, 30사단, 6군단포병, 육군대학, 육사, 항공학교 그리고 민간인 참여자 들 그 외 2군사령부 및 5사단, 고사포여단을 비롯한 야전군 일부 등 모두가 조직을 지킴.
2> 해병 1여단 추가 참여
바. 1961년 5월 12일, 네 번째 시도 그리고 또 다시 연기
1. 방첩대는 무엇을 했는가?
1) 실바(한국CIA지부장)가 덜레스(CIA국장)에게 보낸 4월 25일자 전문,
1> “한국 육군 방첩대가 쿠데타를 수사하고 있음. 만약 쿠데타가 4월 26일 시도되지 않는다면 그들 은 더 좋은 때를 기다릴 것임. 장도영에 따르면, 장면은 4월 24일까지 쿠데타를 모르고 있지만,
한 신문 발행인이 4월 25일 그에게 알려 줄 계획”
2> 방첩대대장 이철희,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이에 대한 수사지침을 내린 적이 없음
2) 방첩대의 구성과 역할
1> 방첩대 지휘체계,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 → 방첩대 대장 이철희 준장(부대장 백운상 대령) → 506방첩대 대장 이희영 대령→ 506특무대 방첩처장 이상무
2> 5·16을 전후한 방첩대의 활동을 기록한 자료는 거의 없다.
3> 이철희는 끝까지 침묵을 지킴
3) 5·16 직후 방첩대 대장으로 취임한 김재춘의 인터뷰
1> 16인하극상사건 무렵(1960년 9월말) 506특무대 상사, 고구마 장수로 변장하여 박정희 감시→ 박정희에게 발각, 헌병차감 문종욱 대령에게 전화를 해서 결국 CID의 윤양 대위에게 체포됨
2> 5월 12일 밤, 박정희·송찬호·박치옥·김재춘 등 네 사람이 남강식당에서 방첩대의 이철희 대장, 이희영 대령, 이형주 중령 등과 우연히 맞부딪힘
3> 5·16거사 전날, 방첩대 김홍서 대위가 박정희를 미행, 체포 건의
4> 506특무대 이상무 방첩처장(쿠데타군의 프락치), 체포에 신중하라고 지시→ 박정희, 6관구사령부로 무사히 도착함
4) 백운상의 경우
1> 5·16 약 10여 일 전 백운상, 장도영 방문
2> 장도영, 확실한 증거 확보를 위해 대구로 내려갈 것을 지시
3> 4∼5일 후 장도영의 집 재차 방문, 장도영의 증거타령, 백운상 다시 대구로
4> 5·16후, 오키나와를 거쳐 미국으로 피신
5) 이종태 사건
1> 4월 21일(4월 19일 예정의 쿠데타 시도가 5월 12일로 연기된 시점)
2> 정부를 뒤집어엎는다면 장도영 중장밖에 없다는 등 쿠데타 관련 발언으로 물의
3> 서울 특무대 이종태 구속, 장도영은 전혀 몰랐다고 발뺌
4> 이종태의 누설로 5월 12일에서 16일로 연기
6) 이희영의 증언
1> 이희영, 박정희의 쿠데타 음모 사실을 이철희에게 보고
2> 두 분(장도영과 박정희)들이 짜고 하시는 걸로 그 당시에 그렇게 알았다.
3> 진실을 알게 된 때는 5·16이 발발하고 난 후
4> 이철희, 백운상과 장도영에게 쿠데타 음모 사실이 전달되지 않도록 정보 차단
5> 이상무, 박정희를 보호하는 역할
6> 두 사람이 5·16 주체 세력에 포함되지 않았던 이유, 정보를 다루는 자들의 숙명
7> 이철희, 중앙정보부 차장 등 많은 요직을 차지하였고, 또 치부로 보상받음
8> 이상무, 중앙정보부 보안과장, 공화당 창당 요원, 6대 국회의원 역임
2. 김덕승의 구속
1) 박정희의 자금요구
1> 1961년 3월 중순, 2백만 환 부탁
2> 4월 12일, 돈을 구하지 못했다고 보고하나 도리어 3백만 환이 더 필요하다고 함
3> 5월 1일,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5백만 환을 마련하라고 지시
4> 서울 소재 한양산업주식회사 대표인 오인환에게 군 불하물자 건으로 접촉
2) 그는 사기꾼인가?
1> 5월 12일 김덕승, 서울시경 형사에게 체포·구속
2> 김덕승→ 오인환→ 민의원 윤병한→ 장면 총리→ 이태희 검찰총장→ 서울지검 김홍수 부장검사, 서울시경 부국장 김덕호→ 오인환 상면→ 인쇄업자 홍경한(검찰이 사주한 허위 자금조달업자) 등의 정보전달 및 수사 과정을 거쳐 김덕승 체포
3> 사기꾼 행세
4> 육영수, 김덕승의 현황을 수소문
5> 이태희, 5·16 후 구속, 죄명 특별법 위반(쿠데타 방해 죄목)
6> 김덕승, 5·16 후 사단법인 한국산업진흥진흥회 회장, 마사회장
7> 이종태가 쿠데타를 반대하거나 밀고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경솔함으로 인해 그는 반혁명자로 지목되어 인생을 망쳐 버렸다. 김덕승 역시 경솔한 행동으로 쿠데타 성사에 큰 누를 끼친
사람이다. 그런데 쿠데타 주체 세력은 왜 이 두 사건을 극과 극으로 다루었을까?
사. 1961년 5월 16일
1. 5월 16일 새벽, 한강변의 총소리
1) 기자가 본 혁명군 입성(경향신문 서병현)
1> 해병 제1여단 제2중대장(계급: 대위) 이준섭 인터뷰
2> 헌병들이 저항, 내 부하가 한 명 사망하고 나는 발뒤꿈치에 총탄을 맞았다.
2) 1963년 8월 한국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군사혁명사』
: 해병 제2중대장을 비롯한 7, 8명의 사병이 부상을 당했다
3) 1963년 4월 민주한국혁명청사편찬위원회의『민주한국혁명청사』
1> 저항대를 강력한 부대로 오인한 진공부대는 북한산 파출소를 수류탄으로 폭파시키고 순식간에
저항을 침묵시켰다.
2> 사상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음
4) 1962년『한국혁명재판사』
1> 1961년 10월 21일 작성된 공소문, 동(同)혁명군이 제2선에 접근하자 무차별 발사케 함으로써
혁명군 일등해병 김 목사 外 8명에게 총상을 가하고
2> 1심 판결문, 전기 해병의 진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실탄 약 100발을 발사 교전 끝에 해병 이최우 (李最雨) 외 5명에게 총상을 가하여…
3> 판결문 증거 설명 편, 헌병이 실탄을 발사하기 시작한 것은 노량진 파출소 쪽에서 2명의 헌병이 부상당하고 한강 파출소 쪽에서 또 3명의 헌병이 부상당하게 되어 발사를 하게 되었는데 해병대 쪽에서의 발사가 심하여 감당할 수 없어서…
※ 혁명재판소 심판관에 의하면 헌병 5명, 해병 6인이 부상당한 것이 됨
5) 김형욱 회고록
: 선두의 이준섭 대위가 총탄에 쓰러졌다.
6) 김 모라는 사람이 인터넷에 기고한 〈5·16혁명 수기〉
1> 부상당한 장병들에게 무슨 보상이 주어진 일도 없다.
2> 혁명 주도 측에서는, ‘5·16이 무혈혁명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
3> 그리고 5·16혁명을 인정하지 않는 측에서는, ‘아무런 가치 없는 총격전’이라고 비하하는 가운데
4> 그날 새벽, 목숨을 걸고 싸운 우리 해병대의 희생은 철저히 그렇게 역사에서 무시되고 잊혀 갔다.
2. 그린, 매그루더, 실바, 하우스만의 움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