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에서 귀한 만남
‘우리 삶은 기차여행같고 기차에서 좋은 인연도 만난다.’더니 나 역시 그런 귀한 체험을 했다. 1966년 고교 2 학년 겨울방학을 맞아, 10 개월동안 열심히 일했던 신문배달을 그만두기로 하고, 인계를 마친 나는 가족이 그리워 귀향했었다. 그런 나는 여수집에서 가족과 즐겁게 며칠을 보낸 후, 새학기를 맞아 상경열차를 탔으나, 기차가 만석이라 어쩔 수 없이 입석으로 서서 상경하게 되었다.
그때 기차가 순천역에 정차했을 때, 눈에 익은 창덕여고 교복을 단정히 입은 귀여운 여학생이 할머니와 기차를 타더니 바로 내 앞 빈 좌석에 앉잤다. 그때부터 나는 남원, 전주, 대전, 수원을 지나는 동안에, 여러 차례나 그녀와 관심 어린 눈길을 주고 받았다.
그렇게 상경하며 영등포 역을 통과할 때는 웬지 그냥 헤어지고 싶지 않아 얼른 내이름과 주소를 메모했다가, 서울역에 도착해서 승객이 내리는 혼잡 속에서 잠깐 눈인사를 하며 전해주었다.
그런 일주일 후 학교에서 돌아온 나에게 부산 집 둘째 딸이 편지 한 통을 흔들며 “오빠는 얌전한줄 알았는데 연애도 한데이.”라며 짓궂게 놀리기 시작했다. 바로 가까운 성북동 주소 아래 ‘박WO’이란 이름이 쓰인 예쁜 글씨의 편지였다. 그래서 설레는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고, 며칠 후 우리는 반갑게 다시 만났으며, 서로 호감을 갖고 사귀기로 약속했었다. 그런 후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창경원 돌담길을 걸으며 정답게 이야기하며, 오랜만에 이성(異性)으로부터 부드럽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으나 우리 만남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세 번째 만났을 때 “두 오빠들이 모두 재수를 해서 대학에 입학했어요.” 라며, 아들의 재수하는 것을 지켜 본 그녀 어머니께서 열심히 입시준비를 해야 할 나를 무척 염려한다고 말했었다. 그때 그녀 어머니 염려 탓도 있었지만, 3학년이 되자 정작 대학입시 준비에 정성을 쏟아야 했던 나는 더 이상 여유롭게 그녀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로의 관심은 계속되었고, 그녀로부터 격려 담긴 편지와 그녀가 참가한 ‘문학의 밤’ 초대장을 받곤했었다. 그러나 나는 무학여고 문학의 밤에는 참석해서 축하했지만, 경기고 문학의 밤 때는 길을 나섰다가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입시 준비로 너무 바쁘기도 했지만, 축하해 줄 꽃다발 하나를 준비할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 삶을 살다가 극도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면 무척 고맙고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967년 후반 대입준비 6개월은 나에게 무척 힘든 기간이었다.열심히 공부를 하고 싶어도 체력이 도저히 따르지 않은 까닭이다. 수험생이면 필요한 영양분과 효과적 수면을 취해야 했는데, 나는 시장통 싸구려 밥집 밥 한 그릇으로 하루 식사를 때웠고, 탁한 공기로 찬 독서실은 휴식과 수면을 취하기에는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대로 먹지 못해 극도로 어려움에 처한 나는, 어쩔 수 없이 고향 집으로 여러 차례 급하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답장은 없고 무리해서 공부한 탓에 12월부터 나는 격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책상에 앉아 책을 보려고 고개를 숙이면 마치 작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 맞는 듯함을 느꼈고, 허기가 지고 피곤하니 몸과 마음이 괴로워서 공부에 대한 의욕이 떨어졌으며,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인내와 용기조차 약해졌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 발악하듯 노력했지만, 제대로 준비를 못한 채 치룬 대학입학시험에서, 결국은 낙방의 쓴맛을 보고는 좌절하고 말았다. 그때 낙담과 절망 속에 집으로 보낸 나의 편지 보았던지 “이틀 내로 여수로 내려오너라.”는 전보를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그래서 늦긴했지만 조금은 지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독서실에서 함께 공부하며 내 사정을 잘 알던 형의 도움을 받아서, 어렵게 2차 대학 입시원서를 접수하고는 기차표를 구해 여수로 급히 내려갔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여수에 도착해 새로 이사간 집을 찾은 나에게, 어머니께서, “느그 아부지가 기다릴텐께 빨리 신항(新港)으로 가봐라.”라고 해서, 신항으로 뛰어갔던 나는 활어 무역선을 타고 일본으로 막 출항하려던 아버지를 가까스로 만났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나에게 결코 잊지 못할 너무나 섭섭한 말 한 마디를 남기고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채 그냥 출항하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집으로 와서, 동생들 공부나 돌봐주다가 빨리 군대나 가거라.”라고.
비록 경제적 도움은 받지 못했지만 “고생한다. 마무리 잘 해라!” 라는 격려의 말과 작은 도움을 기대했던 나는 아버지의 그 한 마디 말이 너무나 서운했었다. 그래서 오동도 뒤 수평선으로 아버지가 탄 배가 사라질 때까지 언덕에 앉자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러다 지친 나는 남은 의지마저 모두 꺾은 채 허탈한 마음으로 귀가를 했었다.
그 날 밤 절망에 빠져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나는, 그 동안에 몇 차례나 편지로 격려해 주었던 창덕 고녀 박WO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 일 년 동안 여러 차례 고마운 격려를 해주었는데도, 대학입학을 포기해서 너무 미안하고 가슴이 아픕니다.”라고. 낙담에 밤새 뒤척이다 잠들었던 나는 다음 날 아침에 늦게서야 일어났고, 결국 오전에는 박W0에게 보내려고 썼던 편지를 시내까지 걸어 나가서, 아픈 마음으로 우체통에 넣고 말았다.
그런 후 허탈한 마음으로 터덜터덜 걸어 귀가하던 나는 뜨거운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아! 이 얼마나 못난 짓인가!’, ‘서울 하늘 아래서 부족한 나에게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던, 오직 한 사람 그 어린 여학생에게 실망만을 전하다니.’ 그뿐아니라 대학입학원서조차 사지 못한 나에게 손수 원서를 사서 전해주던 독서실의 고마웠던 형께도 너무나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못난 결정을 했던 내 자신을 꾸짖다 보니,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서 마음을 바꿔 먹고 어머니와 누나의 협조를 받아, 그날 저녁 급한 마음으로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입학원서를 미리 접수하고 귀향한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며…… ‘지성이면 감천이다’더니 그렇게 상경해 치른 2차 입학시험에서, 나는 결국 한양대학교 공대 건축공학과에 합격해 오래 소망했던 건축가가 되려던 나의 꿈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런 후 여수 집에 도착했더니, 반가운 편지 한 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달 보름달이 뜨면 밝은 달을 보며 성공적으로 대학에 합격하기를 빌었습니다.”라고 적혀 있고 (처음 만났을 떼 보름달이 떴음) “편지를 받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만 울었습니다.”라는 고운 마음이 실린 예쁜 글씨로 쓴 정성이 듬뿍 담긴 그녀의 편지였었다. 그때 그녀의 고마운 편지가 몸과 마음이 많이 약해졌던 나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었고, 그녀가 무척 보고싶고 그리워졌었다.
그렇게 1966년 겨울 기차에서 우연이지만 운명처럼 만났던 어린 소녀와의 만남은, 나의 삶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절망에 빠져 허덕이며 대학입학과 건축가 꿈을 포기 할 뻔했던 나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준, 내 삶에 크나 큰 영향을 미쳤던, 너무나 소중한 축복의 만남이었다
첫댓글 임선생님, 젊을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했는데 힘든 속에서 꿈을 이루셨네요
66년에 고2 였다니 저보다 5년 선배님이시군요
제 형도 49년 소띠고 한양공대 기계과 졸업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