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권(미국)에 도전하다 혼쭐난 일본
1970년대 말 미국은 경기 침체로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태에서 유가 인상, 부동산 가격상승 등으로 달러가 많이 풀려 경기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레이건 정부는 금리를 살인적으로 끌어올려 달러 가치가 급격히 올라갔다. 긴축 정책으로 달러화 평가 절상과 기업체 구조조정을 단행하여, 금리 인상으로 대출받기가 어려워진 기업의 투자 부진으로 제조업이 크게 위축되고 재정적자와 무역 적자로 실업이 증가하여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이 비등하였다.
2차 대전 일본은 패전으로 경제가 완전히 붕괴하였으나, 전쟁 배상금 경감과 원조 등 미국의 도움과 한국 6.25 전쟁 특수에 힘입어 1955년부터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고도성장을 이뤘다. 미국은 달러 강세로 막대한 재정적자와 경상수지 적자가 쌓이고, 수출품 가격이 비싸져 수출이 어려운데, 일본은 엔화 가치를 의도적으로 낮게 유지하여 제품값을 인하하여 미국 시장에서 큰 이득을 보았다. 1960년대 후반에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였고 1980년대 들어서도 유례없는 호황을 구가하였다.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일본 기업은 미국의 기업과 미국의 상징 록펠러센터 등 미국 부동산 10%를 사들여 미국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일본 왕궁을 팔면 미국 캘리포니아를 살 수 있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고 호기를 부렸다. 일본 여행객이 전 세계로 쏟아져 나가고, 미국이 주도하는 IMF에 대항하여 AMF 창설을 발표하여 미국과 통상 마찰을 일으켰다. 무차별적 미국 자산 매입에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적대감과 두려움이 극에 달해 반일감정이 일어났다. 미국 제조기업들과 농민들은 보호무역 정책을 펴라고 정부를 압박했다.
일본에 대한 비등한 비난 여론에 레이건 정부는 1985.9.22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G5(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일본) 재무 장관 회의를 개최하여 각국 정부 개입에 의한 환율조작을 비판했다. 일본과 독일(당시 서독)에 대한 미국의 무역 적자가 심했는데, 특히 일본은 미국 무역 적자의 37%를 차지하여 미국은 일본에 대해 강압적으로 엔화 가치 절상을 압박했다. 미국과의 관계 악화와 관세 폭탄을 우려하여 일본과 독일은 미국의 요구대로 달러화 평가 절하와 엔화와 마르크화 가치 절상을 결정했다.
플라자 합의는 세계 무역 시장에서 슈퍼(super) 갑인 미국의 막강한 힘을 보여준 것이다. 일본과 독일은 미국의 강요로 채택 1주 만에 일본 엔화는 달러화 대비 8.3%, 독일 마르크화는 7% 고평가되었다. 플라자 합의 이후 2년 동안 달러는 30% 이상 평가 절하(급락)하게 되었고 엔화는 50%까지 평가 절상되어 일본 기업의 수출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 달러 약세로 인해 미국의 제조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였고, 미국의 대유럽 무역 적자도 줄어들게 되었다.
제조업 대국 독일도 플라자 합의로 환율이 고평가되어 경기가 침체에 빠졌으나 유로화 통합으로 인한 통화가치 절하효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2위 경제 대국 일본은 환율을 급격히 절상하여 달러 대 엔화 환율이 1:250에서 1:125까지 절상되었다. 1:250일 때 일본 기업은 1달러짜리 상품을 수출하고 일본 내 은행에서 환전하면 250엔을 받았지만, 환율을 절상 후에는 1달러에 125엔(최고 79엔까지 절상)으로 감소하여 수출품 가격이 2배로 올라 수출할수록 손해로 원가 절감을 하거나 수출을 중단해야 했다.
미국은 플라자 합의로 환율을 조정하고, 일본 은행의 거품을 빼기 위해 은행 건전성 기준인 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BIS)이 8% 이상 유지되게 하는 바젤협약을 시행했다. 자기 자본이 위험 자산(대출금)의 8% 이상이 되어야 하는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은행 신인도가 떨어져 경영 위기를 겪을 수 있어 각국 은행들은 자기 자본을 높이거나 대출금을 줄이는 등 BIS비율을 맞추기에 사활을 걸었다. 일본 은행들도 BIS비율을 맞추기 위해 아시아 각국으로 풀린 대출금을 회수하여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이 외환위기를 겪었다. (일본 은행의 대출금 회수가 한국 외환위기의 한 원인이다)
플라자 합의로 한국과 일본 경제 운명이 크게 바뀌었다. 수출 주도 일본 경제는 엔화 가치 급등으로 침체에 빠져들었으나, 수출 부진과 고물가로 고전하던 한국은 1986년부터 3년간 연평균 12% 성장을 하고 경상수지 흑자로 최고 호황기에 진입했다. 일본과 수출 경쟁에서 엔화 가치가 상승하여 상대적으로 원화 가치가 싸져 중화학, 전자 대기업들이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유럽 시장을 잠식한 결과였다. 유가 하락, 금리 인하, 저환율의 3저 호황과 1988 서울 올림픽으로 인한 투자 확대 등이 맞물린 시기였다.
▶ 일본, 잃어버린 20년
일본은 엔화 고평가와 수출 부진으로 경기가 침체되자 원가 절감 등 기업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했으나, 비상 상황이 아니면 기업 구조조정이 매우 어렵고 기득권의 반발로 구조조정에 실패했다. 반면 한국은 IMF 외환위기라는 비상사태를 맞이하여 가혹한 기업 구조조정에 성공했다. 일본은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내리고 규제를 풀어 대출을 확대하여 시중에 돈이 넘쳐나 풀린 돈이 산업 생산에 쓰이지 않고 부동산과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거품경제를 초래하였다.
플라자합의로 일본 엔화 가치를 올리자 일본산 제품의 가격 인상으로 경쟁력을 잃고 경제가 침체되었다. 침체된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금리 인하를 하고 대출 규제를 풀자 대출받아 부동산 투자를 하여 부동산에 엄청난 거품이 끼었다. 거품경제가 최고로 과열되자 부동산 폭락에 대비하여 금리 인상을 하고 대출 규제를 하여 정상적인 경제로 만들려고 했다. 금리 인상으로 대출금 이자 상환 여력이 없던 투자자들은 부동산을 대거 내놓았지만, 부동산 사는 사람이 없어 경제는 폭락하였다. 소비와 기업 매출이 줄어드는 악순환과 자산 가치의 폭락으로 거품이 터져 1990년부터 경기가 장기 침체로 잃어버린 20년(30년)을 겪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