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정성공의 남경 공략전. 그 당시 정씨 세력은 한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하여 대륙에서 쫒겨나 대만을 찾아 이동했고, 이번에도 역시 비슷한 모습의 재판이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판단 미스의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힘 대 힘의 대결에서 튕겨져 나온것입니다. 삼번의 난도 끝난 지금, 대만의 세력이 다시 한번 중국 내륙으로 진입하기에는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정경은 본래부터 그다지 개인적인 행실이 좋은 편은 못되었지만, 이 후부터는 이전의 위풍도 다 상실하고 매일매일 정자에서 술을 마셨고, 애첩을 불러 농밀한 정사를 즐기거나 혹은 문사나 무장을 불러 말을 타고 활쏘기를 하고 연회를 하며 놀았습니다. 정치는 아들인 정극장이 맡아서 처리했는데, 정극장이 1664년생이고 정경이 중국 본토에서 세력을 모두 철수시킨것이 1680년이니, 바로 그때부터 본다면 16살의 아이에게 모든 일을 일임한것입니다.
하지만 정극장은 정성공의 좋은 부분을 많이 물려받아, 어린 나이에 정사를 대리하면서 정경의 숙부들과 부하들, 장수들과 빈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들을 엄격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정경 역시 놀고 마시면서도, 어린 아들이 모든일을 하는것에 대해 약간의 불안감은 있어서, 사람을 시켜 배후에서 정극장의 평소 정치하는 모습을 살펴보게 했는데 그 보고나 처리된 문건이 매우 뛰어나서 아주 크게 기뻐했습니다. 아들이 이렇게 영리하여 아버지로서 기쁘고, 이제 다른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어져서 더 기쁘고, 그는 정극장을 아주 신뢰해서 매일매일 술과 여자들 속을 노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정경의 친척들과 권신들은 여러가지 불만을 가지고 맙니다.
정극장에게 힘을 실어주는 인물은, 진영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진영화는 정극장의 장인으로, 정경이 본토에서 공격 작전을 벌일때 대만을 지켰던 인물로, 자신의 본거지를 선뜻 내밀어주었다는 점에서 보듯, 그의 능력과 충성에 대한 정경의 신임은 보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진영하는 정극장의 교육도 도맡아했고, 자신의 권위로 정극장을 보호해주기도 했습니다.
풍석범등이 본토에서 싸우다 돌아와보니 권력은 진영화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정경이 또 정극장에게 일을 일임하니, 자연히 진영화의 힘이 커지고, 풍석범은 아쉬운 처지가 됩니다. 또 진영화의 사위가 정극장인데, 공고롭게도 풍석범의 장인은 정경의 다른 아들 정극상(鄭克塽)이었습니다. 결국 풍석범은 권력을 위해 본토 공격에서 맹활약을 한 유국헌을 끌어들입니다. 그들은 우선 진영화의 권력을 일소하기로 계략을 짜내었습니다.
유국헌이 계교를 내놓아 풍석범은 진영화를 방문하고는, 평소와는 달리 매우 의기소침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진영화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정경을 모시고 서정했는데, 조그마한 공적도 세우지 못했소. 이에 직책과 권력을 내놓고 세상과 떨어져,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보내고자 하오."
진영화는 이 일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풍석범은 본래가 무인이지만 이렇게 겸손하고 또한 물러날 시기도 알고 있는데, 문신인 자기가 권력에 연연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은퇴해버렸던 것입니다. 정경은 이 일을 풍석범과 논의를 했는데 당연히 풍석범은 적극 동의했습니다. 그리하여 진영화의 권한은 유국헌에게 넘겨주었고, 풍석범은 이전과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 자리에 당당히 머물고 있었습니다. 진영화는 울화병으로 사망해버렸습니다. 진영화가 사라지자, 정극장의 권위도 약화되고 맙니다.
한참을 주색에 빠져있던 정경은 그 생활 습관 탓인지 병환이 위중해져버렸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권력을 준 유국헌을 침상으로 불러 정극장을 잘 보좌해주라고 말하였고, 유국헌은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어서 풍석범이 도착하자 그는 풍석범에게도 부탁을 했고, 사망했습니다. 1681년 정월 28일, 밤이었습니다.
충성의 맹세와 정경의 시체가 식기도 전에 풍석범이 교활한 역모를 꾀했습니다. 정성공의 다른 네 아들이 모두 풍석범을 지지하고 나섰고, 정극장은 정경의 아들이 아니며 친부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주장했습니다.
정극장은 그들이 자신을 부르자 아무 생각도 없이 처소에 들어갔다, 살기등등하게 바라보는 4명의 숙부를 보고 경악했습니다. 그는 흑인 노예의 손에 잔인하게 교살되었습니다. 현명한 정극장을 대신한 인물은 11세의 소년으로 정경의 차남인 정극상이었습니다.
대만은 풍석범이 사실상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들을 억눌렀고, 때마침 기근이 대만을 감돌았습니다. 풍석범과 유국헌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살육을 하자 정씨 정권은 곧 매우 혼란한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4월, 정경의 사망 소식은 청나라 변방에도 알려졌고, 총독 요계성은 지금이야말로 하늘이 도운 시기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또한 일전에 정씨의 함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만정색은 출병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기에, 만정색을 대신할 능력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요계성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다름아닌 시랑입니다.
시랑
시랑은 본래 복건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항해술에 신묘한 능력을 보였고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반 만주족 항전에 참여했습니다. 정지룡 함대에서 그의 역할은 좌군 선봉 선단의 통솔이었는데, 함선을 지휘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수군 병기와 선박용 장비를 설계하는데 그야말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정후(鄭侯)라는 별명을 지녔던 그는 정지룡 함대의 선원들에게도 엄청난 인기를 지녔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실력과 명성을 가진데다 경험까지 풍부한 시랑과 정성공은 서로간에 존중은 하면서도 약간은 소원한 껄끄러운 관계였습니다. 시랑은 가끔 정중하면서도 솔직하게 (정지룡이 통솔하던) 예전이 좋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고, 이는 정성공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둘은 충돌하게 됩니다.어느날 시랑의 선단에서 한명의 부하가 불분명한 죄목으로 고발되자, 그는 탈출하여 정성공에게로 몸을 피했습니다. 시랑은 다른 부하들을 시켜 정성공의 진영으로 보내 탈출자를 붙잡고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속에 정성공의 권위는 무시되어버렸습니다.
예컨대, 시랑의 입장에서 보면 정지룡의 아들이 될법한 사람이자 또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본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정성공에게 고분고분하게 구는 법이 없었고, 대놓고 정성공의 지도력에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태도에 정성공은 시랑의 부관인 만례(萬禮)를 오히려 시랑 보다 높은 지위에 올리는것으로 응수했고, 분쟁은 이제 노골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1650년 쯤, 시랑은 류쿠 열도에서 많은 은을 수송하고 있었는데 군수품을 사들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불운하게도 엄청난 폭풍이 나타나며 많은 은이 유실되고 말았고, 감정이 폭발한 정성공이 시랑을 매우 크게 질책하자 격노한 시랑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상투를 칼로 잘라 들어올려 사의를 표시했습니다. 정성공은 우선 사태를 수습해서 그 자리에서 시랑이 함대를 떠나는 일은 피했다고 합니다.
이듬해, 정성공이 중국 본토 공격을 노릴 즈음 적들이 점령하고 있는 도성을 공격한 후 금은만 탈취하고 도성은 내버려두고 철수하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시랑은 이를 반대합니다. 그게 보통 해적때들의 도적질과 다를 바가 무엇이냐, 그것이 반청복명이냐는 것이었지요. '그렇다면 도적과 다를 바가 아니냐' 는 식의 모욕을 받은 정성공은 정말 크게 노해 시랑을 가택연금 시켰고, 시랑의 행동 범위를 그의 선박 안으로만 지정하는 제한을 걸었습니다.
이쯤되자 시랑은 조용히 야음을 틈타 달아나 정성공의 숙부에게 몸을 피했으나, 시랑의 의견에 일부 동조하면서도 차마 정성공의 권위를 거스르기 힘들었던 숙부는 보호 요청을 거절했고 오갈데가 없어진 시랑은 결국 청나라 정부에 귀순 요청을 신청하게 됩니다.
시랑은 그야말로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왔고, 그 경험은 청조의 어느 장수들도 따라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물을 집으로 삼고 선박을 목숨으로 삼는' 정씨 집단에서도 시랑의 존재는 전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적절한 인물은 제대로 쓰여지지가 못했는데, 사실 일전부터 요계성은 강희에게 시랑을 추천하였으나 오히려 비난만 받았습니다. 시랑의 아들 시제(施齊), 그리고 조카 시해가 정씨 집단에서 요직을 맡고 있었던 탓입니다.
1680년 즈음하여 요계성은 시제, 시해와 연락을 취하고 정경을 사로잡아 오라고 명령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어 두 집 가구 73명은 모두 살해되고 바다에 시체가 던져졌습니다. 그러한 일도 있었고, 강희는 세세하게 시랑을 감시하고 조사했습니다. 1681년 2월, 그는 대학사 이광지(李光地)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이광지
"시랑에게 이 일을 맡길 만한가?"
"시랑은 어려서부터 군대의 경력이 많고, 해상에 익숙하며, 바다의 일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해적은 그를 두려워합니다."
강희는 우선 이광지에게 직접적으로 묻고, 그 후에 다시 명주를 이광지에게 보내어 한 번 더 물어보았습니다. 이광지는 시랑의 장점을 말했습니다. 하나, 그는 대대로 내려오는 해상의 집안이고, 둘, 그는 해상의 정세를 숙지하고 있으며, 셋으로 시랑이 계략을 갖추고 있어, 바다에서 시랑을 두렵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시랑 본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강희는 그 후에 다시 한번 이광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진정 그만 한 사람이 달리 없는가?"
이광지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재략으로 논한다면, 실제로 그에 비할 바가 없습니다. 성공한 이후에 황제꼐서는 비로소 훌륭한 처신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에 결심을 굳힌 강희는 시랑을 수사 제독으로 재임명했습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난리가 벌어지며 시랑을 파견하면 반드시 가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며, 정씨 집단에게 동조할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강희는 이미 생각을 굳혀서 시랑이 아니면 대만을 정복할 수 없다고 여겼으며, 시랑을 불러 직접 음식을 내려 주고 이렇게 단호하게 믿음을 전달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그대의 출신을 가지고 무엇이라 하지만, 그대가 아니라면 이 일을 해결할 사람이 없다."
자존심 강한 시랑은 출발하고 현장에 도착하면서 온갖 요구를 했습니다. 우선은 자신의 측근이자 시위인 오계작(吳啓爵)을 데리고 가겠다는 의사는 병부에서 기각했습니다. 오계작이 일개 시위에 불과한데다 별다른 공훈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지만, 강희는 시랑이 청한 바대로 처리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랑이 휘하 부하에게 작위를 주려고 하자, 이부에서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강희는 시랑이 사람을 써야 한다며 그의 요구대로 전부 처리해주었습니다.
실제로 시랑은 험난한 풍파등에 이골이 난 인물이었습니다. 갑갑한 북경에서 간만에 바다로 나온 그는, 하문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선박을 정돈하고 병사를 훈련시키며, 전투의 준비를 하는 동시에, 해전에 익숙하지 않은 순무와 총독이 자신들을 방해할까봐 주도권을 가져오려는 시도를 벌였습니다. 그는 부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수군을 통솔하고 정씨 정벌에 관한 모든 일을 자신에게 일임하라고 강희에게 요구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사람이 바로 시랑을 천거한 요계성입니다. 요계성은 시랑의 상소를 읽어 본 뒤 답답하고 화가 나서 어쩔줄을 몰라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대만 정벌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더라도 여한이 없겠다고 의사 표시를 했습니다. 둘 모두 자존심이 강하고 능력 또한 대단하며 열의도 엄청나서, 둘 중 하나의 기를 완전히 꺾어놓는것은 좋지 못해보였습니다. 강희는 시랑의 요구에 동의하지 않고, 우선 요계성은 성 전체의 병마를 통괄하고, 제독 시랑과 더불어 팽호와 대만을 정벌하라는 식으로 답했습니다.
1682년 3월, 시랑은 군대와 선박이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보고하면서 진군하겠다고 의사 표시를 했습니다. 그리고 요계성에 대해서는 병력을 관리하고 무기를 제조하고 사졸을 격려하는데 전혀 허술함이 없다고 그의 과단성을 칭찬하였는데, 그러면서도 요계성이 북방에서 성장하여, 비록 재주가 뛰어나지만 바다의 풍랑에 직면하면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총독은 하문에 주둔하여 군량 운반을 도와주고, 자신이 싸움은 다 하겠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요계성은 또다시 분노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반박 상소했습니다.
"신이 비록 북방에서 자라 지금 바다에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았으나, 또한 편안하여 조그만 허물도 없었는데, 어찌 신에게 잘하느 바가 없다고 합니까! 차라리 해상에서 전사할지언정, 하문으로 돌아와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강희는 우선 시랑의 요청을 재고하면서 둘이 확실하게 이야기를 나누라고 말했습니다. 시랑과 요계성의 파워 게임과 서로간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1681년부터 1682년까지 몇번의 출정 계획이 있었으나, 시랑이 뜻을 바꾸어 실행되진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1682년 여름에 팽호로 출발하자고 정하였는데, 여기서 시랑과 요계성이 계획을 두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바람에 또 연기되었습니다.
시랑은 여름의 남풍을 타고 가야 보름 동안 선박은 뱃머리를 이어 일제히 움직일 수 있고, 장수와 병사는 또한 뱃멀미를 겪지 않으며, 교전 시 바람에 불어오즌 쪽 상류에 있게 되고, 적은 도리어 바람이 불어 가는 쪽 하류에 있게 된다는 전문적인 의견을 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요계성은 겨울과 봄 사이의 북풍을 이용하여 진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팽호와 대만은 북풍이 불면 정박할 곳이 많다는것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남풍이 불면 정박할 수 있는곳이 한곳밖에 없으므로, 적이 그곳에 있다면 정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7,8,9월에 태풍이 연속하여 발생하기 때문에 보급도 하기 어렵다고 주장했습니다.
열흘 가량 최고 지휘관들이 이렇게 싸움만 벌이고 있자, 결국 원정도 시작하기전에 파토가 되어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랑은 오기가 생겨 정찰선을 보내 남풍을 타고 유국헌이 있는 팽호까지 정찰을 시키고 다시 귀환시켰습니다. 정찰선은 아무 문제도 없이 남풍을 타고 진군했고, 이는 시랑의 자신감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요계성의 경우에는 회유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요계성의 회유 전략과 첩자들의 공작은 대만 내에서 각종 분쟁과 반란의 씨앗을 뿌렸고 투항군을 받아들여 이득을 보았습니다. 다만 요계성은 중국 수군의 역량에는 크게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일전에도 그는 정경의 세력을 모조리 대륙에서 일소하는 일에, 반드시 네덜란드 선박들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 바가 있습니다. 그는 강희에게 시랑이 빨리 싸우려는것은 시랑의 애국심이 매우 강하고, 또 피를 흘리는 전투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생각이 강할뿐, '본래 기회가 적당하다거나, 적을 토벌할 수 있는 상황; 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계성은 실질적인 군사 작전보다도 회유와 반락 책동, 경제적 봉쇄와 압박을 주요 전략으로 내걸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시랑은 결코 유국헌등이 순순히 항복을 할 인물들이 아니며, 정씨가 회유를 받아들일것이라고 여기는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씨와 결판을 내려는 마음이 매우 강해, 정씨의 사자가 하문에 와서 서신을 보여주려고 해도 아예 처음부터 면담을 거부했습니다. 요계성이 시랑을 돌려서 비난한것과 마찬가지로, 시랑 역시 요계성이 바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돌려서 비난했습니다.
시랑의 요청은 명확했습니다. 바다에 대한 일은 모두 자신에게 일임하라는것입니다. 또한 정예병 2만, 크고 작은 전선 300여 척을 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것만 적을 모두 파멸할 수 있고, 만약 잘못되면 자신에게 처벌을 내려주라는 것입니다.
강희는 처음에는 화를 내었습니다. 시랑의 터무니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자신만만한 태도와 각종 요구도 그렇고, 시랑이 이미 여러차례 공격을 하려다 상황을 보고 연기했던 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기왕지사 시랑에게 맡긴 일이기도 하고, 일을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니 의정왕대신회의에서 논의하여 이를 승낙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사들의 의견을 묻자 명주는 두 사람이 군을 이끌고 가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사태가 나타날 수 있음으로, 시랑에게 일을 맡기자고 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강희의 최종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시랑은 이를 절대적인 권위로 삼아 불만스러운 주변 관리들에게서 득의양양하게 병력 2만 1000여명을 얻어내고 큰배 70척을 포함해 200여척에 가까운 전함을 배치하였습니다. 시랑의 공격 시도가 노골화되자 대만에서도 허둥지둥 전투 준비를 했지만, 토착민들을 강제로 징발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식량을 운반하게 한 탓에 불만이 심해졌습니다. 군사들은 그들에게 매질을 했고, 공방에서 무기를 만드는데 힘을 쓰다보니 농사의 적기를 놓쳐 수확량에 당장 문제가 생겼습니다. 토착민들은 식량을 탈취했고, 정씨 정권이 이를 진압하자 산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시랑은 승리의 기회를 눈치채고 1683년 4월, 최후의 상소를 올렸습니다.
"해역(海逆)은 날로 위축되고 있습니다. 무력 토벌하여 무너뜨릴 좋은 기회입니다."
6월, 마침내 시랑의 대규모 수군이 바다를 뒤덮을듯 하여 진군하였습니다. 청조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남중국해의 바다에서 벌어지는 대격전의 시작이었습니다.
첫댓글 으으 크고 재밌습니다.
ㅇㅇ!!!! 점점 흥미가...정왕조의 마지막인가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