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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기근 및 굶주림은 농업 및 경제정책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1948년 개국부터 북한은 민간인들이 사적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중앙통제 경제체제를 채택해왔다.
1950년대에 시작된 배급제도를 통해 북한 정부는 경작농민 자체 소비량을 제외하고 협동농장에서 수확된 모든 국내 농산
물을 걷어들였다. 그런 다음 우선 순위에 따라, 노동당 간부, 군인, 공안, 경찰에게는 유리하게, 정부와 당에 충성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 사람들(북한 정부의 용어를 사용하면 “적대” 계층)에게는 불리하게 농산물을 배분했다. 기타 식재료와 소비
재들은 배급권을 사용하여 배급소에서 구할 수 있었다.5
북한은 수 십년간 배급제를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효과적으로 공급할 만한 역량이 없었다. 남한의 북한경제
전문가이자 북한 기근에 대한 매우 뛰어난 저서의 저자인 이석에 따르면, 사무직 노동자들의 배급은 1960년대 하루 700그램
에서 1973년 608그램, 1987년 547그램으로 점차 줄어들었다.6 북한의 국영 농업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가 1995년 남한으로
온 이민복(50)은 휴먼라이츠워치에 다음과 같이 상황을 설명했다.
엘리트 계층을 제외하면, 직업을 막론하고, 식량 상황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사람이 극심한
식량부족을 겪고 있었지요. 연구원들, 교수들, 여타 교육받은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농부들 보다 많은 돈을 번다
하더라도, 한달 월급으로 겨우 며칠 식량 밖에 살 수 없다면, 그건 많은 게 아닙니다. 배급의 경우, 비록 쌀이 점점 옥수수로
대치되었고 그 양도 계속 줄었지만, 1980년대 초까지는 주민들에게 배급이 주어졌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배급이 미루어지기 시작했지요. 1980년대 말에 들어서자 연체는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7
과거 배급제도를 통해 분배된 재화들은 중국 및 소련으로부터 온 원조 및 식량 수입에 의해 그 부족분이 충당된 것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구 소련 해체에 따라 무역 상대국들 대부분을 잃어버리면서 북한은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이미
역량이 부족하며 잘못 운영되던 농업 분야는, 에너지 부족으로 인해 특히 화학 비료 공장들의 생산성이 감소하면서 또 한번
타격을 받았다. 북한은 홍수, 가뭄을 포함한 일련의 자연 재해들을 연속적으로 겪었다.8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배급제를 통해 배분되는 식량의 양이 너무 적어서 북한은 식량 또는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새
로운 대안을 찾아야 했다. 전적으로 배급에만 의지하던 주민들 중 상당수가 굶주림 혹은 그와 연관된 질병으로 죽었다.
1995년, 북한은 국제적인 식량지원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9 이례적으로 국내 상황을 공식적으로 공개하면서, 1999년
큰물피해대책위원회의 전인찬은 1995년에서 1998년 사이에 사망률이 37% 상승했음을 보여주는 수치를 공개했다. 언론
매체에 따르면 이는 기근으로 인해 당시까지만 약 22만명의 북한 주민, 인구의 1%가 사망했음을 의미한다.10 이는 재앙의
범위를 보여주는 첫번째 공식적인 발표였다. 독립적인 조사자들과 구호 종사자들에 의한 추산은 58만에서 120만 또는
3백만 사이의 다양한 범위의 사망자 수를 제시한다.11
이 시기의 경험은 참혹하다. 2005년 5월 북한을 탈출한 여성 김OO는 1996년부터 탈출 때까지 배급제를 통한 정부 배급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휴먼라이츠워치에 말했다. 그녀는 해산물을 중국에 팔고 쌀과 다른 생필품을 사들이는 무역 회사의
판매원으로 일했다. 그녀의 회사가 식량 거래를 직접 다루었기 때문에, 그녀는 살아 남기에 충분한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농민시장에서 일하며 천, 단추, 지퍼를 팔아 돈을 벌었다. 그녀는 그녀의 가족은 대체로 굶주림을 피했지만, 많은 이웃들이 굷주림으로 고통 받았고 일부는 기근 동안 죽었다고 말했다. :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 중 15명 정도가 굶어 죽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 하나는 전 가족이 굶어죽었어요.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지요. 기차역이나 길거리, 어디서나 시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1997년이 최악이었고, 그 후로는 좀 나아졌습니다. 왜냐하면, 모두들 시장에서 장사를 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렇게 살아남았습니다. " 북한을 탈출한 많은 사람들은 배급제를
통해 공급되는 식량의 양이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배급이 차별적 기준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지도층 및 그 가족
등 평양에 거주하는 엘리트들, 노동당 고위간부, 군인, 공안, 경찰, 검사 및 기타 사법 관계자 등의 우호 계층에게 먼저 배분
되고, 그 다음에야 나머지 주민들에게 배분되었다.12 이는 비엘리트 계층이 1990년대 식량 위기 동안 필수 식량에 훨씬 못
미치는 배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엘리트 계층 및 우호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배급을 받았음을 의미한다.13
북한 정부는 또한 수형자들과 같이 국가의 관리 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줄 책임을 이행하는데도 실패했다.
남한의 통일부에 따르면, 배급제를 통해 수형자들에게 공급된 곡물의 양은 구 배급제도에서 2세~4세 어린이들에게 배급
되던 양(하루 200g)과 동일하다.14(부록 참조). 영양 전문가들은 성인이 정상적인 건강 수준을 유지하려면 하루 최소 500
그램의 곡물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수형자들의 경우는 더 심각한데, 북한의 수형자들 중 절대다수가 강제노동에 동원되고
따라서 평균적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열량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감옥에 수감된 적이 있던 사람들은 극심한
식량부족이 구금 시설 안에서 받는 가혹한 학대만큼이나 고통스러웠으며, 많은 죄수들이 쥐, 뱀, 벌레 등으로 빈약한 배급을
보충한다고 독립된 조사원들에게 반복적으로 증언해 왔다.15 이러한 증언들은 북한이 식량 접근에 있어서 차별을 제도화
했을 뿐 아니라, 식량을 주민에 대한 상벌의 방법으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는, 군인, 엘리트 계층 구성원들을 포함하여, 좀 더 낳은 배급을 받을 위치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 중 일부도,
기근 동안 식량부족으로 고통 받았으며, 그러한 식량부족은 현재까지도 일부 계속되고 있다. 2005년 3월 탈출 당시 군인이
었던 임OO(남)은 일반 병사들 역시 굶주림을 겪었다고 휴먼라이츠워치에 진술했다.
황해시에 있는 발전소에 배치되어 일했던 그의 부대는 심각한 식량부족을 겪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 같은 국경일에만 제대로 배급을 받았다. 그 외의 날에는, 하루에 “세 숫가락” 정도의 곡물만을
받았다. 부대원중 대여섯이 영양실조로 죽었고, 부대원들 중 상당수가 몸이 약해져 복무가 불가능해지자 집으로 돌려
보내졌다. 부대원 수는 2002년 중반 100명에서 2004년 중반 약 10명으로 줄어들었다. 임씨는 부대에서 복무하기 전,
굶주림으로 죽은 이웃들 10여명을 알고 있었다. 임씨는 그의 어머니가 중국으로 떠난 후 북한을 탈출했다.16
" 그들이 굶주리는 건 다들 알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안보이다가 결국, 그 중 몇사람은 자기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 일은 너무 흔했습니다.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죽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보니 당국자들이 유족을 찾을 수 없을 때도 많았죠. 그래서 관도 없이, 5명씩 10명씩 언덕에 묻곤 했습니다.17 "
2000년 북한을 탈출한 한OO(남)은 평양에 거주하는 공안요원으로서 엘리트 지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굶주림으로 고통 받았다. 그는 하루 700g의 곡물을 계속 받았지만, 그의 부모가 일을 하지 않아서 배급을 받지 못했으므로, 그가 받은 배급으로 세 사람이 먹고 살아야 했다. 그의 가족은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훨씬 낳았다. : 그가 아는 가구들 중 셋 중 둘은 최소 한명의 가족이 굶주림으로 죽었거나, 중병에 걸렸거나 혹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집을 나갔다.18
"하루 중 대부분을 식구들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애쓰는데 보냈습니다. 온갖 것을 내다 팔았습니다. 장롱, 희귀한 책들, 뭐든지요. 쌀독은 비어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가구를 내다 파는 사람은 너무 많아도 먹을 것을 내다 파는 사람은 적었기 때문에, 물건들을 팔아서는 돈을 많이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전엔 그런 굶주림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비참했습니다. "
북한 정부가 정부 정책에 대한 은연중의 비판조차도 용납하지 않은 것이 절박한 위기의 한 원인이었다. 위에서 소개된 북한의 국영 농업연구소 연구원이었던 이민복은 생산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우량 옥수수 종자를 개발하는 연구를 했었다고 휴먼라이츠워치에 말했다. 그러나 1990년 초 그는 농가에서 행한 실험에서 생산결과물을 소유하도록 허락된 농가가 그렇지 않은 농가보다 훨씬 더 많은 농작물을 산출하자 북한의 농업에 시장 원리를 도입해야 한다고 상부에 제안했다가 “반동적” 사상을 가졌다며 호된 질책을 받았다. 그는 식량 위기가 북한을 강타하기 전인 1990년 11월 북한을 탈출했다.19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 위에 언급한 한OO와 같은 북한 주민들은 공식적으로 허가된 장마당과 불법 암시장 모두에서 주로
물물교환의 형태로 사적 경제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작은 채마밭이나 경사진 산허리, 혹은 전에 황무지로 여겨졌던 곳이나 농지로 허가되지 않았던 곳 등에서 사적으로 곡물, 야채를 재배하거나 가축을 기른 농민들이 주된 식량 공급원이 되었다.
일부는 중국으로 탈출해 식량을 구입한 뒤 다시 농민 시장에 되팔았는데, 이러한 식량이 부분적으로 수요와 공급의 차이을
메웠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북한은 배급체계의 경직성을 완화했다. 중앙 정부는 자신의 독점 영역이었던 식량무역에 지방
정부들이 참여하도록 허락했으며, 협동농장 뿐만 아니라 공장과 도시 가구들에 농지를 할당했고, 개인에 의한 사적 식량
거래를 거의 눈감아주었다.29 북한의 국내 농산물 생산은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대체로 국제적인 비료 지원과
자체적 개혁 조치의 결과였다. 남한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북한의 국내 농산물 생산은 2000년에서 2005년 사이 15% 증가하
였다.
2002년 7월 북한은 현존 장마당의 일부 합법화, 일용품 가격 및 임금의 조정, 실패한 국영기업의 보조금 중단을 포함하는
경제개혁 조치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농업 분야에서의 개혁 조치에는 일부 협동농장에서 가족기반 경작 단위를 시행하고,
농민들이 경작 작물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허락하고, 사적 경작지의 허가 면적을 확장하는 것이 포함되었다.30
이러한 조치들은 북한이 경제 개혁을 위해 필요한 단계들을 밟아 가는 신호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 받았지만, 북한 정부는 계속적인 개혁을 통해 후속 조치들을 이어가는데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많은 북한 주민들은,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식량 가격이 계속해서 폭등하는 등 개혁의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으로 고통 받았다. 2004년 농산물의 시장가격은 2002년 6월보다 8배나 올랐다. 임금은 어느정도 올랐지만, 가파른 물가 폭등을 따라잡기에는 부족했다.31 국영 기업들이 문을 닫음에 따라 많은 북한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었고, 일부는 그들의 유일한 수입원과 식량원을 잃어버렸다.
[5] 2005년 북한 인권 백서, 통일연구소, 2005년 4월, pp 201-226.
[6] 1994-2000년 북한의 기근, 이석, 통일연구소. 2004년 12월
[7] 휴먼라이츠워치 이민복 인터뷰, 2006년 2월 2일.
[8] 권리에 굶주리다 : 북한 인권 및 식량 위기, 국제 앰네스티, 2004년 1월.
[9] “북한, 식량부족 인정, 일본에 쌀 요청,” 연합통신, 1995년 5월 26일
[10]“북한, 기근으로 수백만명 사망 인정”, 연합통신 1999년 5월 9일.
[11]수년간 중국 내 북한 난민을 도와왔던 남한 NGO 좋은벗들(Good Friends)은 약 3백만명이 굶주림으로 죽었을 것으로 추산한다. 북한식량난과 북한인권,. 좋은 벗들, 2004년 1월. 북한 중앙통계사무소와 유엔식량농업기구/세계식량계획의 다양한 공식 통계자료들과, 1994년과 2000년 사이의 출생률과 사망률을 토대로, 이석은 58만에서 69만명 사이의 사람들이 굶주림 또는 그와 관련한 질병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산한다. 그러나 이석은 북한 어린이들의 영양상태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사용할 경우 그 수는 63만에서 112만까지 극적으로 증가한다고 말한다. 이석, 1994년~2000년 북한 기근: 발생, 충격 그리고 특징, 통일연구소, 2004년 12월. 인구학 전문가인 대니얼 굿킨드(Daniel Goodkind)와 로레인 웨스트(Loraine West)는 북한이 기근으로 약 백만명의 주민을 잃었다고 말한다. 대니얼 굿킨드(Daniel Goodkind), 로레인 웨스트(Loraine West), “북한 기근과 인구학적 영향(The North Korean Famine and Its Demographic Impact”, 인구개발리뷰(Population and Development Review), 2001년 6월 1일.
[12] 2005년 북한 인권백서, 통일연구소 2005년 4월.
[13] 월간 북한, 2004년 9월, pp.214-216.
[14] “2005 북한의 이해”, 통일교육센터, 통일부, 2005년. 남한의 통일부는 냉전 시대에 북한에 대항하는 정치적 선전기관 역할을 했고, 통일부가 제공하는 정보는 그로 인해 때로 정치적으로 왜곡된 것으로 보였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임하고 남한이 북한에 대한 정책을 적대에서 “포용”으로 바꾸면서 어느 정도 달라졌다.
[15] 보이지 않는 탈출: 중국내의 탈북자들, 휴먼라이츠워치, 2002 11월, pp. 25-26 ; 그들은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믿을 수 없는 잔인함, 북한 난민을 위한 생명 재단 및 북한 인권 자료 센터, 2004년 2월, pp 86~107.
[16] 휴먼라이츠워치 전화 인터뷰, 2006년 2월 6일.
[17] 휴먼라이츠워치 인터뷰, 서울, 2006, 2월 2일.
[18] 휴먼라이츠워치 인터뷰, 서울, 2006년 2월 7일
[19] 휴먼라이츠워치 인터뷰, 서울, 2006년 2월 2일, 이씨는 1990년 11월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같은 날 체포되었다. 그 후 북한 공안원들에게 계속적인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중국에서 겨우 하루 밖에 보내지 않았으므로, 당국자들은 그가 “체제전복적”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다고 판단하고 그를 풀어주었다. 그는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고, 몇 년간을 숨어 지낸 후, 남한으로 와서 서울에 정착했다. 현재 인권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29] 이석, 1994-2000년 북한 기근: 발생, 충격 그리고 특징, 통일연구소, 2004년 12월.
[30] 북한 경제개혁의 이해, 북한 경제 센터, 통일연구소, 2005년 4월.
[31]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