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22 08:00 by 김삼웅
김대중이 부산에서 해운사업을 하고 있을 때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이승만의 권력연장을 위한 살벌한 정치파동이 연출되었다.
1952년 여름,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폭력을 동원하여 정치지형을 바꾸려고 들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였다. 6ㆍ25전쟁 중에 보여준 이 대통령의 행정상의 무능력과 부정부패, 국민방위군사건과 전국 도처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사건 등으로 국회 간선으로는 도저히 연임될 가망이 없었다.
이에 이승만은 재집권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을 추진하는 한편, 신당운동을 벌여 1951년 12월에는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직선제 개헌안은 1952년 1월 국회에 상정되어 재석 163명 중 가 18명, 부 143명, 기권 1명으로 부결되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국민회ㆍ조선민족청년단(족청)ㆍ노동총연맹 등 어용단체를 동원하여 관제데모를 일으키고, 정치깡패 집단인 백골단ㆍ땃벌떼ㆍ민중자결단 등의 이름으로 제작된 벽보ㆍ삐라가 부산시내를 뒤덮었다.
이승만은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내각제 개헌추진 의원들을 체포하는 한편 국회의원 50여 명이 탄 버스를 헌병대로 끌고가 일부 의원이 국제공산당과 결탁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김창숙ㆍ이시영ㆍ김성수ㆍ장면 등 원로와 야당의원 60여 명이 호헌구국선언을 시도하였으나 괴한들이 습격하여 무산되었다. 이승만의 측근이 된 장택상 총리가 마련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추진되어 경찰이 임시 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통과되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의 통과로 이승만은 이 해 8월 5일 실시된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재선되었다. 김대중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는 상태의 전시체제에서 이승만이 오로지 자신의 연임을 위해 헌법을 바꾸고, 야당 의원들을 헌병대로 끌어가서 용공으로 몰아 엮는,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을 현지에서 지켜보면서 잘못된 정치가 국가와 국민들에게 얼마나 고통을 주는가, 정치의 중요성을 거듭 절감하게 되었다.
1987년 대통령선거 유세장의 인파에 쌓인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
지금까지처럼 엉망진창인 정치, 국민을 기만하는 정치가 횡행하고 있어서는 이 나라는 언제까지 좋아질 수 없을 것이며, 정치가 바르게 잘 되어야 비로소 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행복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전쟁을 통해 나는 통감한 것이다. 한국전쟁 중에 처음으로 사선을 넘나드는 체험을 통해 ‘올바른 정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공산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도 국력을 강화하는 바른 정치가 불가결하다는 것을 통감했다. (주석 12)
이승만의 부산정치파동은 우리나라의 헌법을 정권연장의 도구로 변질시킨 최초의 시도로서 일종의 정치적 쿠데타였다. 미국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의회와 군부의 강력한 재선 출마 요구, 심지어 황제 추대 움직임에도 이를 단호히 물리치면서 낙향하여 미국 민주주의의 훌륭한 전통을 세운 것과 비교하면 이승만의 권력욕은 추악하기 그지 없었다. 김대중은 이를 지켜보면서 정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법과 질서를 무시한 폭력을 행사하는 일련의 움직임을 보고, 나는 앞으로 이 나라가 어찌될 것인가 하고 걱정하게 되었다. 정치가 올바르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대통령이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해 민주주의를 짓밟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석 13)
김대중은 정치파동을 일으켜 재집권에 성공한 이승만을 비판하면서 야당의 처사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실용주의 성향 또는 사물(시국)의 양면성을 보는 비판적 시각의 일면을 살피게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야당이 이 박사를 내쫓으려고 한 일은 문제가 있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당시 판문점에서는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이 대통령을 추방하는 형태로 그만두게 하려고 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비록 여러 비판이 있었다 해도 그 상황에서는 이 나라를 이끌 지도자는 이승만 대통령밖에 없었다. 만약 그때 야당이 이 박사를 한번 더 대통령에 추대하도록 힘썼다면 한국정치는 안정과 민주화의 방향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 야당이 이 대통령을 궁지에 몰아넣은 일은 정치현실에 대한 판단에서 비롯된 실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주석 14)
부산정치파동, 달리 말하면 이승만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발췌개헌 파동에 대한 김대중의 시각은 원칙론보다 현실론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아 보인다. 반이승만 노선을 걸어온 야당이 내각제 개헌을 시도한 것은 정당한 정치활동일 수 있었다. 문제는 이에 대해 이승만이 직선제 개헌을 위해 쿠데타적 방법을 동원한 것은 아무리 전시체제라 해도 용납되기 어려운 행위였다.
만약 야당이 ‘한번 더’ 이 대통령을 추대했다고 하여도, 뒷날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ㆍ조봉암후보 사법살인, 3ㆍ15부정선거 등 영구집권을 추구하는 그의 끝없는 권력욕으로 보아, “한국정치가 안정과 민주화의 방향”으로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석
12) <김대중 자서전(1)>, 86~87쪽.
13) 앞의 책, 88쪽.
14) 앞의 책, 88~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