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조선 말기, ‘갑신정변(甲申政變)’이란 이름으로 나라가 시끄러웠고 열강이었던 중(中) · 일(日) · 러[露] 사이에서 시달리던 그 어지러웠던 시대에 이 땅에 태어나셔서 식민지, 해방, 전쟁을 겪으시면서도 훌륭하게 우리 부모님들을 기르고 가르치시며 살아오신 내 조부님들의 얘기이다.
구한말의 서울(빌려온 사진)
지난번 회고록 ‘개똥 줍는 사람들’에서 잠깐 언급했던 큰집 할아버님의 실화(實話)이기에 직접 보거나 겪은 일은 하나도 없지만, 코흘리개 시절, 사건의 주인공(?)들이었던 할아버지들이 대여섯 번째 손자뻘인 나를 귀여워 해주셔서, 오다가다 만날 때 인사를 드리면 조끼 주머니나 쌈지에서 잎담배 냄새에 쩔은 대추나 밤알을 꺼내 주셨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그때 내가 숱한 동네 철부지들 중에서 어른들을 만나면 꼬박꼬박 인사는 잘했던 모양이었다. 이름은 몰라도 ‘용방댁 손자’인 것은 용케 기억해 주셨으니까….
사건의 배경은 1900년 초반경, 그러니까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이라 추정된다. 그 할아버지들의 청년기 시절의 사건으로 한참 후까지 마을에 회자되던 얘기를 기반으로 구성한 것이다.
내 할아버님의 바깥나들이 가실때 모습(회갑 전)
내 고향은 옛부터 경상북도 경산시 중방동이다. 태어나기 전 일본땅에 돈 벌러 가신 아버님 탓에 일본의 키타규슈우시(北九州市)에서 태어났다고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 외에는 줄곧 살아온 고향의 역사는 깊다.
달성서씨(達城徐氏) 원조(遠祖)이신 서진(徐晉)으로부터 12세손(世孫) 되시는, 현감(縣監)을 지내셨다는 동고(東皐) 할아버님이 터를 잡으신 이후 그 자손들 120여 가구가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어, 한 동네에서 줄곧 살아 왔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많이 달라지고 흩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은 분들이 멋지게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고, 내 막내아우도 선영(先塋)을 지키고 있어 연중 대여섯 차례 오르내리기도 한다. 대개 열두촌 안팎의 항렬(行列)이다. 엇비슷한 사이에서는 그냥 아재, 조카 아니면 형님 아우로 통한다. 지금은 동고(東皐) 할아버지를 중시조(中始祖)로 모시며, 불천위(不遷位)로 경산시 한복판에 위치한 옥천서원(玉川書院)에 모시고 있다.
경산시 한 복판에 있는 옥천서당
다행히 마을이 산골이 아니고 걸판지게 너른 들(‘경산 한들’이라 불렀음)을 물고 있었기에 살기는 편했다는 생각이다.
지난번 회고록 ‘개똥 줍는 사람들’에서 내 큰집 할아버지(택호가 ‘월산’이었기에 ‘월산 할아버지’로 통칭함) 얘기를 살짝 한 적이 있다. 그 할아버지가 주역(主役)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구한말 고종(高宗) 갑오년(1894)에 태어나신 내 조부님보다 10살 위로 3형제 중 맏이였던 월산 할아버님이 당시로선 부모 맞잽이었던 사이였으리라. 내 조부님은 여기에 끼이지도 못했으니까.
당시는 대개 남자 열 칠팔 살이면 이미 장가를 들어 애들 두서넛은 두었으면서도 겨우 상투 튼 어린아이들과 함께 동네 서당(지금의 옥천서원)에서 글을 읽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거의 전부가 한 마을의 집안 관계 또래의 아재비 조카 사이었으니 장난도 심했다.
서당에서 밤늦게 글을 읽다가 출출하면 철 따라 수박 서리, 참외 서리, 혹은 닭이나 개 서리를 하기도 했다. 그중 가장 인기 있었고 실속 있었던 것이 개 서리였다.
떼를 지어 남의 과일, 가축 따위를 훔쳐 먹는 장난이었던 서리. 요즘 같으면 당장 절도행각으로 잽혀 들어갈 일이지만, 당시는 그야말로 일종의 장난으로 동네마다 젊은이들에게는 애교적 입장에서 묵인된 낭만이 넘친 시절이었다.
그때의 개는 아무 집에서나 여러 마리를 기르기도, 기르다가 보양식으로 잡아먹을 수도, 새끼를 낳으면 시장에 내다 팔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서민들에게는 가장 보편적인 가축인 동시에 고급스런 고단백질 식품이기도 했다.
이 개 서리는 같은 동네에서 했다가는 어른들에게 혼이 났기에 조금 떨어진 이웃 동네에서 슬쩍 해와야 했다. 다른 동네에서도 우리 동네로 오기도 했다. 이미 전통(傳統)이 되어 온지라, 요즘 말로 하면 작전상(作戰上) 키멤버들의 역할이 정해져 있었다. 개를 불러 모으기 위해 바지를 내리고 똥을 누어 냄새를 풍기는 사람, 적당히 길이를 맞추어 제작한 나무 곰베를 등 뒤에 감추고 모여든 개들 가운데 가장 마참한 놈의 주둥이나 대가리를 쳐서 한 방에 결판을 내는 사람, 현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논두렁 밑에 숨어서 보고 있다가 개가 쓰러지기만 하면 얼른 개를 멍석으로 싸서 둘러메고 튀는 사람, 마을 적당한 곳에다 미리 큰솥을 걸고 물을 끓이는 담당자 등등이다.
이 중 바지를 내리고 똥을 누는 역할의 할아버지는 또래 중 연세는 최상위였지만 가장 몸집이 작고 약했던 남산 할아버지였고, 곰베를 담당하신 분은 당연히 힘이 장사인 큰집, 월산 할아버지가 고정 멤버로 정해져 있었다. 이 두 사람만이 현장에 투입되는 필수요원인 셈이다. 낯선 동네에 외지 사람은 접근하기가 어려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현장의 개들이 먼저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 날밤도 예정대로 잘 움직였다. 한두 번 해본 솜씨들이 아니었기에 밤중임에도 소리없이 몸짓 하나로 척척이었다. 남산 할아버지는 앉아 볼일을 보았고, 그 주위에 모여든 개들 곁에서 눈여겨 둔 놈을 향해 곰베 자루에 혼 힘을 모은 월산 할아버지가 필살의 일격을 날렸다. 퍽! 하는 소리에 이어 ‘깨갱’하는 소리 대신 ‘아야!’ 하는 비명과 함께 남산 할아버지가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그놈의 개가 용케 알았던지 대가리를 살짝 빼는 바람에 월산 할아버지의 전력(全力)이 실린 곰베가 남산 어른의 엉덩이를 치고 만 것이다.
그야말로 초비상 사태가 돌발한 것이다. 개를 뒤집어 씌워야 했던 멍석에 널부러진 남산 할아버지를 말아 들쳐 메고는 마을 침쟁이 집으로 뛰어들었다. 소문이 나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동네가 발칵 뒤집어질 사건이었다. 살인(殺人)이 안 난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쉬쉬~ 하면서 말도 못 하고 어른들 몰래 침 맞으러 여러 날 밤, 주인공들이 번갈아 남산 할아버지를 지게로 져 나르기도 했다. 그래도 결국 동네 어른들에게 알려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른들의 의논으로 호된 징벌이 내려지고 변상을 하는 등 수습은 되었지만 월산 할아버지의 위세나 심기(心氣)가 크게 꺾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 후 어느 겨울 달 밝은 밤에, 마을에서 닭서리를 했는데, 미리 기미를 알아채고 주인집 할머니가 보얀 명주 수건을 둘러쓰고 담장 사이의 닭장 옆에서 지키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훔치는 팀은 그 집으로, 훔친 닭을 받아 들고 튀는 팀은 그 집 담 밖에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팀이 안쪽에서 소리가 들리기에 일이 성사된 줄 알고 담장을 넘어다 보는 데, 하얀 닭이 넘어 오는 것이 아닌가. 엉급결에 ‘백닭이가?(흰닭인가)’ 하면서 덥석 양손으로 잡았는데, 흰닭이 아니고 명주수건을 쓴 주인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야, 이놈 OOO 아니야?” 하면서 냅다 고함을 지른 것이다. ‘백달이가?’하는 목소리에서 월산 할아버지임을 알아차려 버린 것이다. 완전히 월산 할아버지의 명성과 실적에 결정타를 입고 만 것이었다.
아무튼 어려운 시기에 슬하에 5남 3녀를 키워 내신 월산 할아버님이 68세를 일기로 1951년, 내가 11살 때, 세상을 떠셨으니까 할아버님을 제대로 안 것은 불과 몇 년이 되지를 못했다.
평소 약주를 즐기시어 늘 불콰한 얼굴이셨는데, 그해 여름 낮에 이웃 마을 큰 사돈어른의 파제(罷祭)에 가셔서 음복(飮福)을 하시고 와서 소 먹이러 들에 나가셨다가 쓰러지셨다. 요즘의 뇌일혈이었다. 사건 당시 히프를 얻어 맞으셨던 남산 할아버지는 월산 할아버지보다 6년이나 연상인데도 살아계셨다.
그 더운 한 여름에 장례식장도 없었던 시절, 집에서 십일장(十日葬)을 치렀으니, 그 당시의 상황은 상상에 맡길 뿐이다. 감여가(堪輿家)이면서 강호동양학자인 조용헌씨가 말했듯이 주자학(朱子學)은 종교도 아니면서 종교나 법 이상의 규율과 규제로 우리 사회를 옭아매어 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도 나는 상복(喪服) 범위에 해당되어 삼베 띠 하나를 허리에 두르고 장지(葬地)까지 따라갔다가 하도 덥고 배도 고파, 맨 위 형님이 손짓으로 부르는 데도 도중에 냅다 도망을 치고 말았는데, 저녁에 형님에게 회초리를 맞고 한참 울었다. 큰 형님이 나보다 10살 위였으니까 망인(亡人)이 되신 월산 할아버지와 내 할아버지의 사이와 같았다.
그리고는 덧없는 세월은 시대를 앉고 흘렀다. 월산 할아버지가 별세하실 때 이미 일흔을 넘기셨던 남산 할아버님이 그 소식을 들으시고는 가장 슬피 곡(哭)을 하셨다고 했다. 그 심정이 조금 이해가 되는 듯하다. 6년 연상이었음에도 항열은 월산 할아버님이 숙항(叔行)이었기에, 아직 세상 물정이나 예의범절도 잘 모르는 애들 앞에서도 꼭 ‘월산 아재’라고 부르시던 것이 지금도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남산 할아버지는 학창(?) 시절 힘센 월산 할아버지의 곰베에 맞은 자리에 골병이 들어 평생을 궂은 날이거나 겨울철이면 신경통을 앓으셨으면서도 여든 수(壽)를 넘기어 마을에서 최장수(最長壽)를 누리셨다. 당시로선 기록적인 연세의 장수(長壽)였다.
그런 남산 할아버지가 월산 할아버지가 작고하신 후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후까지 철없는 손자들이 정신없이 노는 것을 보시며 거의 혼잣말처럼 듬성듬성 들려주시기도 한 이야기이고 보면 그 속에는 세월 속에 녹고 삭은 깊은 회한(悔恨)과 연모(戀慕) 그리고 우정(友情) 비슷한 온갖 것들이 담겨 있었으리라.
열 살을 겨우 넘긴 나는 남산 할아버지의 둘째 손자이면서 나보다 두 살 위인 상경(相慶)이의 꼬봉이었다. 언제 어떻게 입은 상처였었는지는 몰라도 양 눈섭 사이에 마치 그때 순경들의 모자에 새겨진 무궁화 이파리 같이 생긴 상처가 있어 별명이 ‘소위’였다. 상경이 형은 손재주가 좋아 내게는 완전 스타(star)였다. 그의 손을 거치면 안 되는 것이 없었다. 신비스럽고 존경스럽고 부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혀를 빼문 체(당시 내게는 어떤 일에 열중할 때 나도 모르게 개처럼 혀를 길게 빼무는 습성이 있었다. 누나에게 몇 번이나 핀잔과 주의를 받았음을 기억한다) 둘이서 장독대 받침으로 깔아둔 두꺼운 돌 위에 뭔가를 얹고 망치로 똑딱거리며, 주어온 탄알이나 강철들로 제작(?) 하기에 넋이 빠져 있을 때, 마루에 앉아 긴 장죽을 빠시다가 “야, 이 넘들아 그만하고 들에 나가봐라” 하시던 남산 할아버지의 기운 없는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성인이 된 후, 언젠가 아버님에게 그런 일을 아시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허허허, 있었다고는 들었지, 마을이 들썩했다는 것 말고는 니가 알고 있는 거하고 같은 애길거야” 하셨다. 당신의 부모님 세대의 일이었으니 모를 리는 없었겠지만 자세히는 밝히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상경이는 학교를 졸업하자 그 손재주를 살려 그의 형과 이웃인 청도로 옮겨 당시 유행했던 ‘라디오 중개업(?)’을 했다. 라디오가 없던 시절, 마을 한가운데다 ‘라디오방’을 차리고는, 전쟁 당시 많이 버려져 있었던 구부려지고 헝클어진 군용 전화선을 주어다 용케 바르게 펴고는 집집마다 마루나 방에 스피커로 연결해 주면, 귀한 유행가와 노랭이 부자 영감님이 젊은 애첩에게 ‘춘심아~~’ 하던 연속방송 등을 종일 들을 수가 있었다. 우리 집은 마루와 안방에 하나씩 두 개를 달았다. 보수(報酬)는 곡식이나 돈으로 지불을 했다.
어느 날 아버님이 “저 소리 좀 꺼라”고 고함을 치셨다. 소프라노 오페라였다. “꼭 숨 넘어 가는 거 같다”고 하셨다. 내가 들어도 그랬다. 내가 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가 다 됐을 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솜씨가 어찌 좋은지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120여 가구가 집성촌(集成村)을 이루어, 한 동네에서 줄곧 살아 왔었다]에서 눈이 번쩍.^^
별별 이야기가 쏟아질 것 같은 예감대로 늑점이님 특유의 글 솜씨에 컴과의 거리가 좁혀질 판.^^
집안 이야기가 요로코롬 재미있고 흥미롭다니.....
그 시절 한국 사회상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