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영성
고대 중국 은나라의 충신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수양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충절을 지키고자 한 행동입니다.
일제 강점기, 매하 양태승은 속리산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당시 북에는 오산고보, 남에는 고창고보가 있어서 ‘북오산 남고창’이라 했습니다. 일제는 위안부와 학병 동원에 교사와 지식인을 앞장세웠습니다. 해직당하지 않으려면 창씨개명을 하라고 핍박했습니다. 많은 지식인이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고창고보를 세운 양태승 선생은 “굶어죽을지언정 창씨개명은 못한다”며 속리산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10여년 전 ‘매하 양태승 평전’이 출간되고, 201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된 일은 늦게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 치하에서 세속과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순수한 믿음을 유지하고 보존하려던 열성파들이 광야에 들어갔습니다. 이른바 광야의 영성, 사막의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입니다. 광야에서 심신의 고통과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오직 하나님께 몰두했습니다. 그들은 고행을 자초한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하나님만이 최고의 관심사였으며, 철저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너무 많은 것들로 믿음생활이 혼탁해졌습니다.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출처] - 국민일보
▣ 광야의 영성
광야는 고독한 곳이다. 광야는 조용한 곳이다. 광야는 세속의 방해가 가장 적은 곳이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을 부르고 찾기에 적합한 곳이다. 그러나 광야는 부족함이 많고 불편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는 하나님을 의존함을 배우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광야를 찾았고 거기서 하나님을 홀로 대면했으며 그들을 통해 광야의 영성이 태어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에 앞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다. 이 광야의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도를 배우게 되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존귀함을 배우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직한 모습을 직면하면서 죄와 탐욕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것을 학습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의 백성’이면서 ‘광야의 백성’이었다.
광야는 안전하지 못한 곳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끊임없이 주거를 옮겨 다녀야 했다. 그들은 광야의 경험을 통해서 진정한 안전은 오직 하나님 안에만 있는 것을 배워야 했다. 오늘을 사는 성도들은 다른가? 우리는 오늘도 삶의 자리를 끊임없이 옮기며 유목민의 삶을 흉내 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불행하게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함의 레슨을 너무나 늦게 배운다. 광야의 영성이 고갈된 까닭이다.
그래서 옛날 우리의 선배들도 이 광야의 경험을 제대로 학습하고 전수하기 위한 공동체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시작된 운동이 수도원 운동이었다. 나는 오늘을 사는 성도들이 광야의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가자는 말을 하고자 하지 않는다. 난 단지 오늘의 교회 내에 수도원의 영성이 담겨져 있을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이 광야를 순례하는 백성들을 위한 영적 지도의 책임을 위해서 말이다.
수도원에도 타락과 부패는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수도원은 산위에 높이 세운 산성이요 등대였다. 오늘의 교회에게 세상이 거는 기대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과 다른 모습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하는 갈망은 얼마나 큰가. 그리고 그것을 보지 못한 좌절과 실망이 소위 안티 기독교, 안티 교회 운동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더욱 광야의 영성이 그립다.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 광야의 길에서 예배하라
몇 년 전에 우리 교회에 암으로 죽어 가던 여성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자신이 걸을 수 있는 한 교회에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말을 지켰습니다. 나는 그녀의 삶이 거의 다해 가던 어느 날에 그녀가 여위고 허약해진 몸으로 천천히 예배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고 얼굴빛은 매우 창백해 보였습니다. 남편이 산소 마스크를 들고 그녀 옆에서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맨 뒷자리에 조심스럽게 앉혔고, 그녀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손을 들라는 가사의 찬양을 부르는 동안 그녀는 야윈 양손을 위로 들어 올렸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녀는 힘없이 떨리는 손이었지만 계속해 들고 있었고, 눈을 감고 약간의 미소를 띤 채 나지막하게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날 예배에는 두 개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내가 단상에서 전한 설교였고, 다른 하나는 맨 뒷자리에 앉았던 그녀가 한 마디 말도 없이 행한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두 설교 중에 그녀의 것이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광야를 정복한 영적 거인」/ 마크 애터베리
* 기도: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음으로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 모세가 광야에서 받은 4가지 학위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광야는 성도에게 필요한 교육을 시키는 곳입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가장 중요한 4가지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무명박사입니다. 이제까지 모세는 애굽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목받는 일에 익숙했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아무도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막의 들짐승과 양떼가 유일한 그의 친구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낮아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내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둘째, 시간박사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기다리는 것을 배웠습니다. 성급하면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기다림의 미학은 광야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지혜입니다.
셋째, 고독박사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침묵의 고요와 고독의 깊이를 배웠습니다. 분주함이 아닌 묵상의 능력을 배웁니다. 광야는 이를 가르치는 은혜의 보고였습니다.
넷째, 불편박사입니다. 광야의 거친 환경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모세를 연단시켰습니다. 만약 광야 40년간 ‘불편’이라는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모세는 이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광야가 필요 없다는 어리석은 말을 하지 마십시오. 광야에서 지쳤다는 말도 하지 마십시오. 광야는 꼭 필요한 곳입니다. 광야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교육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훈련을 마쳐야만 모세 같은 사역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훈련을 기뻐하십시오.
* 기도: 주님, 광야의 훈련을 통해 성장하게 하소서.
* 묵상: 인생의 광야라고 느껴지는 때에 성장케 해 주심을 감사하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 연단을 위한 광야
요셉, 다니엘, 여호수아 등은 눈에 띄는 허물을 발견할 수 없다. 허물없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지만, 성경은 그들의 허물에 대해서 침묵한다. 이들에게서 큰 허물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두 광야의 연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요셉은 노예와 감옥이라는 광야를 통과했다. 다니엘은 풀무불과 사자굴의 위협을 통과했다. 여호수아는 오랜 기다림의 광야를 통과했다. 광야는 지나기에는 힘든 곳이지만, 인생의 유혹과 시험에 대한 백신 역할을 감당한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둘다 시작할 때의 배경은 비슷하다. 둘 다 겸손했고, 둘 다 출중한 외모가 있었고, 둘 다 리더십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무너졌고, 다윗은 세워졌다. 다윗에게는 광야가 있었고, 사울에게는 광야가 없었기 때문이다. 광야의 연단이 없는 인생은 약하다. 광야를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넘어졌다가 일어서는 힘이 없다. 광야가 없으면, 광야의 시간 이상으로 그의 삶에서 대가를 치루게 된다.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팔 수 있는가? 물론 있다. 실제로 에스키모에게는 냉장고가 필요없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문화인은 냉장고 정도는 있어야 된다, 선진국 시민은 냉장고는 필수라고 계속해서 광고하면 된다. 그들의 남보다 앞서고자 하는 욕망을 계속 자극하면 에스키모도 냉장고를 산다. 필리핀의 이멜다는 구두가 3,000켤레였다고 한다. 인간에게는 그만큼의 구두가 필요없다. 그러나 욕망으로 살면 이멜다 같은 행동이 가능하다. 이멜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필요가 아닌 욕망에 이끌려 산다. 그래서 쓸데없는데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초점없는 인생을 산다. 왜 광야의 사람이 강한가? 광야는 우리에게 필요에 의해 사는 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필요로 살면, 많은 것이 없어도 된다. 진짜 중요한 일에 집중해서 살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수도원에 방문했다.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무엇을 요청할까 한참 기대했다. 수도사가 말했다. “그것없이도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필요는 크지 않다. 욕망이 크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
영국의 최고 전성기를 이룬 왕이 엘리자베스 1세이다. 1644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력화시키기고 대서야 제해권을 장악한다. 엘리자베스의 강점은 그의 광야에서 찾을 수 있다. 생후 3 달 만에 어머니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 3살 때 아버지 헨리 8세가 어머니 앤볼린을 참수시킨다. 그러고 어머니의 시녀인 제인 시무어와 결혼한다. 얼마나 한이 맺힌 인생이었겠는가. 이후 피의 메리라 불린 언니 메리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는 엘레자베스 1세를 런던 탑에 가두었다. 자신도 어머니처럼 언제 참수형을 당할 지 알 수 없는 위기의 순간들이었다.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영국의 왕이 되었다고 통보받는다. 말 그대로 ‘감옥에서 왕좌로’ 옮겨진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감옥에서 왕좌로 옮기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다. 그리고 그의 평생 그 광야의 연단을 잊지 않는다. 모든 정책에 있어서 욕망의 결정이 아닌 필요의 결정을 한다. 광야가 영국 최고의 왕을 만든 것이다. 언제나 인물은 광야에서 나온다. 광야는 하나님의 최고의 학교이다. 광야는 욕망을 죽이는 곳이다. 필요에 집중하게 만드는 곳이다. 겉멋을 죽이는 곳이다. 광야의 연단을 기뻐하라.
출처/ 삼일교회 청년부 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