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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61.8]
하계수련특집
지성당 양이제의 삶과 신앙(2)
- 수련과 포덕활동을 중심으로
이상임_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3. 지성당 양이제의 신앙의 실천적 구현
지성당 양이제의 삶과 신앙은 불가분의 관계로
그녀의 삶은 수련과 포덕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그녀의 삶의 매순간은 곧 기도이자 수련이었으며
한울님과의 감응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지성당 양이제는 수운의 신비체험과 깨달음,
해월의 강인한 전도 체험, 그리고 의암의
문화개벽기의 활동 등의 3대의 정신을
아우르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것은
수도의 방법론으로 시천주 이념을 실천하는
수심정기의 구체적인 구현으로 볼 수 있다.
초기동학의 의례는 주문, 영부, 검무를 들 수 있다.
후기동학에서는 이러한 의례들 중 ‘주문’ 암송은
계속 유지되었지만 ‘검무’의 전통은 거의 사라졌고
‘영부’의 실행은 공식적인 의례로서가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만 실현되고 있었다.
그런데 지성당 양이제는
이러한 초기 동학의 세 가지 의례를
충실하게 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지성당 양이제의 기도와
수련의 신앙생활을 통한 한울님 모심의 충만함이
주문, 영부, 검가를 통해 나타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이러한 점은
그녀가 동학 초기에 등장했던 의례의 맥을
다소나마 면면히 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운의 한울님과의 첫 만남에서
포덕의 방법으로 알려준 것이 영부와 주문이다.
수운의 『동경대전』 중 「포덕문」은
포덕 2년 봄에 완성된 것으로, 우주 만물의 변화가
한울님의 조화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수운의 “독특한 종교적 신비체험을 통한
한울님과 만남과 득도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뜻밖에도 사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증할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 물은즉 대답하시기를
「두려워 하지 말고 두려워 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묻기를
「그러면 서도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나에게 영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먼저 수운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듯이 영부는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는 수단으로
간접적으로 믿음으로 인도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대신사가 깨달은 후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던 이유는
영부의 효력이 컸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치병의 주술력만이 강조되던 부적의
전통적 흐름을 위천주의 정성과 공경의 맥락으로
전환시켰던 수운의 전통은 해월에 이르러
신이 내재된 인간의 역동적인 마음, 즉
시천주의 마음을 상징하는 인간중심적 맥락으로
전환되었다.”고 동학의 연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지성당 양이제 역시 영부를 받아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그러한 결과로
용담정 일대를 포덕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지성당 양이제가 널리 포덕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가호호 방문을 하여 전교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도통하고 도력이 높아 그중에서 무엇보다
치병의 능력이 뛰어났었기 때문이었다.
이 점은 용담교구인들이 입을 모아 증언해주고 있다.
그 중의 한 사람
故 해암 최해발 도정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양이제 사모님은
마을에 병환이 있으신 분들을 고쳐주곤 했습니다.
어딜 가도 낫지 않는 병이
양이제 사모님 선약과 기도면 다 나았어요.
그런 덕으로 천도교에 입교해 죽기 살기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도 많았지요.
지성당 양이제는 기도 후 영부를 받았는데
이것을 선약이라 칭했다고 한다.
양이제의 영부선약은
병 고침에 아주 큰 효력이 있었다고 한다.
현 용담수도원장인 화암 최상락은 어렸을 적에
할머니되시는 수심당 박백수와 지성당 양이제가
함께 지냈을 때 한 방에서 기거하면서
체험했던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양이제 할머니(종법사 추대)가
우리 집에 유숙하던 시기였는데 어쩌다 새벽에
잠을 깨서 보면 두 분이 5시 기도식을 봉행하시고 나서
양이제 할머니께서는 한쪽으로 자리를 옮겨
별도로 다시 한참 심고를 드린 후 붓을 들고
손바닥보다 조금 큰 문종이 같은 것에
아주 민첩한 손놀림으로 글씨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영부를 그려 내시는데, 오래지 않아
수십 장을 한 묶음으로 하여 몇 묶음이 마련되었으며,
낮이 되면 어김없이
그 영부를 받으러 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영부를 선약이라고 부른 것 같으며
많은 사람들이 우리집 본가를 출입하였는데,
대부분 선약을 받기 위해 온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는 그때만 해도 양이제 종법사께서
도통을 하신 줄, 또 엄청난 도력으로
병자들을 구제하시는 줄 알지 못했으며
마당포덕을 하시는 줄도 몰랐
지금 현재 용담교구 동덕들의 증언에 의하면
영부의 효험이 상당해서
병이 낫는 것을 많이 목격하였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가볍게는 독감이 들은 신도가
2-3일을 영부신약을 먹고 나았으며,
피부 물집이 생긴 사람이
영부선약을 3-4번 먹고 나았다고 한다.
또한 무릎이 아파서 걷지 못하는 분이 나았다고 한다.
영부선약뿐만 아니라 아픈 부위를
기도와 어루만짐으로 병이 나았다고 한다.
원암 이원벽은 사촌 시동생이 아팠는데
고침을 받고 장가도 가고 아이도 낳았다고 회고한다.
더구나 지성당 양이제는
정신병을 치유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
병자의 80-90%가 치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원암 이원벽은 지성당 양이제는 이 영부를
월남하기이전부터 받아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성당 양이제가 아무리 영부를 주려고해도
어떤 병자에 대해서는
영부가 내려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 용담주민의 말에 의하면
영부를 받으려 해도 ‘붓이 날아가서’
영부를 받지 못했다고 증언한 동덕도 있다.
이 점은 수운이 「포덕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영부의 효과는 한울님에 대한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나도 또한 그 말씀에 느끼어
그 영부를 받아 써서 물에 타서 마셔 본 즉
몸이 윤택해지고 병이 낫는지라, 바야흐로
선약인줄 알았더니 이것을 병에 써봄에 이르른 즉
혹 낫기도 하고 낫지 않기도 하므로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그러한 이유를 살펴본 즉
정성드리고 또 정성을 드리어 지극히
한울님을 위하는 사람은 매번 들어맞고
도덕을 순종치 않는 사람은 하나도 효험이 없었으니
이것은 받는 사람의 정성과 공경이 아니겠는가
부언하자면 “영부도
천주를 믿고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는
수심정기를 병행할 때라야
비로소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앞의 인용문에서 봤듯이
수운과 한울님의 첫 조우에서 한울님은
영부에 이어 주문을
포덕의 방법으로 직접 내려주고 있다.
주문은 초기에는
선생주문과 제자주문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나중에는 21자(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로 정리되어 규정된다
실제로 동학에서의 “주문은
‘주문공부’ 혹은 ‘주문수련’으로 통할 정도로
수도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문은 “초기동학의 핵심적인 가치와 내용을
정제된 언어의 형태로 압축하고 있는
고민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주문수련을 통해
“주문의 암송이 지닌 발화의 힘”은
한울님과 합일되는 경지로 이끄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경지는
일상적인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차원이라는 것으로 언급되곤 한다:
“언어의 의미를 발화행위를 통해
현재화하는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
주문의 수련이었다.
반복적인 주문의 암송은
내유신령과 외유기화의 신비를 자각하고
공감하게 하는, 다시 말해 시천주를 체험하게 하는,
마력이 깃든 수련이었던 것이다.”
지성당 양이제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수도의 왕 독신교인”이라고
자타 공인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성당 양이제는 평생을 매일 청수를 모시고
기도 중심의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삶의 모든 순간 한울님 뜻에 순명했다.
통상적으로 기도시간은 새벽 5시와 오후 9시 인데
용담지역의 사람들은 지성당 양이제는
오전 11시에도 빠짐없이 기도를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새벽 기도 시에
비록 겨울일지라도 자주 찬물로 세수, 목욕하고
청수를 모셨다고 한다.
용담교구의 주암 이원주는 어렸을 적을 회고하면서
‘잠을 자다가 소리에 눈을 떠보면’
할머니들(지성당 양이제 및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한 여성동덕들)이
“21자 주문과 신사주문 말고도
몇 가지 주문”을 외우셨고
더불어 “참회문”도 자주 외우셨다고 회고한다.
지성당 양이제의 신앙은
철저한 기도를 통한 수도로 점철된다. 즉
‘수도’를 강조했던 지성당 양이제는
10대의 산중기도를 계기로 기도의 힘을 체험하고,
20대 때에는 3·7기도 49일 기도, 밤기도, 단식기도,
수마기도 등 다양한 기도를 해보았고,
30대 실명을 한 후 다시 기도의 힘으로
시력을 완전히 회복하는 체험을 한다.
월남한 후 50대 후반에 용담정으로 들어가서
일체의 육식을 금하고
다시 ‘독공수련 1000일 기도’를 한다.
이 기도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으나
기도 후부터 본격적으로 용담성지 일대를
포덕 전교한 것을 볼 때
한울님과의 교감의 체험을 배제할 수 없다.
양할머니 수도생활 기간 중에
한울님 계시 같은 그런 일도 많았지만
어려서부터 수도생활에 있어
허황됨은 금물이라고 철저한 교육을 받아 왔기에
어떠한 특수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예언 같은 계시가 있을 때는 침묵을 지키고
더욱더 수심정기하여
항상 자신을 조심스럽게 키워왔다고 합니다...
용담에 들어간 것도 사실은
한울님 명에 의하여 시행한 일이고,
도정 직을 넘긴 일도 모두 천명이었으며
순천명(順天命)의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지성당은 평생을
한울님의 교감 속에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용담의 포교와 그 후 최초의 여성 도정이 되었으며,
또 평생직인 도정 직을
80세에 다른 동덕에게 선수한 것은
모두 한울님의 명령에 따랐다는 것이다. 즉
삶의 계기마다 일상을 뛰어넘는 결정들에 대해
지성당 양이제는 순명하였다.
여기서 순명이라는 의미는 동학의 사상에서 볼 때
‘한울님 마음이 곧 내 마음’이라는 점으로
상기해볼 수 있으며
그녀의 굳건한 신앙에의 의지 표현일 수도 있다.
즉 “인간은 천주의 조화
즉 무위이화에 의해서 태어났기에
경천순천(敬天順天)을 행할 때 비로소
시천주의 내유신령·외유기화·각지불이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셋째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성당 양이제의 주문 암송은
한울님과의 감응으로 나타나고 이것은 곧
몸으로 표현되었다. 원암 이원벽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마당에서 시일식을 봉행할 때는
지금처럼 주문 세 번 외우고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주문을 외웠습니다.
그러다 보면 강령을 모시기도 했는데,
양이제 사모님이 강령 모시고
‘시호시호 이내시호 ~’ 하시면서
춤을 추기도 하셨습니다.
그 때 다 같이 강령을 모시면서 함께 춤을 추곤 했지요.
‘검가’ 외에도 양이제 사모님이 지으셨던
‘풍아가’라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내용은 보국안민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모였다 하면 그 노래를 하셨지요.
시일식에서는 주문을 외우면 강령을 모시게 되고
이것은 춤으로 이어지곤 했다고 한다.
즉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한울님과 혼연일체되는 체험을 하곤 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들은
수운이 추었다고 알려진 ‘검무’는 아니지만 어쨌든
‘검가’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고
지성당 양이제가 지은 ‘풍아가’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양이제의 한울님과의 감응의 경지를
가늠케 하는 것으로 짐작될 만하다. 그리고 특히
그 내용은 모두 ‘보국안민’이었다는 점 역시
놀랍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수운의 검무와
검가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운의 검무와 검가는
‘신성의 내적 충일’을 억누르지 못하고
밖으로 표현한 것이며 이것은 또한
‘서양을 막는 방편’ 즉 보국안민의 수단으로서
한울님이 수운에게 제시한 것이다.
수운 스스로 이 점에 대해서 체포 후
심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처음 배우기 시작할 때에
몸이 떨리며 신과 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느님이 내려와 “근래 바다에 배로 오가는 자들은
모두 서양인인데 검무가 아니고서는
그들을 막을 수 없다”고 하면서
곧 검가 1편을 전해주었습니다.
서양 도적이 나오면
주문과 검무로써 막으면 될 것이고,
장차 하느님의 도움을 얻으면 될 터인데,
어찌 돈, 양곡, 갑옷, 병기 등을
준비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어쨌든 검무는
“체력 단련이나 여흥을 돋우는 몸짓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운이 왕성하게 내리는 것을 표출하는
경건한 의례”이며, “초기동학도들과 함께
목검을 들고 검가를 부르며 거행한
집단적인 의례”였다는 점에서 높이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점에서 지성당 양이제는
수운의 검무, 검가에 대한 정신을
잘 상고하고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넷째, 수심정기의 수도방법을 통한
동학사상의 열정적 실천은 지성당 양이제를
‘양보따리’라고 칭하게 만들었다.
지성당 양이제를 한 마디로 표현해줄 수 있는 말은
도정, 종법사도 아닌 ‘양보따리’라는 호칭일 것이다.
이 말은 그녀에 대한 어떤 칭호나 수식보다
더 강렬하고 선명하게 그녀의 신앙 구현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학의 2대 교주 해월은
‘최보따리’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해월의 삶은 쉬임없이 일하는 하느님을 닮은
“동학적 생활 양식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해월은 언제 어디를 가든지
낮잠을 자거나 하는 등으로
무료하게 소일하는 경우가 없었다고 한다.
짚신을 삼거나 노끈을 꼬거나 하여
손을 놀리지 않았다고 한다. 할 일이 없을 때는
꼬았던 노끈을 풀어 다시 꼬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쉬시라고 말할 때 해월은
“하느님도 쉬지 않는데 사람이
하느님의 녹을 먹으면서 부지런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것”(천도교백년약사)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해월은 ‘
최보따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보따리 하나 지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동학을 알리면서
관의 지목도 피했다.
해월은수운 사후 관군이나 왜군을 피해 다니면서도
항상 스승인 수운의 경전을 보따리에 싸들고 다녔고
그로 인해 후일
수운의 가르침이 출판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관의 추적을 피해 다닌
해월의 발자취는 오히려
동학을 팽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관군의 추격에 의하여 도망 다니는 해월은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민들을 조직하여
접을 만들었다. 해월에 의하여
직접적·간접적으로 조직된 접들은
자율적·생명적 조직으로서 커 나갔고,
점차 상호간의 연대 관계도 넓혀나갔다.
접주제가 포제로 발전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동학의 이러한 양적 팽창에 있다.
지성당 양이제 역시 해월과 다르지 않게
경주에 있을 때 소지품을
보따리에 싸서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매일 쉬임없이 포덕을 하는 그녀는
자연히 ‘양보따리’라는 호칭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평소 “독공이불성자 미지유야
(篤工而不成者 未知有也_독실하게 공부해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니라 하신
해월신사 말씀을 유일한 신념으로
독공을 계속해 오신 지성당 양이제”를
‘최보따리’를 즉발적으로 연상시키는
‘양보따리’라고 불리었다는 점은
그 시사 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나가는 말
“용담정 일대에 포덕의 정성을 기울인 것은
교회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천도교 시원포: 90년의 발자취』에서
지성당 양이제를 한 마디로 압축적으로
소개하는 말이다. 무엇보다 지성당 양이제의 공적은
수운이 득도한 성지인 경주 용담지구 일대를 포덕하여
용담을 성지로 회복, 부활시켰다는 데 있다.
그리고 또한 그 일대에 포덕을 폄으로써
성지를 수호, 유지하는 데
지대한 공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지성당 양이제 혼자의 힘으로 결코 불가능한 것이며
용담 일대의 많은 동덕들의 협력으로 이룩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전교인의 감응을 이끌어냈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계기를 촉발시켰다는 점은
아무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수운을 따라 천일기도를 하고
영부선약으로 병을 고치고
포덕을 하여 ‘양보따리’라고 일컬어졌으며
천도교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곳에서
‘궁을촌’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업적에 비견하여
한 개인으로서의 지성당 양이제는 동학의 정신으로
자신의 온 생을 불태웠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동학·천도교의 정신을 체화하여
3·1독립운동뿐만 아니라 공산치하에서의
반공투쟁에도 참여하였다고 한다.
월남 후 지성당 양이제는 서울에 자녀들을 두고
용담정으로 내려간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기에 그녀는
자신의 일가족을 돌보는 일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용담정으로 들어가는 과감한 선택을 한다.
이러한 행동이 모두 한울님 뜻에 대한
순명이었다고 말하는 그녀의 믿음의 경지는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평가의 영역 너머에 존재한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저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지성당 양이제는 천도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천도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일생을 보면 철저히
근본적인 동학 정신을 잇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양이제는 수운의 주문, 영부 선약,
검가까지를 따르고 있으며, 해월을 닮아
‘양보따리’라고 불릴 만큼 포덕에 매진하였다.
또한 의암은 남녀평등과
젊은이의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의암 사상에 부응하여 양이제는 평양에서
내성단 및 내수단에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천도교의 문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와 같이 양이제의 삶은 철저히 동학인이었고
철처한 천도교도이었던 것이다.
양이제는 천도교 여성 최초의
도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도정 직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포덕한 결과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것은
그녀의 진정한 신앙적 능력이고
동학의 남녀평등정신을 몸소 실천한 것을
증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양보따리’ ‘녹두할머니’라는 호칭에서
그녀가 얼마나 강직하며 투사다웠는지,
그녀의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양이제가 이룩한 남녀평등의 선례를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는 면에서 아쉽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천도교 내에서 여성들이
지성당 양이제처럼 자신이 도정이 될 만큼
포덕을 하지 않았다는 점, 또는 각 포에서
여성에게 도정 직을 물려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내수도에 충실한 천도교 여성들은
남편을 보필하는 겸손한 내조자에 그친다는 점으로
조심스럽게나마 해석할 수 있다.
지성당 양이제가 처음 경주에 내려갔을 당시
용담절이라 칭하던 곳이 지금은
웅대하고 아름다운 용담정의 모습을 띄고 있다.
그러나 용담정을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시킨 주역,
지성당 양이제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더군다나 비교인들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은, 잊혀져가는 인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지성당 양이제를 재조명하는 것은 마치
잊혀져가는 우리 역사의 소중한 한 부분을 기억해내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작업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한 이와 같은 작업은 우리 민족의 정신을 되새기고
정체성을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사료된다.
종교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평가될 수 있다.
필자는 용담교구를 방문하여 시일식 후에 둘러앉아
양이제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주던 여러 동덕들의
선한 얼굴들에서 따스한 ‘양할머니’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양이제를 기억하는 분들이 생존해 계실 때
그 분에 대한 자료가 더
발굴 축적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필자는 되도록 객관적 입장에서 취합할 수 있는
자료의 한계 내에서 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
아쉬움이 있다.
지성당 양이제를 기억하는 분들의
많은 질정을 바라면서 여러 관점에서의
후속 연구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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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정(雲亭), 「모범여성 교역자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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