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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유학은 동이족의 마음을 담은 사상"
변형석 추천 1 조회 281 19.04.22 06: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유학은 배달겨레 마음 담은 사상
입력: 2007년 01월 29일 17:33:52
 
최근 ‘사서삼경강설’ 시리즈를 완간한 이기동 성균관대 교수는 28일 “유학은 우리 민족의 가슴을 공자의 손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밝혔다. 권호욱기자
“유학이라고 하면 중국 사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한국인의 마음을 공자가 정리한 게 유학입니다. 한국인의 가슴으로 들여다보면 그게 보입니다.”

‘사서삼경’ 역해(譯解·한글로 옮기고 설명을 다는 것)라는 방대한 작업을 끝낸 이기동 성균관대 교수(56·동양철학). 그는 최근 ‘서경강설(書經講說)’을 출간, 90년대 초반 ‘대학·중용강설’을 시작으로 ‘논어’ ‘맹자’ ‘시경’ ‘주역’으로 이어진 ‘사서삼경강설’ 시리즈를 완간했다. ‘사서삼경’ 해설집이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나온 것은 처음이다.

1985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교수는 국내 실정에 맞는 사서삼경 번역 필요성을 절감하고 87년부터 작업에 매달려왔다.

“한국 유학의 수준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지만 외국에 내놓을 게 없었습니다. 기존 책들도 외국 학자들의 설들을 정리하거나 원문을 직역한 거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이 유학의 중심임을 보여주겠다고 시작한 게 20년이 걸렸습니다.”

시리즈는 원뜻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저술됐다. 원문과 국역을 제시하되, 어려운 한자를 상세히 설명하고 자구의 문법 사항도 기술했다. ‘강설’에서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을 예로 들어 원전 내용을 해설했다.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비”된 데에는 이교수의 치열한 학문정신도 한몫 했다. ‘주역강설’을 집필할 때는 난해한 ‘주역’을 쉽게 이해하기 위한 ‘주역을 읽는 공식’을 만들어 냈다. ‘시경강설’을 준비할 때는 ‘시경’을 번역한 문장이 시가 되지 않으면 잘된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번역을 중단하고 시작(詩作) 연습에 들어가 시집을 내기도 했다. 그 학술적 성과를 인정받아 ‘논어강설’ ‘맹자강설’ ‘시경강설’ 등이 ‘교수신문’이 기획한 ‘최고 번역본’에 선정됐고, ‘시경강설’은 2006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인문학 부문)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인의 가슴으로 썼다”라고 자평(自評)했듯이 이교수는 사서삼경을 ‘한국인의 시각’으로 접근할 것을 강조했다.

한국인 고유의 시각으로 유학을 보면 한국인의 정서가 알맹이이고 그것을 한국인의 손으로 포장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한국인의 가슴으로 들여다보면, 공자의 핵심사상인 ‘인(仁)’은 바로 한국인, 즉 동이족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이때문에 사서삼경을 읽으면 한국인이 이해가 제일 빠르다고 주장했다. 사서삼경의 어순이 우리말 어순과 같은 게 굉장히 많다고도 했다. 이교수는 ‘사서삼경 읽기’를 강조했다. 유학이 우리 민족의 사상을 담은 만큼 “사서삼경을 읽고 유학을 아는 것이 우리의 장점을 계발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최근 정치나 교육 등에 어려운 점이 많은 건 우리의 정서를 모르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알고 거기에 맞는 정치와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 지름길이 바로 사서삼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는 최근 중국에선 공산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길을 ‘유학’에서 찾고, 기업인들이 논어와 주역을 읽는 등 ‘유학’ 바람이 불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인이 유학 중심의 경영 논리로 무장하면 감당하기 어렵다”면서 “우리도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공자에 대해 “법적으로 중국인이고 혈통은 동이계”라는 이교수는 다음 연구 과제로 공자의 ‘인’ 사상이 우리 민족의 사상을 정리한 것임을 논증하는 책을 쓸 계획이다. 한편 ‘사서삼경강설’ 시리즈는 내후년쯤 영역본으로 나올 예정이다

 

 

 

공자가 말한 대로 예의를 지키고, 부부유별, 군신유의 등 옛부터 착하게 맘 먹고 윤리를 지킨 민족은 동이족인 한국인 밖에 없다. 해서 동방예의지국이란 말도 나온 것이다.. 일단, 진짜 논어를 읽어보면, 공자가 어느 나라 출신이고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는 금방 알수 있다.

공자가 주장한 윤리를 지키면서 그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국인들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공자는 그러한 동이족의 사상을 그가 정리한것일 뿐이다.

이게 너무 길면, 고조선 관련서적을 하나 사서 고조선 사람들이 어떤 마음자세와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 읽어 보면, 바로 공자가 주장한 논어 대로 산 민족이 바로 고조선 사람들이였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의 정사 속에 남아 있는 고조선 사람의 삶과 공자가 말한 삼강오륜 같은 그러한 예절을 지키고 산 사람은 당시 고조선 사람밖에 없어서... 쥐나애들이 동이전이런데 다 기록해 놓았다

즉,, 고대 동이-고조선 사람들의 사상을 정리해 놓은것이 바로 공자의 논어 및 사서삼경이다.

쥐나 화하족은 그 민족의 역사도 동이보다는 훨씬 짧아 그런 사상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상(은)나라, 배달겨레 발해문명들의 후예

 

사기에 나오는 은(殷)은 본래 상(商)나라이다. 최근 중국학계와 정부는 ‘하상주 단대(斷代) 공정’에 따라 상나라의 연대를 확정했다.

즉 BC 1600년에 성탕(成湯)이라는 영웅이 하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으며, BC 1300년에 은으로 천도한 뒤 BC 1046년 주(紂)임금 때 주(周) 무왕에 의해 멸망했다. 은이라는 나라 명은 상왕조의 마지막 도읍 명칭인데, 주나라 사람들이 은으로 낮춰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상나라는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갑골문자를 발명했을 뿐 아니라 청동기 문명을 꽃피웠으며, 동양의 예제를 확립했다.

한자의 뿌리인 홍산문명의 한웅배달국 진서(眞書), 즉 녹도문자의 뒤를 이어 갑골문자가 만들어졌다. 

 

 

천하를 통일한 동이

상나라 시조인 설(契)은 요순 시절에 우(禹)의 치수를 도운 덕에 상(商)이라는 곳에 봉지를 받았다. 그래서 상이라는 나라 이름이 생겼다. 상토(相土·설로부터 3대)는 마차를 발명했으며, 그 세력을 ‘해외’에까지 넓혔다. 그리고 왕해(王亥·7대)는 비단과 소를 화폐로 삼아 부락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였다. 훗날 왕해는 유역(有易)이라는 마을에서 엄청난 환대를 받는다. 왕해의 아우 왕항(王恒)은 유역족을 대패시키고 그 족속의 재물을 빼앗았다. 세력을 넓혀간 상은 훗날 성탕이라는 영웅을 만난다. 탕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요리사 출신인 이윤(伊尹)을 재상으로 등용, 국세를 떨친다. 이 무렵 하왕조는 걸 임금의 학정 때문에 멸망기에 접어든다. 천하의 인심을 얻은 성탕은 도읍을 ‘박(毫)’으로 옮긴 뒤 드디어 11차례의 접전 끝에 하왕조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한다. 이때가 BC 1600년이다.

그 뒤에도 역마살이 끼였는지 하왕조 멸망 뒤에도 다섯차례나 도읍을 옮겼는데, 반경(盤庚)이 BC 1300년 은으로 천도한 뒤에야 완전히 정착했다.(웨난의 ‘하상주 단대공정’(일빛) 참조) 상은 은 천도 이후에도 12명의 왕이 254년 동안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우다가 멸망한다. 마지막 왕인 주왕은 나중엔 폭군이 되고 여성의 치맛폭에 싸여 천하를 그르쳤지만 “처음엔 총명하고 말재주가 뛰어났으며 그의 지혜는 신하의 간언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사기 은본기)”였다.

이 대목에서 기자는 자꾸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기록(삼국사기 백제본기)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양념으로 인용해보자.

“665년, (의자)왕은 궁녀와 함께 주색에 빠지고 즐기기만 했다. 좌평 성충(成忠)이 극력 간언하자 화가 난 왕은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는데….”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인지, 아니면 ‘승자의 전리품’이라는 역사의 기록이 되풀이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대목이다.

 

 

발해문명의 후계자

BC 6000년부터 잉태한 배달겨레 발해문명의 후계자였던 상나라의 문명은 대단했다.

 

도성은 국가의 중심이자 왕조의 위세를 나타내주는 상징이다. 그런데 상나라는 멸망 때까지 10차례가 넘는 천도가 있었으나, 흩어져 있는 도성의 규모는 만만치 않았다. 모든 상나라 도성이 판축기법으로 쌓은 점은 특기할 만하다.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관은 “자연적인 방어시설인 강변에 쌓은 점이라든지, 흙을 켜켜이 쌓아 조성한 이른바 판축기법으로 보면 기원 후 1세기 때부터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풍납토성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했다.

먼저 성탕이 세운 것으로 여겨진 허난성(河南省) 옌스(언사·偃師)상성의 궁전터는 그 규모가 19㎢에 달했다. 성탕은 하를 멸한 뒤 다시 허난성 정저우(정주·鄭州)에 도읍했는데(중정·仲丁 시기에 건립됐다는 설도 있다) 규모가 25㎢였다.

정저우 상성의 경우 궁전 내부에서는 100기 정도의 인골이 묻힌 구덩이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순장제도 혹은 사람을 제사에 바친 증거로 보인다. 외성에서는 중·소형 무덤이 100여기 확인됐다. 이 무덤에서는 력(격·솥의 일종), 작(爵·술잔), 분(盆·물과 술 담는 동이), 규( ·제사에 쓰이는 세발달린 가마솥), 언( ·시루), 존(尊·술그릇) 등이 대거 발굴되었다. 이곳에서는 노예들이 거주하면서 수공업을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 작업장이 확인되었다. 이는 상나라 시기에 노예제가 확립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또한 인쉬(은허·殷墟)유적의 발견은 뭇사람들의 시상을 자극할만한 한편의 대서사시 같다. 1899년 가을. 심한 학질에 걸린 왕이룽(왕의영·王毅榮·국자감 좨주)은 의사에 처방에 따라 ‘용골(龍骨)’이란 약재를 구입했다. 그런데 그는 약재에 뭔가 전서(箋書)와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금석학자인 그는 야릇한 흥분에 휩싸였다.

이것은 훗날 갑골문으로 확인되었다. 후술하겠지만 이 갑골이 허난성 안양센(安陽縣)의 샤오둔춘(小屯村)에서 집중 출토된 것을 파악한 중국학계는 1928년부터 본격 발굴에 들어갔다. 15차례에 걸친 발굴 끝에 2만4794점의 갑골이 발굴되었다. 상나라의 위대한 발명품인 한자의 원형, 즉 갑골문자를 발견한 것이다.

인쉬는 BC 1300년부터 BC 1046년 주왕이 분신자살할 때까지 상나라의 도읍지였으며, 254년간 이른바 은나라 시대를 이끈 곳이다. 망국의 한이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녹아있는 바로 그 인쉬…. 이곳에서는 갑골문자뿐 아니라 궁전터와 종묘유적, 그리고 왕과 귀족의 무덤떼가 고스란히 확인되었다. 이른바 인쉬에서는 100㎏이 넘는 청동기를 주조하던 주형(鑄型)이 확인되는 등 크고 정교한 청동기와 옥기가 대량으로 쏟아졌다. 발굴성과가 중국역사에 준 충격은 엄청났다. 전설상의 나라로 여겨진 상나라의 실체가 완벽하게 드러난 것이었다. 무엇보다 갑골문이 해독되면서 상나라의 역사가 사실(史實)이라는 것을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인쉬에서 발굴된 갑골. 갑골에 새겨진 문자(갑골문자)는 상나라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수수께끼의 열쇠

“이로써 상나라의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지. 상나라 사람들이 전쟁에 나서거나 큰 일을 치를 때는 그 길흉을 점쳤다는 것과, 신과 인간을 소통시키는 신권과 왕권의 복합왕국이었다는 것까지….”(이형구 교수)

 

짐승문양, 도철(괴수)문양 등 왕권과 신권을 상징하는 다양한 청동예기는 물론, 다양한 형태와 쓰임새가 자랑인 다양한 생활용기도 상왕조의 문화를 살찌웠다.

 

 

상나라 문화와 동이족과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이미 상나라가 차하이·싱룽와 문화(BC 6000~BC 5000년)-훙산문화(BC 4500~BC 3000년)-샤자뎬 하층문화(BC 2000~BC 1500년·고조선의 문화로 여겨짐)의 찬란한 발해문명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보았다. BC 1600년 무렵 발해문명의 일파가 남하하여 중원 하나라를 쓸어버린 뒤 천하를 통일한 나라가 상나라라고….

 

 

 상나라와 한민족(上)

 

 ㆍ상나라 귀족묘 출토 인골…한족 아닌 백의민족 모습

“(시조인) 설 현왕이 아들 소명(설로부터 2대)을 낳고 지석(砥石)에 거주했다.”(순자·성상편)

중국 문헌은 동이족인 상족(商族)이 중원으로 내려와 하나라를 멸할 때까지의 역사와 활동무대, 즉 시조 설부터 성탕의 상나라 건국(BC1600년)까지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던져놓았다. 중국 학계는 이 문헌기록을 토대로 다각적인 분석에 들어간다.

 

 

안양 인쉬에서 발굴한 상(은)나라 무덤. 노예로 추정되는 대량의 인골이 나란히 묻혀 있다. 순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부여의 습속과 같다.

옌산에서 백두산·헤이룽강까지

처음에 인용한 ‘순자 성상(荀子 成相)’편의 기록을 검토해보자.

“요(遼·랴오허를 뜻함)는 지석에서 나온다”는 내용이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편에 나온다. 이 내용을 주석한 가오유(高誘)는 “지석은 산의 이름이며 변방의 바깥에 있고, 요수(遼水·랴오허)가 그곳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고 했다.

즉 시조 설은 랴오허의 발원지인 지석에 살았으며, 지금의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츠펑(赤峰)시 커스커텅치(克什克藤旗) 부근이라는 것이다. 물론 ‘남쪽바다’는 발해이다.

또한 ‘여씨춘추 유시(有始)’편에는 “하늘에는 9개의 들이 있는데, 북방을 일컬어 현천(玄天)이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진징팡(김경방·金景芳)은 이 모든 문헌을 근거로 “설, 즉 현왕은 북방의 왕”이라 단정했다.

“상토(설로부터 3대)가 맹렬하게 퍼져, 해외에서 끊어졌다(相土烈烈 海外有截)”(시경·상송)는 내용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상토는 시조 설의 손자. 중국 학계는 이 기록을 토대로 상토 때 상족의 활동무대를 발해 연안으로 보고 있다. 상토는 무공이 매우 뛰어났으며, 마차를 발명하여 세력을 떨친 이다. 시조 설로부터 7~8대인 왕해(王亥)와 상갑미(上甲微) 때는 “하백(河伯)의 군사를 빌려 유역족(有易族)을 쳐 멸망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유역족은 이수이(역수·易水)에서 그 이름을 빌려왔으며,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이셴(역현·易縣) 일대이다. 상족이 초기에 이미 허베이성 이셴까지 세력을 떨쳤다는 것이다.

고고학자 쑤빙치(소병기·蘇秉琦)는 “은(상)의 조상은 남으로는 옌산(연산·燕山)에서 북으로는 백산흑수(백두산과 헤이룽강)까지 이른다”고 단언했다.

또한 그 유명한 안양 인쉬(殷墟) 유적 발굴을 총지휘했던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은 일찍이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동북으로 갔다”고 단정했다. 중국 학계도 이런 쑤빙치와 푸쓰녠의 관점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1970년대 이후 발해 연안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발굴 성과가 이 같은 학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인쉬(은허) 인골의 비밀

상나라 사람들과 발해 연안의 친연관계는 인종학의 지지까지 받고 있다. 인골전문가인 판지펑(반기풍·潘其風)은 인쉬(은허)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들을 분석했는데 아주 의미심장한 결과를 얻어냈다.

 


“인쉬 유적에서는 상나라 귀족들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발굴된 대다수의 시신들이 동북방 인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어요. 인골들의 정수리를 검토해보니 북아시아와 동아시아인이 서로 혼합된 형태가 나타난 거지.

 

 또하나, 인쉬(은허) 발굴자들이 인정했듯 상나라 사람들이 동북방의 신앙을 존숭했다는 것이다. 즉 상나라 왕실에서 고위층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동북방향을 받들었는데, 이는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와 숭배를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다.

결국 이 모든 중국 문헌과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로 미루어 보면 BC 6000년(차하이·싱룽와 문화)부터 시작된 발해문명의 창조자들이 그 유명한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를 거쳐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BC 2000년 무렵~BC 1500년·즉 고조선 시기)를 이뤘다.

그리고 상나라의 시조 설은 차하이·싱룽와 문화-훙산문화의 맥을 이은 발해문명의 계승자로서, 샤자뎬 하층문화의 주인공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설과 그의 손자 상토, 그리고 7~8대인 왕해와 상갑미 대를 거치면서 발해문명의 계승자들은 남으로 뻗어갔으며, 급기야 BC 1600년 무렵 중원의 하나라를 대파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그런 이유로 중국 학계는 단순히 상나라의 선조가 동북민족과 관련이 깊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냥 ‘연나라의 옛 땅’이라는 군색한 표현으로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누누이 강조했듯 상나라를 이룬 동이족, 그 가운데서도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 등 우리의 역사를 이룬 우리 민족과는 강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


의미심장한 부여

이제부터는 상나라와 동이, 그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과의 친연성을 차근차근 다져보자. 먼저 시조설화.

“(목욕을 갔던) 간적이 제비알을 삼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설(契·상나라의 시조)이다.”(사기 은본기)

“북이(北夷)의 탁리국(탁리國) 왕이 출행했는데, 왕의 시녀가 후에 임신했다. 왕이 시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전에 하늘 위에 기를 보았는데, 큰 계란 같았다.’(혹은 닭처럼 생긴 것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시켰다) 이 왕이 시녀를 가두었는데, 뒤에 남자아이를 낳았다.~ 그 이름을 ‘동명’이라 했다. ~동명은 ‘부여’에 이르러 왕노릇을 했다. 곧 부여의 시조이다.”(후한서 동이전 부여조·논형 길험편 등)

“옛날 시조 추모왕이 창업의 기초를 열었다. 추모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었다. 알에서 태어나 세상에 나오니 성덕이 깊었다. 이는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광개토대왕릉비)

재미있는 신화의 공통점이다. 상(은)나라의 시조신화와 부여·고구려 등 동이족의 신화가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중국학계도 “새알을 삼켜 탄생하는 이른바 난생신화는 (중원이 아니라) 동북아 민족의 공통분모”(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라고 인정한다.

“하늘이 현조(玄鳥·제비)에 명령해 상나라 조상을 낳아 넓디넓은 은땅에 살게 했다”(시경 상송 현조·詩經 商頌 玄鳥)는 기록은 상나라와 새의 깊은 관계를 웅변해준다.

고조선과 발해문명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으므로(경향신문 1월26일자 ‘고조선과 청동기’ 참조) 생략한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고구려와 백제의 ‘조상’인 부여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다. 고조선과 달리 중국측 문헌자료도 풍부하기에 논란의 여지는 적어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부여에 관한 중국사서와 우리측 문헌인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우선 중국 위·촉·오 등 삼국시대의 정사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와 중국 후한의 정사를 기록한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유송의 범엽이 5세기 무렵 저술), 그리고 당태종의 지시로 편찬된 진서(晋書) 동이전 등 중국측 사료를 종합해보자.

 


“(부여의 땅은) 동이의 땅 가운데 가장 좋은 곳이다.~사람들은 거칠고, 씩씩하고 용맹스러우며 근실하고 인후해서 도둑질이나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활과 화살, 창, 칼로 무기를 삼으며~음식을 먹는 데 조두(俎豆·제기)를 썼고, 모일 때에는 벼슬이 높은 이에게 절하고 잔을 씻어 술을 권했다. 또한 읍을 하고 사양하면서 오르내린다. 은(상)나라의 정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以殷正月祭天) 나라의 큰 모임이다. 연일 음식과 가무를 하는데(連日飮食歌舞), 이를 영고(迎鼓)라 한다. 흰색을 숭상하고 해외에 나갈 때는 비단옷 입기를 숭상한다. 밤낮 길을 가며 노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니 종일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군사를 일으킬 때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소를 잡아 그 굽을 보아 길흉을 점쳤다.(소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모이면 길하다)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숫자가 많을 때는 100명이 되었다. 남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부인은 베옷을 입고 목걸이와 패물을 떼어놓으니 이는 대체적으로 중국과 비슷한 면이 있다.(大體與中國相彷彿也)”

글귀마다 숨어있는 뜻이 굉장히 의미심장하므로 다소 장황하게 인용했다. 상나라의 그것과 너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은나라 역법을 쓴 이유는

“부여가 은(상)나라 달력을 써서 은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대목이지. 역법(曆法)이라는 것은 왕권국가의 상징이에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어김없이 역법을 바꾸어 새 왕조가 천운에 따랐음을 나타냈어요.”(이형구 교수)

역법이 왕권과 국가의 상징일진대 부여가 하·주·진의 역법이 아니라 상나라의 역법을 썼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다.(이형구의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참조)

하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BC 1600년) 상나라 성탕은 바로 상나라의 역법을 새로 만든 것 외에도 옷색깔(복색)을 바꿔 흰색을 숭상했다.

“하나라는 흑색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흑마를 탔고, 제사 때는 흑생 희생물을 바친다. 은나라는 백색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백마를, 제사 때는 흰색을 바친다. 주나라는 적색을 숭상했는데~.”(예기 단궁상·禮記 檀弓上)

이것은 앞서 언급한 부여의 습속, 즉 “부여가 ‘흰색’을 숭상했다”는 사료와 일치한다. 이뿐이 아니다.

상나라 마지막 왕 주(紂)왕은 온갖 악행으로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랬다면 물론 나쁜 짓이지만, 한번쯤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 “주왕은 수많은 악공들과 광대들을 불러놓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놓고는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놀았다.”(사기 은본기)

이 대목에서 “(부여에서는) 음식과 가무를 즐기고, 노인과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종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료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상나라와 한민족(中)

 

ㆍ은·부여는 ‘君子의 후예’ 풍류 즐기고 禮 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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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마지막 왕 주(紂)의 악행에 대해 변명할 필요는 없다.

충신의 심장을 갈랐고, 육포를 뜨고 젓을 담가 맛보게 했으며, 녹대(鹿台)를 만들어 세금으로 거둔 돈을 가득 채웠으니까. 폭군은 더 나아가 수많은 악공과 광대들을 불러놓고 주지육림의 난행을 펼쳤다.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 것으로도 악명을 떨쳤다.(사기 ‘은본기’)

 

안양 인쉬 거마갱(車馬坑)에서 발굴된 마차유적. 은(상)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다.


 

-주(紂)왕을 위한 변명-

주왕의 악행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지만 “악공과 광대를 불러놓고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 일”에 대해서는 다소간 할 말이 있다. 바로 음주가무야말로 상나라 풍습의 영향을 받은 우리 민족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은나라 정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음식과 가무를 즐겼다(連日飮食歌舞). 밤낮으로 길을 가다가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종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는다”(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는 부여 풍습이 대표적이다. 마한도 그랬다.

“(5월이면) 파종을 마치고 신령께 굿을 올린 뒤 무리가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는데 밤낮으로 쉼이 없다.(群醉歌舞飮酒 晝夜無休).”(삼국지 위지 동이전 마한조)

이는 왜 현재 우리나라 전국에 4만여곳의 노래방이 성업 중인지를 설명해주는 근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아무런 생각 없이 음주가무를 즐겼던 것일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보듯 우리 민족은 무절제한 음주가무가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며칠씩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놀았다.

그것은 천·지·인이 만나 한바탕 신명을 떨친 축제였다. 천지신명과 조상에게 만물의 소생을 기원하고 추수감사를 드리는 전통축제였던 셈이다. 조흥윤 한양대 교수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축제를 벌인 것이 바로 굿이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고조선 시기 순장무덤인 랴오둥반도 강상무덤.

“삼국시대 화랑도·풍류도와 고려시대 연등회·팔관회 등은 종교행사 형식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음주가무를 포함한 옛 제천의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무(巫)와 불교를 억압한 조선 때 크게 위축되었지만 신명과 음주가무라는 한국인의 민중문화는 면면히 이어졌다.”(조흥윤의 ‘한국문화론’ 동문선)

그렇다면 주왕의 난행은 어찌된 것인가. 동이족의 나라 은(상)을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 이들은 의도적으로 은나라와 주왕을 무도한 나라, 그리고 천하를 난도질한 망나니로 폄훼했다. 사마천의 사기는 조작, 날조를 위해 기록한 승자의 역사인 셈이다.

일례로 축제 때 젊은 남녀들을 ‘풀어놓아’ 짝을 짓게 만드는 풍습은 지금도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을 조사한 민족지 연구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자료이다. 고대사회에서 이런 정도의 축제는 흉볼 ‘깜’도 안되는 자연스러운 풍습이다.

 

 

-동이는 군자의 나라, 불사의 나라-

그리고 은(상)나라가 무도하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탐사단이 추적해왔듯 이른바 동이족의 본향인 발해연안은 BC 6000년 전부터 문명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다. 발해문명의 창조자들은 이미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BC 4500~ 3000년) 때 하늘신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지난해 7월 말 뉴허량 유적에 선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이미 이곳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의 제사유적과 뉴허량(우하량·牛河梁)의 여신묘와 적석총에서 봤잖아요. 하늘신, 지모신에게 제사지내고, 그리고 적석총에 마련된 제단에서 조상을 기린 그런 모습들을 그릴 수 있잖아요. 웅녀의 원형이 뉴허량 여신묘에 그대로 나타나잖아요. 그리고 적석총 제단은 지금으로 따지면 조상에 대한 시제를 올리는 성스러운 장소라고 봐야 합니다.”

이교수는 “발해문명 창조자의 일파가 서쪽으로 남하해서 건국한 상나라에서는 제천(祭天), 즉 하늘에 대한 제사와 조상에 대한 제사(祭祖)가 확립된 시기였다”고 말한다. 중국학자들도 훙산문화 시기에 벌써 신권과 왕권이 합쳐진 제정일치 시대가 개막되었다고 본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부여인의 얼굴.

그런 점에서 동이족의 나라 은(상)을 극악무도한 나라로 폄훼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후한서’ 동이열전(5세기 유송의 범엽이 저술)과 ‘설문해자’(說文解字·후한 때 허신·許愼이 펴낸 최고의 자전)를 종합해 보자.

“동방은 이(夷)이며, 이는 근본이다. 만물이 땅에서 나오는 근본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다. 천성이 유순하다. 군자의 나라요, 불사의 나라이다. (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 不死之國焉) 때문에 공자는 ‘중국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의 나라인 구이(九夷)에 거하고 싶다’(故孔子欲居九夷)고 말했다.”

‘후한서’ 동 이전과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동이의 역사를 나열하기 전 ‘서론’ 형식으로 쓴 전언(前言)에서 이렇게 칭찬하고 있다.

“동이는 모든 토착민을 인솔하여 즐겁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그릇은 조두(俎豆·제기)를 쓴다. 중국에서 예를 잃어버리면 사이(四夷)에서 구한다는 것은 믿을 만 한 일이다. (중국) 천자가 본보기를 잃으니 이것을 사이에서 구했다.”



“난 은나라 사람이다.”(공자의 고백)

동이가 예(禮)의 민족임을 중국사료도 인정한 것이다. 그뿐이랴. 만고의 성인인 공자도 동이족의 후예였음을 고백했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다. ~장사를 치를 때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지만 은(상)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젯밤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予始殷人也)”(사기 공자세가)

죽음을 앞둔 공자의 생생한 육성유언이었다. “주나라가 하나라와 은나라의 제도를 귀감으로 삼았기에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던 공자. 하지만 그런 공자도 군자의 나라이자 불사의 나라인 동이로 가고 싶다고 했다. 결국 죽음에 이르러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음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은나라 주왕 때 세 명의 성인이 있었다.

바로 훗날 기자조선을 세운 기자(箕子)와 송나라를 세운 미자(微子), 그리고 주왕에게 심장을 도륙당한 비간(比干) 등이다. 미자는 주왕의 서형(庶兄)이었다.

은을 멸한 주나라는 미자에게 은(상)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미자는 ‘미자지명(微子之命)’을 지어 뜻을 알리고는 송나라를 건국했다. 그런데 공자는 바로 그 송나라 귀족의 후손이었다. 공자는 동이족의 후예답게 어릴 때부터 타고난 듯 예법을 따랐다.

“소꿉장난을 할 때 늘 제기(祭器)인 조두(俎豆)를 펼쳐놓고 예를 올렸다.”(사기 공자세가)

‘조두’에서 조(俎)는 제사지낼 때 편육을 진설하는 도마처럼 생긴 제기이고, 두(豆)는 대나무·청동·도자기 등으로 만든 제사지낼 때 음식을 담는 그릇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조두라 하면 제기를 뜻한다. 공자는 만능 뮤지션이었다. 동이의 후예다웠다.

때는 바야흐로 춘추시대 말기. 세상이 어지러워져 자신의 숭고한 뜻을 알아주지 않자 거문고를 뜯고, 경(磬·돌 혹은 옥으로 만든 타악기)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안타까워했다. 음악에 대한 공자의 철학은 심오했다.

“감정이 소리에 나타나 그 소리가 율려(律呂)를 이루면 그것을 가락이라 한다. 세상의 가락이 편안하고 즐거우면 화평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의 가락은 슬프고 그 백성은 고달프다.”

우리 민족의 무용·문학·음악 등 예술의 바탕에 공자의 음악철학이 깔려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순장제도의 실상-

 

목 없는 순장자들의 유골.

중국학계는 또한 은나라의 습속인 순장(殉葬)제도를 야만성과 연결짓기도 한다. 은(상)의 말기 도읍지인 안양(安陽) 인쉬(은허·殷墟)의 제1001호 대묘에서 확인된 360명의 순인(殉人)의 예를 들면서….

중국의 황잔웨(황전악·黃展岳)는 “순장과 같은 야만적인 습속은 은나라 통치세력권에서 성행한 것으로 은의 동방 회이와 동이 지역에서 널리 유행했다”고 비난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63~65년 랴오둥 반도 강상(崗上)·러우상(樓上)유적에서는 100여명, 수십명을 순장한 고조선시기의 순장무덤이 발굴된 바 있다. 그리고 “부여에서는 사람을 죽여 순장했는데 많을 때는 100여명이 된다”(삼국지 위지 동이전)고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를 보면 “248년 왕이 죽자 순사하는 자가 많아 이를 금지하도록 했지만, 그래도 속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신라는 지증왕 3년, 즉 502년에 비로소 순장제도를 금지했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 목공이 죽었을 때 무려 177명을 순장시킨 기록도 있다. 순장은 고대사회에서 유행한 장례풍습이었다. 진시황이 죽었을 때는 1만여명을 생매장했으며, 명나라 성조가 죽자 무려 3000여명의 비빈이 순장됐다.

이형구 교수는 “순장제도는 전제적인 지위와 통치권을 갖춘 통치자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라면서 “동이의 습속이 야만적이냐 아니냐는 단순논리로 순장제도를 해석하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여와 은(상)의 끈질긴 인연-

중국사서를 들춰보면 눈에 띄는 점이 나오는데, 그것은 ‘부여’를 늘 맨처음에 올려놓고는 돋보이게 기술한다는 점이다.

진서(晋書·당태종 때 지은 진왕조의 정사)를 보면 “부여 사람들은 강하고 용감하며 모임에서 서로 절하고 사양의 예로 대하는데 중국과 같은 것이 있다(會同揖讓有似中國)”면서 중국과의 친연성을 강조한다.

“오랑캐의 나라지만 조두(俎豆)를 사용하여 음식을 먹고~, 풍습이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大體中國如相彿也)”(삼국지 위지 동이전)는 기록도 무시할 수 없다. 조두는 바로 공자가 어릴 때 소꿉장난을 했던 제기가 아닌가.

물론 중국측 기록으로 따져봐도 부여가 BC 3세기쯤부터 494년 고구려에 병합될 때까지 700년이나 이어진 강력한 왕국이었기에 비중있게 다뤘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의 친연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을 보면 은(상)으로부터 이어진 끈질긴 인연의 끈이 작용한 게 아닐까. 부여, 즉 우리 민족과 은(상)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단서가 또 있으니 바로 점복신앙, 즉 갑골문화이다.

 

 

 

상나라와 한민족(下)

 

 

ㆍ‘갑골문화’ 동이족이 창조 한자는 발해 문자 였을까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빛바랜 논문 한 편을 꺼냈다. 1981년 국립 대만대 유학 시절 작성한 중국어 논문(‘渤海沿岸 早期無字卜骨之硏究’)이었다. 그는 논문 뒤편에 쓴 후기(後記)를 보여주며 추억에 잠겼다.

“여기 후기에 ‘내가 병중에 초고를 완성했다(病中完成草稿)’고 했어요. 이 논문을 쓰기 시작할 무렵 대장암 진단을 받았거든. 의사가 수술을 빨리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죽기 전에 이 논문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 수술 날짜도 받지 않고 한 달 동안 밤을 새워가며 신들린 듯 논문을 완성했지. 그리곤 곧바로 다른 병원으로 달려가 재진찰을 받았는데, 아 글쎄 오진이라잖아요.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갑골문화는 동이의 지표

 

안양 샤오툰춘에서 나온 갑골과 갑골문자. 갑골문화는 발해문명권의 독특한 문화였다.

27년 전에 쓴 사연 많은 논문은 갑골문화와 우리나라 갑골문화의 관계를 처음으로 다룬 것이다. 논문은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이 발행하는 ‘고궁계간’(81~82년)에 3회 연재되었다. 우리의 국사편찬위원회격인 대만 국립편역관이 펴낸 갑골학의 교과서인 ‘갑골문과 갑골학’(張秉權·장빙취엔)도 이 교수의 논문을 갑골의 기원을 가장 잘 논증한 논문으로 평가했다.

“그때까지 갑골문화라 함은 은(상)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로만 여겼거든. 내 은사이자 안양 인쉬(은허·殷墟) 유적을 발굴한 스장루(石璋如)·리지(李濟) 선생은 물론, 대륙의 후허우쉬안(胡厚宣) 선생 등도 모두 갑골문화의 원형을 황화 중류와 산둥반도에서 찾았어요.”

하지만 이형구 교수는 달랐다. 유학 초기부터 발해문명에 깊이 연구해왔던 이 교수가 아니던가.

“갑골문화의 분포지를 유심히 살피니 발해연안, 즉 동이족의 영역에 집중되고 있더군요.”

이 교수의 말마따나 “갑골문화는 동이족의 문화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갑골(甲骨)은 복골(卜骨)이라고도 하는데 귀갑(龜甲·거북의 배 부분)이나 동물의 견갑골(어깨뼈)로 점을 치는 행위(占卜)를 말한다. 즉 거북이나 짐승뼈를 불로 지지면 뒷면이 열에 못이겨 좌우로 터지는데, 그 터지는 문양(兆紋)을 보고 길흉을 판단한다. 한자의 ‘卜’은 갈라지는 모양을 표현한 상형문자이다. 또한 발음이 ‘복’(한국발음), 혹은 ‘부(중국 발음)’인 것도 터질 때 나는 소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점복은 왕이 주관했으며 길흉을 점친 것을 판정하는 사람을 정인(貞人)이라 했다. 은말(제을~주왕·BC 1101~BC 1046년)에는 왕이 직접 정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貞자를 잘 뜯어봐요. 맨 위에 卜자가 있고 그 밑에 눈 目자, 맨 밑에 사람 人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것은 점(卜)을 보는(目)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점을 친 뒤에는 질문 내용과 점괘, 그리고 실제 상황과 맞아 떨어졌는지를 기록한다. 가장 오래된 월식사실을 기록한 은(상)의 무정(武丁·BC 1250~BC 1192년) 때의 갑골을 보자.

“癸未卜爭貞 旬無禍 三日乙酉夕 月有食 聞 八月(계미일에 정인 쟁이 묻습니다. (왕실에) 열흘간 화가 없겠습니까? 3일 뒤인 을유년 저녁에 달이 먹히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여덟번째 달에).”(김경일 교수의 ‘갑골문 이야기’, 바다출판사)

이렇게 점을 친 뒤 갑골판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꿰어놓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책(冊)이 아닌가. “오로지 은(殷)의 선인들만 전(典)과 책(冊)이 있다”는 “상서(尙書) 다사(多士)”편은 옳은 기록이다.



점복의 나라, 예법·효의 나라

이렇게 은(상) 사람들은 하늘신과 조상신, 산천·일월·성신 등 자연신을 대상으로 점을 쳤다. 국가대사에서 통치자의 일상 사생활까지, 예컨대 제사·정벌·천기·화복·전렵(田獵)·질병·생육까지….

 


“점복 활동과 관계된 기록을 복사(卜辭) 또는 갑골문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갑골문화야말로 발해문명, 즉 동이족이 창조한 문명의 상징이지. 갑골문을 보면 ‘선왕선고(先王先考)’, 즉 조상에게 제사 지냈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결국 동방의 예법과 효 사상은 발해문명 창조자인 동이가 세운 전통이라 보면 됩니다.”(이형구 교수)

사실 하늘신과 조상신에 대한 끔찍한 사랑은 동이족만의 특징이었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보이는 신전과 적석총, 제단 등 3위 일체 유적은 바로 하늘신·지모신·조상신에 대한 사랑을 표시한 예법의 탄생이자, 제정일치 사회의 개막을 상징한다.

그리고 점복신앙과 갑골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형구 교수가 갑골문화의 기원을 발해연안에서 찾은 이유다.

“군사를 일으킬 때 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소의 굽으로 출진 여부를 결정했다. 그 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부여·고구려의 점복기사는 삼국지 위지뿐 아니라 후한서와 진서(晋書) 등 중국사서에 차고 넘친다. 신라의 경우엔 아예 왕과 무(巫)가 동일시되기도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조 기록을 보자.

“(2대) 남해 차차웅(次次雄)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이 말하길) 방언에 이르길 무(巫)라 일컬었다. 세인들이 귀신(조상을 뜻함)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므로 이를 두터이 공경하고, 존장자를 칭하여 자충(慈充)이라 했다.”

그런데 ‘차차웅’ 혹은 ‘자충’을 방언으로 ‘무(巫)’라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월식사실이 기록된 은(상) 무정(BC 1250~BC 1192년)시기의 갑골내용. 점을 친 정인의 이름과 점복내용, 실제 일어난 일 들이 기록됐다. | 김경일 교수의 ‘갑골문 이야기’에서

“한자음으로는 차차웅(츠츠슝)이나 자충(츠충)이 매우 비슷하다. 또 점복의 목적과 결과를 말하는 ‘길흉(吉凶·지슝)’과도 유사하다. 길흉의 한자음을 표음해서 차차웅 또는 자충이라 하지 않았을까.”(이형구 교수 ‘문헌자료상으로 본 우리나라 갑골문화’ 논문 중에서)

그럴듯한 해석이다. 점복신앙의 단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 시조설화에서도 엿보인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龜何 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유명한 내용인데, 이 교수는 “끽(喫)자는 구워먹겠다는 뜻이 아니라 점복에서 불로 지지는 행위를 뜻하는 계(契)자가 와전됐거나 가차(假借)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불변을 뜻하는 계(契)자는 갑골에 새긴 문자 혹은 불로 지져 터진 곳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헌만 있고, 증거가 없으면 모든 소용인가. 고고학 자료를 보자.

 


갑골의 원류는 발해

우선 발해 연안. 1962년 시라무룬(西拉木倫) 강 유역인 네이멍구 자치구 바린쭤치(巴林左旗) 푸허거우먼(富河溝門) 유적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갑골이 나왔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는 갑골 외에도 동이족의 대표 유물인 지(之)자형 빗살무늬 토기가 공반되었다. 연대는 BC 3500~BC 3000년이었다. 이 연대는 중국·대만학계가 갑골문화의 원조로 보고 있던 허베이(河北)·허난(河南)·산둥(山東)반도의 룽산문화(龍山文化·BC 2500~BC 2000년)보다 1000년 이르다. 또한 고조선 문화에 해당하는 발해연안의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 유적에서도 갑골이 흔히 발견된다. 츠펑 즈주산(蜘蛛山)·야오왕먀오(藥王廟) 유적, 닝청(寧城) 난산건(南山根) 유적, 베이뱌오펑샤(北票豊下) 유적 등에서도 다량의 갑골이 나왔다. 물론 이 유적들의 연대는 상나라 초기 갑골이 출토된 유적보다 이르다. 갑골의 재료도 거북이가 아니라 사슴과 돼지 같은 짐승뼈를 사용했다.

갑골문화는 은(상)의 중기~말기, 즉 무정왕~주왕(BC 1250~BC 1046년) 사이에 극성했다. 글자가 있는 갑골, 즉 유자갑골(有字甲骨)도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모두 글자 없는 갑골, 즉 무자갑골(無字甲骨)이었다. 대부분 발해 연안에서 나타난다.

“또 하나 갑골의 분포도를 보면 재미있어요. 발해 연안에서 갑골 재료로 주로 쓴 것은 사슴과 양이었는데, 시대가 흐르고, 또한 남으로 내려오면서 소가 많아지거든. 이것은 시대와 사회가 농경사회로 급속하게 변했음을 알려주는 거지. 또 하나 발해문명 사람들이 기후가 온화한 중원으로 갑골문화를 대동하고 남천(南遷)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고….”

그런데 발해 연안에서 태동한 갑골문화가 중원으로만 확산된 게 아니었다. 1959년 두만강 유역 함북 무산 호곡동에서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형구 교수가 81년 처음 논문을 쓸 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갑골문화와 한반도

“왜 한반도에는 갑골이 보이지 않는지 정말 궁금했어요. 갑골문화는 일본 야오이(彌生)시대와 고훈(古墳)시대에도 보이는 현상인데 왜 한반도에는 없을까. 같은 동이족의 발해문명문화권인데….”

그런데 ‘병중 논문’의 초고를 완성, ‘고궁계간’에 송고한 뒤, 81년 가을 귀국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 교수에게 한 편의 보고서가 전달됐다.

“이 교수가 좋아할 대목이 이 보고서에 있어요.”

당시 동아대 정중환 교수가 건넨 것은 ‘김해 부원동 유적’ 보고서였다. 이교수는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

“아! 학문을 한다는 게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지 실감한 순간이었지. 그 보고서에 바로 내가 그토록 찾던 복골의 존재가 있었거든. AD 1~3세기에 한반도에서도 갑골문화가 있었던 것을 확인했으니….”


이후 봇물이 터졌다. 김해 봉황동 유적과 사천 늑도, 전남 해남 군곡리 패총, 경북 경산 임당 저습지와 전북 군산 여방동 남전패총 등에서 갑골이 속출했다. 수 천 년 전부터 점복과 굿을 좋아했던 사람들. 지금도 20만명에 이르는 무당과, 30만명에 달하는 역술인들이 성업 중인 ‘별난’ 나라, ‘별난’ 민족의 전통은 이토록 뿌리깊은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그렇다면 동이족이 한자를 창조했다는 말인가.

“발해문명 창조자인 은(상) 시대에 갑골문자가 창조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하지. 하지만 아직 연산산맥 동쪽이나 한반도에서는 문자가 있는 갑골이 나오지 않았으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죠. 발해문명 창조자들인 동이족이 남으로 내려가 중원문화와 어울려 함께 한자를 창조했다고 정리하면 되지 않을까….”

 

 

 

 

 

집요한 `역사공정` [중앙일보]

 

이젠 한반도 문화 뿌리까지

 

중국이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뿌리로 알려진 랴오허(遼河)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자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노력을 가속하고 있다. 선사(先史)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기존 학계가 주장해온 황허(黃河)와 창장(長江) 유역에서 여타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이른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에 따른 것이다.

17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국가문물국은 랴오닝(遼寧)성 뉴허량(牛河梁) 신석기 유적 등 35개를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할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 목록에 포함했다.

국가문물국은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예비 목록을 수정해 제출하도록 한 '세계문화.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1996년에 이어 이번에 목록을 수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뉴허량 유적을 랴오허 유역에 분포한 북방 신석기 문화의 대표적 유적의 하나로 분류해 왔다. 랴오허 일대 문화는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원류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돼 왔다.

이번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이들 문화의 원류인 랴오허 일대의 북방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 사학계는 황허와 창장 유역을 중국문명권으로 분류하고 랴오허 일대는 중국문명과 뿌리가 다른 북방문명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올해 선양(瀋陽) 박물관에서 '랴오허 문명전'을 여는 등 일련의 역사 왜곡을 진행하면서 북방문명을 중화문명권에 편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새로 작성한 예비 목록에는 뉴허량 유적 외에도 ▶대운하(大運河)▶실크로드▶장경동(藏經洞)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渤海)진에 있는 옛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은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목록에서 빠져 당분간 신청이 어려울 전망이다. 예비 목록에 오른 유산 중에서 2008년 32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 등재 신청할 유산이 최종 선정된다.

장세정 기자

◆ 뉴허량 유적=랴오닝성 링위안(凌源)시 젠핑(建平)현 근교에서 1981년에 발굴된 신석기 유적. 북방 신석기 문명(기원전 7000년)의 하나인 훙산(紅山)문화에 속하는 유적으로 황허 유역의 중원 신석기 문명보다 일찍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랴오허강 일대에 기원전 3500년 무렵에 형성됐다. 섬세한 옥기(玉器)와 돌무지무덤(적석총) 등이 발견됐다. 특히 흙으로 빚은 여신의 두상(頭像)은 전형적인 몽골 계통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중원문명과 확연히 구별된다.

◆ 탐원공정=상고사를 고쳐 써서 선사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확대할 목적으로 중국 당국이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에서 황허문명(기원전 3000년)보다 더 일찍 발생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당국이 이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온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를 편입하면 중국문명이 기원전 1만 년까지 올라간다. 현재의 정치 사정에 맞춰 역사 왜곡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06.12.18 04:26 입력 / 2006.12.18 07:00 수정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동북쪽에 紅山(홍산)이라는 산이 있다. 몽골사람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 이 붉은 바위산 인근에서 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적석총(塚) 등 거대한 후기 신석기 문화가 발견됐다. 100여년 전의 일이다.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 하북성 경계의 燕山(연산) 남북, 만리장성 일대에 널리 분포된, 국가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 유적을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홍산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1906년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 등을 발견했는데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다. 1955년 이를 ‘홍산문화’로 이름 붙였는데 이후 1982년 요녕성 뉴허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세계 각국 언론들은 ‘5천 년 전 신비의 왕국’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일대는 현재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나 중국의 방해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 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서기전 4천500년~2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통상 청동기 시대에나 출현 가능한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가면과 玉(옥) 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돼 국내 학자들은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 초기(고조선 중기 이후는 철기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신석기 시대의 배달국 초기(한웅배달국 후기는 청동기시대)가 자리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즉 홍산문화는 단군조선 건국의 토대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라는 말이다.

◇2006년에 중국이 뉴허량 유적 등 35개를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목록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遼河(요하)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探源工程(탐원공정)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국내 학자들은 “고조선과 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를 중국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라고 비난하고 있다.

◇30년 전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앙소문화에서 하모도문화로 바꿔 재설정한 중국은 뉴허량 유적 발견 이후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 3대 문명의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漢族(한족)의 것과 엄연히 다른 동이족 문화인데도 과거 일제가 한 것처럼 한민족의 뿌리마저 잘라버리려는 역사왜곡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허구의 종족 짱골라  

 

中교수 “순수한 漢族은 없다”… 多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2007년 02월 16일 | 글 | 베 이징=하종대 동아일보 특파원ㆍorionha@donga.com |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蘭州)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 회족(回族)인 그는 한족(漢族)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北狄·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甘肅) 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陝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山西) 성 남부와 장쑤(江蘇) 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客家族)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발행일 : 2001 년 06 월 14 일 (288 호)
쪽수 : 62 ~ 62 쪽

 

 

 

 

 

 

 

 

쥐나사상이 나오게 된 배경에 관해 몇 가지 자료를 엮어 봤습니다.
주나라와 공자,사마천에 관해서 그리고 삼태극,팔괘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애기하겠습니다.

 

먼저 공자와 주나라에 관해 말하겠습니다.

지나 역사기록을 보면 하,은,주, 춘추전국,진, 한, 삼국, 진, 남북조, 수, 당, 송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나라는 은조선으로 우리한민족(동이족)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라 다음인 나라 입니다.

 

상(은)나라는 동이족이고 주나라는 왕족과 지배계급 및 백성들은 동이족이나

그 사이의 중간관리자 지배계급의 다수가 화족으로서 이로 인해 전혀 다른 성격의 국가가 됩니다.

주나라는 초기에 은나라의 서쪽 변방 작은 나라에 불과하였지만, 점차 세력을 키워서 상(은)나라를 점령버렸습니다. 

주나라는 점령한 은나라 백성인 동이족을 종처럼 다루었고, 이때문에 공자 가문은 7대(代) 동안이나 주나라에 대항한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주나라는 일반 동이족 출신들은 신하로 받아들이나, 과거 은나라에 충성했던 동이족 출신들의 관리는 배척했습니다.

 

공자의 아버지는 한(동이)족이고 엄마는 화족 입니다. 그러데 공자께서는 우리 민족의 전통과 같이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아 마침내 주나라 건국 공신 주공을 흠모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때문에 공자는 일평생을 떠돌아 다니면서 덕치를 주장했지만 결국 길에서 죽었습니다.

동이족의 반발로 나라들이 분열된 춘추전국 시대에 태어나 동이족의 화족에 대한 저항시대에서 덕치를 주장하며 떠돌아다니다 결국 허무하게 끝난 공자의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지금 지나정부의 공자가 지나사람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명백한 사기 행위입니다.

 

 

공자(仲尼丘)

 

(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 邑:지금의 山東省 曲阜의 남동) 출생.

자는 중니.

이름은 구.

공자의 ‘자(子)’는 존칭이다.

일생

 

공자는 은(殷)왕족의 혈통을 이어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동이족이고, 어머니 안징재씨(顔徵在氏)는 화족안시의 집안이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됨)

 

 

 지나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동이東夷族 와 공자(에 대한 기록)

 

 

동이족(東夷)과 공자(孔丘)

고대 배달겨레는 지나에 의해 동이족(東夷族)이라 불리워졌다. 오랑캐(夷)란 말의 뜻을 해석해보면

"동방(동아시아)에 사는 활을 잘쓰고 빠른 부족들"이라고 나와 있다.

화족들은 우리를 "오랑캐"라고 불러 왔고(우리 또한 화족을 야만인들이라고 불렀다) 또 지금까지 서로 그렇게 부르고 알고 있다.

아래는 지나의 사서에 기록된 내용들이다.


첫째. "夷는 동쪽에 사는 사람들로써, 활궁(弓)자와 큰 대(大)에서 따온 글자로, 그 사람들

         은 어질고 오래 살며, 죽지 않는 군자(단군)의 나라이다." -설문(說文):자해(字解)-

 

둘째. "그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순리(順理)를 따르는 성향이 있으나, 오직 동이(東夷)

         만이 큰 것을 따르니 대인이다.(惟東夷從大大人也) 이(夷)의 풍속은 어질고, 어진 사

         람은 오래 살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곳은) 죽지 않는 군자가 있는 나라이다.(夷俗仁

         仁者壽故有君子不死之國) 살펴보면 그곳은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사람 역시 크다.

         (按天大地大人亦大) " - 설문(說文): 대부(大部) -

 

셋째.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 夷는 곧 뿌리를 뜻하는 말이며 그들의 천성이 어질어 살리

         기를 좋아하고 노래부르고 춤추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모든 것은 땅에 뿌리 박고 있

         어 천성이 유순하고 道로써 다스리기 쉬워서 군자의 나라이자 죽지 않는 나라(不死

         國)이 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넷째. "은나라의 (건국) 시조 설은 동이족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다섯째. "지나 민족의 조상은 동이족이다." -고사변 (古史辨)

 

 

 

그러나 이씨조선시대의 유교는 공자 본래의 유교가 아니라 반역정권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기에 비정상적인 정권수호를 위한 교리가 되어 본말이 전도되었습니다. 원래 공자의 유학은 근세조선의 유교, 유림처럼 변질된 그런 교리가 아님을 분명히 하며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작성자: 닉네임  crosis star  본명: 공문주 배상 (저는 공자의 후손입니다)

 

 

 

 

조선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왕조의 이름입니다. 조선에는 여러 조선이 있기에 그 앞에 성씨를 붙여 왕조를 구분합니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상(은)조선, 이씨조선 등이 그것입니다.
 동일 명칭이라 헷갈리지 않기 위해 성씨를 붙여 왕조를 구분하는 예는 매우 많은데,
삼국지의 조위, 손오가 그렇고 페르시아도 많은 페르시아가 있지만
사산조 페르시아, 카자르조 페르시아, 사파비조 페르시아 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이씨조선만을 조선이라 하고, 나머지 조선들을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 실사적 태도가 아닙니다.
쥐나와 왜국의 역사학자들은 모두 이씨조선이라고 부르며,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도 이씨조선이라 명명하셨습니다.
즉, 이는 왕조를 구분하기 위한 역사용어이지, 조선을 비하하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공자 족보, 세계에서 가장 긴 족보로 기네스 북에 올라

영국 기네스 세계기록유한회사는 지난 20일 프랑크프르트에서 지나 공자의 족보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긴 족보이며, 여서(女& #20070;)는 세계에서 가장 성별 의식을 구비한 문자라고 밝혔다고 베이징위러신빠오가 22일자로 보도했다.

기네스 세계기록유한회사 총재 알레시 타이얼 · 리차드 씨는 각각 산둥성 취푸시의 문물 관리 위원회 대표와 후난성 장융현의 대표에게 공자 족보와 여서(女& #20070;)에 대한 기네스 세계기록 증서를 수여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공자의 족인은 지금까지 82 세대가 번성했는데 공자세가의 족보는 명나라때부터 60년에 한번씩 큰 수정에 들어가고 30년에 한번씩 작은 수정에 들어간다.

1999년 공자의 후손은 지금까지 규모가 가장 큰 공자세가의 수정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之不知 是知冶
  
(지지위지지 부지위지부지 시지야)
  
- 공 자 -

 


공자의 저서들을 보면 공자는 이런 말들을 합니다.
"모든 것들은 내가 지었다기보다는 오래전 내려오던 글들을 모아서 다시 펼쳐 놓은 것에 불과하다"
오래전의 그 글들의 출처를 여러분에게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겠죠.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이런 말이 쉽게 찾기 어려운 것이 그의 짱골라인 제자들이 그 부분들을 공자 사후에 의도적으로 숨겨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이 조금씩 형성되다가 한나라에 들어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여 역사를 직접적으로 삭제,왜곡,날조에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그가 이렇게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진나라의 진시왕의 도움도 큽니다.
진시왕에 대해서는 먼저 삼태극에 대해 말하면서 하겠습니다

 

<<"태극기는 천손민족의 표시..중국보다 앞서"... 클릭참조>>

 

사람들은 태극,팔괘,사방신이 쥐나에서 건너온 것으로 아는데 이것은 거짓이죠.
쥐나에서는 북(현무)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중앙(황제)라 하는데 이것은 날조된 것입니다.
원래 사방신은 북(현무)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중앙(곰)이다. 우리 민족의 한 상징인 곰이 빠지고 황제를 집어넣어 자기 것이라 짱골라들이 우기는데 정말 웃기는 일이죠. 하물며 공손헌원(황제헌원)마저 우리 민족인 동이인이니 말 다 한것이죠.
팔괘는 복희씨가 만들었는데 복희씨 역시 우리 민족 사람이며 조상인 것이죠.

 

삼태극은 배달시대부터 사용되어왔는데 삼태극 , 천지인 , 치화 교화 조화 ,삼족오 등 우리의 사상의 상징을 뜻하죠.
우리의 일반 생활에 3이란 숫자가 도처에 녹아있는 것도 마찬가지.
환>>>배달>>>조선로 이어져 오다가 조선이 무너지면서 부여,돌궐,흉노 등으로 한민족이 흩어지게 되는데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오고, 고구려에서 백제 거란(요),말갈(여진,만주족>>>금,청),대진국(발해)가 나옵니다.
서돌궐은 서쪽으로 가 지금의 터키(투르크)가 되고 흉노 중 일부는 유럽으로 가 훈족이라 불리며 아틸라의 지휘아래 헝가리의 마자르족을 이루죠, 동돌궐에서는 몽골이 나오고, 백제에서 왜가 나옵니다.

 

배달,조선,고구려는 삼태극(적,청,금)을 그대로 쓰고 몽골은 푸른 초원의 영향과 곰의 민족으로 자각을 가지고 금태극을 쓰게 됩니다.

백제는 적태극을 사용하고 백제의 후예인 왜 역시 적태극을 사용해 지금의 왜국기인 중앙의 붉은 태양의 적태극 왜장기를 쓰게 된 것이죠. 고대로부터 백두산을 영산으로 여겨왔으며 청 역시 이를 지켜왔죠.
그래서 청은 백두산의 천지를 연상하는 청태극을 쓰게 됩니다.

고려는 삼태극과 양태극을 혼용해서 사용했으며 이씨조선은 양태극을 사용하였죠.

지금의 대한민국은 팔괘 중 사괘와 양태극을 사용하여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하고 있다.

 

태극이란 말이 쥐나에서는 송나라때 <태극도설>이란 책에서 나왔는데 우리는 신라, 고려 시대의 절이나 제단, 북 등 그나마 얼마 없는 자료, 유적에서 발견되니 남아 있는 것으로 따져도 이미 고대로 올라가지 않아도 태극이 원래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죠.

 

한웅배달국이나 곰족,호랑이족 모두 한민족을 나타내는 상징과 국가들이며, 이미 사방신이나 단군왕검조선국의 검이나 칸,선우 등에서 곰이란 말이 내포되어 있죠.
이 '곰'이란 것이 의미가 매우 중의적인데, 우리가 신성시하는 영수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임금이나 하늘신 혹은 지도자를 나타내는 '군'이 변화발음된 결과물이죠.

'군'이 '김,검,곰,금' 등으로 변음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사방신에서 보면 우리의 지도자 하늘신인 '곰'이 중앙을 차지하고

북 현무, 남 주작, 동 청룡,서 백호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중앙의 '곰' 역시 중의적이죠. 영수인 곰을 가리키기도 하고 신을 가리키기도 하는 한마디로 동음이의어라 할 수 있죠.

그래서 한웅은 한신(韓神)으로, 단군 역시 단신(檀神)으로, 웅녀는 신녀(神女)로 할 수 있죠.

왜국에서는 신을 뜻하는 '곰', '검' 등을 '가미'라 부릅니다.

 

참고로 그리스 로마 신화도 학자들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신의 이야기를 지어서 적은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민족의 지도자의 이름이나
혹은 그 민족의 이름을 신화에 대입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즉 역사로 남겼지만 그 후손 중 누가 그것을 더 위대하게 보이려고, 말을 더하고 짓고 하는 중에 신화라 치부된 것이죠.

 

쥐나족은 중화중심주의를 내세웠고 자기 주위의 민족은 전부 오랑캐라고 부르며 자국 중심의 역사를 기술하였습니다.
 본래 중원대륙의 주인인 한민족을 동이족東夷族으로 부르는데서도 저들의 왜곡수법이 드러납니다.
이른바 ‘춘추필법’은 자국을 높이는 역사서술 방법인데 사마천 이하 역대 쥐나족의 역사가들은 철저하게 이 방법을 따릅니다.

 

특히 사마천의 역사왜곡 수법이 쪽바리 왜국인 ‘오향청언吾鄕淸彦’에 의하여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는데 본말전도本末顚倒식이죠.
 즉 몽골, 만주, 조선반도, 왜열도, 중원대륙 등의 배달겨레 역사를 쥐나족의 역사로 뒤바꾸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사마천이 편찬한 역사(사기史記25권)는 그가 태어나기전의 거의 2천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진시왕의 분서갱유 사건 이후로, 당시까지 제대로 된 사료가 없는 상태에서 사마천이 그 많은 사서를 편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사마천이 서술한 사서들은 거의 꾸며낸 쥐나족 위주의 재미있는 이야기 책 수준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쥐나족의 역사왜곡수법에는 크게 세 가지 원칙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나라의 허물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은 자기는 높이고 남은 낮춘다는 것이며,
셋은 자기 것은 자세히 말하고 남의 일은 축소하여 말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민족에게 심각한 상처를 주고 있는 역사왜곡의 결정체 서남, 서북, 동북공정도 쥐나족의 이러한 못된 버릇에서 나온 것이며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황하문명도 자기 것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더 윗대의 홍산, 요하 등 선진문명이 속속들이 발견되자, 곧 바로 자기 것이라고 하면 앞뒤가 안 맞아 억지라는 것이 탄로 날까봐 외부에 공개를 하지 않고 숨기면서 자기 것으로 짜 맞추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진시왕릉은 없다 & 진(만리)장성의 이해 클릭참조>>

 

직접적으로 허구의 종족 짱골라의 시작은 유방의 한나라 때부터입니다.
이 때부터 사마천의 사기를 집필하는 등 여러 역사조작 왜곡을 시작합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많은 서적들과 자료들이 불타버린 관계로 조작하기가 한층 쉬웠죠.

옛날(B.C 200) 쥐나의 사마천은 당시까지 정립되지 않았던 쥐나의 역사를 26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짱골라의 역사를 편찬했습니다.
그것이 쥐나의 사기입니다. 소위 말하는 춘추필법으로 말이죠.
즉 자기들은 한껏 올리고 주위의 국가나 민족은 한껏 깎아 내리는 못된 필법으로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에는 그들 스스로도 그것을 역사서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약간 양심은 있었던지....)
그것이 약 300년 후에야 정식 쥐나의 사서로 채택된 것입니다.
그것도 후대의 왕들이 자기들을 높이기 위해서는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한번 생각해봅시다.
2600여년이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당시까지 정립되지 않았던 그들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정식역사라고 할만한 사료가 그때까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마천은 26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단숨에 정립(?)했던 것이죠. 사마천이 편찬한 사기史記25권......
진시황의 분서갱유 등의 여러 이유로 인해 당시까지 제대로 된 사료가 없는 상태에서 사마천이 그 많은 사서를 편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따라서 사마천이 서술한 역사들은 거의 꾸며낸 짱골라 위주의 재미있는 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그들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그것을 정식역사로 인정을 하지 않았던 것이죠.

 

짱골라는 역사를 삭제,왜곡하는 등의 방식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이四夷라 하여 북적,동이,서융,남만으로 나누어

배달 한겨레를 흉노,동호,몽골,선비,묘족,말갈(여진)족,돌궐,거란,강족,오환,저족 등으로 계속 분리되도록 유도해왔습니다.
이夷란 뜻마저 오랑캐로 변질시키기까지 했죠.
반면에 짱골라는 서로 다른 민족과 결합되도 양친 중 한명만이라도 짱골라면 그 혼혈인은 짱골라다라는 정책을 편 것이죠.
누구는 결합되면 민족이 사라지고 누군 마찬가지로 결합되도 민족이 불어나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계속 한 것이죠.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 등은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의 후예들로 농경과 유목기마를 함께 하는 대표적인 반농반목민족국가이고 몽골,돌궐 등은 전형적인 유목기마민족국가죠.
배달 한겨레는 여러 지역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퍼져 살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보고 그것이 모두를 대표한다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뿐만 아니라 어불성설입니다.
배달 한겨레는 농경민족이면서도 유목기마민족이며, 그의 후예 백제나 왜열도 등 해상민족이기도 한 것입니다.

 

유방 한나라 이전에는 짱골라가 존재하지 않았죠. 아니 없어졌다고 보면 됩니다.
화하족은 낙양 중심으로 살아가던 소수민족이었죠. 시간이 흘러 화하족은 배달민족들에게 흡수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유방의 한나라 때부터 자신의 치부를 가릴려고 조작하게 되면서 짱골라 개념을 갖고 나오게 된 것이죠.
한나라가 영토확장하려다 북쪽 배달계 흉노와 동쪽 배달계 북부여에게 대패해서 그들에게 조공을 바쳐가며 살아가는 속국으로 전락하죠. 이런 상황 등이 그들에게 조작,날조하도록 더욱 부채질하게 되죠.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조작하기는 더욱 쉬운 것은 말할 필요없죠.
짱골라들이 타국을 침략할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그 나라의 사고에 있는 역사서나 수많은 저서들을 약탈하거나 불태운 것이었죠.
지들이 저질러놓고 그것을 믿으라 하는 심보가 정말 가관입니다.
지들이 없애놓고 니네는 원래 그런 것 없었다 하면 말이 됩니까?

 

민족에 의해 그 역사가 탄생하는 것이지, 영토에 의해 역사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민족의 흥망성쇠에 따라 영토의 변화가 있을 뿐이죠.
짱골라들이 내세우는 역사관의 맹점은 시간의 연계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공간(영토)를 확보하여 날조,삭제하려고 ㄱㅐㅈㅣ랄을 떠는 것이죠.

 

복희, 신농, 공손헌원, 요임금, 순임금 등 삼황오제 모두 배달 한겨레입니다. 진시황의 진나라마저도 배달 흉노계 국가죠.
실제 짱골라의 왕조는 한,송,명 3왕조뿐이며 이들이 설쳤던 세월은 고작 수백년 밖에 안 됩니다.
한나라는 북쪽 배달계 흉노와 동쪽 배달계 북부여의 속국으로서 조공을 바치며 연명했고,
송나라는 배달 흉노계 거란족의 요나라와 고구려,발해 후예인 배달 부여계 여진족의 금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힘겹게 속국으로 살아가다 배달 흉노계 몽골족의 원나라에 병합되어 사라집니다.
명나라 역시 고구려,발해의 후예 여진족의 청나라(후금)에게 망합니다.
(+고구려,발해의 백성이었던 배달계 말갈족이 이후에 여진족으로 불리고 다시 만주족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이 아니라 같은 민족입니다. 이것 역시도 짱골라들이 고구려,발해 후예인 그들 배달계 말갈족이 다른 민족인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 시대에 따라 달리 부른 것입니다)

 

처음 시작은 단일민족으로 시작했을지 모르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겨레가 여러 계통으로 나누어졌죠. 그래서 지금으로서가 아닌 오래전부터 우린 다민족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처음에는 하나였지만 시간이 흘러 먼 친척이 되고 그 후에는 남남이 되어 다시 서로 만나 부둥켜 살아가는 세상처럼 말입니다. 수많은 배달 한겨레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여러 분파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기원은 배달 한겨레에서 시작되지만 그 세부의 역사에 있어서는 그 분파된 민족의 고유한 역사인 것입니다.
역사는 그 민족의 것이지, 시대적인 영토변화에 따라 역사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의 흥망성쇠에 따라 영토의 변화가 있을 뿐이죠.
원나라의 역사는 몽골 그 자신들의 것이고, 훈제국의 역사는 헝가리의 것, 오스만투르크(돌궐족)의 역사는 터키의 것,
부여,고구려,백제 등의 역사는 대한민국인 것처럼 우리 배달 한겨레 형제들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억지를 부리는 짱골라들이 문제입니다.
치우천황이나 복희,신농,공자,묵자,징기스칸 등 남의 조상도 자기 조상이라 하고 수많은 배달갈래왕조들이 이룩한 발견,발명,업적 등을 자기 것이라 어거지를 부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짱골라의 억지에 대해 우리는 보다 정확히 민족을 분류하고 그것에 따라 역사를 논리적으로 반박할 뿐이죠.
만약 누가 우리 자신이 역사나 민족을 너무 확대시킨다고 성질을 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것은 사대주의 매국노나 짱골라,쪽바리 등의 의견에 동조하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배달 한겨레가 시간이 지나 이렇게 여러 민족으로 나누어졌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끝내려 하나 짱골라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니 그것에 대해 배달 한겨레가 나누어졌다고 말하는 이상의 사실을 지적하며 그들의 무지를 일깨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니죠.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 문제의 원인과 원인제공자인 짱골라나 쪽바리에게는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서, 그에 대해 지적하는 우리 자신 스스로를 타박한다면 말이 안 되죠.
그런 어리석은 짓은 공정하지도 못 할 뿐더러 스스로를 자학하는 꼴이죠.

 

민족이란 용어가 근대 국민국가 이후에 생겨났다고 해서 '배달 한겨레'가 부정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훨씬 이전부터 '겨레'라는 순수 우리말을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겨레는 같은 혈족,언어,풍습,문화 등을 공유하는 용어입니다.

 

고대의 배달겨레가 크게 동이계,흉노계와 융족계 등으로 나누어졌지만 그 뿌리는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달민족이 먼저 생긴 개념이고, 이것이 후에 광의의 동이족, 협의의 동이족 개념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리고 배달계통이 흉노,예맥,말갈(여진),돌궐,동호,거란,선비,묘족,오환족, 강(티벳)족, 장족 등으로 좀더 세분되어집니다.
배달민족이란 용어 안에는 흉노계나 융족계,동이계 등 모두 담을 수 있는 말이지만 동이족이란 말은 그렇지 못 하죠.
그리고 한웅배달시대가 단군조선시대보다 더 이전의 시대니 당연한 것이죠.

 

요하문명 전시회도 심양이나 대련에서 열고 있는데 짱골라들은 그 유산들과 우리 배달 한겨레의 연관성을 숨기려고 엄청 노력을 하더군요. 그래서 역사공정을 더욱 펼치는 것이죠.

드러나는 한웅배달국의 홍산문명이나 단군조선국의 요하문명 등 여러 고대 유적들과 학자들의 발표로 점점 사실로 드러나고 있죠.
세계 학술대회에서도 여전히 홍산문명을 주제로 벌어지고 있으며 국회에서는 2006년 생방송으로 국회방송도 했었습니다.

 

홍산배달문명의 발견으로 러시아,독일,미국 등 세계 학자들의 유적 방문조사가 보다 대대적으로 벌여지려 했으나 짱골라들이 이를 막아서 모든 게 지지부진하게 지체되어 있는 중입니다.
지금 짱골라들이 그 고대 유적들을 조사 못 하게 군사통제구역으로 설정해서 출입을 아예 틀어 막고 있으며 그 유적들의 일부는 물에 수장시키거나 나무를 심는 등 여러 방법으로 파괴하고 또다른 일부는 유적지 자체를 들어내어 거기에 인위적인 장치를 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조작하고 있는 것도 알았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여러 유적과 유산들로 인해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의 실존은 점점 확정되고 있거나 확정되었습니다.
이번 2007년 국사교과서부터는 단군조선국의 역사가 편입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학계의 연구 결과로 통해 본인 역시 홍산문명의 한웅배달국과 요하문명의 단군조선국 실존을 더더욱 확신하게 되었지만 한웅배달국 이전의 환국시대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유보중입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오랑캐라 치부하던 치우천황이나 단군,징기스칸 등을 지금에 와서는 짱골라들이 자신의 조상이라고까지 우기는 코미디도 연출하고 있죠.

실제 복희,신농,요순임금 등 삼황오제 모두 배달민족일 뿐 아니라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배달 흉노계 국가이니 이미 말 다 했죠.
남의 조상,역사,업적 등을 빼앗으려 하는 짱골라들.
한,송,명 3왕조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배달왕조들에게 지배당한 짱골라들.
그래서 짱골라들은 배달 한겨레에 대해 그렇게 열등감과 두려움으로 똘똘 뭉쳐있나 봅니다.

 

<사고전서>는 청나라 건륭 황제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로 무려 7만9천여권에 달합니다. 고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원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에서 모두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 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필적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죠.
만약 고대부터 청나라때까지 역대 중원대륙 모든 왕조들의 역사서들을 그 출처로 하여 종합편찬한 <사고전서>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그 출처였던 중원대륙의 모든 사서들마저도 부정하는 자가당착에 빠질 뿐이죠.
청나라의 <사고전서>나 근세조선의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이미 디지털화되어 있어 일반인들도 확인이 가능하죠.

 

실지로 짱골라의 왕조는 한,송,명 3왕조뿐이며 오히려 짱골라들이 배달계왕조들의 지배에 있었고 혹은 속국으로 살아간 노예종족입니다. (실지로 짱골라족 자체가 허구의 개념입니다. 조작,날조를 시작하면서 허구의 종족을 내세운 것에 불과합니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배달 흉노계 선비족 국가이고,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배달 흉노계 국가이니 이미 말 다 한 것이죠....


유적발굴이나 역사를 알아가는데는 역사학자만 동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고학자,인류학자,사회학자,화학자,생물학자,지질학자,지리학자 등 인문사회계열 및 이공계열 여러 관련분야의 학자들이 동원됩니다.
그 유물,유적에서 나온 물질을 분석도 해야 하는 등의 여러 상호관련되어 진행되는 것이죠.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 방관적인 태도랑 중립적인 태도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진실을 알기 위해 중립적이면서도 공정한 태도는 학자들뿐만이 아닌 기자,판사,일반인 등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필요한 당연한 행동인 것입니다.

 

[소위 세계화]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하게 확립된 위에 이뤄져야 [진정한 세계화]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각 국가의 역사교육,민족교육,국민교육이 바로 [그 나라, 혹은 민족의 정체성]을 기르는 교육이죠.
[시민교육]은 세계인으로서 갖춰 야할 [보편적인 윤리/덕목]을 가르치는 것이죠.
따라서 [역사교육]은 없고 [시민교육]만 한다는 찌질이의 절규에 정말 웃기는 일입니다.

(옛날 덴마-크의 "그룬트비히"라는 사람은 [너는 크리스찬이 되기 전에 먼저 덴마-크 인이 되라]고 했죠.)
유태인들이 부르짖는 시온주의, 독일의 게르만주의 운운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입니다.
미국도 다민족국가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민족사회,인종사회로 굴러갑니다.
그에 따라 인종차별도 심하고... 그래서 미국 정치계에서 스패니쉬계나 흑인종,동양인 등을 비롯한 각 단체들의 힘겨루기가 극심합니다

근데 미국내 한국인사회만 결집이 안 되는 편이죠. 그래서 미국에서 부당한 이익을 받는 면이 더 큽니다.
흑인이나 스패니쉬계 등은 각각의 정치의원이나 이익,인권 등 다양한 수단을 마련해 미국 정부에 압력을 주어 보다 많은 것을 이끄는 것에 비하면 정말이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가 되고 있는 유럽공동체마저도 각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합니다. 물론 미국도 마찬가지.

그런 기반이 되는 정체성교육도 없이 세계화를 추진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사상누각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보스니아 내전이나 아프리카의 여러 내전과 같은 위험을 안게 되는 겁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나 슬로바키아로 나누어진 것이나 구소련이 무너진 후, 여러 국가가 들어선 것만 봐도
현재는 한울타리의 세계화라는 이면의 '신민족주의'시대로 볼 수 있는 겁니다.
하여튼 자신의 주변도 살피지 못 하면서 인류애,세계화를 부르짖는 찌질이들이 된다면 우리는 곧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폭풍전야의 풍전등화같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겁니다.

 

최근 유엔에서 한국 순혈주의 운운하며 마치 인종차별을 낳는 식으로 민족주의가 나쁘다는 식으로 몰고 가는데 참 황당합니다.
민족주의는 부정도 긍정도 아닌 그저 중립적인 용어일 뿐입니다.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혼동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군요.
어떤 이들은 애국심과 배타성을 구분 못 하더군요.
미국 사람들이 자기 나라 위해 애쓰면 애국심이고, 한국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애쓰면 국수주의,배타성입니까??
도대체 이런 사람들의 의식구조는 어떻게 되어 먹은 것인지.....
언제부터인가 한국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을 잃어버린 나머지 외부에서 무슨 소리를 하면 쉽게 흔들리더군요.
그리고 도움도 안 되는 체면을 위해 손해보기를 밥 먹듯이 하고, 똥고집은 엄청 부리죠.
중세고려 아니 후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실리추구를 하는 면이 강했는데 중기에 들어서면서 유학이란 학문을 변질적인 유교로 받들기 시작하면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유교로 포장하는 것도 실은 불완전한 후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죠.
그래서 백성과 현실을 도외시한 채 양반만의 정치, 체면과 허위허례의식의 유교로 똘똘 뭉쳐 종국에는 국방력을 모두 말아먹고 외세에 침입에 쉬이 당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몇 가지 더 인용하면서 말하겠습니다.

단일민족론의 기원은 근세조선 유교 쥐나사대주의에 비롯합니다.
단일민족이론의 시초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유학이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은 근세조선조 이후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죠.
‘조선왕 독살사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등의 저자인 역사 연구가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씨는 ‘소쥐나’ 사상에 경도된 유학자들을 단일민족이론의 시초로 꼽습니다.
이씨는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쥐나와 일체화하기 위해 같은 민족이었던 동이, 몽골, 만주족을 오랑캐로 내몰았다”면서 “민족 개념이라는 것도, 봉건시대에서 통일국가로 이행했던 유럽이나, 왜국의 경우에는 맞아 떨어질지 몰라도, 나라의 개념이 하나뿐이었던 우리나라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단군신화를 순수혈통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한 조상이라고 해도, 여러 지류가 흘러 큰 물을 이루는 넓은 개념으로 해석하면 다문화, 다민족 사회를 가로막는 요소로 보기 힘들다”고 덧붙였습니다.

 

고대에 이미 배달겨레가 크게 동이계,흉노계,융족계로 나누어집니다.
이들이 서로 다시 여러 민족으로 갈라지며 합쳐지는 등의 변천을 거듭했죠.
곧 우린 이미 배달겨레의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입니다.
그래서 단일민족이니 뭐니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서양인들이 헛소리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죠.
더욱이 그들의 혼혈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 지배로 통한 것이니...
더군다나 그들의 현사회에서도 오히려 인종차별이나 민족차별이 심하면 심했지 못 하진 않죠.
지들 주제도 모르면서 남에게 뭐라 한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거죠!

그리고 유엔에서 한국의 민족 운운하는 헛소리들은 정확히는 유럽에서의 논란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입니다.

본인은 외국의 사례인 스킨헤드, 시오니즘, 네오나치, KKK단 등은 굳이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표리 부동한 그들에 대해서 비판은 하겠습니다.

유럽인들이 왜 다인종 국가를 만드는데 성공했을까.....
그것은 그들의 관용(똘레랑스 ㅗ 먹이셈)따위가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제국주의 시대에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끌고온 것이었으며, 2차대전 이후 경제성장에 있어 3D업종에 종사시킬 사람들을 충당하기 위해 그나마 연관성이 있는 식민지인들을 데려온게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신생아 출생 감소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그것으로 인해 다원사회를 이룩하였으면서, 그들이 본질적으로 관용적인 것처럼 말하는 것에 어이가 없을뿐입니다.

 

어차피 한국도 20년내 고려인 역이주.
50년내 타국민 이민을 받아들여 인구수 8000만 유지해야만 하는 ?가 옵니다.
통일한국이 되면 더욱 가속화되겠죠.
순리가 그러니까 제발 먼저 설레발 치지 않길 바랄뿐입니다.
그 잘나신 프랑스도 타인종 관리 못해서 폭동이나 일어나게 만드는 주제에, 자신들이나 잘 관리하길 충고할 뿐입니다!
똘레랑스 좋아하고 자빠졌다. {-_-}

 

서양은 동양으로부터 문물을 받기 시작해서 그리스,로마 문명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죠.
하지만 중세시대의 미쳐버린 종교때문에 건축기법 중 시멘트공법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암울한 시대죠
하지만 아랍의 문명을 다시 받아들이면서 르네상스를 이루어 과거의 학문,문화 등을 서서히 되살리기 시작하죠.
세계최초의 종합병원이나 도서관 아라비아 숫자 등 뛰어난 동양 아랍문명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었죠.
하물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의 여러 고대 저서 등이 아랍의 도서관에 보관되지 않았다면 아마 서양의 문명은 벌써 사장되어 한참이후에나 다시 발전을 이루어 나갔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전에 EBS교육방송에 방영된 BBC역사관련 다큐멘터리 등에서도 나왔던 내용입니다.


한웅배달국부터 시작하여 고구려,발해까지 위대한 선조들이 이룬 업적을 짱골라에게 우리 조상까지 다 빼앗기고 역사마저 빼앗기게 만든 그 후손이 못 나서 그렇지 그 조상이 못난 것은 아니죠. 아무리 뛰어나도 그 후손이 못 나면 아무 소용없죠.
우리의 전례뿐만 아니라 잉카,마야,캄보디아의 크메르, 인도의 여러 문명,종교때문에 모든 발전이 거의 정체되게 된 근동,중동의 아랍문명 등등...
서양 역시 마찬가지죠. 동양의 문명이 없었으면 다시 르네상스를 일으키지도 못 했죠.

또 회계제도는 우리나라도 개성상단의 사개송도치부법이라는 훌륭한 복식부기법이 예전부터 사용되어왔고 시스템도 현대 서양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쳐지지 않습니다.
숫자는 한웅배달시대에는 산목으로, 단군조선시대에는 산대 등으로, 시간이 많이 흘러 근세조선에 들어서는 쥐나의 숫자나 조선산이라는 고유숫자도 사용했습니다.
물론 숫자표현체계는 아라비아숫자가 더 쓰기 편한듯 싶습니다
이 우리부기법은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있어 1910년대 오스트리아 경영학회에 보고되어 고려의 회계시스템이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고 주장되었으나 왜국의 학자가 이를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당시 왜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우리 나라의 상황때문에 묻히게 됩니다. 물론 금속활자에 대한 앞선 사용 또한 마찬가지죠.


참고로 서양이 동양을 서서히 따라붙다가 17세기초에 이르러, 여러 분야의 발전 에서 조금씩 추월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서양이 세계대항해시대를 열게 된 배경 중 자연의 영향도 큽니다.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유럽은 소빙하기시대였거든요.
그래서 최북단에 있던 영국은 식량문제 등을 비롯한 여러 악조건을 타개하기 위해서 상공업을 장려시키고 과학을 위시한 학문을 공부하고 세계로 뻗어나갈 필요성이 컸죠.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끝내는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그리하여 전세계에 미국,호주,뉴질랜드 등의 영연방이 생기게 된 기저가 되죠.

솔직히 서양인들이 배가 부른 때라 해 봤자 기껏 '그리스, 로마시대'와 '산업혁명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300년 정도'입니다.
이를 제외하면 수천년동안 아랍과 동아시아 등 동양의 지배에 있었던 야만인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나는 실증주의와 과학 등을 믿으며 전적으로 학문은 공정해야 한다는 주의입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현재 많은 학자들의 연구결과로 사실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학문은 정체된 것이 아닙니다.

연구결과에 따라 얼마든지 업데이트가 되는 것입니다. 일례로 우리 주변의 과학발달의 결과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짱골라들이 유적조사 등을 못 하도록 무수한 방해로 인해 전세계 학자들이 동아시아 고대문명에 대해 연구 진행이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도 진실을 밝혀내는 학자들이 그나마 역사적 사실을 조금씩이나마 밝혀낸 것도 대단한 것이죠.
허구의 종족 짱골라 그들이 그렇게 남의 조상,발견발명,역사 등을 빼앗으려는 서북,서남,동북공정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허구를 가리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약탈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입니다.

 

이옥순, 이종득, 이태주, 이평래, 이희수, 조흥국, 한건수 등 많은 대학교수들이 함께 저술한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한 세계사 교과서 바로잡기'란 책을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우리 모두 각자 자신들이 알고 있던 것이 편견,오류였는지 자기검증도 할 수 있어 유익할 것 같습니다.

 

허구의 종족 짱골라들. 매일 하는 것이라고는 남의 것 훔치는 것 밖에 없으니....
짱골라들은 한국의 수도 서울을 지금도 공공연히 한성이라 하며 무시합니다.

서울시가 서울의 쥐나어 표기를 '한청'(漢城)에서 '서우얼(首爾)'로 바꿨지만 쥐나쪽은 상당히 불쾌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직도 지들끼리 공공연히 한성이라 합니다.
‘서울’의 쥐나어 표기 ‘首爾(서우얼)’이 쥐나어로 ‘서우얼’로 발음돼 ‘서울’과 비슷한 데다 ‘首’가 수도를 뜻하기 때문에 가장 적합하다고 하지만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치입니다. 그 쥐나어 발음이 ‘서울’과 좀 닮았긴 하나 우리의 한자어 발음으로는 ‘수이’일 뿐입니다. 또 ‘首’가 수도의 의미를 풍기긴 하나 ‘爾’는 쥐나에선 변방 지명에 주로 사용되는 글자입니다. 쥐나의 서북쪽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와 동북쪽 하얼빈(哈爾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지금 쥐나가 고구려를 쥐나의 변방 역사에 편입하는 동북공정과 티벳과 신장 등의 여러 소수민족들을 살육하며 서북,서남공정을 추진하고 거의 끝나가는 마당에 우리가 자진해 쥐나의 변방임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소수의 의견이라서 진실이 아니다란 식으로 말하는데, 진실이 다수결로 이루어집니까???

그렇게 따지면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는 자신의 주장 자체가 처음부터 진실을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거짓을 부르짖은 것이었군요.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Schliemann, Heinrich]이 트로이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트로이의 존재는 그냥 신화의 일부나 호머의 이야기로만 치부되어 지금도 진실이 아닌 허구로 여겨졌겠죠. 그리고 세뇌된 일반사람들이 우리고대사가 무턱대고 거짓이라 치부하는데 그것은 짱골라나 왜놈의 방해 때문에 우리의 유적을 조사하지 못 해서일뿐이죠. 연구나 조사할 의지조차도 없으면서 무조건 거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식민사학자들 역시 나와 같은 실증주의를 주장하는데 그럴수록 더더욱 우리의 유적을 알아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거짓이라는 딱지를 붙인다는 것은 실증사학에 위배되는 짓, 곧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승자박이죠

여전히 활개치는 몇몇 식민사관학자들때문에 많은 선량한 강단학자들마저도 도매급으로 욕 먹게 됩니다.

우리 역사를 찾으려는 강단학자들이 왜 일반인들에게 식민사관학자로 엉뚱한 오해를 받아야 합니까.....
식민사관학자와 강단학자는 동의어가 아닙니다.

 

그리고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을 저술한 우실하씨 등을 비롯 몇몇 교수분들이 우리 동아시아 역사를 한국,몽골,일본,쥐나,티벳,위구르,중앙아시아 등 모든 민족이 함께 공유하는 동북아시아 시원을 밝하려 했지만 쥐나의 서남,서북,동북공정으로 거의 좌절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학자적 양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쥐나 공산당 정부의 충실한 개노릇을 하는 짱골라학자들에게 뭘 바랄 수 있겠습니까만....

솔직히 실제의 종족인 배달겨레의 조상,발견발명,유산,업적들이 허구의 종족 짱골라에게 눈 뻔히 뜨고 빼앗기고 있다는 것도 기가 찰 일입니다.

 

부디 학자적 양심을 가지고 모든 것에 공정한 시선으로 봤으면 합니다. 그것이 소수의 학설이든 다수의 학설이든지간에 말입니다.
진실을 밝혀나가는 것에는 수가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진실이 다수결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 다수의 학설은 무조건 옳고 소수의 학설은 틀리다란 생각을 고쳤으면 합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의 학설도 처음에는 소수의 주장으로 시작했지만 종교시대에 억압받고 있던 무지몽매한 어리석은 다수를 결국에는 진실로써 일깨웠지 않습니까. 고고학자 슐리만[Schliemann, Heinrich]이 트로이를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을 지금이야 상식으로 알지만 발견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그리스신화의 일부로 봤었죠. 그래도 슐리만은 다행이었습니다. 트로이유적을 조사한다고 누가 방해하지는 않았으니....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거 우리의 터전이었던 만주,몽골,연해주,중원 등에 있는 유적들을 조사하려 해도 짱골라들의 방해가 너무나 극심하죠. 있던 사서나 사료도 오랜 세월 동안 전부 왜놈이나 짱골라들이 훔쳐가거나 훼손했고..... 왜제시대 35년동안 우리의 20만권의 사서들이 조선사편수회에 의해 압수되고 불태워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 때 목록을 보면 대부분 20세기 초반 저서들이 대부분이죠. 다만 우리의 진짜 사서들은 모두 교묘히 빼돌려 왜왕실이나 혹은 일본대학도서관 등에 잠들어있습니다. 왜제시대 35년뿐입니까? 그 이전 임진왜란이나 수많은 왜구들의 침략으로 도자기,서적,장인 등 사람,물건 할 것 없이 너무나 많은 것을 약탈했습니다. 사서를 통해 연구하려 해도 짱골라와 왜놈들이 숨기고 안 보여주니 더더욱 답답할 뿐이죠. 왜왕실에 수많은 우리 사서들이 숨겨져있는 것에 대한 신문기사자료도 있습니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과학이 발달하고 깨인 강단학자들이 많이 늘어서 다행이지만 아직도 우리 역사를 찾으려는 길은 멀기만 합니다. 과거 2~30년전만 해도 식민사관학자들의 폐해가 컸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암운이 아직 걷혀지지 않고 있지만 뭐 뉴라이트가 버젓이 이명박을 앞세워 더더욱 극성을 부리는 시대니.....

 

역사를 밝혀나가는데는 역사학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딸랑 사서만 보고 밝혀내는 것도 아니고요.....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사회학, 천문학, 생물학, 화학, 지질학, 지리학 등 인문사회계열과 이공계열을 비롯한 수많은 관련분야 교수나 박사들이 함께 연구하며 진행되는 일이 많습니다.
"몇몇 이들은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문명과 역사를 판단하는데, 이는 대단히 위험하고 짧은 생각입니다.
문명과 기후, 지형 변화 등 다각도로 그 상황에서의 여러 관계들을 함께 끌어들여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겁니다.
과거의 땅이었던 것이 지금은 바다로 되어 있는 것도 많고 또 이전에는 초원지대가 지금에 와서는 사막이 된 자역도 많죠.
한마디로 오판하는 그들은 지구의 환경변화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따라서 지구의 환경변화를 중심으로 문명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재차 당부하지만 유적발굴이나 역사를 알아가는데는 역사학자만 동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문사회계열과 이공계열 등 관련성 있는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동원됩니다.
그 유물, 유적에서 나온 물질들을 분석도 해야 하는 등 여러 일들이 상호관련되어 진행되는 것이죠.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 방관적인 태도랑 중립적인 태도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진실을 알기 위해 중립적이면서도 공정한 태도는 학자들뿐만이 아닌 기자,판사,일반인 등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필요한 당연한 행동인 것입니다.
역사란 현실의 거울이요 미래의 지표라고 합니다.
진실되고 확실한 역사관정립은 분명히 후대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자 우리 미래의 도약대가 될 것입니다"
일반인들에게도 공정함이 필요하지만 학자들에게는 더욱 엄격히 지켜져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분야의 학자가 되었든지 말입니다.

 

하나 더 예를 들어 한성백제시기 같은 경우 위례성의 위치에 관련하여 '몽촌토성이다 아니다... 풍납토성이다'라고 설전이 많았습니다.

초기에는 몽촌토성이 자료와 논거가 더 확실하여 풍납토성이라는 주장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자료가 더 발굴되면서 풍납토성이 현재는 다수설이죠. 이처럼 일련의 과정을 거쳐 학문은 업데이트되는 것입니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는것이 아니라는겁니다.

여러 교수들과 함께 코리안루트 탐사원정으로 고대유적과 그 문명들을 파헤치고 있는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풍납토성의 발굴에 참여했던 학자입니다. 그리고 최근 그는 홍산문명과 요하문명 등에 관한 탐사자료 일부(코리안루트를 찾아서)를 경향신문을 통해 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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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발자취 및 현황 

 

 문명을 볼 때 기후 참 중요하죠. 하지만 식량에 대한 한쪽 면만 보면 안 됩니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식량쪽도 중요하지만 그 외의 의식주 전반에 관한 여러 요소가 함께 옵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작용하듯이 식량증산에 따른 도구 역시 중요하거든여.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그 수단이 필요하듯 그 수단에 수반된 것도 역시 고려해야 하죠.

양자강쪽(강남)에는 광물자원과 같은 지하자원이 드물죠. 반면에 황하쪽(강북)에는 지하자원이 풍부하며 그에 따른 운송의 이로움과 선대 문명인 배달,조선이나 다른 민족들의 우수한 문화를 얻기가 쉬웠죠. 전쟁에 대한 두려움도 크지만 그보다 더 큰 지리적인 이점이 더 많이 작용한 것이죠. 외형적으로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의 얼굴만 보지 않죠. 그사람의 앞면,뒷면,옆면도 보아야 하죠. 그리고 그의 내면적인 모습까지 보려고 노력해야 보다 더 진실에 다가갈 수 있죠. 먹는 것에 대한 것으로 먼저 예를 들어 설명했지만 중요한 것은 다른 면과 함께 종합적으로 봤으면 해요. 분석만 하고 끝나면 수술한다며 배만 찢어놓은 것이랑 같죠. 종합도 함께 해야 그 수술에 대한 치료도 할 수 있는 것이죠

한민족 모두가 유목만 했던 것도 아니고 농경만 했던 것도 아닙니다. 한민족의 일부는 유목하고 또다른 일부는 농경을 하며 둘 다를 병행한 부류도 있었습니다. 고대의 한민족의 영토는 드넓었으며 같은 한민족이지만 각각의 지역에 맞게 생활하였을 뿐입 니다. 지금의 각 지역들을 보세요. 어느 한나라가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서 그것만 신경썼던 것도 아니고 관광이 발달했다고 해서 그것만 주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후진국이라 여겨도 과학이 발달한 나라도 있으며 구식과 신식이 함께 공존하는 나라도 많습니다. 인도,쥐나,러시아,프랑스, 이탈리아 등등 각 지역마다 그에 맞게 생활을 영위해 갈 뿐입니다.

너무 한쪽만 보지 마세요. 지금의 쥐나를 보세요. 해안쪽과 내륙을, 도시와 시골을,부자와 서민들. 넓은 땅덩어리에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어우려져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농경을 이미 고대부터 널리 하고 있던 민족이면서도 강맹한 유목,기마민족이기도 한 민족이 바로 우리랍니다. 한민족의 수많은 지류 중 어느 하나만 보고 그 지류가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 지류들을 하나하나가 모여 적용될 때야 한민족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유목과 농경을 모두 한 부여와 고구려는 대표적 반목반농 국가였습니다. 물론 그들의 후예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부여와 고구려는 배달과 조선을 이어받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유목이나 농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헌종이란 이가 <동북아시아 중기구석기문화 연구>에서, 대륙에서 리프팅된 제 문화권의 유사성에 대해 말한 것이 있는데 검색해보면 도움 될겁니다

역사상에서 홍산 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 단계인 홍산 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요동, 요서 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동부지역에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되기까지 합니다

청동기 문화의 실존근거를 홍산문명의 발굴로, 홍산문명의 고조선이나 동이와의 연관성을 묘실문화의 유사성으로 서술하고 있죠. 그리고 청동기 문명의 원조로 공인된 것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쪽에서이고, 유목민족의 이동성이라는 특성때문에 청동기 문명은 '초원길' 즉, 지금의 고비사막북쪽과 시베리아 삼림지대 사이에서 서로는 카스피해와 소아시아 헝가리지방 동으로는 만주와 연해주에 이르는 스텝기후지역인 대초원을 따라 유목민들끼리의 교류로서 퍼진 것으로 보는 것이 세계사적인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것이구요..그래서 특히 동북아 고대에는 유목민족=청동기문 명, 농경민족=신석기문명이라는 공식을 적용하는 것이구요

그래서 농경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패러독스에서 벗어나 고대에는 유목민족의 문명적 우위성과 특성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는 논조의 책도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동기를 전파한 스키타이인부터 서흉노의 갈래인 훈족, 대제국의 몽골족등을 가장 중심 예로 들면서 말이지요

빙하기는 기원전50-42C까지 엄청난 강우량증가시기를 겪고 다시 기원전42-33c까지 감소를 보이다가 기원전24C에 증가를 보여 건조한 사막지대까지 소택지화가 진행된다 합니다..... 만주의 경우도 별반 다름이 없어 지금처럼 건조한 상태가 아닌 조금 기온이 높은 다습한 곳이었지요.....그러므로 산해경의 곳곳에 지금은 보이지 않는 대나무 생장의 기록이 보여집니다.....대나무는 후에 없어진 것이지요......

숙신의 화살인 <호시>도 그걸로 만든 것이 많습니다....하지만 한웅배달국의 갈래왕조 상나라와 주나라시대에 나타나게 되는 죽간은 사용하지 않았고 그 대신에 그런 지역에서 잘 자라고 있던 나무를 써서 껍질이 있는쪽을 얇고 반듯하게 베어내면 큰 손톱 모양의 단면을 가진 한쪽은 둥글고 한쪽이 평평한 가벼운 나무판이 됩니다......거기에 불로 지져서 녹도문을 새겼을 것입니다......단순한 뜻새김부호가 많았겠지요.......

목간이라고도 볼수 있겠지만 아직은 조금 그렇네요.....이것이 서토(중원대륙)로 들어가 죽간도 되고 갑골문으로도 달라지며 또 불에 지져 뜻을 아는 걸 본받아 갑골점을 쳤을지도 모릅니다.....실제로 소부리씨는 오래 전부터 짐승의 넓적한 뼈를 사용하여 뼈점을 쳐왔지요.....상(은조선)나라에서도 거북의 등껍질을 쓰기에 앞서 소부리씨(예맥족)와 같은 짐승의 넓적한 뼈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근세고려에 들어서면서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뛰어난 재질의 종이라 만주와 몽골, 중원대륙 등 아시아 전지역에서 닥나무종이가 최고의 상품으로 떠올랐죠. 그래서 근세조선의 닥나무종이 한지가 유명해진 것이죠. 타림분지塔爾木盆地(탑리목분지)는 David.H.Childress의 <중국..중앙아시아..인도의 잃어버린 도시들>이라는 글에서도 기원전3415년까지 민물호수로서 이루어졌으며 이 커다란 호숫가 근처에 이 곳으로부터 나온 타림강과 여러 시내들이 흘렀다고 하였습니다. 고비사막은 이때 기름진 들로서 호수의 기슭에 있었는데 곤륜산맥이 타림호의 남쪽 언저리를 이루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지구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자연환경을 끊임없이 변화시켜왔고 변해갈 것입니다. 특히 노아의 방주로 유명한 홍수가 일어나던 때가 기원전24C입니다. 이 당시의 홍수는 지금의 터키지역인 소아시아뿐만 아니라 중동,동아시아 등 전세계 적인 홍수기였죠

한웅배달국은 지금의 미국이 51개의 나라인 여러 주들이 뭉친 연방국가처럼 크게 아홉나라의 연방국가였죠. 물론 한웅배달국의 후예인 단군조선국 역시 여러 제후국을 거느린 연방국가였습니다. 한웅배달국의 연방제후국 중 하나였던 수메르(수밀이)는 외세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과거 서양에서 노아의 방주로 일컬어지는 전세계적 기상이변인 홍수에 의해서였습니 다. 물론 그 지역마다 홍수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어느 것은 정사로 또 어느 것은 신화, 종교서적(성경) 등등의 방식으로... 이 대홍수라는 천재지변으로 수메르는 무너진 겁니다. 그 뒤 백인민족인 아카드족에게 혼혈정책을 강요당하고 중동을 지배한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당하고 말죠. 중원대륙에 있던 한민족연방국가들 그것도 상(은조선)나라 이전의 요,순 임금시대나 하왕조를 비롯 여러 우리 제후들이 홍수의 범람을 막으려고 한웅배달과 단군조선에 도움을 청하고 받은 기록도 있죠

그래서 그들은 치수법을 배워 범람하는 홍수로 인한 비옥한 토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징기스칸이 유라시아에 대제국을 세웠을 때 한웅배달이전 한민족의 시조 환국을 재현한다는 뜻에서 제후국의 이름을 차카타이 한국,오고타이 한국,킵착 한국, 일 한국 등으로 붙이죠

제후국의 왕 또는 어떤 지역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말인 한(汗)은 하늘을 뜻하는 글자인 한(桓)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주: 단군조선 이전의 우리나라는 한국(桓國) : 고대한국--> 배달한국)즉 한(桓)에서 한(韓), 한(漢), 한(汗)이 나온 것입니다.] 또 한(汗 : HAN)이 몽고로 건너가 칸(KAN : 징기스칸)이 되었으며, 징기스칸의 유럽 정복 때 서구로 건너가 킹(KING)이 되었으며, 그후에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몽골의 칸(KAN)이 서구의 킹(KING)이란 단어로 변화되어 자리잡는 이러한 과정은 하버드대학에서의 연구결과로도 발표된 바 있습니다. 

본인이 처음 한국상고사의 제왕의 계보를 보고 처음에는 의문이었습니다. 집권기간에 따른 수명이 너무 길어 허황되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여러 곳에서 조사를 한 결과 꼭 허구라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들의 연세를 보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상식으로 도저히 수긍이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잖아도 한국 상고사를 부정하고 왜놈들과 쥐나 그리고 한국의 식민주의사관 학자들에게 좋은 공격 목표의 빌미가 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부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야곱은 147세였으며 아브라함은 175세, 모세는 120세, 아담은 930세, 그의 아들 셋은 912세, 노아의 방주로 이름난 노아는 950세까지 살았다는 기록에 비교하면 참 양호한 편입니다

그렇다면 보통 인간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여기서부터는 예사체를 쓰더라도 양해 ^^;) 이탈리아의 통계학자 보디오는 인간수명의 한계를 70세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상식적인 상한선으로서 여러 선진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프랑,파류,파블로프와 같은 학자들은 100세까지는 생물학적인 접근이 가능하 다고 말하고 있고 르브넬이나 봐만 같은 학자는 115세 전후를 인간 수명의 한계로 보고 있는가 하면, 메치니코프,풀무산,보코모렐 같은 학자들은 150~160세로 주장하고 있다. 한편 하르렐이나 하벤 같은 학자들은 인간의 수명을 성숙에 필요한 시일의 10배로 보고 있어 200세까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학자들의 이론이다.

그럼 실제로 공식기록에 나타난 장수의 기록을 살펴보면, 덴마크의 도라켄버그는 146세, 스코틀렌드의 잰킨스는 169세, 노르웨이의 요셉 슬린트는 160세, 콜롬비아의 자봐이어 페이러라라는 169세, 헝가리의 야노스 로웬 부부는 모두 장수하여 남편이 172세, 부인이 164세까지 살았는데 공교롭게도 한날 한시에 숨을 거두었고 그 머리맡에는 116세의 아들이 임종을 지켜보았다

구 소련의 코카서스 지방에 살던 사라리 오구리무스리모프는 1973년 9월에 168세3개 월만에 죽었는데 그 당시 아들은 143세였고 막내손자는 93세였다고 하며, 이 지방에는 인구10만명당 10명의 비율로 100세이상의 장수노인이 있다고 한다. 코카서스 지방 외 남이 에콰도르의 발가봐, 캐시물 지방의 훈사왕국 등도 장수자들의 천국으로 100세이상은 보통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서남 해안의 한 마을도 100세 이상된 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장수 마을로 보도된 적이 있다. 그 외 쥐나 방중술의 원류로 알려진 유해첨은 600세, 이청운 선인은 257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1928년에 상해신보에 보도됐으며 이팔백은 무려 800세를 살았다고 한다. 달마대사는 280세, 히말라야의 성 자 바바자는 600세를 살았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위 글이 무조건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무리라고 본다

100세 전후의 집권기간은 그 개인의 집권으로 보아도 무방하고, 그 이상의 수백년의 집권기간은 개인의 집권이 아닌 왕조의 집권이라는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나라이름은 동명으로 유지되면서 왕조만 바뀐다는 말이다. 나라를 그대로 이루고 있으면서 왕조만 교체된 역사도 세계에는 부지기수고 나라가 없어졌다가도 다시 그 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며 그 국가명을 쓴 역사 역시 부지 기수죠..... 가까운 예로 유럽의 왕조들이나 아랍의 국가들을 둘러봐도 알 수 있을 겁니다


▒ 서량지(徐亮之) : 대만대학 교수>>>대만대학의 서량지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4천여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동이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고 하였으며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 "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고 하였다

▒ 왕동령(王棟齡) : 중국 역사학자>>>중국학자인 왕동령(王棟齡)은 『중국사(中國史)』에서 "한족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의) -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등 지방은 본래 "묘족(동이)의 영속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蚩尤)였다" 고 주장하고 있다

▒ 임혜상(林惠詳) : 중국 역사학자>>>임혜상(林惠詳)은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순(舜)임금은 동이의 사람이다고 하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순임금은 은나라 사람의 조상임을 추측하여 알 수 있다. 은나라 사람이 바로 동이인데 동방에서 흥기하였다
은나라가 망한 뒤 기자(其子)가 동쪽 조선으로 달아난 것은 조선 역시 은민족의 소거지(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퍼온이 주: 은민족은 (고)조선민족과 같은 민족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고 하였다

▒ 시로코고르프 : 소련 역사학자>>>소련의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는 『중국사』 에서 "BC 3,000년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 양자강 서강의 중류이동(中流以東)(강의 가운데 의 동쪽)의 중간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 고 주장하였다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Schliemann, Heinrich]이 트로이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트로이의 존재는 그냥 신화의 일부나 호머의 이야기로만 치부되어 지금도 진 실이 아닌 허구로 여겨졌겠죠. 그리고 일반사람들이 우리고대사가 거짓이라 치부하는데 그것은 짱골라나 왜의 방해 때문에 우리의 유적을 조사하지 못 해서일뿐이죠. 연구나 조사할 노력조차도 안 해 놓고 무조건 거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식민사학자들이 실증주의를 주장하는데 그럴수록 더더욱 우리의 유적을 알아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거짓이라는 딱지를 붙인다는 것은 실증사학에 위배 되는 짓 곧,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승자박이죠

녹도(신시)문자는 산동성과 강소성,안휘성 어림의 대문구문화 유적지의 질그릇에 새겨진 그림과 평안도 영변도호부 읍지인 영변지에 적혀져 있는 글씨 그리고 만주 흑룡강성 영안현 서남쪽에 자리잡은 길림성 경박호나 두만강 700여리의 송화강 기슭에 있는 선춘령과 부오소리지역의 새김글씨에 보입니다. 나중에 배달사람 공손헌원(황제)의 일을 적었던 같은 배달사람인 창힐이 일찍이 한웅 배달에 들어와 자부선생에게 배울 때 녹도(신시)문을 처음 보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를 깨우쳐 황제(공손헌원) 밑에 일하면서 이 녹도(신시)문을 바탕으로 약 간 고쳐 만들어 새 발자국 모양으로 된 한(韓)자의 실마리를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한(韓)자의 원형인 한웅배달국시대의 녹도(신시)문자와 한글의 원형인 단군조선국시대의 가림토를 썼던 것으로 보이는데 은조선의 갑골문자보다 더 오래된 내몽골지역의 홍산배달문명에서 신시문자의 형태 의 증거를 찾았다는 지나학자가 고백을 한적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자신들의 역사가 아니라 해서 짱골라들이 그 유물들을 도로 숨기고 그 유적지역을 군사통제구역으로 하여 아무도 접근 못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누가 증거를 들이대라 하지만 과거 우리 영토를 빼앗긴 상태니 가서 보고 확인할 수 도 없죠

이미 홍산배달문명은 세계학자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죠, 그리고 해외사이트들에도 그런 사실이 돌아다니고 홍산문화,하가점문화,장강문화 등 여러 배달 문화 등에 관 한 학자들 논문이 발표되고 있죠. 지금 짱골라들은 세계 여러 학자들의 유적방문조사 를 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적들마저 나무를 심어 파괴하거나 댐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물속에 수장시키거나 하는 방식 등으로.... 자신들의 유적이라고 우기는 놈들이 자기 스스로 그 유적들을 파괴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배달민족이 이룬 문명의 역사 진실이 밝혀질까봐 그들은 그 유적들을 군사통제구역으로 해서 아무도 못 들어가게 막고 언론통제를 하고 있죠. 물론 인터넷 포털의 야후나 구글에 협박을 해서 진실을 가리고 조작하는 것도 서슴치 않죠

현재 티벳,위구르 등을 비롯한 수천만의 이민족들을 몰살시키고 여러 소수민족들을 폭력을 동반하며 역사공정하는 등 끊임없이 조작된 내용을 세뇌교육시키고 있죠. 하루라도 빨리 여러 민족들을 짱골라화시키기 위해... 법륜궁 수련자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장기 적출은 기본이죠. 근래에 뉴스나 신문기사에서도 나온 내용이니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몇몇 어떤 내용들은 한국내에 친쥐나를 동조하는 무리가 있는지 몇몇 내용들 은 아예 인터넷접근을 막고 있더군요. 법륜궁을 나타내는 파~뭐시기라 치면 마치 음란성의 내용을 차단하는 양 접근이 안 되죠. 한국정부의 통신부에서 음란사이트 차단과 함께 같이 도매급으로 취급하는 모 양입니다

독일학회에서도 짱골라들의 저런 유적개방을 막고 학자들 조사를 막는 것에 대해 항의를 하는 중이죠. 전에 러시아학자들이 티벳의 무슨 피라미드라나 몽골 등의 동아시 아의 유적들에 대한 학설발표를 짱골라들이 말도 안 되는 걸로 덮어씌우기 바쁘더군 요. 혹시 매일 짝퉁만 생산하는 짱골라들이 러시아나 미국,독일을 비롯한 유럽보다 과학이 앞선다는 생각은 안 하겠지?

러시아 학자들의 티벳의 피라미드 발견이나 몽골과 만주,연해주의 유적들 조사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죠.독일학자들의 만주,몽골지역의 고분,피라미드 등 조사와 함께 말이죠. 오마이뉴스나 중앙일보에서도 일부 다루었던 내용이니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혹은 동북공정이다 서북,서남공정 등으로 날조하고 언론통제하는 짱골라 등의 행태나 쥐나학자들의 태도가 모범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겠죠.

짱골라들과 왜놈들의 만행이 굉장히 합리적으로 보인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뿐... 뭐 한국에는 모든 이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국마저 팔아먹는 친쥐나,친왜,친미 등의 극우매국노들이 판치는 나라니.....진실된 자신의 역사마저 부정하는 나라이니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죠

KBS역사스페셜시리즈에서도 홍산문화 등을 비롯한 여러 배달문명에 관한 내용을 방영한 적이 있고, MBC에서도 홍산배달문명을 뉴스형식의 방송을 한 적 있죠. 그리고 연세대교수가 요하문명론 이라는 책도 올해에 출간했죠

한웅배달국의 신시에서 나와 중원대륙의 산동성,하남성을 경유한 배달민족 복희씨는 하남성의 진陳에 터전을 잡게 되죠. 이때 복희씨와 함께한 배달민족 비치수리씨(화서華胥부족)들은 새부리(산동성)의 지 마울(제음濟陰)지역에 살림터를 마련하여 크게 일어나게 되고, 복희씨와 함께한 배달민족 누에검씨(뇌신雷神부족)들 역시 산동성지역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 누에검씨들은 일찍이 산뽕나무 잎을 먹고 아름다우면서도 고운 실을 뽑아내는 천잠天蠶(하늘누에)을 잘 다루었는데 복희씨를 따라 가는 중 산동성을 터전으로 잡게 되어 이 산동지 역은 산뽕나무 누에비단실을 만들어내는 누에치기가 성행하게 되죠. 배달민족인 복희씨는 대략 기원전 3528~3413년경의 사람으로서 음양오행의 환역법桓易法을 갑자甲子로 시작하는 복희팔괘를 창안하게 됩니다. 그의 무덤은 현재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부산鳧山의 남쪽에 있습니다

참고로 환역(桓易)이란 한웅배달국시대부터 단군조선국시대로 전래된 철학으로서 세상만물의 구성과 그들 사이의 운행이치를 밝힌것이죠. 훗날 복희가 한웅배달국의 환역을 이용하여 新易을 창안하니 이를 희역(羲易)이라 하며 한웅배달국의 갈래왕조들인 하(夏)나라 때는 연산역(連山易)으로, 상(은殷조선)나라 때는 귀장역(歸藏易)으로 그리고 주(周)나라때는 문왕과 그 아들 주공이 이를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풀이를 해 놓은 주역(周易)으로 변모되어 전해지게 됩니다. 하여튼 여기서 눈여겨 볼것은 한웅배달국시대의 자부선생이란분이 삼청 궁에서 윷놀이를 만들어 환역을 강연했다는 것이죠. 이러한 기록으로 본다면 환역의 역사는 단군조선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듯 합니 다. 환역의 그당시 모습은 알길이 없으나 윷놀이를 가지고 강연하였다 하므로 그것을 단서로 삼아 추론은 가능하리라 봅니다

지나支那란 진시황의 진나라 진(秦)’의 음 [chi’n]이 전와(轉訛)하여 서방 제국에 치나(Cina) ·틴(Thin)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지나支那란 용어에는 한민족의 갈 래 민족 지류란 뜻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쥐나 짱골라들의 사서를 주의깊게 들여다 보면 옛날부터 쥐나족들은 북으로는 황하의 위쪽과 동으로는 태행산맥을 경계로 결코 발을 들여놓지 못 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왜 그들의 도읍이 장안과 낙양을 벗어나지 못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황하를 경계로 한 하남에서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 시기 북경을 비롯한 그 주변의 모든 땅은 배달민족의 것이었으며 황하 위쪽은 짱골라 자신들이 말한 것처럼 서쪽은 서융과 백이 동쪽은 북융과 산융이라는 융적의 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진시황이 동으로 순행할때도 그렇고 초한의 싸움도 어디에서 주로 일어났는지 보시면 금방 알게 될 겁니다.

참고로 서융,북융,산융 등으로 불리는 융족은 사실 배달민족의 갈래입니다. 서융만 해도 한웅배달국 초기에 배달민족인 반고가 가서 세운 배달제후국의 사람들입니다. 백이의 이夷는 배달민족의 또다른 표현이니 말 안해도 우리 민족이란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한웅배달국 갈래왕조입니다. 진나라는 배달민족 그 중에서도 흉노계의 나라입니다. 배달민족은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으로 시대를 변천해가면서 여러 민족으로 나누 어지는데 북쪽은 배달계 흉노로 서쪽은 배달계 융족 등으로 동쪽은 배달계 동이로 중원대륙에는 회이, 견이, 풍이 등 여러 배달계로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배달민족 말할 때 구환九桓,구이九夷 등으로 불리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갈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흉노는 돌궐,선비,몽골,거란,오환,저족 등으로 갈라지죠. 융족은 이후에 강(티벳)족과 흉노의 갈래들인 달단(타타르), 중앙아시아의 여러 부족 들로 갈라지고 합쳐지는 등 변화를 거듭합니다. 동이족 역시 예족,맥족,환족과 숙신,말갈(여진)족 등으로 갈라지고 합쳐지는 변천을 겪습니다. 서흉노는 유럽으로 진출하여 아틸라의 천하를 이루어내죠. 아틸라의 죽음 이후로 그들은 지금의 헝가리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선비족은 수나라와 당나라 북위 북연 등 여러 나라를 세우죠. 거란족은 요나라를 세우고, 여진족은 금나라,청나라를 세우죠. 몽골족은 원나라를 일으키고, 우리는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남부여(백제),대진국(발해) 등을 세우죠. 서돌궐(투르크)은 아랍으로 건너가 오스만투르크(터키)를 이룩하죠

쥐나 짱골라들의 왕조는 한,송,명 셋뿐이죠. 그 외의 대부분 왕조들 삼황오제시대,하,상(은조선),주,춘추전국,진,수,당,요,금,원, 청 등과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남부여(백제),대진국(발해) 등 모두는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의 제후국 또는 갈래왕조국가들입니다

게르만족이 서고트족,동고트족,반달족,알란족,주트족,색슨족,앵글족 등으로 나누어졌었죠. 배달 계열 훈족(서흉노)의 유럽침입으로 이들 게르만족계열이 로마(이탈리아), 브리티니아 (영국),갈리아(프랑스),이베리아반도(스페인,포르투갈) 등 서유럽으로 이동해 퍼지죠

이 사실들에 관한 학자들의 논문도 여러 편이고, 독일의 ZDF방송국에서도 훈족에 대해 다큐방송도 있었죠. 어차피 훈족이 흉노계라 하든 투르크(서돌궐)계라 하든 어차피 배달갈래민족이죠. 배달갈래 흉노계가 나중에 선비,오환,돌궐,거란,몽골,저족 등으로 나누어진 것이니...

보다 많은 이들이 알기를 바라며 옛고토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유쾌,상쾌,통쾌한 팍스 코리아나가 되도록 우리 모두 다물하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근세조선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왜국은 1592년이후부터 포르투갈의 조총 등을 비롯한 문물,난학(네덜 란드 학문),프랑스,독일,미국 등 많은 서양의 문물을 300년간이나 꾸준히 받아들이 고 발전시켜 지금의 강국이 되었습니다. 물론 독일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수십개의 소국으로 갈라진 약소국 독일은 끊임없이 주변 유럽의 열강에 당해왔습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그로 인한 과학의 집중적 투자 등으로 독일은 하나의 나라로 통일할 수 있었으며 그 저력 으로 세계1,2차대전까지 일으키는 최강국이 된 것입니다. 서양은 동양으로부터 문물을 받기 시작해서 그리스,로마 문명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죠. 하지만 중세시대의 미쳐버린 종교때문에 건축기법 중 시멘트공법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암울한 시대죠

하지만 아랍의 문명을 다시 받아들이면서 르네상스를 이루어 과거의 학문,문화 등을 서서히 되살리기 시작하죠. 세계최초의 종합병원이나 도서관 아라비아 숫자 등 뛰어난 동양 아랍문명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었죠. 하물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의 여러 고대 저서 등이 아랍의 도서관에 보관되지 않았다면 아마 서양의 문명은 벌써 사장되어 한참이후에나 다시 발전을 이루어 나갔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전에 EBS교육방송에 방영된 BBC역사관련 다큐멘터리 등에서 나왔던 내용입니다. 배달부터 시작하여 고구려,발해까지 위대 한 선조들이 이룬 업적을 짱골라에게 우리 조상까지 다 빼앗기고 역사마저 빼앗기게 만든 그 후손이 못 나서 그렇지 그 조상이 못 난 것은 아니죠. 아무리 뛰어나도 그 후손이 못 나면 아무 소용없죠. 우리의 전례뿐만 아니라 잉카,마야,캄보디아의 크메르, 인도의 여러 문명,종교때문에 모든 발전이 거의 정체되게 된 근동,중동의 아랍문명 등등...

서양 역시 마찬가지죠. 동양의 문명이 없었으면 다시 르네상스를 일으키지도 못 했죠. 또 회계제도는 우리나라도 개성상단의 사개송도치부법이라는 훌륭한 복식부기법이 예전부터 사용되어왔고 시스템도 현대 서양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쳐지지 않습니다. 숫자는 한웅배달시대에는 산목으로, 단군조선시대에는 산대 등으로, 시간이 많이 흘러 근세조선에 들어서는 쥐나의 숫자나 조선산이라는 고유숫자도 사용했습니다. 물론 숫자표현체계는 아라비아숫자가 더 쓰기 편한듯 싶습니다

이 우리부기법은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있어 1910년대 오스트리아 경영학회에 보고되어 고려의 회계시스템이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고 주장되었으나 왜국의 학자가 이를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당시 왜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우리나 라의 상황때문에 묻히게 됩니다. 물론 금속활자에 대한 앞선 사용 또한 마찬가지죠. 참고로 서양이 동양을 서서히 따라붙다가 17세기초에 이르러, 여러 분야의 발전 에서 조금씩 추월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서양이 세계대항해시대를 열게 된 배경 중 자연의 영향도 큽니다.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유럽은 소빙하기시대였거든요. 그래서 최북단에 있던 영국은 식량문제 등을 비롯한 여러 악조건을 타개하기 위해서 상공업을 장려시키고 과학을 위시한 학문을 공부하고 세계로 뻗어나갈 필요성이 컸죠.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끝내는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그리하여 전세계에 미국,호주 등 의 영연방이 생기게 된 기저가 되죠

7000년을 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하다 그 후 2000년은 혼란을 거듭하다 이제는 이렇게 반도에 처박혀 옛 영광은 다 망각하게 되었지만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다른 이들이 하는데 위대한 문명의 후손인 우리가 못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는 돌고 돕니 다 과거 반도신라나 근세조선같은 어리서은 시대가 있었지만 그들 백성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위정자들이 나쁜 것이죠

백성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악용한 위정자들 이 나쁜 것입니다. 김씨,이씨,박씨,고 씨,강씨,연씨 등의 각 가문이나 혹은 만주,연해주,경상도,전라도,함경도 등 각 지방이나 또는 각 왕조 등에는 언제나 영웅과 매국노가 있어왔습니다. 그러니 하나를 보고 나머지마저 나쁘다고 판단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자제했으면 합니다. 전두환이나 노태우 같은 쓰레기도 있고 한국동해영역을 왜놈들에게 거의 팔아먹은 김대중도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에는 매국노들을 비롯하여 쓰레기 정치가들이 각 지방색을 들먹여서 가뜩이나 좁은 나라의 국민들을 쪼개고 서로에게 불화를 일으키도록 만들죠. 우리는 절대 그들의 어리석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됩니다 반도내의 배달쥬신족이 다른 지역의 같은 배달쥬신족들을 배척해서 수많은 전쟁을 스스로 불러낸 것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는 통합하여 앞으로 나아가야지 그렇지 못 하고 분열하면 지금의 한국은 아니 반도의 배달쥬신족은 또다시 수많은 종족으로 갈라지고 약해지겠죠. 우리는 합쳐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통합되고 강해져야 지금의 몽골내각이 한국에 연방의 손길을 보내는 것을 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주를 아우르고 조선족을 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고대의 배달과 쥬신 역시 지금의 미국처럼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많은 제후국을 거느린 연방제국이었습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끊임없이 합치고 강해져 나아가는 길입 니다

그리고 이 말하는 본인은 경상도태생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자랑스런 배달쥬신의 후예입니다. 다시 한번 고토를 회복하고 배달쥬신 과거의 영광을 재현했으면 합니다. 세계를 주도하는 팍스 코리아나를 위한 그 날까지 우리 모두는 다물하도록 노력해야 합 니다

그래야 다물을 이루어 다시 영광의 진정한 최강 대한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최소한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정신의 회복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역사부터 먼저 다시 세워야 하겠죠. 역사란 현실의 거울이요 미래의 지표라고 합니다. 진실되고 확실한 역사관정립은 분명히 후대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자 우리 미래의 도약대가 될 것입니다

평화를 바라면 전쟁을 대비하라!란 말도 있죠.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기회가 와도 준비소홀로 실력이 부족하여 그 기회를 잡지 못 하겠죠. 하물며 주변4강국에 둘러싸인 한국은 풍전등화의 위기라 볼 수 있습니다. 손 놓고 있다가 는 평화는 커녕 모든 것을 잃게 될 겁니다. 과거의 기상을 잃어버린 근세조선만 봐도 알수 있죠

[소위 세계화]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하게 확립된 위에 이뤄져야 [진정한 세계화]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각 국가의 역사교육,민족교육,국민교육이 바로 [그 나라, 혹은 민족의 정체성]을 기르는 교육이죠.[시민교육]은 세계인으로서 갖춰 야할 [보편적인 윤 리/덕목]을 가르치는 것이죠. 따라서 [역사교육]은 없고 [시민교육]만 한다는 찌질이의 절규에 정말 웃기는 일입 니 다.

(옛날 덴마-크의 "그룬트비히"라는 사람은 [너는 크리스찬이 되기 전에 먼저 덴마-크 인이 되라]고 했죠.) 유태인들이 부르짖는 시온주의, 독일의 게르만주의 운운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입니다. 미국도 다민족국가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민족사회,인종사회로 굴러갑니다. 그에 따라 인종차별도 심하고... 그래서 미국 정치계에서 스패니쉬계나 흑인종,동양인 등을 비롯한 각 단체들의 힘겨루기가 극심합니다

근데 미국내 한국사회만 결집이 안 되는 편이죠. 그래서 미국에서 부당한 이익을 받는 면이 더 큽니다. 흑인이나 스패니쉬계 등 은 각각의 정치의원이나 이익,인권 등 다 양한 수단을 마련해 미국 정부에 압력을 주어 보다 많은 것을 이끄는 것에 비하면 정 말이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가 되고 있는 유럽공동체마저도 각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합니다. 물론 미국도 마찬가지

그런 기반이 되는 정체성교육도 없이 세계화를 추진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사상누각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보스니아 내전이나 아프리카의 여러 내전과 같은 위험을 안게 되 는 겁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나 슬로바키아로 나누어진 것이나 구소련이 무너진 후, 여러 국가가 들어선 것만 봐도 현재는 한울타리의 세계화라는 이 면의 신민족주의시대로 볼 수 있는 겁니다. 하여튼 자신의 주변도 살피지 못 하면서 인류애,세계화를 부르짖는 찌질이들이 된다면 우리는 곧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폭풍전야의 풍전등화같은 어려운 상황 에 놓여있는 겁니다. http://blog.daum.net/hearo9mars/3027535
 여기 가시면 현재 한-몽골 국가연합에 관한 내용이 있으니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홍산배달문명의 발견이 세계 학자들 사이에는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으나 쥐나 짱골라들이 학자들 유적방문조사 자체를 막고 있으니 정말 답답한 실정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알려고 강해지려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처음 시작은 단일민족으로 시작했을지 모르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민족이 여러 계통으로 나누어졌죠. 그래서 지금으로서가 아닌 오래전부터 우린 다민족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처음에는 하나였지만 시간이 흘러 먼 친척이 되고 그 후 에는 남남이 되어 다시 서로 만나 부둥켜 살아가는 세상처럼 말입니다 수많은 배달쥬신족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여러 분파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기원은 배달쥬신족이라는 것에서 시작되지만 그 세부의 역사에 있어서는 그 분파된 민족의 고유한 역사인 것입니다. 역사는 그 민족의 것이지, 시대적인 영토 변화에 따라 역사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의 흥망의 역사에 따라 그 영토의 변 화가 있을 뿐이지요... 몽골의 역사는 몽골 그 자신들의 것이고, 훈제국의 역사는 헝가리의 것, 오스만투르크 (서돌궐)역사는 터키의 것,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의 역사는 대한민국인 것처럼 우리 형제들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억지를 부리는 짱골라들이 문제입니다. 치우천황이나 태호복희씨 등 남의 조상도 자기 조상이라 하고 짱골라의 한,송,명 의 3왕조를 제외한. 수많은 배달쥬신왕조들이 이룬 발견,발명,업적 등을 자기 것이라 고 어거지를 부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짱골라의 억지에 대해 우리는 보다 정확히 민족을 분류하고 그것에 따라 역사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려고 할 뿐이죠

만약 누가 우리 자신이 역사나 민족을 너무 확대시킨다고 성질을 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것은 사대주의 매국노나 짱골라나 쪽바리 등의 의견에 동조하는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배달쥬신족이 시간이 지나 이렇게 여러 가지로 나누어졌다는 사실만 언급하려 하고 끝내려 하죠 그러나 짱골라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니, 그것에 대해 배달쥬신족이 나누어졌다고 말하는 것 이상의 사실을 지적하며 그들의 무지를 일깨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원인을 제거해야 되는 데, 그 문제의 원인과 원인제공자인 짱골라나 쪽바리에게는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서, 그에 대해 지적하는 우리자신 스스로를 타박한다면 말이 안 되죠. 그런 어리석은 짓은 공정하지도 못 할뿐더러 스스로를 자학하는 꼴이죠

혹시 헝가리나 터키의 유럽,근동 혹은 이전 타타르 등의 중앙아시아 등의 민족들이 우리와 많이 다르다고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래동안 꾸준히 동양의 피보다 서양의 피가 많이 보급된 하나의 결과일뿐입니다 헝가리나 터키 중앙아시아의 여러국가들의 그 시작은 배달형제들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브라질 등을 위시한 남미에서는 같은 부모밑에서라도 황인종, 흑인종,백인종의 다양한 자식형제들이 태어납니다 유럽이 중남미를 침략하는 과정 중에 워낙 많은 피가 섞 여버렸기 때문이죠. 그들의 가계를 보면 인디언,독일인,스페인,포르투칼,영국인 등
다양합니다. 그래서 남미에서는 같은 친형제끼리라도 피부색이 다른 것이 다반사입니다

이는 이전에 KBS나 MBC 등의 다큐멘터리 등을 비롯하여 세계각국 유명 방송국들에서도 다룬 다큐나 뉴스,과학 등 여러 방송물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한번 참고해도 좋겠네요. 그리고 조선족이라 나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뒤에서 못된 짓만 꾸미는 짱골라가 나쁜 것이죠

 

<<'졸본부여 고구려의 정복활동'과 '한국의 국제 교류' 클릭참조>>


짱골라학자 낙빈기 금석문에도 어느 정도 밝혀져 있다.

상(은)나라와 주나라가 모두 동이족 국가이며 은나라의 갑골문은 유명하죠. 또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나라가 배달 9夷의 후손이란 것도..

홍산요하문명이나 양주장강문명, 하가점문화 등 모두 배달겨레들이 이룬 것이라는 고고학적 사실이나 논문도 계속 나오고 있는 중이다.

짱골라들이 지들 조상이라 억지 부리는 복희, 신농, 요임금, 순임금 등 삼황오제마저도 모두 배달겨레들이죠.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배달 서융계 국가죠. 그러니 짱골라들이 역사공정하려고 발악할 수 밖에...

 

우리 형제민족들 국가인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 수많은 북방민족왕조들하에서 짱골라 한족은 똥개와 동급인 최하층계급이었죠.  원나라 치하에서 가장 높은 계급이 몽골인이었고 그 아래를 고려인, 거란인, 여진인, 승려들인 라마를 비롯한 티벳인, 이슬람인 등이었죠. 짱골라는 아예 사람 취급도 못 받는 노예계급이었죠.

또 청나라 조정은 중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귀순한 한족(漢族)들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고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나 저항하는 명나라 군인들이나 한족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학살합니다.
그리고 한족들의 복종의 징표(徵標)로 치발(& #34201;髮 : 쥬신 고유의 머리양식)과 만주 옷[滿洲服]을 입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남기면 머리카락이 남지 않고, 머리카락을 남기면 머리가 남지 않는다 [留頭不留髮 留髮不留頭]."는 유명한 포고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청나라는 한족(漢族)들의 단지 일시적으로 고개 숙이는 것일 뿐"이라는 사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치발령(& #34201;髮令)과 만주 옷의 착용을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벌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간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타면 으레 나타나는 한족(漢族) 특유의 쥬신에 대한 욕설, 경멸적인 서술이나 패러디와 같은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장정롱(莊廷& #37992;)이 편찬한 『명사집략(明史輯略 : 1660)』에서 청 초기의 황제들을 묘호가 아니라 그 이름으로 부르고 만주 연호 대신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자 청나라 조정은 이 책의 출판과 관련된 사람 70여명은 물론 이 책을 구입한 사람들까지 처형하였습니다.

박창규님의 글을 잠시 인용해보겠습니다.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는가? 그는 인도에서 태어나 중국에 불교를 전할 뜻을 세우고 히말라야를 넘어 동쪽으로 갔다. 이처럼 뜻을 세운 사람 하나의 흔적도 분명히 남아있는데 거대한 종족의 무리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이것도 역사를 찾는 후세의 노력부족에서 원인을 찾아야하는 문제겠지만 상상력의 부족에서 오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 사례 하나를 들어 좀더 살펴보자.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 이것이 곰 토템족과 호랑이 토템족의 투쟁으로 곰족이 승리한 역사의 기록이라는 점은 역사가들도 지지하는 설이다. 곰족이 우리가 말하는 단군조선의 정통구성원이었다면, 호랑이족은 누구였으며 정통성 다툼에 패배한 후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단군신화에서 나타나는 상징성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으므로, 실제로 역사와 연결시켜보자.
단군왕검의 출현은 환웅 신시배달국의 분열과 멸망을 의미한다. 이 사건은 단순히 환웅이 아들을 보고 아들이 왕이 되는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왕조와 왕조의 교체를 너무나 함축적으로 설명한 신화다.
창세기 1장1절과 2절 사이의 간격만큼 먼, 그런 거리를 단 한 사건으로 연결한다. 신화의 용도는 그런 것이다. 천년의 비약이 환웅과 웅녀의 가족사에 숨어있는 셈이다. 이 연결고리에 곰과 호랑이의 설화가 끼어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 그대로 원래 함께 살았던 곰과 호랑이가 단군을 기점으로 헤어진다는 의미다. 그것도 마늘과 쑥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곰은 환웅의 적통을 이어받을 옥동자 단군을 낳지만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도망간다. 그리고 그 후로 그들의 흔적은 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호랑이는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호랑이족이 정통성에 패배해 권력을 잃고 피지배층이 되었다고 상상할 수도 있고 멀리멀리 다른 땅을 찾아 떠나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흔적을 찾아 떠나보면 호랑이 토템은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중국 동북부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내용의 설화가 전하고 있고 산동성에서 청나라 때 발견되어 다시 세워진 고대 사당에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판박이한 듯한 그림이 있는데, 여기서는 곰이 아니라 호랑이가 적통을 잇는다.
호랑이라는 점만 빼면 단군신화와 이야기 줄거리가 같은 벽화가 걸린 이 사당의 이름을 '무씨사당'이라고 한다.

 

<<'무씨사당 화상석'과 '배달겨레' 클릭참조>>

 

나는 호랑이족의 출현을 중국왕조의 출현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물론 이때만 해도 중국적 특징보다는 북방 기마민족의 흔적이 더 많은 고대중국의 국가다. 실제로 초대 단군시대는 중국의 요임금과 맞물려있고, 위서논쟁에 휘말리고 있는 한단고기가 주장하는 대로라면 요임금은 한웅시대에 배달국에 도전했던 황제(黃帝)헌원 이후 최초로 반란을 일으켜 독자적인 나라을 세운 중국왕이다. 한단고기가 조작이라고 하더라도 요임금이 중국의 동북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중국 역사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요임금의 어머니는 동쪽 바다로 놀러갔다가 용에게 겁탈당해 요임금을 낳는다. 특히 요임금이 천거하여 왕이 된 순임금의 아버지는 고수라는 사람으로 중국이 아닌 동쪽 나라의 관리였다. 한단고기의 연대기를 믿기만 한다면 순임금이 고조선 관리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증거할 수 있다.
이 때만해도 중국과 조선이 민족국가로 분리된 때가 아니었으므로 이런 가능성은 충분하다.

즉, 요임금이나 순임금은 중국보다는 우리종족에게 더 가깝다는 의미다.(그러나 일단 국수주의적인 해석은 삼가자)

요순 뒤를 잇는 하나라와 은나라에 와서 드디어 우리는 호랑이의 정체를 본다. 환웅의 배달국에서 함께 살았던 곰과 범은 아마도 누가 진정한 계승권자냐라는 적통의 문제로 갈라선 것으로 보인다.
단군신화는 그 사실을 매우 상징적이지만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범은 못 참아 떠나갔고 곰은 사람이 되어 적통을 이었다는 거다. 적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곰족과 갈라선 범족은 이미 환웅시절부터 광범위하게 대륙에 흩어져있던 夷족(배달족)을 결합하여 곰족의 조선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그 첫 나라가 상(은)나라다. 그들이 배달범족이다. 상상을 돕기 위해 이렇게 정리해보자.
한웅의 신시배달국 시절에 많은 종족들이 연합을 이루어 살았다. 물론 그 중 적통은 고조선으로 나라를 이어간 곰족들이지만 다른 많은 종족들(말갈, 흉노 등등)과는 형제국이었을 것이다.
적통을 잇는 과정에서 범족이 분리되자 그들은 곰족과 대립하게 되었고 다른 형제국들과는 달리 중원으로 흘러들어가 중국족, 즉 화하족과 혼혈문화를 이룬다. 중국문화 자체가 혼혈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상당부분 기마종족의 특징을 지키며 나라를 이어 간다. 이 배달범족은 도대체 언제까지 그 고유성을 지켰을까? 지금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진흙탕에 묻혀 고유함을 보기가 쉽지 않지만, 우리는 상당한 사료를 근거로 이 흔적을 한나라까지 연장할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우선 주나라에 패퇴한 기자가 동북으로 가서 조선의 제후국인 번조선의 왕이 되는 장면에서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연대기로 보면 진시왕 시절에 해모수가 부여를 세우고 조선을 폐했으므로, 한나라에 망했다는 조선은 고조선이 아니라 이 번조선이다.) 성삼문이 읊었다는 백이숙제의 수양산 이야기도 이 시절의 것이다. 하는 짓으로 보아 틀림없이 배달족이다...이야기를 이어보면, 상(은)나라가 망한후 주나라가 섰지만 많은 수의 배달범족이 여전히 중국땅에 살았다. 그래서 광범위한 혼혈이 이루어지고 이 때문에 옛조선의 동이족은 더욱 이들을 동족취급하지 않는데 그러다 보니 우리가 알고있는 “사기열전”의 많은 나라들이 우리 갈래인 배달범족의 나라다. 공자가 인자의 나라인 동쪽 나라로 가고싶다고 한것은 바로 그들의 원래 출신인 배달 나라로 가고싶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공자가 보기에 모략과 후안무치가 난무한 중원에 비해 동방 고조선의 태평성대는 거의 환상이었으리라.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사람들이 다 타락한 지금에 와서, 태평성대의 이야기는 인기가 없다. 오히려 모사와 정쟁으로 점철된 사기열전은 잘 팔릴지언정 교화와 훈시로 가득한 옛조선의 기록은 정말 재미가 없다. 사기열전에 나오는 춘추시대의 나라들 중 거의 대부분이 배달범족의 나라였다. 이런 기록은 그들이 조선과 적절히 연합하기도 하고 적대하기도 하면서 나라를 운영했다는 사소한 기록을 죄다 훑어봐야 가능한 어려운 작업이다. 중원대륙내의 배달범족 국가들은 혼혈문화로 뒤덮이기 시작했던 초대 단군시절부터 조금씩 배달겨레의 순수성, 즉 기마종족적인 요소와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상(은)나라는 틀림없이 기마종족적 요소가 강한 북방민족의 후예였고, 주나라 동북을 차지한 연나라는 그 국민들 대다수가 화하족이 아닌 북방의 동이족들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는 주나라 무왕의 아우가 풍속을 바꾸는데 삼년이 걸렸다고 고백한 틀림없는 배달범족 국가이고 송(宋)나라와 위(衛)나라도 배달범족국가라는 증거가 많은 나라들이다
배달범족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보아야 하지만 한웅배달국 시절에 중국에 터를 잡은 배달국가, 즉 동이(東夷)가 아닌 다른 夷족 국가로는 제나라와 래나라, 오월동주로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가 있다.
특히 패왕항우로 유명한 초나라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을 구성하는 종족들은 주로 蠻夷(만이), 淮夷(회이), 萊夷(래이) 등의 초기 배달족이다. 홍산요하문명의 한웅배달국에 있었던 아홉가지 夷족(九夷)의 후손들인 셈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문헌으로의 역사란 쥐나족이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만든 책에 의지하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쓰기 시작한 책에서 시작하는 역사라...
사기열전은 이미 한나라라는 화하족의 나라가 선 다음에 나온 책인데, 여기 보면 진시황은 중국땅에서 배달족의 영향을 몰아내기 위해 장성을 세우고 옛기록을 태우고 유(儒)라고 부르는 지식인들을 매장한다.

儒, 지금은 공자학파로 부르지만 그 때만 해도 공자를 비롯해 제자백가를 모두 유라고 불렀다.
이를 제사장적인 전통을 가진 기마민족의 지식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많다. (주 무왕이 기자에게서 배운 사례 등)

단군왕검이라는 제사장적 전통이 곰족의 것이라면 儒라는 지식인적 전통은 배달 범족의 것이었던 셈이다. 배달 서융계 진나라의 왕이었던 진시황은 이런 과정을 거쳐 배달족의 나라들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끝내 완성하지는 못하고 전국을 맞는다. 유방과 항우의 혈전으로 삼천만에 달했던 중원의 인구는 육백만으로 줄어들었다. 이 때를 틈타 허구의 종족 '쥐나 짱골라'가 섰다. 漢나라다. 그 한나라가 사기열전을 썼다!
제 종족 이외의 종족을 죄다 제거하고 그 땅에 있는 옛 것을 죄다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역사전환의 출발점"이다...호랑이들은 서쪽으로 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진시왕 때 망했다가 다시 일어나 한나라와 중원을 놓고 일전을 벌인 초(楚)나라는 만이(蠻夷)땅에 살던 웅역이라는 사람의 조상에서 비롯된다고 사기열전에 적혀있다. 근원을 잘 알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사마천의 의도를 잘 아는 나는 패왕 항우가 배달범족의 마지막 왕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말? 정말!     장기둘 때 생각나겠네? 응!      언제나 초나라를 아래로 취급하는 것, 바꾸면 안되나? 바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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