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 블루* 外
조성래
내가 나를 달래느라 아이스크림 하나 사주는 날이다
내가 나를 응원할 힘이 없는 날이다 내가 나를
슬퍼하기를 뚝 그친 날이다 나는
나의 밖에 내놓아졌다
내다 버린 사람의 표정과 버림받은 사람의 표정이 맞물려
대체로 무뚝뚝한 얼굴이 되어 있지만
카운터 안에서는 갑자기 농담과 상냥함이.
자연스러운 얼굴의 변화가 이상한 날이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내가 더 이상 안 달래 주는 나를
생각하기를 그친 날이다 고아의 눈빛이 변해서
아이 하나가 사라진 보육원의 분위기 같은 날이다
나를 쥐어박고 싶다가 가슴을 몇 대 쳐주고 싶다가 난간 위에서 떨어졌으면 하는 날들이
다 지나가 버린 날이다 폭력은 죽여도 죽여도 솟구치는 귀뚜라미들의 하수구다 그 구멍을 그냥 덮어 둔 날이다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도 얼굴이 참으로 멀쩡한 날이다
수학여행 온 한 반이 단체로 편의점을 가득 채우고 있어도
신속하게 모든 계산을 실수 없이 끝내는 그런 날이다
해치우고도 아무렇지 않은 날이다
* 일본의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기타노 다케시 영화 특유의 서늘하고 푸른 색감
도망친 남자
마산에 살 적 이성복의 시집이 좋았다 한자가 많아 사전을 뒤져 가며 한글을 달아 놓았던 그 시집을
캄보디아 여자에게 주었다 나보다 열 살이 많아 누나라 불렀던, 밥 한 끼 같이 먹은 적이 있던 창원 여자
그녀는 밤이 깊은 공원에서 자신의 설움을 한국말로 털어놓았다 한국의 전남편과 처음 살게 되었을 때
시아버지가 저주받은 것을 데려왔다고 인간 취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카페에서 어린 아들과 짧게 통화를 하고서
내가 건네준 황토색의 이성복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 아주 집중해서 오랜 시간을 읽었다 그저 예의 때문이 아니라
한자 밑의 깨알 같은 한국어를 되뇌고 이해하면서 한 장 한 장 시집을 넘기고 있는 것 같았다
용지공원의 밤은 까맣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남편과 시댁 사람을 다 죽이고 싶었다고 식칼을 쥐는 대신
이혼해 주지 않는 남편을 두고 도망 나왔다고 눈물 흘렸다 공장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인도의 신화에서 온 여자가 아닐까 착각했던 아름답고 큰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어느 날은 그녀를 따라 경상대학병원을 같이 가주었는데, 머리가 아파서 미칠 것 같다고
의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내게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보는 것이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내 어머니와 같은 머릿속 종양을 앓고 있었다
…… 나는 연락을 두절했다
삼 년간 세 번의 경상대학병원 생활을 끝내고 나는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머니는 코끝에 누런 낙엽들을 매달고 온종일 누워 있는 나무였다 침대 옆 간이 변기에 간신히 앉아 오줌을 누는
잎사귀 몇 개 매달린 나무였다 하루 두세 번 응급실에 가지 않으면 버티질 못하는 나뭇가지였다
동생과 나는 발작 직전의 그녀를 부축하고 집 앞 응급실을 매일같이 들락거렸다 당직 의사는 트라마돌 중독 직전이라고 더는 오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짜증을 냈다가, 따로 불러서 걱정스레 타이르곤 했다 나는 미쳐 가는 그녀에게 줄곧 화를 내게 되었다
누런 낙엽들 위로 코만 내놓은 엄마의 눈, 왜 오늘은 화 안 내? 동생이 있으니까? 나는 살기 위하여 동생과 나를 줄다리기 하는
그 나무를 포기하고 싶었다
동생은 나를 나무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했다 어느 날 나와 아무런 상의 없이, 그는 나무를 짊어 메고 요양병원으로 들어갔다
집에 혼자 남은 나는 광주로 가 며칠간 떠돌았다 광주의 광은, 넓은 광이었고, 미칠 광이었고, 빛 한 줄기 찾을 수 있었으면 하는 광이었다
순천에서 한 여자가, 집이 비었으니 하룻밤 주무시고 가라 하였다, 요양병원에서 그들이 돌아온 날, 나는 짐을 싸 들고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도시로 도망쳤다
▲조성래
-1992년 경남 마산 출생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중퇴
-2022년 『문학사상』 신인상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