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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08
창세기 41:37-45
애굽의 총리 요셉(1)
바로의 꿈을 해석함으로 요셉이 총리가 된다. 요셉이 총리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바로 왕 다음 서열의 권력을 차지하였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왕의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어떤 일을 하신다는 것은 그것이 역사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요셉이 총리가 되었다는 것은 역사를 바르게 알고 해석하는 자가 진정한 통치권자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역사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과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남을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이며 일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언약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안다는 것은 세상의 결말을 안다는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고 하나님에 의해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두시고 그분을 중심으로 모든 영광이 그분께 돌아가도록 일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가 성도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37절). “신하”의 ‘에베드’는 ‘아바드’(섬기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노예, 종’이라는 뜻이다. “이 일”이라고 번역하였는데 ‘다바르’로 ‘말씀’이다. 요셉을 통해 주어진 바로 왕의 꿈에 대한 해석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위한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좋게 여긴지라”라는 말의 ‘야타브’는 ‘선하다, 즐겁다, 좋다, 잘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직역하자면 ‘바로의 눈에, 모든 신하의 눈에 이 말씀을 선하게 여겼다’라는 말이다. 즉 눈을 두 번 강조함으로 모든 자들의 눈에 선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자들의 눈을 열어 말씀을 보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왕뿐만 아니라 모든 자들이 말씀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 요셉을 통해 이루시는 언약에 집중하게 만드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38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38-39절).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꿈을 하나님께서 하실 일로 해석함으로 말씀이 말씀답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0-13)
그러므로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라는 바로 왕의 고백은 애굽이라는 세상에 있는 자 중에는 없는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복음의 비밀을 드러내 주셔야 하는 것이다. 실로 성령의 오심은 십자가 죽음에 근거하여 자기 백성에게 임하신 말씀이다. 그 결과는 이상한 은사를 좇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드러난 것은 같은 진리의 마음으로 십자가로 완성하신 하늘 양식을 나누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었다.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바로 왕이 말한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란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전 1:24). 결국 언약의 아들 요셉을 통해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40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40-41절).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너는 내 집 위에 존재하라’라는 말이다. 요셉은 이제까지 보디발의 집과 보디발의 집에 있는 감옥이며, 마지막으로 바로의 집에 이르렀다. 이 집들은 모두 자신의 행위를 고수하며 신께 자신의 정성을 드리고자 하였던 율법의 성전을 상징한다. 이 성전들이 무너지고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마지막 집에서 예수님이 성전의 실체이시며 머리이심을 드러내셨다.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라는 표현은 바로와 요셉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뜻이다. 율법의 성전을 고수하던 바로 왕에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임하여 그 말씀이 문자적인 율법이 아닌 복음인 것을 드러내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요셉은 왕과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로에게는 백성을 대신하는 자이고 배성들에게는 바로를 대신하는 자라는 뜻이다.
1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 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 8:1, 6)
“내가 총리가 되게 하노라”라고 번역한 것은 많이 의역을 한 것이고 히브리어로는 ‘나탄’이라는 말인데 ‘주다, 두다, 놓다, 세우다, 만들다, 적용하다, 지정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아들을 요셉으로 지정하여 세우셨다는 의미이다. 그 의도는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이 어루어지는 것을 위해서이다. 그 아들에 의해 애굽 온 땅이 섬김을 받게 되고 그것으로 살게 되는 은혜를 입는 것이다. 언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넘겨주심으로 언약의 말씀이 성취도록 그의 아들을 지정하시고 그 일을 시키셨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요 17:6-7)
“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43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42-43절).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라는 말씀에서 “인장 반지”라는 말의 ‘탑바아트’는 ‘반지, 고리, 인장 반지’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 단어는 ‘타바’(가라앉다, 익사하다, 놓다, 자리잡다, 심다)에서 유래하였는데 문자적으로 물에 가라앉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가라앉게 하려고 누르는 것이니 곧 도장을 눌러서 찍는 상태를 비유한 것이다. 결국 물에 빠지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세례로 인해 죽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세례는 십자가 죽음을 나타낸다. 결국 요셉의 다스리는 행위는 언약 안에서 십자가 죽음을 계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를 이루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5)
“세마포 옷을 입히고”라는 표현은 제사장의 자리에서 말씀으로 섬긴다는 것을 나타내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라는 표현에서 ‘라비드’는 문자적으로 ‘목걸이’라는 뜻이지만 ‘펼치다, 펴다’라는 말의 ‘라바드’에서 유래한 단어로 요셉이 하나님으로 세움을 받아 말씀으로 자기 백성들을 섬긴다는 의미를 보여준다. “금”이 정결을 상징한다면 그 자신의 정결함으로 섬길 수 있다는 것이다. “목에 걸고”의 ‘차바르’는 ‘(짐이 묶여지는 곳으로의) 목의 뒷부분’이라는 뜻으로 목에, 어깨에 짐을 메고 있는 것을 상징한다. 어깨에 다스림을 메고 말씀으로 섬기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43절)라는 말씀 역시 단순히 왕 다음의 위치에 걸맞는 수레를 탔다는 말이 아니라 “버금”의 ‘미쉬네’가 ‘두 배, 두 번째, 반복’이라는 뜻인데 ‘이중, 반복’이라는 의미로 언약의 아들로서 말씀을 섬기는 그 역할을 이중으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요셉의 위치나 역할이 단순히 애굽의 통치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말씀의 성취를 위해 보내심을 입었다는 것이다. 실로 요셉은 야곱 언약을 위해 말씀에 붙잡혀 그 언약대로 형통하게 이끌려 왔다. 그 언약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말씀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 십자가 성취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말씀이 되게 하신다.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계 19:9-10)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43절)라는 이 말씀 역시 총리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나탄’이라는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지정하여 세우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40-41절 말씀을 반복하여 야곱 언약의 성취를 위해 일할 자는 오직 언약의 아들 요셉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만 말씀의 성취자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라는 말씀을 통해 오직 예수의 이름에 무릎 하심을 나타낸다(빌 2:10).
“44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45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44-45절). “사브낫바네아”의 ‘차프나트파네아흐’는 애굽어 표현이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오늘날 언어 학자들이 가장 근접하게 이해한 것으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가 살았다’ 혹은 ‘생명을 주는 자’라는 뜻이다. 요셉은 말씀의 기근이 있는 땅에 생명을 주는 자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라는 말씀은 단순히 요셉이 애굽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왕으로서 신적인 권위를 가졌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렇게 하여 언약의 아들 요셉을 통해 말씀이 이루어지듯이 언약의 성취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로 하나 되어 완성되는 것이 구원이요 생명임을 보여준다(2025031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