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일몰이 아름다운 천년고찰 망해사는 전북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김제평야라는 지평선과 서해의 수평선이 맞닿는 만경강 하구 진봉산(73m) 자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ㆍ
《망해사 서해 낙조》
《망해사 들어가기 전 안내판》
《망해사 부도전》
망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입니다
망해사는 백제 의자왕 2년(642) 동양의 3대거사중의 한분인
부설거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백제 경덕왕 13년(754) 통장법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여기서 부터 망해사 경내로 들어갑니다》
《청조헌과 망해사, 망해사 종무소》
《오층석탑과 범종각
그 뒤 1073년(문종 27) 심월이,
1371년(공민왕 20) 지각이 중창하였습니다ㆍ
《극락전과 낙서전》
《범종각과 팽나무》
《낙서전과 팽나무》
《낙서전》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거의 폐허화되었던 것을 1624년(인조 2) 조사 진묵이 중창하였습니다.
진묵은 이곳에 머물면서 많은 이적을 남겼는데 그 일화들이 오늘날까지 널리 전승되고 있습니다.
《화재전의 극락전과 극락전에서 바라본 망해사 전경》
그 뒤 승려 관준(1850∼1919)이 다시 중창하고 수도하였으며, 1915년 계산이 중창하였습니다.
1933년 주지 김정희가 본전을 중수하고 보광명전과 칠성각 등을 신축하였습니다.
《기와불사, 공양미, 양초 판매대》
《삼성각》
《화재전 삼성각에서 내려다 본 망해사 전경》
1977년 남파가 요사와 망해대를 새로 짓고 보광명전·낙서전·칠성각 등을 복원 중수하였습니다.
《삼성각》
《극락전》
1984년에 보광명전과 칠성각을 헐고 그 자리에 대웅전을 새로 지었습니다.
1986년에는 낙서전을 해체 복원하였으며
1989년에는 종각과 요사채인 청조헌을 중수하였으며
1991년에는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나
2024년 4월13일 밤중에 불이나 극락전이 전소되고,
낙서전의 일부가 그을음 피해가 있었습니다ㆍ다행히 경관적 가치에는
거의 영향이 없었답니다ㆍ
《화재 후 낙서전》
《담장이 없어졌습니다ㆍ》
2024년 6월18일 국가유산청 자연유산위원회는
'망해사 일원'을 국가지정유산 명승 제1호로 지정됐습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칠성각, 요사채로 사용되는 청조헌·낙서전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석비가 있습니다만,
지금 현재 극락전은 화재 후 아직 재건을 못하고 천막법당이 대신하고 있습니다ㆍ
화마이전의 극락전과 천막법당 사진을 탑재하겠습니다ㆍ
많이 아깝고 안타깝습니다ㆍ
《삼성각에서 내려다본 망해사》《화재 전》
《삼성각에서 내려다 본 망해사》《화재 후》
《화재후의 극락전과 삼성각》
《화재후의 극락전과 낙서전》
‘바다를 마주하는 절’이라는 뜻의 망해사는 서해안의 아름다운 낙조와 해넘이를 감상할 수 있어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 명소입니다.
《망해사 낙조》
2020년에는 한국관광공사 선정 비대면 관광지 100선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바다전망이 탁월합니다ㆍ
《망해사와 마주보는 바다》
《오층석탑과 범종각, 낙서전》
망해사는 만경강 하구와도 접하고 있으며, 만경강 하구는 새만금 간척 사업의 일환인 방조제 조성으로 담수로 변해 생물학적 가치가 높습니다.
문화재청은 “만경강 하구는 대표적인 철새 도래지와 다양한 생물의 서식지”라며 “간척 역사를 보여주는 장소로도 학술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습니다.
《낙서전에서 바라본 전경》
👇다시 망해사로 들어갑니니다ㆍ
진봉산 북서쪽 갈림길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서는 길목에는 부도군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사찰의 입구에는 흔히 보이는 일주문도 없고 사찰의 전각도 천년고찰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소박하게 보입니다.
👇경내로 들어갑니다ㆍ
경내로 들어서면 좌측에 청조헌, 망해사,망해사 종무소 현판이 붙은 하나의 건축물이 있습니다.
《청조헌 》
바닷가에는 5층석탑과 범종각이 있는데, 종루에 서면 만경강하류(서해의 새만금 앞바다)가 잘 조망됩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를 최고의 경관으로 유명해졌습니다ㆍ
《오층석탑》
《범종각》
《오층석탑과 범종각, 낙서전》
《청조헌》
경내에는 파도소리를 듣는다는 요사채 청조헌이 있는데, 현재는 새만금 방조제로 파도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ㆍ
다만 오후에 석양을 바라보면서 넓게 탁 트인 바다와 들판을 바라보》면 가슴속이 후련해지는 힐링의 장소라고 합니다ㆍ
《낙서전》
망해사 낙서전은 1589년(선조22) 진묵대사가 처음세웠고,
1977년에 복원 중수 하였고 1986년에는 해체 복원 하였습니다ㆍ
망해사 낙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 형식에 팔작지붕으로 지은 'ㄱ' 자형 목조 기와집입니다ㆍ
평면은 중앙의 거실을 중심으로 방과 대청부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ㆍ
구조는 1단의 화강암 기단 위에 방형의 가공된 주초와 덤벙주초를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ㆍ
기둥은 두리기둥으로 상부에서 도리 보와 결구하고 있습니다 ㆍ
도리는 굴도리이며 공포는 익공 양식입니다ㆍ
지붕은 5량 집으로 꺾인 팔작지붕 양식입니다ㆍ
편액에 '낙서전' 이라 써있고 4개의 주련이 걸려 있습니다ㆍ
망해사 낙서전은 1986년 9월8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방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문화재로 재지정 되었습니다ㆍ
건물 외형은 팔각지붕에 'ㄱ자' 형으로 앞으로 한 칸 나온 부분은 마루가 놓여있고 오른쪽에는 방과 부엌이 딸려 있어서 원래 이 낙서전은 법당 겸 요사채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ㆍ 비록 규모는 작으나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망해사의 오래된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건물입니다ㆍ
또한 낙서전 맞은편에는 낙서전을 창건하고 진묵대사가 기념으로 심은 노거수 팽나무 두 그루가 있어서 오래된 망해사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으며 망해사의 명물이라고 합니다ㆍ
《낙서전 내부》
낙서전 좌측에는 탱화가 걸려 있고
그 옆에는 기와와 공양미 및 공양초 불사를 위한 전각이 있으며 뒤쪽 언덕에는 삼성각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2024년3월17일에 참배하고 왔는데 4월13일에 불이나서
........화마 전의 극락전 사진과 현재의 천막법당도 모셔와서 함께 올립니다ㆍ
《화마 전 전경》
《화마 후의 전경》
《오층석탑과 청조헌 》
창건하고 심은 400년된 수령의 팽나무입니다ㆍ
● 부설거사와 김제 망해사●
출가사문의 길을 걷다가 세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돌연히 환속을 결심한 이는 바로 부설거사입니다.
재가 불자로서 도를 닦아 성불한 그는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방거사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재가 불자이기도 합니다.
부설거사의 성은 진,
이름은 광세,
부설은 법명입니다.
경주 출신으로 신라 28대 선덕여왕 때 태어났으며,
어려서 출가해 경주 불국사에서 원정스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불국사에는 부설과 함께 출가한
영희와 영조라는 두 도반이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출가수행자의 길을 함께 걷게 된
세 스님의 수행인연은 부설거사가 입적에 들 때까지 이어집니다.
어느 때 부설스님은
영희, 영조스님과 문수도량을 순례하기 위해 만행을 시작했습니다.
오대산으로 향하는 길에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들이 있는 두릉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고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쉴 곳을 찾던 스님들은 구무원의 집에서 유숙을 하게 됩니다.
독실한 불자인 구씨는
부설스님의 일행이 머무른 동안 밤새는 줄 모르고 법담을 나눕니다.
한편, 구무원에게는 묘화라는 18세의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묘화는 나면서부터 벙어리였습니다.
그녀는 멀리서 세 스님이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것을 보고
사랑채로 가서 스님들과 아비가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됩니다.
묘화는 깨달음에 대해 설명하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 갑자기 말문이 트였습니다.
입을 연 묘화는 부모에게
“부설스님과 저는 전생에도 인연이 있고 현생에도 인연이 있으니 이 인과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 바로 불법”이라면서
“삼생연분을 이제야 만났으니 죽기를 맹세하고
부설스님을 남편으로 섬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무남독녀 외동딸이 죽기를 각오하고
부설스님과 부부의 연을 맺겠다고 말하자
구씨는 용기를 내어 부설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소승은 일대사인연을 이루기 위해 출가한 수행자입니다.
주인어른과 따님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으나
청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하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자 묘화는 죽기를 한하면서
부부의 인연을 맺기를 간청하게 됩니다.이에 부설스님은
“모든 보살의 자비는 중생을 인연 따라 제도하는 것”이라며
묘화와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영희와 영조 두 도반은
“수행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오대산으로 떠났습니다.
재가자로서의 부설거사의 삶이 시작됐습니다.
어느덧 등운과 월명 두 남매의 아버지가 된
부설의 생활은 수행자 때와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도 화두에 열중했으며,
동네 사람들에게 불법을 설하고 참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부설거사는 혼인 후 15년을 살다가 어느 날 수행을 계속하기 위해 가족을 떠나 지금의 망해사 자리에 토굴을 짓고 수행에 들어갔습니다ㆍ그리고 수행에 들어간지 20년이 지나 옛 도반인 영희, 영조스님이 물어물어 망해사 부설거사를 찾아왔습니다ㆍ
이에 서로 법력을 시험하기 위해 아들 등운에게 호리병 세 개에 물을 담아
처마에 매달도록 하였습니다ㆍ그러보는 각자 막대기로 내리치게 했는데
두 도반은 호리병이 깨지면서 물도 쏟아졌으나 부설거사가 내려친 호리병은
병만 깨지고 물은 호리병 모양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ㆍ
깜짝 놀란 도반이 어찌 된 일인가 하고 묻자 부설거사가 "이 병은 몸이고 이 물은 마음이다" 라고 답하며 "몸은 생겼다가 언젠가는 소멸하지만 마음은 원래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다"라는 불생불멸의 진리를 두 도반에게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ㆍ
영희와 영조가 존경의 뜻으로 삼배를 올리자 두 도반에게 그대들을 기다렸다 하며 아들과 딸을 부탁하고 열반송을 남기며 망해사 자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이에 두 도반은 부설거사를 다비하여 사리를 변산 묘적봉 남쪽 기슭에 안치 하였는데 묘화부인은 이에 그치지 않고 등운은 영희를 월명은 영조를 은사로 출가까지 시켰습니다ㆍ그리고 지금의 월명암 사성선원 자리에 등운암,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월명암을 세웠습니다ㆍ
변산반도의 월명암은
부설의 딸 월명의 이름 따서 지은 암자로
이곳에는 부설거사의 성도담을 소설화한
《부설전》필사본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부설거사의 삶은
오늘날 재가불자들에게도
한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환속했다고 해서
세속의 인연에 묻히지 않고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묘화부인과
등운, 월명 두 자녀에게도 깨달음의 길을 안내했습니다ㆍ
그는 스스로 부설거시라고 칭하며
현재 망해사 자리에 초막을 짓고 참선수행을 병행하였다고 합니다ㆍ
https://youtube.com/watch?v=f67sEbOGxVk&si=eb5vEGsdmv41AkVb
🔶️김제 진봉산 망해사 🔶️ 해운대반야선원🔶️ 서해 낙조와 일몰이 아름다운 천년고찰 🔶️ 부설거사가 수행하고 입적하신 곳입니다🔶️불기 2568년3월17일 순례🔶️
첫댓글 망해사 창건설 두번째 백제 경덕왕13년(754)을 신라 경덕왕13년(754)으로 수정합니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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