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고영근목사의 1주기를 맞이하여
죽은 날을 추모하지 말고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날을 기념해 달라
유재무 (279)
故 고영근목사가 소천하신 날은 2009년 9월 6일로 1주기는 벌써 지났다. 그러나 고목사님은 생전에 가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으면 나의 죽은 날을 추모하지 말고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날을 기념해 달라’ 고 하셨는데 이번의 고목사님의 바램대로 1월 18일(화)에 생전에 “고난받는 자를 위한 목요기도회” 가 열렸던 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 1주기 추모행사를 하게 되었다.
고목사님은 76세로 그렇게 많치 않은 나이에 세상과 아쉬운 이별을 하였는데 만년에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눈이 시력이 낮아 활동을 거의 못하셨고 두발가락도 절단하여 평소에 활동적이던 모습에 비하여 외로운 생을 마감하셨다. 재건복을 즐겨입으시고 부지런하시고 검소하시고 신실한 목회자로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분이였다.
고목사님은 1933년 1월 평북 의주에서 출생하여 1946년 3월에 기독교에 입문하였는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에 징집된다. 그러나 평소에도 김일성과 공산정권에 반대와 거부하는 행동으로 인하여 요주의 인물이 되어 병역법으로 잡혀가 45일간 형을 살고 강제입대하게 된다. 그러나 이내 탈영하여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부지하였고 국군에 투항하였다. 그리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있다가 반공포로 석방때 출소하였다.
그러나 다시 국군에 자원입대하여 군종하사관으로 근무하며 군복음화운동에 동참하여 부대부흥회를 시작한 이래 제대후에 유명 부흥사로 활약하시였다. 제대후에는 대전의 보육원과 백운교회에서 시무하셨는데 그때 인근 공군부대 군목이셨던 김선도목사(광림교회원로)의 사귀였고 평생을 친구로 지내시며 많은 도움을 받으시기도 하였다.
성결교 신학교를 졸업하시고 목사안수를 받으셨지만 다시 장로교 통합측 목사로 이명하여 북아현교회와 성수동교회에서도 시무하셨다. 그러나 부흥회에 대한 열정으로 개교회 목회에 지장을 준다는 판단아래 총회전도목사와 부흥전도단에서 활동하셨다. 목사님의 마직막 소속노회는 전주노회 전도목사였다. 서울서노회 전도목사로 재직중 옥중에 면회온 노회임원들이 정치활동을 하는 목사를 노회원으로 둘수 없다고 하여 결국 사직하게 되었고 이를 안타까이 여긴 전주노회에서는 고목사님의 본심과 사역을 귀히 알아 전도목사로 받아주기로 하자 이명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부흥회 사역은 6.25 전쟁 직후인 1954년 5월(22세)에 제주시 중부교회(성안교회)에서 첫 번 부흥회를 시작하여 오늘까지 860주간에 걸쳐서 주간부흥회를 인도하였고 1,500여회에 걸친 일일부흥회를 인도하였다.
1965년(33세)에는 신약성경의 각장를 4대지로 만들어 대지가(大旨歌)를 작사하여 교계에 발표하였고 성경연구에 깊은 조예가 있어 성경통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성경통독의 원조시다. 1968년(36세)에는 국민의 신앙자세와 생활윤리를 바르게 가르치기 위하여 “한국교회혁신과 사회정화방안”이란 책자(185쪽), 1971년에는 “목회계획”(185쪽), 1972년도에는 全軍信者福音化를 위한 “군인용 설교자료집”을(128쪽) 출판하였다.
지속적으로 문서전도의 필요성을 아시고 1973년도에는 한국교회갱신을 촉구하는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285쪽), 1974년도에는 “마태복음 설교자료집” (320쪽), 1974년도 부터는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 전7권, ‘민주화냐 독재연장이냐’ 전7권, ‘우리 겨레의 나갈 길’ 전5권, ‘내 양을 먹이라’ 전3권, ‘죽음의 고비를 넘어서’ 전5권, ‘정의를 일으켜 세우자’ 전3권, ‘한국 국민에게 고하는 글’ 등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한 국민계몽서적 30여권 약20만권을 인쇄하여 우리나라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언론사간부, 대학생들 및 사회지도자들에게 우송하였다.
이후에도 많은 책을 출판하시는등 문서선교에 힘을 쓰셨는데 수입의 절반이상을 책을 보급하시는데 쓰셨다. 자서전에 보면 그가 얼마나 열심있고 총명한 소년인지 알수있다. 초등학교때는 전과목을 다외워서 1등도 아닌 특등을 하기도 하셨지만 부친을 일찍 여의고 모친을 도와 가장이 되어 가족을 돌보는 농사일로 더 이상 공부하기가 어려웠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이미 군대에서 군목을 도와 설교와 심방을 하며 전도에 소질을 보였는데 이렇게 복음사역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계셨다. 80년 내가 모셨던 故조남기목사(청담교회, 전 NCC 초대인권위원장)의 소회에 의하면 논산 훈련소 정훈관(소령)으로 계셨을때 고영근목사를 아주 똑똑하고 유명한 청년하사관으로 기억 한다고 하셨다. 그때 전두환 전대통령이 같은 부대 소대장으로 근무를 하기도 하였는데 이분들이 같은 부대에 있었다니 새삼 놀랍다.
조목사는 그 인연으로 김대중선생 사형언도후 집행이 되었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모두가 안타까워 할 때에 청와대에서 전대통령과 독대하여 김재중선생의 생사를 묻자 “선배님이시니 알려드린다” 고 하고는 남한산성 육군형무소에 있다고 하자 즉각 면회를 청하여 허락받고 최초로 김대중선생을 면회하여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최초로 알려 국내외적으로 그의 구명운동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게 하셨다.
이미 북한에서부터 인민군대 입대를 반대하다가 소위 군사재판을 받은 이래 남한에서 군사정권에 의하여 25회나 연행과 투옥을 당하여 48회에 걸친 재판과 4년 2개월의 옥고를 겪은 바가 있었다. 심문과 재판을 받을 때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담대하게 진술하였다. 그의 최후진술은 유명하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시국사범 6,000여 명에게 영치금 차입, 도서 차입, 의복 차입, 음식물 차입 등을 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광림교회(김선도목사), 목민교회(김동엽 목사)와 여러교회의 지원이 있었다.
평생 집회를 많이 다니시고 직접 쓰신 책이 많아서 비교적 목사님의 일생이 많이 알려져 있는데 청년 고영근은 북한에서도 김일성찬양이나 공산주의 정책에 비판적이여서 인민재판을 받기도 하셨다. 탈영후에도 깊은 산에 숨어서 성경을 외우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살려주시면 하나님을 위하여 평생을 일하겠다고 서언하셨다고 한다.
한국기독교선교연합회의 총무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목회자들을 교육하는 단체였다. 강신명목사(새문안교회)가 회장으로 있었다. 당시는 신학교도 시설이나 자료가 미비하였고 목회현장의 요구는 다양해지자 목사들의 교육을 시작으로 매년 자비를 들여서 목회자들의 소양과 건전한 목회를 위하여 재정과 시간을 투자하셨다. 그후 교단 총회의 전도목사로 전국교회와 목사를 대상으로 목회한다는 일념으로 “목민목회” 를 주장하고 목민교회를 설립하는데 일조하시고 전국적인 인물이 되기 시작한다.
고목사님의 설교는 성경을 근거로 하여 복음적이면서 특유한 논점과 기치로 불의와 부정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하셨다. 예을 들어 어떤 본문으로 어떤 사람들이게든지, 어떤 장소에서 설교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하고는 “독재타도 민주정부 수립” 이 그 골자였다. 한마디로 정의의 예언자셨다. 특히 당시는 군사독재정권에 반대하는 학생이나 지식인과 언론인 종교인들이 저항하다가 감옥에 많이 가는 상황속에서 침묵하는 한국교회를 향하여 쓴소리를 많이 하셨다.
1976년 단양지역의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시다가 처음 구속이 되시는데 고육영수여사의 묘지에 대한 언급으로 보여진다. 국립공원은 일정한 규정이 있는데 그것을 초과하여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7년 형을 선고 받고 1년 6개월 옥고를 치루고 나오신다. 그러나 그러한 징역형이 고목사님의 마음과 입을 돌려 놓키는 커녕 더욱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게 되였다. 바로 다시 구속되여 6년 형를 받고 2년 살고 나온다. 회고 하시기를 구속과 연행 구류를 한 40회쯤 당하신 것 같다고 하셨다.
48회의 법정재판과 25회의 투옥을 당하셨는데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할 기록이다. 사모님이 이신 한완수권사님이 어느 간증자리에서 "우리 고목사는 예수도 별나게 믿으셔서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 고 하신 것을 들었다. 그래서 고목사를 "광야의 외치는 소리" 혹은 "고난의 종" 이라고 불리우는 목사였다.
청년들과 학생집회의 단골 강사셨고 특히 어려운 집회 자리에 부탁을 하면 주져없이 오셔서 거침없는 말씀으로 듣는 이의 기대를 체워주시고 반대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셨다.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가 1982이 되자 광주민주화 운동 2주기를 맞아서 이제 광주에서 한번 모여야 되지 않나 하는 일을 도모 하던중 금남로 YWCA에서 추모예배를 드리게 되였다. 이일의 실무를 맡았던 박준철회장(당시 장청)은 지방에서 부흥회중이던 고목사님을 섭외하여 숨박꼭질 하듯이 모시고 와서 "아벨의 핏소리"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는데 구속은 면하셨다.
그때 원풍모방노동조합에서는 자기들의 억울한 사정을 유인물로 만들어서 배포하기로 하고 처음으로 이 집회에 가져갔는데 꾀 큰 물량이었다.
나는 강남 터미널에서 배송받아 고속버스로 광주까지 배송되는 책임을 맡았다. 광주에서는 지역청년회원의 차로 반은 집회장소로 반은 저녁에 있을 천주교 광주교구의 2주기 기념 미사에서 뿌리기로 하였다. 낮 집회에서는 무사히 배포가 되었지만 천주교 집회 배포 책임을 맡은 류시경청년(현성공회 신부)과 여자청년이 연행되여 징역형을 살았다. 조사과정에서도 다른 사람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는데 누가 가져왔는지를 모르기 때문이였다.
그때만 해도 적발되면 고문을 받게 되니 원치 않게 여럿이 다치게 되자 모두 점조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당일 압권은 고영근목사님의 설교였다. 모두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으시고 “아벨의 핏소리” 라는 제목으로 광주학살과 원흉 전두환과 신군부의 회개와 무고한 죽엄들인 광주영령들에 대한 위로와 살아있는자들의 의연한 항거를 주창하는 것으로 당일 사회는 김영진회장(현 민주당 국회의원)이 하였다.
고목사님은 양심수들의 옥중심방을 부지런히 하셨고 영치금에 넣으셨다. 누가 오지랍이 넓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천성이 부지런하시고 사랑이 많으셔서 그런 아픔을 외면하시지 못하셨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기도하며 후원하는 미국의 제단체에 초청받아 가셔서 부흥회를 하시기도 하셨고 많은 환영과 후원도 받으셨는데 세계적인 인물이 되셨다.
목사님의 이러한 일은 가족들의 이해와 협조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완수사모님과 두딸(성숙, 성휘)은 헌신적으로 고목사님을 도우셨다. 한편 아들 고성진은 성악을 전공하였고 이태리 유학까지 다녀온 재원으로 평범한 생활을 했다.
“목민선교회” 라는 이름은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말로 牧民(백성을 친다)라는 의미인데 이 단체를 통하여 활동을 하셨다 그리고 고목사님에게 은혜받고 지원하는 분들을 통하여 후원을 받으셨다. 김동엽목사, 이해학목사, 조영래목사, 김성락목사, 차선각목사 임영천목사가 대표적으로 도우셨다.
그리고 한때 진보진영과 인사들로 부터의 가도한 공산주의 비판에 대하여 정부의 반정부 세력을 용공시하고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는 예민한 시기에 혼자 반공으로 피해가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는 비판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셨다. 말하기 복잡하지만 당시 민주화가 먼져냐 통일이 먼져냐? 하는 즉 독재정권의 타도가 먼져냐? 이를 지원하는 미국의 반대가 먼져냐? 하는 주적논쟁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운동의 주적이 달라지고 운동의 전략과 전술이 달라지게 되어있다.
그런 이론들을 주창하는 세력들인 PD이니 NLPDR이니 하는 노선에 따른 투쟁이 있었다. 그러나 고목사님의 북한에 대한 생각과 반공관은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의 모습에 고정되여 있었고 감상적 반공주의라고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현재도 그렇치만 북한은 공산주의라는 정치체제를 갖고 있는 염연한 국제사회의 한 독립국가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가 되야 할 반쪽이다.
체제가 다르지만 그 체제와 전쟁을 통한 통일이 아니라 평화적인 통일을 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궁극적으로 경계의 대상이자 대화의 대상이다. 그러니 남북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고도의 정치적인 전략과 판단이 요구되는 것이지 한가지 방법으로 단순화 하거나 도식화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양한 지혜를 모으고 인내를 갖고 대해야 한다.
정치인들이 인기를 의식하고 임기내에 무슨 가시적인 성과를 바라는 얄팍한 마음을 갖고는 안된다. 비판을 해도 우리는 미국이나 중국, 일본이나 구소련과 같은 입장의 나라가 아니다. 이러한 북한에 대한 태도를 어느게 맞고 틀렸다고는 함부로 말할수 없다.
고목사님의 말씀도 맞고 문익환목사의 말도 맞을 수 있고 한상렬목사의 말도 맞을 수 있다. 서경석목사의 말로 맞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자기들이 한말에 대하여 모두 책임을 지면 되는 것이며 역사의 평가를 받을 것이며 신앙인으로 하나님 앞에 각자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기에 고목사님에 대한 고도한 기대와 비판은 역사에 묻어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