꿇어앉으라고?
가톨릭과 불교가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다. 놀랄 만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조심스럽게 들먹이는 용어 하나. 장궤(長跪)! 가톨릭에서만 쓰는 줄 알았었는데, 불교에서도 일상화되었다는 게 아닌가?
<백과사전> 혹은 <우리말사전>에서 장궤를 이렇게 풀이해 놓았다.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는 중, 앞 의자에 붙은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몸을 세우는 동작(주님께 존경을 나타내기 위하여(가톨릭)/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꿇어앉음(일반적 의미)/ 두 무릎을 땅(바닥)에 디딘 자세에서. 허벅지와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 예의(불교)…….
여담을 내놓는다면 죄인지 모르지만, 하는 수 없다. 내가 여태 적을 둔 본당은 세 개다. 헐벗고 굶주린, 그야말로 가난한 교우들이 주를 이루는 본당에도 하느님은 계셨다. 죽음 일보 전에 거기서 제대로 앉지 못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교리 교육을 받고 영세했다. 몇 년 동안 버텨냈지만, 그건 사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윽고 나는 소생했다. 복음성가 한 곡 ‘살아 계신 주’. 주교좌 중앙 성당에서 노인들 앞에서 열창한 게 주님이 나를 일으켜 세워 주신 신호탄이었다. 그래서 나는 짧은 영어 실력이지만 이 문장을 좋아한다. Jesus lives in his house! 그러나 주님은 내게 견딜 수 없는 비통함을 주셨다. 혈육을 앗아가 버리신 것.
위(내가 적을 두었고 현재 두고 있는) 본당 세 개. 장궤틀이 있는 곳도 없는 곳도 있다. 관절이 별 좋지 않은 나는, 장궤 자세를 취하기 부담스럽다. 무릎이 닿는 곳을 폭신하게 헤 놓았을 경우엔 그래 얌체처럼 쾌재(?)를 부른다. 나무판자로만 되었으면, 불경스럽게도 얼굴에 주름살이 생김은 물어보나마나.
장궤는 주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작게 겸손의 표현인 줄 안다. 기도는 내적으로 지녀야 할 덕목인데, 장궤는 이 기본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이란다. 위로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하느님께 호소하고 겸손과 통회의 정신을 고백함은 물론이다. 장궤틀이 있는 성당은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를 부르짖은 후 성령 청원을 할 때, 하느님의 어린 양‘을 외운 후 영성체기도 전 등 두 번 장궤를 하는 줄 안다.
서귀포 성당에서 소중한 체험을 했다. 해설자가 별도로 일러 주지 않아도 차례가 되니까 신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는 것 다시 말해 장궤의 예를 표하지 않는가? 그래서 거기서 느낀 게 많았으니 주님을 찬미한다. 게다가 말이다. 서귀포 성당에서의 신선한 충격 하나. 장궤틀 의자 등받이에는 당연히 선반이-<성경>이나 <매일 미사>, <성가집> 등을 얹어 두도록 - 만들어져 있는데, 서귀포 성당은 그걸 수평으로 해 두었던 것이다. 그 조그마한 착안이 주님을 기쁘게 한다 싶었다. 경사로 만들었을 경우 이런 책들이 미끄러져 떨어지고, 적막을 깨기 예사다.
명동 성당에서도 장궤틀을 없앴다는 얘기다. 앞으로 신자(성도/ 개신교에서만 쓰는 게 아니더라. 우리 성경에도 나오니까)수가 늘어나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장궤틀을 없애는 쪽으로 의견을 모을지 모른다. 그리고 장궤틀을 젖히는 소리가 미사를 방해한다는 진단도 있더라.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렇다고 해서 단시일 내에 그 많은 장궤틀을 어떻게 처분하겠는가? 거기에 예산도 들어가고, 새로 사들이는 비용이 만만찮으니 하는 말이다.
이제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자. 어린이 미사에는 녀석들뿐만 아니라, 학부모 연로 교우들도 많이 참례한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지도교사와 함께 해설을 맡는다. 당연하다. 그런데 어느 본당이든지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는다. 꼬마 녀석이 하는 말이다. 아무리 하느님 앞에서의 자세지라 치자. 하나 여든이 넘은 노인보고 하는 말 치곤(물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너무 심하다.
“꿇어앉으십시오.”
이럴 수가! 동방예의지국에서, 열 살 남짓한 어린이가 호호백발의 노인을 꿇어앉힌다? 난 처음에 내 귀를 의심할밖에. 세상에 저 여든 노인이 무슨 죄가 있어, 일흔 살 아래인 꼬마한테서 꿇어앉으란 지시(?)를 들어야만 하는가? 아무리 장궤 시간이지만, 너무하지 않나 말이다. 천주교 부산 교구 노인대학 강사 지원단장을 했었기 때문에, 미사 참례한 본당수는 나도 만만찮은데, 군데군데서 실소를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낯도 안 익은 처지에 신부를 붙잡고 항의할 수도 없고. 울며 겨자를 먹었다. 하여튼 분명히 잘못되었다. 서귀포 성당처럼 100년 넘은 역사에 모든 게 제대로 잡혀 있다면 걱정 없는데…….고민 끝의 정답.
“꿇어앉으시겠습니다.”(어린이만 있을 때는, ‘꿇어앉겠습니다.')
“꿇어앉으실 시간입니다.”(어린이만 있을 때는, '꿇어앉을 시간입니다.')
마찬가지로 ‘일어서십시오.’가 아니라 ‘일어서시겠습니다.’가 맞다. 지시어가 아닌, 안내 말이 되어야 더욱 거룩한 미사가 된다. 성변화(聖變化)에 도움을 주는 방편은 여러 가지가 있다는 의미에서, 서귀포 성당이 다시 한 번 떠오른다.
* 13장
첫댓글 장궤에 대한 설명 잘 들었습니다.
평화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