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1일
함양에서 산청을 지나 집으로 가는 길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나
세밀한 계획없이 대강 나선 길이라
망설여야 했다.
집으로 가는 길목인 산청을 둘러 보는게 좋겠다 하여
함양에서 산청으로 향했다.
축축 늘어진 수양 버드나무 가로수가 참 신선하고 예뻤다.
조금만 더 긴 길이라면 메타세콰이아 길처럼
유명해질 수도 있겠다 싶으리만치...
물레방아 함양 쌀 이 저 곳에서 모아지고 방아 찧어지는가 보다
창고 앞 노랗게 익은 벼들이 탐스러웠다.
굽이굽이 예쁜 길 오도재의 유혹도 물리치고 다랭이논의 유혹도 물리쳤는데
작은 고개 하나 넘다보니
내려다 보이는 마을과 논들이
참 예뻤다.
잠시 내려 보기도 했다.
구형왕릉이다.
500년 역사가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까운 가야.
구형왕은 신라 법흥왕에게 합병되기까지 492년간 계속 되었던 금관가야의 마지막 10대왕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비와 세아들과 함께 돈과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 하였다"
라고
그 가야 마지막왕 구형왕릉이라 하지만
정확한 역사적 근거가 없어
전 구형왕릉이라 칭할 수 밖에
돌무더기가 단을 이루었고
감실이 하나 있긴 하지만
상징적 의미
무덤이다 제사 지내던 곳이다.
정확한건 없고
다만 앞산이 왕산이란것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왕산은 현의 서쪽 십리지점에 있고,
산중에 돌을 포개서 만든 둔덕이 있고,
사면이 모두 층계로 되어 있는데 왕릉이라는 전설이 있다 라는 기록이 있다고
후대 김해김씨들에 의해 세워진 문인석 무인석이
무덤을 지키는 것 같다.
그 앞에 세워진 석등 구멍으로
바라보는 문인석
담장 밖을 한바퀴 돌면서
옆쪽에서 바라보니
고구려 유적 답사 때 보았던 장군총이 생각났다.
변방 장수의 무덤이라 하여 장군총이라 격하시켜 이름 지어놓은 중국.
무덤 뒤 정 중안에서 바라다 보니
솟을 대문까지 달아 놓은 모습이 보인다.
한때의 부귀도 영화도
패배자에게 제대로 된 기록하나 없다
층단은 모두 7개
돌무덤을 약 1m 높이의 담장이 에워싸고 있다.
그 담장 너머에서 구형왕릉을 바라보니
가을햇살 따뜻하게 내려 받고 있어 쓸쓸함을 덜해 보였다.
김유신 장군의 활터
구형왕의 후손인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가 구형왕)
김유신이 여기서
활 쏘는 훈련을 하던 곳이라고
금관가야 왕실의 후예로 신라의 진골에 편입되었던 김유신 .
신라 귀족들에게 얼마나 멸시를 받아야 했을지....
덕양전은
구형왕릉을 오르는 길 입구에 있었다.
정조 17년 구형왕의 후손들이 사적 보호를 위해 지었고,1930년 이곳으로 이전 되었다고 했다.
구형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봄 가을 추모제를 지낸다 했다.
이 수수께끼를 풀어낼 정확한 근거는 없고
누가 만들었는지 검은 돌덩이들은 알고 있을까?
고려 문화유적 답사 때에도 가야의 흔적을 보면서
남아 있지 않는 역사의 기록이 너무너무 아쉬웠었다.
그래서 나는 구전을 믿기로 했다.
금관가야 마지막왕 구형왕릉이 맞다고,
합병되고 30년을 더 살고 죽은
패망국 왕의 무덤을 누가 이렇게
장황하게 해 주었을지 의문이지만,
그래도 믿고 싶은 마음은 잃어버린 왕국에 대한 미련
그것 때문이리라.
초가을 햇살을 받고 있던 구형왕릉은
아직도 눈에 마음에 선하게 남아 있음이다.
구형왕릉에서 유의태 약수터도 가까웠고,
왕산을 등산하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구형왕릉이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잠시잠시
다녀가고 있었다.
무덤가를 한바퀴 돌고
김해김씨 후손들이 세워둔 돌사자 암수 한쌍도 보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렇게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