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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가수 백설희 본명 김희숙
고인은 지난 2009년 말 고혈압에 따른 합병증으로 경기 분당의 한 병원에 입원, 그간 투병 생활해 오다 이날 숨을 거뒀다. 고인은 전영록의 모친이자, 지난 2005년 향년 85세를 일기로 별세한 유명 원로배우 고(故) 황해(본명 전홍구)씨의 아내이다. 또한 요즘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6인조 걸그룹 티아라 멤버 보람(본명 전보람)의 친할머니이기도 하다.
고인은 지난 1943년 조선악극단원으로 데뷔한 뒤 '봄날은 간다' '물새우는 강언덕' '청포도 피는 밤' 등의 히트곡을 발표, 50~60년대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25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7일이다. 가족장으로 치른다.
원로 작곡가 박춘석씨 별세
▲ 뇌졸중으로 16년간 투병하다 별세한 원로 작곡가 박춘석씨의 빈소가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가운데2010. 3월14일 오후 가수 남진이 조문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1930년 서울에서 태어난 박 씨는 본명이 의병(義秉)이고 춘석은 아명이었다. 네 살 때 풍금을 연주했고 봉래소학교와 경기중학교를 거치며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익혔다. 1949년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했고 이듬해 신흥대(경희대) 영문과로 편입해 졸업했다. 경기중 4학년 시절 명동의 나이트클럽인 ‘황금클럽’에서 피아니스트 활동을 시작해 대중음악 작곡가로 변신했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1995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박 씨의 음악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박춘석 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14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에 마련된 빈소에는 최희준, 패티 김, 이미자, 남진 씨 등이 찾아와 고인을 애도했다. 이 씨는 “박 선생님과는 가족 같은 사이였다. 아들이 어릴 때는 내가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는 동안 아이가 박 선생님의 무릎에 앉아 놀던 기억이 난다”며 “성격이 워낙 깔끔해서 투병 이후에는 (누워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우리를 피하셨다”고 안타까워했다. 패티 김 씨는 “선생님이 쓰러지신 뒤 매년 자택을 찾아갔는데 노래를 불러드리면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셨다”며 연방 눈물을 훔쳤다.
남진 씨는 “1966년 박 선생님 자택을 찾아가 곡을 써달라고 부탁해서 받은 곡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가슴 아프게’였다. 철없던 때는 연습 시간에 자주 늦어 박 선생님한테 군밤을 많이 맞았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2010.2.23일 오전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故 배삼룡의 빈소에서 유족들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故 배삼룡은 폐렴 투병 중 향년 84세 나이로 23일 새벽 2시경 타계했다./뉴시스
코미디언 배삼룡씨의 젊은 시절 모습. /연합뉴스
생몰 1948년 8월 3일 ~ 2010년 1월 29일
2010.1.29일 오후 고(故) 이남이 씨의 빈소가 마련된 강원 춘천시 동내면 춘천장례식장에 고인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연합
고(故) 이남이씨는 1974년 밴드 신중현과 엽전들의 베이시스트로 데뷔한 이후 1977년부터 밴드 사랑과 평화에서 활동했고 1988년 ’울고 싶어라’로 솔로 데뷔해 이름을 널리 알렸다.
특히 고인은 2000년 춘천에 자리를 잡고 절친한 소설가 이외수씨와 지역 문화 활동에 앞장섰다.
또 딸(이단비)을 비롯한 지역 음악인들과 결성한 밴드 ’철가방 프로젝트’로 음반을 내며 활동한 그는 춘천교도소 수용자들을 위한 공연을 주도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영욕의 85년. 故 이후락 전 중정부장 대전현충원 안장
31일 노환으로 별세한 이후락(李厚洛.85) 전 중앙정보부장의 인생은 `권력무상',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한번 번성한 것은 반드시 쇠함)' 그 자체였다.
그는 우리 현대사의 암흑기인 `유신(維新) 시대'를 대표하는 권력자였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은밀한 정치공작의 `대명사'였다.
이 전 부장은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 이듬해 3월 임관한 뒤 1948년 육군 정보국 차장을 지냈다.
이 전 부장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공보실장을 맡으면서부터. 1963년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으면서 일약 권력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1969년 10월 박 전 대통령은 3선 개헌의 `후폭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를 주일본 대사로 내보냈고,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도 해임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듬해인 1970년 12월 제6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면서 다시 권부 핵심으로 복귀했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총지휘, 명실상부한 `정권의 2인자'로 발돋움했다.
그는 중앙정보부장 재임 기간인 1972년 5월 `대북 밀사'로 평양에 파견돼 김일성 전 북한 주석과 사상 첫 남북비밀회담을 가졌고 `7.4 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당시 이 전 부장은 판문점을 경유, 3박4일간 비밀리에 평양에 머무르면서 2차례에 걸쳐 김 전 주석과 회담했다.
김 전 주석과 이 전 부장의 회동은 심야에 이뤄졌으며, 김 전 주석은 당시 "민족의 분열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동포끼리 이처럼 만나고 보니 반갑고 감개무량하다"면서 조국통일 3대 원칙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부장은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 체제를 확립하고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하는 등 유신의 어두운 역사를 만든 장본인중 한명이다.
실제로 지난 1998년 6월8일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홈페이지에서 `1973년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이 전 부장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이 전 부장은 1973년 12월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박정희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라고 밝혀 파문을 일으킨 소위 `윤필용 사건'으로 숙청된다.
`오뚝이'라는 별명대로 이 전 부장은 1978년 제10대 총선에서 자신의 고향인 울산에서 무소속 출마해 당선, 무소속 원내 교섭단체인 `민정회(民政會)' 회장을 지내다가 공화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10.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되고 신군부에 의한 제5공화국이 출범하자 영원히 정계를 떠나 지금껏 경기 하남에서 도자기를 구으며 칩거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력자였지만 그의 말년은 불우한 나날이었다.
지난 2004년 부인이 당뇨 등 지병으로 별세한 뒤에는 노인성 질환을 앓기 시작해 최근에는 지인들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방 밖으로 거동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됐었다고 한다.
이씨 소유의 경기 하남시 자택과 땅은 보험회사 대출금을 갚지 못해 1999년 8월 경매돼 다른 사람의 명의로 넘어갔고, 앞서 경기 광주에 있던 도자기 요장과 땅도 1994년 매각됐다.
(서울=연합뉴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중 하나였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안장식이 11월2일 대전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서 열렸다.
안장식에는 유가족을 비롯해 고인을 모셨던 양희재 전 비서관 등 100여명이 참석했으며 40여분간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