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바다의 폭풍/렘브란트
마8:23~27, 막4:35~41, 눅8:22~25
본문의 갈릴리 바다의 광풍을 잠잠하게 하신 이야기는 예수님의 기적 중, 공관복음 모두 기록 되어 있을는 매우 중요한 기사이다.
이 세 복음서의 사건의 내용은 기록자에 따라 일부가 순서가 뒤바뀌거나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세기록물을 조합해 이때의 상황을 그려보면, 예수님은 이 일이 있기 전에 먼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귀신들린자와 병든자를 더 데리고 몰려 들자 예수님은 이들도 다 고쳐주신다.
그런 후 사람들에게 씨뿌리는 비유를 하시고 저녁이 되어 점점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들자, 예수님은 군중을 피해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 건너 편으로 가자고 이르신다.
그때 한 서기관이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에 감화를 받아 예수님을 좆으려 하자, 예수님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둘곳이 없다며 자신을 따르는 것이 고난의 길임을 알리시며 이 서기관을 제자로 허락치 않으신다.
그때 한 제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자는 예수님께 먼저 부친을 장사하고 오겠으니 허락해 달라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엔 또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좆으라"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린 예수님이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할 제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심을 알수있다.
그런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배를 타시고 곤하셨는지 배의 고물에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데 그때 갈릴리 바다에 큰풍랑이 일게 된다.
파도는 배를 엎을 것 같은 기세로 몰아치고 배안엔 그 파도물이 들이 닥쳐 배가 가라앉을거 같자 제자들은 두려워 아우성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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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님은 그 와중에도 여전히 주무시고 계시고,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원망스레 급히 흔들어 깨운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에 예수님은 일어나시고 바람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며 호통을 치신다.
그러자 바다의 풍랑은 이내 곧 그치고 고요해지고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며 제자들을 핀잔 하신다.
이에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워 하면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길래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는가"하며 놀라 서로 수근 거리는 걸로 끝이 난다.
이 갈릴리 바다를 잠잠케 하신 일은 다른 큰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참으로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내용으로 갈릴리 바다위를 걸으신 기적과 상관없는 일이지만 마치 한 이야기나 전후편 처럼 서로 닮아 있다.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 주는 교훈도 두 이야기 모두 세상의 풍랑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마음과 자세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두사건은 예수님이 배안에 계시는 것과 배 밖에 계시는 것의 큰 차이가 있는데 이는 마치 예수님이 우리안에 계시면서 밖에 계시기도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 두상황에 대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살펴 보면, 바다위를 걸어걸으신 사건은 우리가 베드로처럼 예수님께 나아갈때 세상이란 바다와 접촉을 하되 빠지지 않는, 즉 세상을 밟고 이기며 예수님께 다가가야 하는 것을 가르지고, 본문의 사건은 우리가 세상의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함께하심과 그 능력을 믿고 풍랑에 의연해야 함을 가르친다.
그런데 본문의 사건에서 재밌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서기관에게 여우와 새도 거처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둘곳이 없다고 하신 후, 실제로 배에 오르신후, 마땅한 잠자리가 아닌 풍랑에 요동치는 배의 고물에 머리를 베고 주무신 사실이다.
예수님이 서기관에게 하신 마8:20의 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후, 실제로 한번도 자신을 위해서 집을 짓거나 한곳에 머물지 않으셨기에 인자는 머리둘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무신 배안은 우리를 의미 하기도 한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겐 그 안에 예수님이 와 계신다. 이것은 '내안에 너 있다'란 식의 사모하는 자의 상상이나 정신승리가 아니라 실제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안엔 예수님이 편안히 쉴만 한곳은 없다. 배는 세상의 풍랑에 뒤집힐 듯 요동을 치고 우리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배안으로 들이닥치는 파도에 죽을 것 같이 무서워한다. 그리고는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는 예수님을 원망하면서 울고 불고 안달을 떤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느새 나서서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우리는 또 새삼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깨닫고 감동한다. 이일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성경의 주무대 중 하나인 갈릴리 바다엔 두가지 면이 있다.
하나는 아름다운 경치와 물속의 풍부한 물고기들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량에 큰 도움이 되고 또 어부들에겐 생계를 이어가게 하는 고마운 생명의 바다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배를 엎을 듯한 풍랑이 일때엔 어부의 목숨을 위협하는 죽음의 바다이기도 하다.
우리가 항해하는 세상이란 바다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때는 아름다은 경치와 풍부한 먹거리로 마냥 우리에게 즐거움과 안락을 주는 것 같지만 그 바다는 때로 무섭게 돌변해 우리에게 한없는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마8장에 '갈릴리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라는 표현에서 '놀'이라 번역한 헬라어 '세이스모스'는 지진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바다위의 물이 바람에 파도가 치는 정도가 아니라 바다밑의 땅이 근간이 흔들려 바다가 뒤집어 지게 크게 풍랑이 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 사람들의 살아가면서 겪는 세상의 풍랑도 이와 마찬가지다.
땅이 흔들려 파도가 우릴 집어삼기게 몰아치는 것은 이 세상엔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그리스도인도 여기에서 피할수 없다.
크게는 전쟁이 나고 자연재해가 일어나는 그런 세게적인 지축을 흔드는 일들이 있기도 하지만 작게는 가족이 죽고 실직을 하고 죽을 병에 걸리고, 이러한 일은 개개인의 삶의 근간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는 일이다.
우린 그럴 때 예수님이 함께 한다는 것과 예수님이 함께 하는 한 이러한 파도에 배가 뒤집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선 안되고 이러한 광풍도 예수님이 곧 잔잔케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이 거친 풍랑이 일때 배 고물을 베고 주무시고 일어나지 않으신것은 단순히 피곤해 잠에 빠지셔서 그러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주무시면서 모든 상황을 아셨지만, 그럼에도 주무시는 척 하신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때때로 인생의 풍랑을 맞을 때 주님이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무관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 우린 불평을 하며 예수님을 원망하지만 예수님은 우릴 떠나지 않으시고 우릴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의심하면 안된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능력을 보았음에도 그 파도에 빠져 죽을 까 두려워하는 연약한 모습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체험에서 오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도 인생의 풍랑에 놀라 두려워 우왕좌왕하는 우리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은 두려워 한것 때문이지, 자신을 깨운 것을 나무라신것은 아니다.
제자들이 두려워 예수님을 깨운 것 보다 더 잘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깨우지 않고 스스로 어떻게 해보려는 것이다.
사실 배안에 탄 제자들중 넷은 어부였다. 그 어부였던 제자들은 이러한 풍랑이 처음은 아니었을것이다.
그들은 바다에서 어릴 때부터 헤엄치며 자랐고 또 어부로서 한평생 바다에 산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럴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바다와 상관없이 자란 전직 목수였던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어떻게 해보시라고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오직 예수님이 해결책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복잡한 문제를 만났을 때, 예수님이 2천년전 분이라 자기가 닥친 일에 대해 모르실거라 여겨서인지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미련한 짓이다.
우리는 우리가 터득한 경험과 기술로 그 풍랑은 잦아들게 할수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그 풍랑은 예수님만이 나서서 '잠잠하라' 명령을 할때야 잦아들기 때문이다.
앞으로 감당할수 없는 풍랑이 찾아 올때, 혼자 고민하고 불안해 떠는 대신 우린 어서 해답은 예수님께만 있다는 것을 깨닫고 빨리 예수님을 흔들어 깨워 일어 나시게 해야 할것이다.
ㅡ주님의 산 나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