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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 구속사의 완성
2020. 1. 10. 이현래 목사
오늘은 구속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간단하게 해도 다 아시니까 창세기 1,2장은 창조지만 3장부터는 빗나간 길이니까 비정상적인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바벨론으로 가서 바벨탑을 쌓을 때까지 빗나간 아담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는 말씀이다. 지금도 세상을 보면 그대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다. 허무한 인생, 또 강하고 위대해진 인생, 그리고 뭉쳐서 사회를 이루는 인생, 이것을 빼면 세상은 아무 것도 없다. 구속은 아브라함을 부르심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 창조의 목적이 빗나가니까 거기서 다시 회복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구속사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과 연합해서 한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해서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 저편에 있는 나라가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나라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하나님 나라를 천당이나 저 구름 뒤에서 찾아서는 소용이 없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위에 있는 나라다.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다른 것이다. 바벨론으로 가는 사람은 바벨론을 만들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아무리 개선해도 안 된다. 본성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좋은 나라를 이루어 본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한다. 제일 좋은 선택을 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보다도 종교 안에서는 더 심각하게 더 좋은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역시 바벨론으로 간다. 이런 형태로든지 저런 형태로든지 결국 도착하는데 가보면 바벨론이다.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도 결국 바벨론으로 갔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은 종교세계를 말하는 것이지 일반적인 세상과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계18:2) 종교적으로 최고를 바라는 것이 알고 보면 바벨론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성질만 좀 다른 것뿐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다른 세계를 향해서 부르신 것이다. 마태복음은 그것을 요약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 이것이 새로운 세계의 계보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기 때문이다. 그 노선이 하나님 나라의 노선이다. 이것은 전혀 다른 노선이다. 사람들이 아담 안에서 이루고 싶었던 여러 가지 노선들이 있는데, 그 노선과는 전혀 다른 노선이다. 아담의 노선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다. 결국은 바벨론이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시작한 노선은 바벨론으로 가는 노선이 아니고, 성경으로 말하자면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노선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로 가는 노선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이 발전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 속에서 연구해서 만들어진 나라도 아니다. 종교 다원론자들은 다 다른 곳에서 가도 만나는 곳은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한라산을 올라가는 것과 백두산을 올라가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한라산을 올라가는 사람은 동쪽에서 가든지 서쪽에서 가든지 다 꼭대기 백록담에서 만난다. 그렇지만 백두산 꼭대기에 가는 것은 아니다. 다원론자들이 하는 이야기는 목표점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 과학적 정신이고 서구정신이다. 땅에서 우리가 찾아가 보자. 마지막에 이를 곳이 있을 것이 아닌가? 이런 이야기 인데 아무리 가도 바벨론 밖에 없다. 개가 어디로 모이겠는가? 개가 있는 곳으로 모이지 않겠는가? 악어가 어디로 모이겠는가? 다 늪지로 모이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다 모여서 가면 거기에 뭐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노선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처음부터 계시되었다. 우리가 모르는 데서 보여주어서 이런 나라가 있다, 이런 나라로 가자고 해서 이것을 보여 준 것이지 사람들이 생각하고 의논해서 된 것이 아니다. 불교나 유교나 이런 것은 다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최선의 방법이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헛것을 찾을 필요가 없다. 힌두교가 너무나 많은 것들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정리하다 보니까 석가모니의 종교가 나온 것이다. 이것들은 다 헛것이다. 허상이다. 그것들을 말끔히 정리하려고 하다 보니까 명상이 필요할 것이 아닌가? 생각해야 되고 이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가려내야 된다. 옷은 내가 아니다. 벗으면 그만이다. 이런 것이다. 절에 가면 달마상이다.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달마상이 있는데 거기에 대한 설명을 그렇게 한다. 9년 면벽을 하고 세상으로 나오던 길이었다. 달마대사가 9년 동안 한 벽만 봤다니까 대단한 일이 아닌가? 그런 후에 도를 깨달아서 나오는 길이었는데 오다 보니까 큰 호수가 있다. 호숫가에서 보니까 어떤 사람이 멱을 감고 있다. 그런데 뒤에 악어가 쫒아가더라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이 사람은 멱을 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자기 몸을 잠시 벗어 놓고 물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구제하고 나와 보니까 어떤 놈이 이 흉악한 몸을 두고 가 버렸다는 것이다. 달마의 원래의 몸은 그것이 아닌데 어떤 놈이 와서 자기 몸과 바꾸어 가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절마다 가면 거의 다 있다. 몸은 옷과 같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벗었다 입었다 하는 것이다. 몸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참 실재는 무엇인가? 이것을 찾는 것이 불교다. 사람의 생각 중에서는 가장 깊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와 도교도 마찬가지다. 유교는 도교가 근본이 되니까 중국 사상의 근본은 도교다. 내가 도라고 말하면 이미 도가 아니라는 식이니까 불교나 별 차이가 없다. 달마가 불법을 전하기 위해서 히말라야를 넘어서 중국에 왔는데, 도교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선불교다. 선불교는 알고 보면 중국식 불교다. 인도 불교가 아니고 중국불교인데 그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조계종이다. 우리는 중국 불교를 믿고 있는 것이다. 인도에 가 본 사람이 말하는데 인도 불교와는 다르다고 한다. 인도 불교는 잘 모르겠는데 선불교와는 많이 다르다고 한다. 소승불교가 있고 대승불교가 있는데, 그런 것들이 문화와 만나면서 필요한 것들을 서로 받아들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무엇을 해도 마찬가지다. 어디를 가도 사람이 찾는 것은 다 똑같다. 형태만 다를 뿐이지 다른 것이 없다. 창세기 11장까지 가면 결국 바벨탑을 쌓는다.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4) 이것이다. 지금 세상을 보라. 이것뿐이다. 국회에서 왜 싸우는가? 이것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다른 일이 없다. 합하면 될 것인데 합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이름을 빛내자고 했는데 그것이 자기 이름을 빛내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안 된다. 벽돌이 다 조각조각 났으니까 자기 이름을 빛내자가 되고 만다. 그래서 연합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하나님이 원래 목적으로 했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다. 이 부르심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어디에서 부름 받았는가? 바벨로 가는 길에서 부름 받았는가? 아니면 새 예루살렘을 향해가는 그 길에서 부름 받았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기독교가 어디서 부름 받았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가톨릭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잘 생각해 보면 그것도 바벨론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핍박 중에 있던 기독교가 결국 국교가 되었으니까 대 승리를 했다고 생각했다. 큰 승리를 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을 정복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했지만 세상을 정복한 것이 아니다. 바벨론이 되어버렸다. 세상을 정복하러 들어갔다가 세상화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70년대에 토착화라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우리는 이제 서양의 기독교를 탈피해서 현장으로 나가자가 되었다. 예배당에서 주여, 주여 만하고 있으면 무엇을 하는가? 현장에 나가서 목회를 하자는 운동이 한때 벌어졌다. 여름이면 바다에 휴가도 가야 되는데 예배당에 잡아 놓고 휴가도 못 가게 하면 되겠는가? 우리가 따라가자. 그래서 비키니 목회, 등산 목회, 이런 것들을 했다. 그런데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다방 목회 등 별것이 다 있었다.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세상은 바벨론이기 때문에 거기 가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400년을 애굽에서 살았지만 거기서는 여호와를 경배할 수가 없었다. 바로가 있는데 여호와 경배가 되겠는가? 안 된다. 모세가 가서 내 백성을 내놓으라고 하니까 왜 나가려고 하느냐고 했다.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나가야 되겠다고 하니까 바로가 그러면 여기서 하지 어디로 나간다는 말이냐고 했다. 여기서는 안 되고, 한 사흘 길쯤 가야 된다고 말했다. 바로가 왕이 되어 있는 땅에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광야로 나왔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다. 바벨론으로 가는 그 대열 속에서 잘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지 어디로 바깥으로 나간다는 말이냐? 이러는데 그 안에서는 되지 않는다. 나도 해보니까 안 되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약간 있었다. 있다가 말았는데 금방 저항이 왔다. 그것이 안 된다. 노선의 문제이다. 내가 경부선을 타고 가면서 목포의 눈물을 아무리 불러봤자 소용이 없다. 어차피 울며 헤어진 부산항으로 가기 때문이다. 방법이 없다. 기차를 그 기차를 탔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목포의 눈물을 아무리 흘려 봐도 안 된다. 국제시장이 나오는 노래가 있다. 서울 가는 12열차라는 노래는 부산에 가야 그 노래가 들리지 목포의 눈물이 들리겠는가? 기차를 어느 것을 타느냐가 성패를 좌우하는 문제다. 아브라함 안에서 부름 받았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부름은 다 있는데 어디서 부름 받는가? 이것이다. 사람들이 교회를 가게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서 간다. 자기가 외로워서 가는 사람도 있고, 인생이 괴로워서 위로를 받으려고 가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어디서 부름 받느냐? 이것이 참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병을 고치려고 가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이것이 제대로 길을 못 들면 교회를 가도 역시 바벨론으로 가 버린다. 목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많다. 1년에 3000명씩 나온다든가 하는데, 이 사람들이 뭘 보고 가는가가 중요하다. 그냥 목사만 되면 다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어디서 부름 받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내가 신학교를 가니까 알게 되었다. 조그마한 신학교였지만 조그마한 데서도 다 보였다. 중학교 때부터 기도를 하고 왔다고 하길래 대단하다, 나는 기도 한 번 해 본적이 없고 갑자기 끌려 왔는데 어떻게 어린 나이에 저런 생각을 했을까?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조금 있으니까 자기들끼리 앉아서 수군수군 거리는데 들어보니까 여기 나와야 갈 데도 없겠다면서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앉았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부름을 받았으면 부르신 이가 알아서 할 일이지 왜 너희가 걱정을 하고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특수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전혀 생각이 없다가 부름 받았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공연히 불렀겠는가? 내가 무슨 목회자가 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전혀 내 생각 밖에 있었던 일인데, 부름 받아서 왔으니까 그러면 알아서 하시겠지, 책임을 지시겠지, 이런 믿음이 생겼다. 그런데 뒤로 보니까 살금살금 다 빠져 나갔다. 뭔가 한 번 해 보려다가 희망이 없으니까 나간 것이다.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뭔가 좋은 길로 갔으면 좋겠다. 그런 식으로 가다보면 결국은 바벨론으로 가는 길이다. 나쁜 일을 해서 바벨론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그 속에 뭐가 처리 안 되면 도로 바벨론으로 가 버린다. 교회라고 해서 그냥 하나님 나라인 것이 아니고, 그것도 어디로 이끌려 가느냐에 따라서 바벨론으로 가는 교회도 있고,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교회도 있다. 그래서 구속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왜 아브라함을 불렀겠는가? 길이 다르니까 불렀다. 길이 다르지 않으면 부를 필요가 없다. 거기 두고 하면 되지 뭘 하려고 따로 불러내서 “너는 너의 고향(본토)과 친척과 아버지(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지시 할) 땅으로 가라.”(창12:1)고 하겠는가? 하나님 나라는 지원병 제도보다 징병제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지원병이 더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전부 징병제다. 하나님이 불러서 썼지 내가 가겠다고 해서 온 사람은 별로 없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있는 분들이 다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언젠가는 그것이 한 번 부딪친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부딪친다. 내가 원해서 왔더라도 그 노선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께 한번 부딪쳐서 내가 끌려가야 되지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그 길로 쭉 가서는 안 된다. 언제 부딪쳐도 한번은 부딪쳐야 된다. 아브라함이 했던 것처럼 “고향(본토)과 친척과 아버지(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지시 할) 땅으로 가라.”(창12:1)는 이 노선이 한번 있어야 된다. 내가 보기에는 안 그러면 안 되는 것 같다. 결국은 길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하나님께서는 형체가 없으신 분이시고 모양이 없는 분이시니까 사람을 창조해서 모양이 있는 사람과 연합해서 자신의 나라를 이 땅위에 가지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갈망이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천지를 창조하셨는가? 무엇 때문에 나를 불렀는가? 이 모든 해답이 다 거기에 있다. 그분은 누구와 연합을 해야 되는 분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안 되는 분이다. 나는 그것을 가난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은 되게 가난하신 분이시고 외로우신 분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적인 표현으로 하니까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극히 외로운 분이시다. 왜? 형체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손발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내속에서 손발을 갈망하겠는가? 돈과 비교가 되겠는가? 무엇과 비교되겠는가?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해도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것이지 하나님이 없으면 죽는다는 것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이 없으면 자기가 나타날 수가 없다. 누구의 갈망이 큰가? 하나님 갈망이 크다. 이번에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 천주교 사제님이 나와서 재미있게 강의를 했다. 그 사람들은 농담 같은 것을 참 잘한다.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교황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도를 하라. 기도해서 손해 볼 게 뭐가 있느냐고 하셨다. 기도해서 손해 볼 것이 없으니까 기도하라.’고 하면서 씨익 웃었다. 그 이야기를 두 번이나 했다. 듣고 보니까 그렇다 기도해서 손해 볼 것이 뭐가 있는가? 기도한다고 돈이 들어가는가? 뭐가 들어가는가? 기도해서 되면 좋고 안 되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죽고 살고 할 일은 없다. 그래서 참 큰 사람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황이면 세계에서 가장 큰 사람인데, 그렇게 너그럽게 이야기를 했다. 기도하면 손해 볼 게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처음에는 고아원을 해서 차츰 커졌다. 지금은 학원 재벌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지역에서 유치원부터 대학은 없고 고등학교까지 다 있다. 대구에도 그런 분이 있는데 다른 지역에도 그런 분이 있다. 그분의 지론이 그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데 믿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안 믿어서 지옥 가느니 믿으면 천당에 간다니까 믿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천당이 없더라도 믿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사업가들의 생각이다. 사업적으로 생각하니까 큰일을 하는 것이다.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다가 지옥에 가는 것보다 믿으면 천당 간다는데 믿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내가 직접 들었다. 이런 사람들이 사업을 하고,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나 잘하는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못 한다. 사업가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밑져야 본전이 아니냐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예수를 적당히 믿는 것이다. 천당 갈 만큼만 믿는 것이다. 그것이 참 속 편하다. 신분도 보장되고 얼마나 좋은가? 그런 이야기를 우리가 들을 때 우습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세상을 보는 것도 있고 세상은 이래야 되는구나. 세상을 살면서 사업적으로 성공하려면 그런 마인드가 있어야 성공한다. 콩이냐, 팥이냐 가려서는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다. 장사는 밑질 때도 있고 남을 때도 있어야 되는 것이지 항상 이익을 볼 수는 없다. 물건을 사다 놓고 장사를 해보면 몇 년에 한 번 팔리는 것도 있다. 재고로 처 박혀 있다가 팔린다. 그런데 그것이 없으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와서 그것을 찾는다. 없다고 해버리면 그 한 가지 때문에 신용도가 다 떨어져 버린다. 우리 동네에 만물상이 하나 있다. 철물점이다. 상가가 있는 곳도 아니고, 그냥 시골 길에 있는데도 장사가 잘된다. 왜냐하면 오만 것이 다 있고, 다 갖다 놓았다. 한번은 내가 무엇을 만들다가 이런 너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가서 찾아보았다. 나를 보고 저기 가서 찾아보라는 것이다. 찾아주기는 그렇고 사보았자 몇 개를 사겠는가? 찾아보니까 딱 내가 찾던 것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몇 년 만에 파는 것인지 모른다. 비닐에 싸놓았는데도 먼지가 가득했다. 그것을 보면서 이 집에 오면 없는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에도 뭘 사려면 그 집에 가게 된다. 왜냐하면 이 집에는 별 것이 다 있더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세상은 어떻게 생각하면 참 재미있다. 그 물건이 돈이 안 될 것 같지만 그 물건이 다른 물건을 팔게 해준다. 그래서 구석에 처박아 놓고 있는 것이니까 찾아주기는 귀찮다. 먼지도 끼었지만 그런 너트가 한 주먹쯤 있는 것이다. 컴퓨터 탁자가 떨어져서 너트를 사러 갔었다. 세상은 어쩌면 재미있다. 세상대로 살려면 재미있다. 이것이 노선이 틀리니까 그런 마음 가지고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셨다. “고향(본토)과 친척과 아버지(아비)의 집을 떠나.”(창12:1) 본토, 친척, 아비집이 요즘에는 별것이 아닌데, 옛날에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굉장히 중요했다. 내가 살던 곳은 나의 태생지였다. 그때는 내가 망해서 거기를 떠나야 될 형편이었다. 거기서는 도저히 일어날 방법이 없었다. 빤히 보고 있는 곳이고 아는 사람들이니까 아무 장사도 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가게를 하고 있다가 망해서 밑천이 떨어져서 없는데 거기서 풀빵 장사를 하겠는가? 고구마 장사를 하겠는가? 어렵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 가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는데, 빤히 보는 데서는 하기 어렵다. 그럴 때는 고향을 떠나야 되는 것인데, 떠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바깥에서 불러내지 않으면 나는 못 떠날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하다. 거기서 나를 불러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거기서 뭘 하고 살 수 있었겠는지 모르겠다. 빌어먹자니 뭐라고 하더니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궁지에 빠진 일이 있었다. “고향(본토)과 친척과 아버지(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지시 할) 땅으로 가라.”(창12:1)는 말이 지금은 쉽지만 그때로서는 굉장히 어려운 말이다. 그래도 분리해야 되니까 갈라놓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어떤 사람이 필요한데 그런 사람이 있어야 자신이 원하는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산에 가서 나무를 구할 때도 옛날 목수들은 자신이 직접 산에 가서 나무를 지정해서 자른다. 소나무 밭이니까 구부러진 것도 있고 펴진 것도 있다. 대들보 나무는 비스듬한 나무가 필요하니까 그런 것을 찾는 것이다. 그런 나무는 보통 때는 필요가 없다. 그런데 어떤 때는 딱 필요한 나무가 있다. 그래서 그것을 자르게 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필요한 사람을 찾는다.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 나라가 잘되겠다는 것과 다르다. 목수가 볼 때, 이 나무가 필요하다고 해야지 내가 스스로 그 생각을 할 수 있는가? 없다. 하나님이 불렀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다.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든 간에 불렀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우리 교회에서도 어떤 이는 참 잘 안 되는 사람이 있다. 내가 늘 말할 때마다 ‘너를 하나님이 그냥 불렀겠는가? 너에게 무슨 뜻이 있으니까 불렀지 않겠는가?’ 이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이 말을 알아듣게 되면 정말 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도 그런 줄을 알면서도 잘 안 되는 모양이다. 내 역량도 있겠지만 말씀을 잘 못 알아들으니까 안 되었다. 좌우간 하나님이 필요해서 불렀다면 언젠가는 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필요해서 불렀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사람은 우리 생각과 전혀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왔으면 참 좋겠다는 것이 있다. 저 사람은 안 왔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기는 필요하니까 오는 것이다. 그러면 목회자로서는 부담이 된다. 그런데 그 사람이 교회에 쓰일 데가 있다. 그것을 보면 나 같으면 쓰지 않는데 하나님에게는 이 사람도 필요하구나. 이런 것이 있다. 우리 교회에 와 보면 여러분은 그런 것을 좀 구경할 수 있다. 저 사람은 어디에 필요한가 싶은데, 그 사람 때문에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너는 필요가 없으니까 꺼져주라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언제 그 사람을 쓸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는 교회를 안 오는데 그 사람 때문에는 교회를 올 사람이 있다. 내가 낫느냐, 네가 낫냐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쓰시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꼭 유명해서 쓰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생각할 때 저 사람은 좋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나에게는 짐이 되는 사람인데도 하나님에게는 필요할 수가 있다.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보내 주시면 받아야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도 그가 특별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기준으로 생각할 때는 그 사람도 고향에서 망하지 않았겠는가 생각한다. 사람은 고향에서 망하지 않으면 고향을 안 떠난다. 뭘 하려고 고향을 떠나겠는가? 대부분 고향을 떠난 사람은 망한 사람들이다. 망해서 온 사람이 많다. 제주도에 가 보면 호남 사람이 많다. 옛날에는 전라남도 제주군이었다. 전라도에서 제일 가까운 섬이다. 육지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많이 와 있다. 육지에서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 옛날에 제주도에 올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지금은 비행기도 있고 참 좋고, 제주만큼 좋은 곳도 없다. 옛날에는 사람 살 곳이 못 되었다. 논이 없으니까 쌀이 없다. 그래서 시집 갈 때까지 쌀 한 되를 못 먹고 간다는 말이 있다. 망하지 않고는 제주도에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지금은 제주도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곳이 되었다. 공기 좋고 교통이 좋다. 우리나라에서 교통이 제일 불편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제일 교통이 좋은 곳이 되었다. 전국 어디든지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옛날 C.C.C. 있을 때 간사들을 소집했는데, 누가 제일 먼저 오는가? 제주 사람이 제일 먼저 온다. 비행기 타고 오니까 1시간이면 서울까지 온다. 제주보다 좋은 곳이 없다. 나도 아무 일이 없으면 제주 가서 살고 싶다. 그만큼 좋은 곳이다. 조용하고 공기 좋고 물 좋고 여름에는 해수욕장이 좋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정말 좋은 곳이다. 결국은 망한 사람이 좋은 곳으로 간다. 우리나라 초창기, 개화기 때,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이 아주 많다. 왜냐하면 선교사들이 와서 사람을 찾는데 누가 양코배기에게 자녀들을 보내겠는가? 그때는 아무도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미국사람에게 가면 눈 빼먹는다고 하는 민요가 나왔었다. 그래서 가난한 집에 가서 쌀 한말 가지고 가서 사와서 아이들을 공부시켰다. 이화학당, 배제학당 같은 곳에서 공부를 시켰고, 그 아이들을 유학을 보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김활란 같은 분들이었다. 원래 잘 살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 분들은 개화기에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이 그런 사람들에게는 큰 복이다. 그런데 양반집, 잘사는 집은 콧방귀를 뀌었다. 학교를 보내준다고 하면 오겠는가? 자기들은 서원도 있고 별 것이 다 있는데 뭣하러 아이들을 서울로 보내겠는가? 하나님에게 부름을 받는다는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뭔가 우리에게 어떤 갈증이 있어서 하나님이 부르니까 나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저런 사람 교회에 나오면 좋겠다는 사람은 여간해서는 안 나온다. 잘 사는데 나오겠는가? 내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나오는 사람은 굉장히 귀중한 사람이다. 나는 생각할 때 이러이러한 사람이 왔으면 교회가 잘되겠다 싶은데, 그 사람은 안 오지 않고, 저러저러한 사람은 안 왔으면 좋겠다싶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들면 어쩌겠는가? 그래도 할 수 없다. 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다르니까 하나님 필요가 다르니까 그렇다. 사람이 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지었으니까 사람이다. 동물학적으로 사람이 우수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아마도 다른 동물들이 인간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괴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멀쩡한 곳에 콘크리트 집을 지어서 난리를 치고 있으니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생각할 때는 굉장한 것 같지만 다른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인간은 백해무익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들어오기만 하면 자기들을 괴롭힌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람으로 지었다는 것이 없으면 인간이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우주에 없었으면 좋았을 존재가 사람이다. 사람이 들어가면 자연이 다 훼손되어버린다. 하나님이 필요를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완전하다는 이런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정말로 필요한 것을 찾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복이다. 완전해서 아무 필요도 없는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너무 우리에게 갈망이 있는 분이 복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지었다. 우리의 가치는 거기에 있다. 그분의 갈망 때문에 우리가 가치가 있다. 내가 잘나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갈망 때문에 인간은 가치가 있다. 그래서 만유를 포함한 사람을 지었다. 첫째 날부터 창조의 과정을 보면 그것은 사람을 짓는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 만유가 다 포함되어있다. 사람 속에는 모든 것이 조금씩 들어있는 것이다. 이것이 포함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만 만유를 포함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사람을 지을 때 사람은 만유를 포함한 존재로 지어놓았다. 그래야 만유를 다스릴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중요한 뜻으로 사람을 지어놓았는데, 반대하는 놈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바로 이 중요한 문제를 깨뜨려야 하는 것이다. 사탄의 일이 우리가 술 먹고 욕하라고 하는 것이 사탄의 일이 아니다. 그런 것은 저 밑에 있는 하수들이 하는 것이다. 사탄의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탄의 목적이다. 왜 그런가? 자기가 하나님과 연합을 안 했으니까 그렇다. 그래서 이것을 마귀라고 한다. 이런 자(세력)가 사람보다 먼저 있었다. 이것 때문에 사람이 지어졌다. 그놈도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필요한 놈이기는 한데, 하여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놈이 있다. 성경을 읽어보면 계속 따라다니면서 방해한다. 예수님의 비유를 한 말로 하자면 밀을 뿌려놓았는데 가라지가 났다는 것이다. “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였다.”(마13:27,28) 이 말 속에 성경의 역사를 보면 계속해서 따라다니면서 방해하는 훼방꾼이 있다. 보통 호사다마 이렇게 말한다. 좋은 일에 마가 많이 낀다고 말하는데, 결국 아담을 이탈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구속사역이 시작되는 동기다. 하나님의 지극한 갈망으로 큰 뜻을 가지고 사람을 지었는데, 그 사람을 다른 길로 가도록 사탄이 빼돌린 것이다. 이것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구속사역이다. 결국은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 이것이다. 왜 그는 구주가 되는가? 왜 그는 세상을 구원하러 왔던가? 그것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왔던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 문화에 기여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이것이 석가모니와도 다른 점이고, 노자와도 다른 점이고, 공자와도 다른 점이다. 그분들은 인간의 문제를 보고 좀 고쳐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것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왔다. 예수는 노자나 석가나 공자보다 더 위대한 분이 아니고 목표(목적)가 다른 분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도 마찬가지다. 위대해서 사역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목적이 분명해야 사역자가 된다. 아무리 위대해도 이것이 없으면 그냥 헛일이다. 세상을 도와주는 것밖에 안 된다. 목회를 잘해서 사람을 많이 모은다고 해도 세상을 위한 것밖에 안 된다. 내가 한 사람을 부르더라도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필요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의 증인이다. 어떤 사람도 자기의 증인이 되라고 한 사람이 없다. 석가도 아니고, 공자도 아니고, 노자도 아니고, 맹자도 아니다. 자기들이 가르쳐준 것을 배워서 세상에서 잘 살라는 말이지 내 증인이 되라는 말은 없다. 예수님만 나의 증인이 되라고 했다. 우리는 그의 증인이 중요한 것이지 위대한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분의 증인이 누구냐는 것이다. 이 구속사역!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창조 다음에는 구속이다. 창조해 놓은 것이 구속이 안 되니까 모두 사탄의 것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가 “천하만국을 보이며 이르되(가로되) 이 모든 권위(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4:5,6)고 말했다. 이것은 세상의 영광을 모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위대하신 분들과는 길이 완전히 다르다. 이 전쟁에서 지면 우리도 헛일 하는 것이다. 마귀의 일을 해주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이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눅4:8)고 했다. 천하만국의 영광! 우리가 생각할 때 금이 번쩍번쩍한지 알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바벨론으로 가는 길이 천하만국의 영광으로 가는 길이다. 기독교도 그래서 부패해졌다. 국교가 되면서 커지니까 부패된 것이다. 교회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하락되어 버렸다. 질이 떨어졌다. 대량생산을 하다보니까 품질이 불량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아주 심각하게 시작되었다. 이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창조가 다 사탄의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구속이 필요하다. 왜? 사람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결국은 사탄과 사람이 결합하느냐?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느냐? 이것이다. 만일 사람이 사탄하고 결합해버리면 이 세계는 전부 사탄의 것이 되고 만다.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4:6)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거짓말인 것 같으면 예수님이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을 것인데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눅4:8)고 했다. 사람은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있는 것이지 천하만국의 영광을 가지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쉬운 일이 아니다. 교황을 시켜주겠다는데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눅4:8)고 했으니까 나는 교황 안한다고 하는 것이 쉽겠는가? 어렵다. 교인 100명만 데려다 준다고 해도 마음이 흔들릴 텐데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주겠다고 하면 내가 흔들리지 않겠는가? 내가 목회를 하러 나오니까 너무 초라했다.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는 사람을 모을 수가 없었다. 옆에서 보니까 사람들을 많이 모아서 북새통을 치는데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곳은 얼마나 뜨거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나도 저렇게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그것이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교회를 위해서 그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를 보니까 너무 초라하고 너무 볼 것이 없으니까 이것을 살리려면 나도 저렇게 해야 안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8,9)고 할 때 ‘아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고 했다는 말이 쉬운 것 같지만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까지 가신 것이다. 그것이 쉬우면 거기서 하면 됐지 뭐 하러 십자가까지 가셨겠는가? 구속사역의 시작은 정말 중요한 문제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아담은 불순종하므로 자기 자리를 잃어버렸고 예수님은 순종하므로 그 자리를 얻었다. 이 차이다. 이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처음 대화다. 이것이 근원적인, 근본적인 대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뭘 했느냐고 묻기 전에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를 묻는 것이 원초적인 물음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나를 찾고 있다는 말이다. 집을 나간 아이가 길을 못 찾고 헤매고 있는데, 어디서 전화가 온다면 얼마나 반갑겠는가? 처음 묻는 말이 뭐라고 했겠는가? 뭘 하고 있느냐고 묻겠는가? 아니면 어디에 있느냐고 묻겠는가? 어디에 있냐고 물을 것이다. 너 지금 어디냐? 당장 찾아가겠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내가 거하고 있는 위치이지만 인생의 위치는 그것보다 더 심각하다. 너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느냐? 네가 피조물의 위치에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같이 되어보려고 하는 위치에 있느냐? 이 문제니까 아주 중요한 문제다. 구속 사역의 목표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지금도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상황에 있다.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사역자의 일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엇갈려있다. “어디 있느냐.”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하는데 그냥 만나면 될 것 같은데 이것이 어려운 일이다. 두려운 것에는 이유가 있다. 위치가 이탈되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인데, 사람은 자기가 위치가 이탈되었다는 것을 모른다. 종교학자들은 말하기를 사람 속에는 깊은 두려움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종교학자들의 생각은 사람들이 왜 종교를 찾는가? 왜 종교를 만드는가?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시적으로 보면 큰 바위를 숭배한다거나 큰 나무를 숭배하는 것이 물영숭배인데 왜 그런 것을 숭배하는가? 자기 안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뭘 의지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들도 왜 두려움이 있는가는 모른다. 누가 쫓아오지도 않는데 왜 두려운가? 정신과 환자들을 보면 항상 두렵고 항상 불안하다. 자기는 어떤 것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어떤 것 때문이 아니고 신체적이든지 뭐이든지 불안한 것이 생긴다. 그것이 정신병의 근원이 된다. 그 불안한 것을 자기는 덮으려고 엉뚱한 행동을 하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 미쳤다고 말하고, 또 귀신같은 행동을 하니까 귀신들렸다고 말한다. 내가 멀리서 볼 때는 저것이 귀신들렸다고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서울에 있을 때만해도 귀신들린 것은 못 치겠다. 귀신 들린 것을 병원에서 무슨 수로 고치겠는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 대구에 와서 우리 교회에서 보면서 귀신들린 것이 아니고 사람이 불안하면 저렇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귀신들린 것인 줄 알았었다. 나도 귀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 행동 자체를 보면 영락없이 귀신들린 것으로 보였다. 그것이 아니고 자기 불안을 감추려는 행동이었다. 아무도 믿을 데가 없다. 온 천지간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정신병에 걸리고 만다. 그래서 아무라도 믿을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부모를 못 믿게 되면 아이는 정신적으로 병이 들어버리게 된다. 이런 아이들은 사춘기가 되어서 발현되기도 한다. 부모에 대한 신뢰가 1차적인 신뢰인데, 이것이 안 되면 정신병이 걸릴 확률이 굉장히 많다. 두 번째는 친구들 중에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다. 세 번째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어려서 어떤 상처를 받아버리면 그 병이 평생 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는 것이 남의 일이 아니고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다.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구속사역이다. 구속사역의 목표는 이 관계를 해결해서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연합을 하면 화목이 된다. 화목하는 나라!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해서 화목하는 나라! 이것은 당연하게 사람과 사람이 연합해서 화목하는 나라가 된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한다면 그 다음에 사람과 사람은 연합하기가 쉽다. 먼저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고, 그 다음에는 사람과 사람의 연합이다. 하나님과만 연합이 되면 사람과는 그냥 연합이 된다. 예수는 잘 믿고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 사람을 보면서 저런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겠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과는 전혀 연합이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이 하나님과의 연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연합은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과 연합이 된다는 말은 늘 말씀을 드린 것처럼 십자가 안에서 예수와 연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와 잘 못살고 잘 살고를 따질 일이 없는 것이다. 믿고 안 믿고 할 것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과 연합이 잘 못되었기 때문에 그냥 내 행동으로 열심히 연합했기 때문에 사람과 연합이 안 되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연합이 된다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다면 다른 사람과 나쁠 리가 없다. 그럴 일 자체가 없다. 근본적으로 없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마1:1) 참 간단한 말로 요약을 했는데, 이 노선 전체를 설명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런데 예수는 누구인가? 바로 이 노선의 중심이고 열매다. 그래서 이 노선이 예수 없이는 해석이 안 되는 노선이다. 예수가 있으면 이 노선이 아주 유명한 노선이 되고 영광스러운 노선이 되지만 예수가 없으면 이 노선은 아무 것도 아니다. 다윗이 없었으면 아브라함의 노선이 아무 것도 아니다. 다윗이 나옴으로서 아브라함의 노선이 유명해졌다. 그러면 다윗도 예수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가 없으면 그냥 이스라엘 국가의 한 왕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다윗은 아주 훌륭한 전략가였다고 생각한다. 맞기는 하지만 예수 때문에 다윗은 유명해진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마1:1)를 볼 때, 이 노선의 중심은 예수다. 그리스도이다. 또 열매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이 왜 부름 받았는가? 개인적인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우주화된다는 것은 예수 때문이다. 왜 우리들의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예수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이 왜 중요한가? 나 때문이다. 내가 그 안에서 부름을 받기 때문이다. 그 부름이 나의 부름이 되고 내 조상이 되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아브라함의 부름은 의미가 없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수없이 많다. 지금 중동사람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란사람인데 이삭을 전혀 모른다. 아브라함을 자기 조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 지금 유태인들보다 훨씬 많다. 그런데 예수가 없으니까 열매가 안 된다. 나무를 어떤 나무인가를 알려면 열매를 봐야 알 수 있다. 이 노선으로 부름 받았다는 말은 이 나무 안으로 부름 받았다는 말이다. 이 나무에서 이 열매가 열리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마1:1)할 때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그 나무의 열매는 예수라는 말이다. 나무는 볼 것이 없는데 열매는 좋은 것이 많다. 무화과나무는 참 볼모양이 없다. 그런데 열매는 엄청 맛있다. 제대로 익은 것을 먹어보면 꿀같이 맛있다. 나무가 생긴 것은 엉성하고 아무짝에도 볼모양이 없는데, 열매가 그렇게 좋다. 이 노선 안으로 부름 받은 것은 참 중요하다. 왜 볼모양이 없는 무화과나무를 심는가? 열매 때문에 심는다. 대추나무도 제대로 모양을 갖춘 나무가 없다. 그런데 왜 대추나무를 사람들이 심는가? 열매 때문에 심는다. 나무가 보기 좋아서 심는 것은 열매가 별로 없다. 관상수 같은 것은 열매가 별로 없다. 은행나무도 은행이 열리는 나무는 모양이 별로 없다. 은행이 안 열리는 나무가 모양이 좋다. 수놈이 모양이 좋다. 사람들은 열매를 따려면 나무모양을 보는 것이 아니고, 열매를 보고 나무를 심는다. 예수라는 열매를 보고 나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이 중요해졌다. 아브라함의 부름이 중요해졌다. 나는 처음 이 노선으로 부름 받을 때 이렇게까지 좋을 줄 몰랐다. 그냥 어쩐지 마음에 들어서 부름 받은 셈이다. 아브라함이 100살이 되었는데 아들을 못 낳고 믿음도 떨어지고 모든 것이 다 떨어졌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삭을 주었다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꼭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빨려 들어왔다. 이 안에 이렇게 풍성한 것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살아보니까 살수록 그 출발이 이런 출발이었구나.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노선으로 우리가 부름 받았다. 이것이 은혜 중에 은혜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은혜는 수없이 많다. 그 은혜 중에 은혜가 내가 아브라함의 노선으로 부름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 안으로 부름 받은 것이다. 다른 은혜들은 잠시 있다가 갈 수도 있고 이 은혜에 비하면 다 하급의 은혜이고 이 은혜를 위한 은혜였다.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동안 받은 은혜가 많다. 그 은혜들이 만일 예수라는 열매 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그냥 재수가 좋았다거나 운이 좋았다는 것으로 되고 만다. 이렇게 해석해도 무방하다.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운이 참 좋았다거나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부름 받아 온 길을 이야기해도 세상들이 생각할 때 이 사람은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겠는가? 그런데 내가 예수 안에 와서 축복이 생산되 나오면 그때는 재수만 좋아서 되는 것이 아니구나. 운이 좋아서만 된 것이 아니구나. 그때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를 보셨겠지만 이 사람은 어쩌면 운이 참 좋았네, 재수가 좋았네, 그렇게 된다. 자서전 치고 재수가 좋았다는 자서전은 별로 인기가 없다. 왜냐하면 나도 자서전을 보고 그렇게 하려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봐도 이것을 보고 뭐 배울 것이 있겠나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한 것이 없다. 내가 사랑하는 친구가 있었는데도 그 친구에게 이것을 못 준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그 친구도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도 되지 않았다. 몇 년 후에 우리 딸 결혼식 때 주례를 시켰다. 먼저 간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는데, 말씀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고 도로 옛날 말만 나왔다. 그때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했다. 사모님 말씀으로는 맨날 테이프만 듣는다고 하여 나는 많이 달라진 줄 알았는데, 주례할 때 보니까 다른 목사와 똑같았다. 그래서 말도 못하고 정말 안타까웠다. 부름 받는다는 것이 그냥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 같지 않다. 부름 받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 친구에게도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니고 있었지만 은혜 중에 은혜인 이 은혜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냥 그 사람 참 다행이었네, 하게 된다. 나를 알던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 지금도 살아있느냐고 한다. 지금은 나이가 들었으니까 그런 말을 할 만 하지만 5~60대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람 살아있느냐고 한다고 한다. 지금도 살아있다고 하면 그 사람 참 재수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 하나님 은혜를 받은 모양이라고까지는 생각한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내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착실하게 다니더니 하나님이 살려주었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이지 더 이상은 안 된다. 이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 중에 은혜다. 우리가 받은 모든 은혜 중에 은혜다. 나무를 키울 때도 좋았고, 잎이 날 때도 좋았고, 꽃이 필 때도 좋았고, 다 좋았다. 그런데 열매가 나와야 완전한 가치가 나오는 것이다. 열매가 없으면 꽃도 좋고 다 좋았는데 허망하다. 벚꽃나무의 꽃이 굉장히 좋다. 그런데 열매는 먹을 수 있는 나무도 있고, 먹을 수 없는 나무도 있다. 보통 꽃이 피는 왕벚나무는 열매가 써서 먹을 수 없다. 열매를 먹을 수 있게 되었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열매를 못 먹는다.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어서 참 좋기는 좋은 나무인데 열매는 먹을 수가 없다. 그런데 버찌가 있는데 이 나무는 나무가 별로 좋지 않은데도 열매가 너무 좋다. 은혜 중에 은혜다. 축복 중에 축복이다. 요즘 많은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축복합니다.’는 말이 굉장히 많다. 그런 축복과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다 축복 중에 축복이다. 소망 중에 소망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소망이 있는 것인데 그 소망 중에 소망이다. 다른 소망이 아무리 있어도 만일 그리스도가 없다면 소망의 결론이 없다. 아무리 우리가 소망을 이야기해도 그 소망의 열매가 안 생긴다. 이것이 또 믿음 중에 믿음이다. 나는 예전에 믿음이 좋다 나쁘다는 생각을 했다. 크다 작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은 믿음이 좋다고 하거나 믿음이 없다고 했는데 아무리 일하는데 믿음이 좋아도 이 열매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 안 된다. 나는 믿음이 정말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이 열매를 얻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참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일을 해보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차이가 참 많았다. 그런데 나는 그런 면에서는 믿음이 없는데, 어째서 이렇게 믿음 중에 믿음을 얻게 되는지 모르겠다. 아브라함이 100살이 되어 믿음이 다 떨어져서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해도 내가 그 사람이 좋은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것이지, 당연히 그렇지, 했다. 그 사람이 거기서 믿음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내가 여태까지 믿음으로 참고 기다렸습니다.’고 했으면 나는 완전히 망하는 것이다.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까 가까워지고 친근해졌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좋은 것이지 너무 믿음이 좋아버리면 내가 가까이 할 수가 없다. 너무 믿음이 좋은 사람은 예전에 무서웠다. 너무 믿음이 좋은 사람이 있으면 무섭고 주눅이 든다. C.C.C.에 있을 때 그런 것을 많이 느꼈다. 동료들이 그렇고 각 지부에 나가면 실적을 가지고 있는데 믿음으로 일을 해서 실적을 올리는 사람을 보면 겁이 난다. 나는 쫓겨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일 못하면 나와야 된다. 그런데 믿음도 없고, 일은 제대로 안 되면 여기서 며칠이나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같이 믿음이 없으면 괜찮은데, 믿음 좋은 사람들이 많다. C.C.C.에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정말 믿음 좋은 분들이 많은데, 그것이 무섭다. 좋은 것이 아니고 두렵다. 내가 그런 사람이다. 다 이야기할 수 없지만 하나님 안에서 긍정적인 모든 것, 우리에게 부정적인 것도 있는데 긍정적인 모든 것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그의 시발점이 되게 된다. 예수는 그렇다. 그 안에는 부정이라는 것이 없다. 성경도 우리가 볼 때 부정적인 것만 찾으려면 수없이 많다. 그런데 긍정적인 것이 눈에 보여야 축복이 된다. 긍정적인 것이 보이려면 그리스도가 있어야 긍정적인 것이 보이게 된다. 예수는 하나님 안에 있는 긍정적인 것의 모든 것의 근거가 된다. 생각해보라. 십자가에서 죽었다.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생명까지 다 잃었다. 아무데도 의지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참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가 부정적인 것이 뭐가 있는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이고, 그 사람이 진짜 사람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것이 있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것은 왜 이렇게 안 되는가? 또 예수 믿으면서도 이것은 잘못된 것 같다는 것도 많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과 비교가 되겠는가? 십자가의 고통만 생각하고 내가 고통이 올 때는 예수님이 더 고통당하지 않았는가? 나보다 더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생각도 하지만 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에게 부정적인 것이 많이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래도 부정적인 문제가 또 있다.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엇을 보는가? 아무것도 없어져 버렸다. 그 좋은 능력이 다 없어져 버리고, 그 좋은 많은 말씀이 다 없어져 버리고, 아무것도 없어졌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우리가 볼 때는 완전 실패이다. 그 사람이 참 사람이고, 그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면 부정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 교회에서도 정말 부정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 있다. 불구자가 있는데 저 사람 안에서 찬송이 나온다면 불평하는 것이 부끄럽다. 저런 사람을 교회에 두신 것도 이유가 있구나. 사탄에서 속아서 불평밖에 없는 사람들이 저것을 보면서도 불평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나로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나로서는 그래봤자 당신은 있을 것이 다 있지 않느냐고 한다. 당신 있을 것 다 있잖아, 자식도 있고 다 있잖아, 그러면 끝나버린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말하면 그 사람들도 할 말이 없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박*석 형제가 나는 행복하다고 해버리면 다른 일로 불평하던 사람들의 입이 쏙 들어간다. 나는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는 그 한 마디가 백 마디 말 보다 낫고 천 마디 말보다 낫다. 교회 안에서 필요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예수 믿으면 불평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그 한 사람의 말 한마디 보다 못하다. ‘나는 아무 불만이 없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 한 마디 해버리면 끝난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면 여러 말 할 필요가 없다. 예수 한 분이 그냥 서있기만 해도 부정적인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 아무 말도 못하고 죽은 예수가 우리 앞에 있기만 해도 우리 입이 막아진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골치 아파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 저런 것을 갖고 왜 저러나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그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렇게 하지만 옆에서 볼 때는 쥐어박고 싶다. 정신과 환자들이 엉뚱한 짓을 하면 머리를 때리고 싶다. 빤히 아는 것을 엉뚱한 소리를 하면 정신 차리라고 때려주고 싶다. 정신병 환자가 아니라도 별 것 아닌 것을 갖고 고통스러워하고 온 천하를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하면 정신 차리라고 한 방 때려주고 싶다. 그렇다고 해결되겠는가? 너는 다 있으니까 그렇지, 하면 끝난다. 그런 것을 당할 때 막막했다. 말로 해도 안 된다. 너는 다 있잖아, 당신은 있으니 그렇지, 나처럼 없어봐, 이렇게 하면 할 말이 없다. 교회에서는 여러 사람이 다 필요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부정적인 것이 다 사라진다. 예수만 확실히 알면 그것이 영생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고 했다. 예수만 확실히 알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그리고 다 소망이다. 다 믿음이다. 다 은혜다. 믿음을 따로 강조하여 믿음이 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의 신념이 키우는 것이지 진짜 믿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있으면 은혜도 나오고 축복도 나오고 소망도 있고 믿음도 있고 모든 것이 다 있다. 긍정적인 모든 것이 그 안에 다 있다. 구약의 예언과 제사가 구약의 중심이다. 무엇 때문에 있었는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 때문에 있었다. 제사를 왜 지냈는가?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다. 예언자들의 무슨 예언을 하는가? 전부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예언이다. 무슨 말을 했든지 다 그 말이다. 부르심의 목적은 바로 이것을 해결하려고 부르신 것이다. 예수는 이런 이유로, 이 이유로 해서, 존재적으로는 하나님 아들이고, 사역 안에서는 만유를 구속할 수 있는 구속주다. 우리가 원래 지음 받을 때 그렇게 지음 받았다. 우리가 속아서 곁길로 나가서 그렇지 우리가 정상적인 위치에 있다면 우리가 다 하나님 아들이 되고, 또 우리는 다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가 되도록 다 지음 받았다. 속아서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 아들로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 아들인데 죽임을 당했다. 지금도 헷갈리고 있다. 하나님 아들이 죽을 수 있는가? 하나님 아들이 신이라고만 생각하니까 여러 가지 파들이 나온다. 신이 죽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가현설 같은 것이 나오게 되고, 영지주의도 나왔다. 하나님 아들은 사람이다.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다. 사람이 나오기 전에는 천사들이 하나님 아들이었다. 창세기 6장에서도 천사들이다. 하나님 아들들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것들은 천사들이다. 사람이 나오는 것을 천사들이 시기하는 이유가 자기들의 위치를 뺏기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들로 죽임을 당했는데 구속주가 되었다. 구속의 주님이 되었다. 그래서 이분을 참 하나님이라고 부른데도 있다. 요한1서 5장 20절에 보면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5:20)고 했는데, 이 말은 예수를 보고 한 말이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신이라는 말이 아니고 칭호다. 나를 지어주신 분에 대한 칭호다. 나를 창조하신 분의 칭호가 하나님이다. ‘당신의 이름이 누구입니까?’ 하고 모세가 물었을 때, 모세에게 대답한 말은 ‘나는 하야다.’라고 했다. 히브리말로 ‘하야’인데 그 말은 어떤 존재자라는 말이 아니다. 영어성경에서 ‘I am That I am~.’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것은 좀 철학적인 번역이다. ‘하야’하는 말은 ‘I am~.’이라는 말이다. 불완전 자동사가 붙어서 그 다음에 뭐가 붙어야 한다. ‘I am~, 나는 ~이다.’이다. 무엇인가 될 수 있다, 나는 무엇이다, 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것을 인용해서 “I am the way, I am the true, I am the life.”라고 말씀한 것이다. ‘I am~’까지가 ‘하야’이다. ‘I am~’이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모세는 이 이름을 가지고 애굽에 내려갔다. 네가 거기 가면 바로 앞에 신이 될 것이다. ‘I am~’하는 그분을 가지고 가면 거기 가서 너는 신이 된다는 것이다. 장군이 필요하면 너는 장군이 될 것이다. 능력이 필요하면 너는 능력이 될 것이다. 이 이름이 무한정한 이름이다. 우리가 규정할 수 없는 무한정한 어떤 그런 이름이다. 우리가 그 분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겠는가? 존재를 규정하려는 것이 삼위일체론이다. 이것이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해도 끝이 안 나는 말이다. 불완전한 그런 이론이다. 하나님은 그냥 ‘I am~’이다. ‘나는 무엇이다.’이다. 우리가 얼마나 좋은가! 그분이 ‘I am~’이니까 ‘I am~’이신 분을 지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어떤 때는 포도주를 만드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나면서 소경된 자를 눈을 뜨게도 하고 했다. ‘I am the life.’라고 할 때는 그렇게 될 수 도 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는 다르다. 이것이 철학적으로 존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을 보고 이렇다고 하는 것이지 그분의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모른다. 안 보이는데 어떻게 존재를 알겠는가? 그것을 희랍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기어코 존재적으로 만들어보려고 하다가 오히려 더 오류에 빠진다. 하나님 아들로 죽임 당했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말이 안 된다. 하나님 아들이 죽다니? 그런데 하나님 아들로 죽었다. 그런데 구속주가 된다. 구속주로서의 맏아들이 되었다. 히브리서에 보면 이 사람을 보고 맏아들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맏아들 안에서 형제들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아들이 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믿으면 그냥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냥 믿는다고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고, 맏아들 안에서 우리가 아들들이 된다. 하나님 아들로 죽임 당해서 구속의 주가 됐다. 쉽게 말하면 구속의 하나님이다. 구속의 주로서 맏아들이 되었다. 우리는 그 맏아들 안에서 형제들이다. 얼마나 가까운가! 히브리서에서는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며.”(히2:11)라는 말이 나온다.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히2:12) 이 말은 형제 중에서 찬송한다는 말이다.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그래서 그 아들들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사극을 보면 임금이 자식을 낳으면 홍복이라고 한다. 아들이 몇 명인지도 모른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아들이 스무 명인가 되니까 자기 아들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렇게 좋아하는가? 아들들이 있어야 나라가 된다. 일본에 가니까 왕자들을 다 왕이라고 써 놓았다. 우리는 대군이라고 하는데 일본은 대군이라고 하지 않고 아들들이 다 왕이니까 천왕이 되는 것이다. 중국은 나라가 많으니까 천왕이 되는 것이다. 일본은 나라도 없는데 천왕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아들들이 다 왕이다. 우리도 맏아들 안에서 우리가 아들들이다. 이 아들들이기 때문에 나라가 되는 것이다. 맏아들 안에서 아들들이 된 사람으로 인해서 나라가 된다. 결국 예수의 나라다.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다 예수다. 하나다. 그로 인해서 아들들이 된 것이니까 다 한 사람이다. 아담도 한 사람, 그리스도도 한 사람이다.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우리가 저주에 이르렀다면 한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혜가 얼마나 넘치겠느냐고 바울이 말했다. 하나님의 구속이 완성되는 것이 이 우주가 회복되는 길이다. 구속의 완성이 예수 안에서 있었다. 완성이 되었다. 내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분 안에서 발견되면 된다. 저기 내가 있구나. 나는 저 사람이구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는데 알고 보면 잃어버린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다.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능력이 없어졌고 다 없어졌다. 다 없어졌는데, 예수님은 다 잃어버렸는가?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다. 그냥 그대로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내 것인가? 내 것이 아니다. 다 없어져도 나는 나다. 그런데 사람은 이것을 의지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내 소유가 없어지면 내가 죽은 사람같이 된다. 진짜로 죽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 존재가 없어진 사람이 죽은 사람이다. 하나님이 창조해서 정해주신 나는 잃어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나는 원래 맨손으로 왔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없다. 그 뒤로 돈이 좀 모아지기는 했지만 이래저래 다 없어지고 뒤로 교회에 다 들어가고 아무것도 없다. 없는데 내게서 없어진 것이 아니다. 나는 원래 없었다. 원래 없었던 사람은 없어질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원래 뭐가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많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처음에 젊은 형제들이 우리 교회에 올 때, 자기를 다 버리고 왔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버리고 오기는 뭘 버리고 왔느냐고 생각했다. 버릴 것도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거지도 거지보따리 짊어지고 다니다가 없어지면 그것이 없어졌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그런 짝이다. 소유라는 것이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들이다. 그것이 나를 받쳐주는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그것으로 자기라고 착각하고 산다. 계급이 별이 하나 되었다가 둘이 되었다가 셋이 되었다가 하면 그것이 자기인줄 생각한다. 그것은 자기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불교만 가도 그것이 자기가 아닌 것은 안다. 하물며 구속 안에 있는 사람이 별이 자기인줄 알면 되겠는가? 그것은 절에만 가도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별이 몇 개 붙었든지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 있는 사람이 그것을 자기라고 생각하면 되겠는가? 기독교인의 수준이 불교인만 못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우리는 다 훨씬 더 나은 자들인데 더 못한 자들이 되어 있다. 그 사람들은 맨날 외우고 훈련하니까 겉으로라도 그렇게 생각한다. 스님들은 낡은 옷을 입고 다녀도 아무렇지도 않다. 계급장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나 도포 입고 다니는 사람이나 똑같다. 오히려 누더기 옷을 더 좋아한다. 연조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신자들이 좋은 천으로 해주는지 스님들이 옷을 잘 입고 다닌다. 내가 있었던 암자에는 그때는 좋은 천도 없을 때이지만 이 스님이 옷이 상하면 일부러라도 천 조각을 옷 위에 바느질해서 붙인다. 너덜너덜 천 조각들이 붙는데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다닌다. 누더기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소유냐? 존재냐? 이런 말들도 있다. 잃어버린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이 주신 존재는 그냥 그대로 있다. 예수 안에서 받은 나는 그냥 그대로 있다. 손해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기도해서 손해날 것이 있느냐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뺏긴 것도 없고 손해 난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원래 흙이고 아무것도 아닌데 없어진 것이 뭐가 있겠는가? 혹시라도 내가 무엇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거든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라. 원래 아무것도 없었는데 빼앗기기를 뭘 빼앗겼는가? 어차피 마지막에는 빈손 들고 갈 것이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런 문제는 예수 구속까지 오지 않아도 절에만 가도 될 일이다. 그것을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일은 정말 귀중한 일이다. 거기서 우리가 시작하는 것이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왜 그냥 갔겠는가? 이것 때문에 그냥 갔다.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3:4)라고 했다. 다시 나려면 이 자리에 와야 하니까 그냥 간 것이다. 오늘날도 아마 교회를 찾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처음부터 이러면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그 말하지 말라. 다 달아나면 안 되니까 잘 구슬려서 들어오면 그때 이야기해야 된다. 아브라함 안에서 내가 부름 받을 때, 내가 이렇게 풍성한 것이 있을 줄 몰랐다. 정말 나는 그것까지 몰랐다. 오면 올수록 이 열매가 어찌 그리 맛있고 달고 풍성한지! 가나안 땅의 풍요를 설명하면서 그 땅에 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오만 과일을 다 이야기한다.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과일을 가지고 이렇다고 설명한다. 포도 한 송이를 두 사람이 매고 오더라고 하는데, 진짜로 그런 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성경에 그렇게 써 있다. 가나안 사람들이 너무 커서 우리는 메뚜기 같다는 사람도 있고, 그들은 우리 밥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옷을 찢으며 아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 밥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두 사람만 광야에서 살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우리가 이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 안에 있는 이 축복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다른 믿음은 없어도 된다. 이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믿음은 많다. 나도 옛날에 목회할 때, 아이들 아프다고 데려오면 난처하다. 기도해 주어도 낫지도 않을 것인데 기도해달라고 하면 난감하다. 어떻게 해보려고 아무리 해도 안 된다. 그렇게 믿음이 없던 사람인데 어찌 여기에 대해서는 믿음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지금 아브라함을 유명한 사람으로 말하니까 그렇지 그때 당시에는 이재민이다. 알고 보면 자기 고향을 떠나 오갈 데 없는 그 사람이다. 하란에 있을 때 자기 형은 죽고 자기 조카까지 맡아서 온 사람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불쌍한 이재민이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 때문에 유명해졌다. 후손들 때문에 유명해진 사람이 많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데 후손들이 너무 유명해져서 유명해진 사람들이 많다. 경상도 영천에 우리 선조의 묘가 있다. 원래는 경기도 이천 광주 사람들인데 여기에 왜 선산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인 유래가 있다. 할아버지가 여기 와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거기에 묘를 썼다. 그 뒤로 한 5대까지 걸쳐 원 없이 높은 지위의 벼슬을 했다. 옛날에는 벼슬을 할 때마다 선산에 찾아온다. 사람들을 거느리고 나팔을 불며 온다. 시골 골짜기인데 거기를 얼마나 많이 왔다 갔던지 거기 사람들이 거기를 광릉이라고 부른다. 능이라고 한다. 경상도 말로 광롱이라고 하는데 자세히 들으니 광릉이다. 그 할아버지는 별 분이 아니다. 후손들이 잘되니 유명해졌다. 거기가 우리나라 몇 대 명당 가운데 하나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후손들이 잘못되면 없어지고 만다. 아브라함도 사실은 별것이 아닌 사람인데, 그 후손들이 열매를 맺어서 유명한 사람이 된 것이다. 하나님도 인간이 잘되면 하나님이 유명해지고, 인간이 개판이면 하나님도 별것이 없다. 사탄에게 늘 조롱받는다. 당신이 만들어 놓은 인간이 저 모양 아니냐고 사탄이 늘 그럴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인간이 제대로 되면 그때는 하나님이 큰 소리 치게 된다. 저 사람을 보라. 히브리서를 읽으면 그런 말이 나온다. 네가 지금 이 사람을 봐라. 네가 무시한 그 사람이 어떻게 됐는가를 보라는 말이다. 히브리서는 굉장히 중요하다.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히2:9)라고 했다. 그것은 천사와 비교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신약성경가운데서 신약을 아는데 가장 중요한 책이 히브리서다. 신약이 무엇인가를 아는데 중요한 책이다. 워츠만니가 이 책을 주제로 신약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썼다. 신약은 하나님이 사람을 자랑할 수 있는 시대이니까 우리가 그분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구속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천사들에게 주눅이 들었다. 당신이 만든 인간이 저 모양이 아니냐고 송사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을 못했는데, 이제 하나님이 큰 소리를 치게 되었다. 우리도 하나님이 큰 소리를 치게 우리가 해 주어야 한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