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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표현의 정치학
「표현과 개벽: 최제우, 최시형, 이돈화, 김기전」 8. 표현의 정치학
이규성(李圭成, 1952-) in 한국현대철학사론: 세계 상실과 자유의 이념,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2, pp 126-132(P.975)
* 동서양을 막론하고 19세기는 상층의 허위와 가식이 드러나고 인민이 시대의 파열을 내며 돌파구를 마련하고 하는 시기이다. 그럼에도 영국의 빅토리아왕조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그리고 중국의 청(靑)왕조 등은 파열을 막는 왕조의 힘이 있었다. 이 왕조들이 근대 국가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겉보기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높이에서 토지 표면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저항은 언제나 표면에서 위로 솟아나려는 역동성이 저런 저항을 파열하고 나오는 저항이 더 거셀 때 가능하다. 벩송이 말하는 ‘저항의 저항’, 들뢰즈가 말하는 인민이라는 전쟁기계가 홈패인 공간을 물결이 사방으로 넘쳐가듯이 매끈한 공간을 가로질러 고른 평면을 정립한다. 그 고른 평면의 안에서 인민들은 들끓고 있었던 것이 변혁기가 아닐까, 즉 인민의 저항, 봉기, 혁명은 고른 평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51WLC)
** 다른(일제든, 미제든) 나라의 지배 하에서 자기 나라의 사상을 전개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두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전통을 되살려서 지배국에 저항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사상을 창조하여 자국의 전통과 지배국 사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후자는 어렵다. 이 과정조선과 중국의 전통의 일부를 수용하면서 우리 사상을 새롭게 만드는 한계에서 서구의 사상들을 들여다본다. 그 들여다보는 통로가 일본을 통해서하는 한계에 부딪힌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데, 머리수가 필요한데, 그렇지 못하다.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데는 한글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남녘에서 국한문 시대를 1987년의 한글 가로쓰기 신문세대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은 머리수가 목소리를 넘어서 사유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앞으로 30여년 한 세대까지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9. 창조적 진화와 자유」에서 이돈화가 서구 사상을 수용하는 몇몇 과정들을 서술하고 있다. 소수의 지식인이 처음으로 서구의 문화와 사상을 수입하는데는 어려움이 많았으리라. 동학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여러 단편적인 측면들이 있었겠지만, 서구 사상의 유입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리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 본격적인 수입은 1970년 후반일 것이다 - 한 가지는 앵글로색슨의 철학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서양철학사 속에서 지위에 대한 합의가 지금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서양철학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적어도 21세기 전까지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데서 온다. (51WL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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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자유와 현실 39
제1장 표현과 개벽: 최제우, 최시형, 이돈화, 김기전 41
1. 천명(天命)과 무극대도(無極大道) pp 41-61
2. 두 가지 방법과 능동적 신비주의 pp 61-67
3. 경험과 표현(表顯) pp. 67-83.
4. 세계불안과 자기 인식 pp. 83-91
5. 개방성과 연대성 91-99.
6. 때[時]와 개벽(開闢) 99-116.
7. 심령의 윤리와 영적 코뮤니즘 116-125.
8. 표현의 정치학 126-132
9. 창조적 진화와 자유 132-150
10. 대지(大地)의 철학 선언과 본위론(本位論)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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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표현의 정치학 126-132 [표현(表顯)]
새로운 삶의 양식에 대한 관심과 열망은 표현의 철학이기도 한 동학의 기본적 분위기이다. .. 동학혁명이 정부와 외세의 억압을 벗어나려는 정치적 자유와 양반계급의 착취를 일소하려는 경제적 자유, 즉 정치해방과 경제해방을 시도했다는 것은 이미 이돈화가 언급했었다. .. 그의 신인철학은 소유투쟁의 성격을 갖는 계급투쟁을 더 높은 인문주의적 가치와 영적 가치로 승화시키는 관점에서 논하고 있다. (126)
.. 진정한 계급의식은 “계급은 완전히 고정ㆍ불변하는 것을 의식하는 동시에 그것을 자기네의 손으로 고치지 아니하면 영원히 자기네의 행복을 도모치 못할 것을 아는 것” 또는 “계급이라는 것은 순전히 인위적으로 나온 것인 고로 고치면 당연히 그 재앙을 면할 소질을 가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의식이다.” 계급의식은 ‘노예상태’를 극복하려는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을 주임하는 본가가 갑오 동학이다.” (126)
그러나 이돈화에 의하면 “이 의식은 당초에 순수 혁명적 수단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요, 종교적 새 인생관으로 들어가졌다.” ... 역사가들의 평가와 같이 동학은 민중의 저항의식을 선취하여 민중성을 갖는 사상을 그들에게 고지한 것이며, 최시형에 의해 혁명적 군사적 지도자들은 사상과 실천을 연결할 수 있었다. (126-127)
이러한 맥락에서 이돈화는 동학혁명이 갖는 세 가지 특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1) ‘동학혁명’은 “무지한 관리의 압박과 몽매한 정부의 존재를 전복키 위하여 정치적 개혁을 목적으로 일어난 운동”이다. 이것은 ‘정치혁명’이다.
(2) ‘동학운동’은 “민중 대 양반, 민중 대 부자의 학살이 일어나게 된” ‘계급투쟁’이다.
(3) “지상천국의 생활을 희망하고 그를 대번에 조성하려는 신념에서 그 활동의 세력이 더욱 커진 것이다.” 이것은 ‘이상향 건설’ 과정이다. [굵은 글씨는 마실이]
여기서 이상향은 기존 유물론의 통속적 표현대로 계급투쟁의 외피이거나 광포한 환상만은 아니다. ... 동학의 이상향은 개체와 개방적 전체성의 통일적 완성이다. (127)
동학의 이상향은 고정된 생활을 넘어가는 초월적 이념이다. 이러한 형이상(形而上)의 이념은 최제우가 경험했듯이 생을 제도와 인습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고 언제나 가능성에 살게 한다. “대도가 밝게 드러나는 날[大道彰明의 時(대도창명의 시)]”을 향한 희망 속에서 도가 현현하는(顯道, 현도) 떼를 묻자[,] 최시형은 예언자로서 답한다. “모든 산이 생명의 짙푸름으로 가득 변하고, 도로에 비단을 펼칠 정도로 문명이 개벽된 때이며, 모든 나라와 교역하는 때이다[萬山皆變黑하고 路皆布錦之時也요 萬國交易之時也니라, 만산개변흑하고 로개포금지시야요 만국교역지시야니라].” (128)
우주 ‘대생명’인 진실은 “천지만물을 융화상통(融和相通)”하게 하는 방식으로 표현(表顯)되어 있다. (128)
표현의 정치학은 개인주의를 전제한 자유주의 법률 체계와 부르주아 시민 계급의 생활 방식을 넘어서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지배도 넘어선다. 그것은 소유투쟁과 계급투생 너머 저쪽인 영적 코뮤니즘의 인력에 추동되는 삶을 창조한다. 사법적 맥락에서 각 개인에게 부여된 권리주체는 자연과 인간 모두에 대해서도 공경(恭敬)을 최상의 정치적 생활로 하는 생태론적 주체로 변형된다. (128-129)
인간의 내적 본성은 형이상의 초월적 내면으로만 후퇴하는 삶을 추구하는 구실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심층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환원(還元)의 과정을 통해 바닥에서 나오는 생의 활력을 정치적 실천으로 표현하는 동태적 삶의 원리이다. (129)
표현의 정치학은 내면의 고유 속에서 일어나는 존재의미에 대한 체험과 신체적이고도 정치적인 활동의 통일을 본질적 구조로 갖는다. 이러한 구조는 사실상 동양전통에 친숙한 것이었지만, 동학은 구체제의 몰락과 제국주의 시대를 만나 그것을 창조적으로 적용했다. (129)
민주주의의 이름아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경험한 현대인은 그 두 이데올로기가 주는 고통을 통해 또 다른 정치학을 생각해야만 했다. (129)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개인주의 대 사회주의, 상업자유주의 대 인성자유주의로 구분해야 할 것이다. 인문주의 대 인도주의가 구별되듯이 말이다. 인성자유주의야 말로 공산주의 나 사회주의 체제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이런 용어가 이상하게 뒤섞이게 된 것이 남북의 대치 때문이라고 본다. 공화국 앞에 민주니 자유니 붙은 이유를 모르겠다. 공화국인 민주주의를, 그리고 인간의 자유 실현하는 국가 체제가 아닌가?]
추상적으로는 사회 내의 어느 누구도 다른 개인에게 명령할 수 없지만 실제적으로는 사회 내의 소유계급은 명령할 수 있었으며, 사회 위에 군림하는 국가는 개인들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명령자로서 존재했다. 인권이란 특정 신분이 벗겨져 개별화된 개인들인 시민의 권리로 천명되었지만, 사실상 소유계급과 국가의 명령권을 확보하는 사법적 장치로서도 기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국가는 명령체계이다. 사법장치로 인민을 위협한다. 전쟁을 동원하여 인민을 공포에 몰아넣기도 한다. - 들뢰즈/가타리는 이에 저항하는 인민을 전쟁기계라 부른다.] [1923년 11월 20일 독일에서 명령어 시행, 한국에서 2018년 명령어 실행이 드러나다. - 2018년 4월 6일 유령주식 발행, / 2018 11 14 삼성바이오로직스 '고의 분식회계' 결론.. 거래정지 후 한 달이 안 되어 2018 12 11 삼성 바이오로직스 상장. (51WLB)]
표현의 정치학 ... 개인은 국가에 기대지도 않고 국가 위의 신에도 기대지 않는다. 그는 자신으로 돌아가 내면의 바닥에서 자신의 본래성과 우주적 생명 원리의 동일성을 자각하는 동시에 인류와의 내적 동일성을 자각하는 ‘새로운 인간[新人(신인)]’이다. (130)
그러나 동학혁명의 한계를 고려한 평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은 자신의 사상의 발전에 따라 동학혁명에 대한 평가를 달리 했다. .. 그는 1910년 이전의 글로 보이는 「흥학설(興學說)」에서 “저번 동비(東匪)의 요망스러운 말은 족히 민중을 의혹시킬 수 없는데도,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쏠려서 좇게 한 것은 어찌 교화가 허물어지고 인민이 우매한 까닭이 아니리요!”라고 했다. 이것은 그의 초기 주자학 시기의 입장인 위정척사의 관점에서 평한 것이며, 조선 후기의 노론을 중심으로 한수구파의 견해이다. (130-131)
그러나 한국통사(韓國痛史)(1915)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동학당은 본디 정치사상, 혁명 성질이 포함되어 있으나, 대부분 비천한 무뢰배나 우준(愚蠢, 우둔)하고 무식한 무리에게서 나온 까닭에 난폭하기가 이와 같았다. 그러나 엄격하고 잔인했던 종래의 계급관념은 이로 말미암아 무너졌으니, 또한 가히 개혁의 선구[改革之先驅(개혁지선구)]라 이를 수 있다. … 이러한 마력의 군대를 인솔하고 밤을 새워 길을 걸어 바로 서울에 들어와 개혁을 착수하면 외인(外人)들의 간섭이 미치지 못할 것이니, 서구혁명의 피가 아시아 동쪽 반도에서 광복을 볼 것이라 하였으니, 어찌 이들의 담력과 식견이 없겠는가.”.. 이 평가는 그가 애국 계몽사상 시기를 지나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시기에 나온 것이다. (131) [망명시기 - 나라를 빼앗기고 떠돌이가 되어서야 인민의 전쟁기계임을... ]
그러나 1920년 작품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는 「갑오동학당의 대풍운(甲午東學黨 大風雲)」이라는 표제 아래 동학혁명의 의의를 적극 옹호하고 있다. “대개 그들을 이렇게 분기하게 만든 동력은 양반의 압제와 관리의 탐학에 분격하여 나온 것이다. 즉 그것이 우리나라 평민(平民)의 혁명(革命)이다. 오직 그 도당들 중에 어리석고 무식한자들도 많았고 그들의 거동도 난폭하고 기강이 없었으니 정치를 개혁하는 것은 그들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구습(舊習)을 파괴하는 데에는 남음이 있었다. 그들로 하여금 외국인의 간섭이 없게 하고 또 유능한 자가 그 속에서 나왔다면, 그 파괴로 인하여 하나의 신선한 독립국(獨立國)을 건설하는 것도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박은식은 동학혁명을 통해 타국의 간섭없이 자력으로 독립국을 건설하는 것이 ‘평민혁명’, “백성들의 혁명의 본의”였다고 한다. (131-132)
그의 이러한 평가는 독립을 기준으로 쓴 통사(痛史)에 비해 혈사(血史)의 ‘민권(民權)’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박은식의 평가는 평민이 역사의 정치무대에 등장하여 자신들의 의지가 반영된 국가 조직을 건설하려 한 평민 혁명의 의의와 평민이 정치 주체로 될 수 있는 혁명 역능의 결여를 지적한 것이다. (132) - [인민의 역량이 표면으로 올라온 것이 서양(프랑스)도 1848년이고 진정한 주권의 행사는 1871년 파리꼬뮌이었다고 평가한다. - 동학이 표면의 등장은 1894년이다. 그리 멀지 않다. 20세기는 시대와 공간이 점점 좁아지고 있고, 21세기는 각나라 각 계열들이 공명하며 거의 같이 예상참여 할 것이다. 시대의 효과는 어디에서 나올지 아무도(신도) 모른다. (51WLC)]
9. 창조적 진화와 자유 132-150
이돈화(李敦化, 1884-1950) 호는 야뢰(夜雷) 또는 백두산인(白頭山人), 함경남도 고원 출생이다. .. 1차 대전 이후 ... 그는 자각적 개인들의 문화적 연대를 통한 개량적 사회주의 혹은 사회주의 휴머니즘 노선에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노선은 당시 일본의 다이쇼 생명주의 시기(1910-1920년대)의 서양철학 수용과 연관하여 구체화된다. 당시 일본 사상계의 일부는 근대화의 정신적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신칸트주의의 문화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또한 예술적 개인주의 사상과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를 비롯한 베르그(Bergson, 1859-1941)송과 니체(Nietzsche, 1844-1900)의 생철학도 유행했다.(132-133) - [일본의 침을 발라서 들어온 사조들이다. 이미 1884(갑신정변) 이래로 앵글로색슨사상이 일본의 필터를 거쳐서 굴절된 방식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 다른 한편 중국과 소비에트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사상도 중요하다. 여기서 논제는 아니지만. - 나로서는 요즘 생각이지만 베르그송 수용은 크리스트교로 해석된 플라톤주의의 관점으로 수용된 것이 잘못이라 여긴다. 앵글로색슨이 그러하다.]
서남(西南)[바덴]학파라고도 하는 신칸트주의자인 릭케르트(Heinrich Rickert 1863-1936)와 빈델반트(Windelband, Wilhelm, 1848-1915) 등은 각기 편차는 있지만, 자연과학적 인식 방법의 한계를 인식하고, 개체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과학을 세움으로써 가치들의 균형을 찾고자 했다. (133)
천도교의 문화 운동 종합지인 개벽(1920)의 노선은 동학의 개벽정신을 문화 운동의 문맥에서 현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화는 베르그송, 니체와 함께 수동된 신칸트주의의 문화주의[바덴학파]를 조선에 적용하고, 자주적 자본주의 발전을 ‘가치철학’과 결합하여 새로운 ‘생활 형식’을 창조해냈다. 신칸트주의의 문화주의는 경성제대의 철학 교수들을 통해 박종홍(朴鍾鴻 1903-1976)과 그의 제자 세대 및 신남철(申南徹, 1903/7-?), 박치우(朴致祐 1909-1949)에게도 ‘새로운 휴머니즘’의 문화로 인식되면서 일정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 그것은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선택적 활용이었다. (133-134)
이러한 선택은 최제우, 최시형의 시대와 다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역사적 선택은 문화의 후진성이 민족의 자존심 손상과 함께 첨예하게 부각되는 상황을 반영한다. 이돈화는 김기전(金起瀍, 1894-몰년 미상(월북), 호는 소춘(小春), 평안북도 구성 출신)과 같은 동료들과 함께 민권 평등을 위한 계몽운동과 그에 적합한 인간상 형성을 문화 창조의 내용으로 삼고자 했으며, ... (134-135)
이돈화는 인류사가 신권이 지배하는 신화 시대, 영웅이 지배하는 낭만시대를 거쳐 오늘날 인류 각자가 자기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현실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한다. (135)
신이 가진 속성은 사실상 인간의 속성이다. 이돈화가 보기에 동학의 성령(性靈)이나 씨알[종자(種子)]은 인간 내부의 무한자이며, 최제우와 최시형이 자각한 것이 그러한 내재적 생명의 원리이다. ,
그는 이러한 견해를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의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 1841)에서 말하는 인본주의에 의거해서 옹호한다. 신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이 소외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이 풍요하게 된 것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신에게 양도했기 때문이다. (135)
“... 전체 사람들은 사람 자기 능력을 가운데로부터 신의 전 능력을 제거해버리고, 또 위인 전체의 능력을 따로 나눈 까닭에, 전체 다수의 인류는 자기 능력을 멸시하고, 의뢰(依賴)와 기원(祈願)과 탄식과 회의로써 헛되이 인생 일대를 허송세월할 뿐이었다. 그러나 현실 시대의 사람은 이처럼 이상과 사실을 따로 보는 것이 아니오, 사람 가운데서 나온 모든 이상을 사람 자기들의 고유능력의 발휘하여 그것의 실현을 노력하는 시대니, 이 시대의 인류는 자시 생활의 욕구를 의뢰와 기원에 말미암지 아니하고, 협동과 실행에 호소하며, 탄식 회의에 머물지 않고, 희열과 자각에 의하여 모든 이상을 사람 자기들이 손수 건설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136)
‘이상(理想)’은 ‘현실(現實)’을 초월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고 있는 현실의 것이다. .. 현실은 인간 생명과 자유의 표현이지 목적이 아니다. (136)
이런 의미에서 ‘사람性주의’는 그러한 시대정신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내부의 무한성을 자신의 ‘성(性)’으로 자각하고, 그것이 초자연이 아니라 ‘천연(天然)’의 자연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이돈화는 사람性주의 혹은 ‘사람주의’라고 했다. (136)
이러한 입장을 그는 스피노자(B. Spinoza, 1632-1677)의 ‘신 즉 자연’의 관점에 해당하는 것으로도 보았다. .. 이돈화는 그(스피노자)의 내재성의 철학과 신의 자연적이면서 창조적인 힘에 주목한다. .. 이돈화는 내재적인 창조적 생명성에 주목했던 반면, 그 필연성과 결정론적 성격은 표피적 논리로 여겨 중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36-137)
이러한 입장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인류의 희망을 보았으며 아시아 청년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의 견해와도 상통한다. ... 김기전과 이돈화는 그의 생애와 사상을 윤리설과 정치사상을 중심으로 개벽(開闢)(1921, 5월호)에 「사상계(思想界)의 거성(巨星) 버트란트 러셀 씨를 소개함」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러셀의 사회개조의 원리(Principles of Social Reconstruction)(1916)와 자유에의 길(Proposed Roads to Freedom: Socialism, Anarchism, and Syndicalism) 등은 영국과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지성들에게도 커다란 위안과 희망을 주었다. (137)
이돈화는 「최근사회의 신현상을 보고 도덕심의 수립을 切望함」이라는 글에서 “러셀의, 이른바 소유충동, 창조충동이라 함도 어떤 의미에서 전자를 물질 방면이라 할 것이요, 후자를 정신방면이라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정신개조는 도덕심의 승리로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138) [절망(切望) 간절히 바람. 절망(絕望)이 아니다. 뒤의 것은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 버림. 또는 그런 상태.’의 뜻이다]
그러나 러셀의 기독교 비판과 정치적 사회 활동은 이돈화가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러셀은 신학과 투쟁하여 종교계에서는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다. 김기전의 소개글과 에이어(Alfred Jules Ayer, 1910–1989)의 보고에 의하면 중국에 와 있던 러셀이 병들어 죽었다는 소문을 언론에 낸 것도 종교계였다. (139)
“...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의 유명한 경구가 있으니, 우리는 무엇을 가질지라도 오히려 그 이상의 무엇을 가지고 싶으며, 또 우리는 어디들 갈지라도 좀 더 다른 곳을 가보았으면 ...(중략) .. 하나니, 이것이 인생의 목적이니라. 최후의 일언을 발하노니, 금일 우리 조선 형제들이 하는 모든 것은 맹종이냐 타협이냐 자주이냐! 그리고 누구에게라도 미혹되지 아니할 만한, 과거나 현재에 대한 철저한 판단을 가졌는가.” (140)
인격신에 대한 이돈화의 비판은 「속, 인내천의 연구(續, 人乃天의 硏究)」(1920)에 있다. 이 글은 “나(이돈화)의 의견과 동일한 구로이와 루이코(黑岩周六, 1862-1920)의 최후종교론”에 대한 소개와 평가이다. ‘천지만물이 신의 표현’이라는 범신론을 가장 지적인 최후의 종교라고 보는 구로이와의 天人論(1903)은 이돈화에게 천도교의 철학적 종교와 부합하는 논설이었다. (140-141)
[# 참조: 이돈화는 1919년 기점으로 이전의 천도교 교리해설에 머물러 있던 수준에서 벗어나서 사회적 실천과 문화계몽과 관련된 글을 집중적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쿠로이와 루이코(黑岩周六)의 ‘최후종교론’이나 이노우에 테쓰지로[井上哲次郞]의 ‘현상즉실재론’을 영향받아 인내천주의의 종교에 입각한 사회개조에 골몰하였다. 22년 이후에는 사회주의와의 사상적 대결 속에서 인내천주의를 사람성주의 철학으로 재해석하고, 진화론적 입장에서 수운사상을 재해석하였다. - 김용휘, 「천도교의 문화운동론과 서양철학 수용: 이돈화를 중심으로」(2012-2013). - 「천도교의 문화운동론과 서양철학 수용: 이돈화의 신인철학을 중심으로」, 범한철학회, 2015, 06. ]
이돈화의 의도는 최후 종교론인 범심론을 인내천주의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141)
.. 이러한 자주적 완전 가능성을 전제로 이돈화는 사람주의의 세 가지 본령(本領)을 제시한다.
(1) 시대의 요구로써 시대의 정신을 체현하여 사람의 의의를 철저하게 하는 일.
(2) 모든 사람의 이상은 ㅅ람 자기들을 토대로 하고 일어난 자이니, 그러므로 이상과 사실을 다 같이 사람 자기들의 생활 만족에 부합하게 하는 일.
(3) 사람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면, 전 우주의 위력(偉力)과 감능(堪能)을 사람 자기 중에 체인하여, 사람 자기의 권능으로써 모든 행복할 수 있는 능력[福能]을 증진하는 일. (141-142)
이러한 측면에서만 보면 김기전뿐만 아니라 이돈화의 철학은 무신론적 행동주의에 가까워진다. 그 행동주의는 우주에는 퇴보와 정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 자주성과 자유가 완성되어간다는 진화적 이상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다. (142)
이돈화의 낙관적 활동주의는 ‘사람性주의’와 함께 ‘사람性자연주의’를 말한다. 그가 자연주의라는 말을 추가한 것은 무한히 창조적으로 진화하려는 창조충동이 자연 내부의 본체이기 때문인데, 인간의 외적 활동은 그것의 ‘표현’이거나 ‘발휘’이다. .. 이러한 인본주의적 자연주의를 이돈화는 사람성자연주의로 명명하고, “사람성자연주의로 돌아오라”고 권고 한다. (143) [자연주의 속에 부분으로 인성(人性)이 있을 것이다. 자연을 사람에 종속시키거나 자연을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연주의가 아니다. (51WLJ)
그는 자연의 활력에 근거하는 사상은 중용(中庸)의 솔개는 하늘에 날고, 고기는 연못에 뛰논다“와 노자(老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에도 있다고 한다. .. 사실 자연의 생기로움에 대한 사유는 송명이학(理學)에서 우주의 천도와 합일한 성인의 마음의 광활한 초월적 기상을 의미했다. 이돈화는 이학(理學)의 심학적인 소요의 태도를 ’처사‘와 ’은둔자‘가 되는 것이 고상하다고 보는 소극적 생활의 원인으로 보았다. (143)
여기서 이돈화는 우주와의 동일성에 대한 최시형의 근본경험을 말할 수 있었다. 전통 이학은 ‘무대립[與物無對]’의 자유, 그리고 자연과의 소통의 경험을 ‘의미(意味)’ 혹은 ‘취미(趣味)’의 세계로 보았다. 이돈화는 “만물을 정관하니 모든 것이 그 자체 만족하며 자유롭다[萬物靜觀皆自得]”는 말을 취미의 세계로 보았다. (143-144)
[새로운 인간상] .. 그에 의하면 공자(孔子, 전552-전479)도 늙음이 오는 것을 몰랐고,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고서 단계적으로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 종심소욕(從心所慾)의 경지로 추월해가는 활동을 보여주었다. 공자가 지향한 자기변화의 노력도 “활동과 도덕이 간명했던 시대”의 “향상(向上) 진화의 대활동(大活動)”인데, “만사가 진부하고 막혀 있어 개혁의 업이 산적한 우리 조선인”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우주는 영겁순환(永劫循環)이며 세계는 항구상존(恒久常存)이라. 혤리 혜성이 와서 태양계를 파괴할지라도 우주의 본체에는 손익이 없을 것이오. 상전이 변하여 벽해가 될지라도 지구의 본질에는 증감이 없을 것이다. .. 다만 인류의 영력(靈力)이 자연에 대해 작용해가는 변화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는 스스로 우주의 주인공이며 만물의 영장이라 칭하나니, 이 점에서 인사의 변화를 가리켜 우주의 개벽, 만물의 개조라 칭하여도 무방하리라. 원래 인류의 인류된 진정한 가치는 실로 자기해방과 자연개척에 있다 하리라.” (145) - [1920년 일제하에서 용기를 북돋우기 위한 글이리라. / 우주총량의 불변의 법칙을 인정하고, 인간이 자연위에 있다는 관점은 데카르트로부터 칸트 그리고 신칸트학파로 가는 인본주의 관점이다. 자연자체의 자기 생성에는 관심이 없을 수 있겠다. (51WLJ)]
...이러한 가치위에 만인의 자주독립의 가치가 구현된다. 이러한 사회사상을 이돈화는 ‘평민주의(平民主義)’로 명명했다. 평민주의는 기존의 ‘자본주의 영웅들’인 자본가, “군국주의 영웅들, 현실과 다른 신들의 억압주의”를 타파한다. 또한 인류가 오해하여 만들어낸 모든 우상들을 파괴하고, “만인이 오직 자기의 의지(意志)대로 자기의 역능(力能)대로 활동하는 시대”를 여는 또 다른 형태의 우주개벽이다. 문화란 바로 이 평민 개인들의 ‘역능’이 종교, 예술, 도덕 및 제반 과학으로 실현되는 삶의 양식이다. (145-146)
“눈을 크게 뜨라. 귀를 크게 열라. 그리하여 세계를 보라. 세계를 들으라. 세계를 앎이 곧 자기의 죄악[착오, 오류]을 앎이요, 자기의 장래를 앎이요, 자기의 총명을 도움이요, 자기의 일체를 개벽함이로다.” (146)
이런 견지에서 이돈화는 유럽 근대주의가 자유문제를 다루는 방식에는 사회 측면과 개인측면을 분리하여 발전시킨 폐단이 있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전자에서는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가 대표이고, 후자에서는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대표이다. 이런 분열의 이유는 근대주의가 “인격의 원만성(圓滿性)을 통관(通觀)하지 못한 까닭이다.” 이돈화는 니체의 자주적 독립정신을 높이 평가하지만, 사회적 문화운동에는 허약했던 측면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147) - [서구는 20세기 전쟁이 끝나봐야, 톨스토이와 니체에 대한 진솔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 하나는 인도주의로 다른 하나는 인성자유주의자로 알게 될 것이다.]
“인생의 선천적 약속이며 본능적 충동이다. 그러므로 생활이라는 것은 결코 허식이 아니며, 치레[致禮]가 아니며, 수단이 아니며, 과도가 아니며, 우연이 아니며, 인류의 생명이라 하는 고상한 원천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귀결의 실재이며, 이미 정해진 행위이며 필연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사람이 있음으로 생활이 있다기보다 차라리 사람이 있기 위하여 생활이 있다 함이 더욱 절실할 것이다. 즉 사람은 자기가 있는 증명(의 수단으로)으로 생활을 영위함이 아니요, 자기를 살리는 목적으로써 생활을 영위한다 하리라.” (148-149)
.. 평민주의 문화는 ‘의지의 자유’를 전제한다. 의지는 파괴와 창조의 능력인 자유의지이다. 문화는 “인간 능력의 자유발달이다” (149)
이런 맥락에서 이돈화는 「문화주의(文化主義)와 인격상 평등(人格上 平等)」에서 창조적 진화 과정과 가치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가치의 창조는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다. 그에 의하면 문화는 사실의 차원에서는 어떤 필연적 법칙이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단계는 자유의지의 비약성과 우연성이 개입하여 형성된다. 그에 의하면 부트루(Emile Boutroux, 1845-1921)와 그의 후예인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이 가치의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이론을 개발했다. (149)
이돈화에게 부트루의 자연법칙의 우연성(1874)과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1907)는 매력있게 다가왔다. 그들의 이론은 이돈화의 평민주의적인 실천적 사고에 이론적 기초를 주게 된다. 생명의 의미는 중국과 일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의 형이상학에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미시 차원의 불확정성과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감각을 환기시켰다. (149-150) [당대의 철학의 수용차원에서 여러 학설을 보았다는 장점이 있지만, 각 철학자들의 고유성을 파악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이돈화에게는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문화현상에서도 일어나는 자유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자유이기에 창조가 가능하며 퇴보도 가능하다. 그는 사람이 우주 창조적 과정에 바탕하여 진보적 문화의 방향으로 노력하는 것을 세계의 의미로 보았다. (150)
(10:18, 51WL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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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일제 강점기의 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애국계몽운동가, 정치가. 자(字)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 백암(白岩·白巖·白菴),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이며 본관은 밀양(密陽).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 한국통사(韓國痛史)(1915),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1884 야뢰(夜雷) 이돈화(李敦化, 일제명: 白山一熊, 백산일웅, 1884-1950) 일제 강점기의 천도교 지도자, 사상가. 천도교 도호는 두암(豆菴)이며 아호로 야뢰(夜雷)와 백두산인(白頭山人)이 있다.
1894 김기전(金起瀍, 金起田, 1894-몰년 미상(월북)), 일제 시대의 언론인, 종교인, 소년운동가, 독립운동가, 페미니스트. '한국의 페스탈로치'로도 불린다. 약 7년간 '개벽'지의 주필을 역임했다. [1920 개벽(開闢) 이돈화(李敦化 1884-??)가 창간 ]
1903 열암(冽巖) 박종홍(朴鍾鴻 1903-1976) 호(號)는 열암(冽巖) 서울대교수. 1903년 7월 1일 평안남도 평양.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정희 유신에 협력.
[1905 고유섭(高裕燮, 1905-1944) 한국의 미술사학가. 경성대학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뒤 경성대학 연구실의 조수, 개성박물관장, 연희전문․이화여전 교수를 역임하면서 국내의 명승․고적․사찰을 답사․연구하였다. 《송도고적(松都古蹟)》《조선탑파(朝鮮塔婆)의 연구》《고려청자(高麗靑瓷)》]
[1906 이강국(李康國, 1906-1955) 조선공화국의 정치인. 아호는 이촌(耳村). 경성대 법문학부, 독일 베를린대학 유학, / 중국 공산당의 프랑스 유학과 비교해 볼 필요 있다. 중국은 일본의 영향 하에 있기 싫었다(?).]
1903 신남철(申南徹, 1903/7-?) 서울 출생.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1948년 3권으로 이루어진 ‘역사철학’을 출간. 1950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고, 1958년 3월 제1차 당대표자회에서 자유주의자로 비판받았다.
1909 박치우(朴致祐 1909-1949)(40살)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졸업. 숭실전문 교수. 1949년 12월 4일 동아일보 “약 일주일 전 태백산[지리산] 전투에서 적의 괴수 박치우를 사살하였다.”고 보도했다.
1937 신용하((愼鏞廈, 1937-) 제주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 대학교수 독도학회 회장 수상2007 제3회 독립기념관 학술상 외 4건..
1938 이만열(李萬烈, 1938-) 경남 함안, 서울대 역사학과, 역사학자, 교회사학자.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기독교와 역사의식』(1981)
1957 박찬승(朴贊勝 1957-), 전주. 서울대 국사학과와 동대학원 졸업. 미국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 방문교수, 역사문화학회 회장, 한국사회사학회 회장, 목포대학교와 충남대학교 교수,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저서로는 '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1992)',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민족주의 시대ㅡ일제하의 한국 민족주의', '근대이행기 민중운동의 사회사', '언론운동',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다', '민족, 민족주의'.
1963 정혜정(丁蕙貞, 1963-) 동국대 교육학과, 박사논문 “東學·天道敎의 敎育思想과 實踐의 歷史的 意義”(1996, 동국대 교육학과, 박선영), 인천대 일본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원광대 HK 연구교수, 「이돈화의 인내천주의와 서구 근대화 철학의 수용」, 동학학보 제19호[2010], 143-188쪽; / 특집논문 : 동학과 서학의 만남 ; 이돈화의 인내천주의와 서구근대철학의 수용 = Lee Donhwa`s Innaecheonism and the acceptance of Modern Western philosophy, 정혜정 ( Hye Jung Jung ), (동학학보, Vol.19 No.-, [2010])[KCI등재]
1967 허수(1967-) 경남 함안, 서울대교수 한국근대사상사, 「1920년대 전반 이돈화의 개조사상 수용과 사람성주의」, 동방학지 125, 2004: / 1920년대 전반 이돈화의 改造思想 수용과 '사람性주의' = Yi Tonhwa's Adoption of Reformation Theory and His "Doctrine of Human Nature" in the Early 1920s, 허수, (동방학지, Vol.125 No.-, [2004]) [KCI등재후보]
[1969 김용휘(金容暉, 1969-), 고려대, “시천주 사상의 변천을 통해 본 동학 연구”(2005, 윤사순)
1975 손유경(孫有慶, 1975-) 서울, 서울대 국문학과 동대학원 박사. 아주대학교 교양학부 강의, 주요 논문으로 [프로 문학과 '감각'의 문제―김기진의 '감각의 변혁론'을 중심으로](2007)와 [임화의 유물론적 사유에 나타나는 주체의 위치](2008), [나혜석의 구미만유기에 나타난 여성 산책자의 시선과 지리적 상상력](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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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 이노우에 테쓰지로(井上哲次郞, 1856-1944) 일본 명치시대 철학자. 주요개념: ‘現象即実在論(현상즉실재론)’ 『教育ト宗教ノ衝突』(1893年).
1862 구로이와 루이코(黑岩周六, 1862-1920) 黑岩泪香(흑암루향) 黑岩淚香(흑암루향), 思想家、作家、翻译家、推理小说家、记者, 주요개념: ‘最後 宗敎論’(찾을 수 없음) 評論: 天人論 - 1902年, 人尊主義 - 1910年.
1874 구와키 겐요쿠(桑木厳翼, 1874-1946) 1896년 도쿄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 1902년 빈델반트의 『철학사요』를 번역하고, 또 『철학개론』이 신칸트학파적 구성을 취하고 있듯 당대 독일철학의 영향하에서 철학연구를 해나갔다. 칸트철학과 신칸트학파 철학을 일본에 정착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1881 소우다/소다 기이치로(左右田 喜一郞 1881-1927) 요코하마 출생. 동경상고를 거쳐 케임브릿지대, 프라이부르크대학 등에서 유학, 박사학위를 받음. 리케르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음. 1923년에 귀국, 소우다은행 사장으로 활동하면서 동경상대 강사를 겸하여, 신칸트파의 철학자, 특히 경제철학자로서 정밀한 논문을 발표했다. 과학론의 선구자이며 니시다철학(니시다 기타로)을 비판하고, 「黎明會」멤버로서 다이쇼데모크러시의 계몽운동에 참가했다. 신칸트학파의 학문론, 과학론의 대표적인 학자. 논리적인 엄밀함과 대중화라는 대정기다운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일컬어진다.(주 『현대일본사상대계17 휴머니즘』1964년 치쿠마쇼보) - [1913년 아닐까? 1919년에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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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자(老子, ?-? ) (572년 석비, 이 비석은 도교의 창시자인 노자에게 헌납된 석비) 석비에는 당소전백공지묘(唐少傳白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명 이이(李耳). 자 담(聃).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 고현(苦縣, 지금의 河南省 鹿邑縣) 출생.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에서 장서실(藏書室)을 관리하던 수장실사(守藏室史)를 하였다. 공자(BC 552~BC 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552 공자(孔子, 전552-전479) 성인(聖人), 유가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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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리베리아 반도에서 온 유태인 가계의 출신으로 네델란드에서 활동한 철학자이다. 그는 그리스트교나 유태교가 지닌 유일신의 불변성과 독자적 고유성에 대해 부정하고, 살아있고 움직이는 자연 즉 신을 주장한다. 윤리학
1804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 독일 철학자, 헤겔좌파 계열의 선두,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 1841)
1819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 영국 사회 비평가. 화려한 예술비평가의 길과 험난한 사회사상가의 길을 차례로 걸었던 19세기 영국의 저명한 지식인이다. 후에 간디, 톨스토이, 버나드 쇼 등은 러스킨을 두고 ‘당대 최고의 사회개혁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근대화가론(Modern Painters 5 vols. (1843–60),
1828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 러시아의 소설가, 시인, 개혁가, 사상가. 장편으로《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중편으로《이반 일리치의 죽음》, 《바보 이반》이 있다.
1839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 미국 기호학자, 철학자. 〈신념을 확정하는 방법〉(월간 <통속과학>, 1877년 11월)과 〈어떻게 우리들의 관념(觀念)을 명석하게 만드는가〉(같은 저널, 1878년 1월)
1844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독일의 문헌학자, 철학자. 서구의 오랜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1885; 《선악의 저편》, 1886; 《도덕의 계보학》, 1887
1845 부트루(Emile Boutroux, 1845-1921) 프랑스 철학자. De la contingence des lois de la nature, 1874(학위논문), Études d'histoire de la philosophie : Socrate, Aristote, J. Boehme, Descartes, Kant, etc. 1897.
1848 빈델반트(Windelband, Wilhelm, 1848-1915) 신칸트학파에 속하며 '독일 서남학파(바덴학파)'를 만들었다. 칸트의 비판주의적인 방법에 따르면서 역사학의 방법론을 다룬다. Präludien(1884), 4판, 2권(1911); Lehrduch d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1891), 15판(1954).
1859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 프랑스 철학자.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1889), Matière et mémoire. (1896), L'Évolution créatrice, (1907),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Paris, (1932)
1863 릭케르트(Heinrich Rickert 1863-1936) 자연과학은 몰가치적(沒價値的)인 태도인데 반하여 그의 문화과학은 가치관계적(價値關係的)이다. 빈델반트의 제자. 신칸트학파 중에 문화 역사쪽의 바덴학파(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주요 제자 중 한사람. 이 학파의 인물들: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 1848-1915), 리케르트, 라스크(Lask, Emil, 1875-1915). / 신칸트학파의 인식론 계열인 마르부르크학파: 랑게(Friedrich Albert Lange, 1828-1875), 코헨(Hermann Cohen, 1842-1918), 나토르프(Paul Natorp, 1858-1924) 등이 있다.
1872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의 수학자, 철학자, 비평가. 반전운동가로서 감옥에 간적이 있다.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10 에이어(Alfred Jules Ayer, 1910–1989), 영국 철학자, 논리 실증주의자. The Origins of Pragmatism 1968, Russell, 1972, Ludwig Wittgenstein,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