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캐럴 (Lewis Carroll, 1832–1898)(1971)
- “실비와 브루노(Sylvie et Bruno)” dans Le Monde, 11 juin 1971.
Gilles Deleuze, dans 비평과 임상(Critique et clinique, 1993), 34-35.(P.191)
-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이 글은 두 쪽이며, 미발표문인 것 같은데, 발표 연도를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캐럴의 작품에 대한 요약인 셈이다. 글의 흐름으로 보아 의미의 논리(1969) 다음에 쓰여진 것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심층, 표면, 상층의 구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상층이란 용어보다 표면의 감김(surface enroulée) 또는 부피(le volume)로 쓰면서, 상징계로 나가지 않고 상상계를 풀어내기(확장하기) 이전의 감긴 덩어리와 같이 보았던 것 같다. 그러면 덩어리가 풀어지는 과정은 무엇이 되는가? 이 과정이 상상작용들이 되면, 표면의 분출이 될 여러 방식들을, 여러 가지치기들을 상징계처럼 보아야 할 것인가? (54UKF)
그런데, ...
르 몽드(Le Monde)에 실린 글이다(1971년 6월 11일). 그 기사 제목은 “실비와 브뤼노(Sylvie et Bruno)”인 것으로 보아, 이 작품에 대한 해제를 간략하게 쓴 것이리라. - 그런데, 왜, 189쪽 이 책의 논문들의 출전에 대한 기록에는 빠졌을까? (54UKI)
*서지(書誌)에 관하여, 실비와 브루노(1889)는 캐럴(Lewis Carroll, 1832–1898)이 1867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 소설 속에서 논리학과 그것의 파라독스, 기표들과 기의들이라는 주제들을 다루면서 유머와 무의미(넌센스)의 모든 조합들을 밀접하게 다룬다. 그의 셋째 소설인 실비와 브루노(1889)를 1889년에 출간하고 1893년에 결론을 냈다고 한다.
이 소설은 들뢰즈의 부인인 파니 들뢰즈(Fanny Deleuze)에 의해 프랑스어로 1972년에 번역되었고, 이 번역의 서문을 쓴 루이스 캐럴 전문가인 가떼뇨(Jean Gattégno, 1935-1994)는 질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1969)를 참조했다고 한다. 영어권 소설을 전문 번역하는 레리스(Pierre Leyris, 1907-2001)가 이 작품을 1982년 번역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화정이 옮긴 실비와 브루노(1889)가 페이퍼하우스에서 2011년에 나왔으며, “루이스 캐럴은 넌센스와 환상으로 가득 찬 요정 세계와,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19세기 당시의 화젯거리에 대한 진지한 논쟁이 펼쳐지는 현실 세계, 그리고 이 두 세계를 넘나드는 작중 화자를 통해 우리를 이야기 속으로 이끈다”고 소개한다. (54ULA)
** 주제는 무-의미(le non-sens), 즉 비결정성이다. 무의미가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전우주를 공포로 대할 것이 아니라, 마치 영광처럼 대하게 하도록 지각하게 하는 것이다. 즉 심층을 드러내는 것은 공포가 아니라 영광일 수 있다는 것이 루이스 캐럴이 심층문제에서 본 것이 아닐까? (54UKI)
의미의 논리에서 읽은 것 중에서. 훌륭한나라에서 엘리스의 모험들(1865)에서 ‘얼굴 없는 고양이의 웃음’이라는 장면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표면에 투사되듯이 서술한 것이지만, 실재 상으로 의식의 내재성으로서 지각을 표현하는 방식일 것 같다. 이 환타지적 표현은, 우리가 일상에서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쓰일 수 있는데 마치 ‘그 인간 속에는 호랑이의 발톱이 있다’ 또는 ‘저 인간 속에는 구렁이가 몇 마리가 웅크리고 똬리를 틀고 있는지 모른다’고 할 때 쓰이고 있다. 그 신체의 표면에서 ‘발톱’과 ‘똬리’가 표출되는 것이 아니지만, 이런 단어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 두 단어가 상징계와 연상되어 등장하기보다, 지각된 감화작용에서 그 인간이든 저 인간이든 내용을 규정할 수 없는 어떤 방식과 실행할 행위가 들어있다는 것이리라. 떡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라는 “햇님 달님”의 전래 동화의 “범”이 어둠의 “밤”과 같은 입말의 표현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고개 넘어 집으로 오는 엄마의 신체를 범(호랑이)이 먹는 것과 어둠(밤)이 엄마의 신체를 부분적으로 잠식하는 것은 같은 흐름처럼 지각된다. 잠식 또는 사라짐은 감화작용에서 작동하는 지각작용이 아닐까. 즉 무의미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새롭게 만드는 방식일 수 있다는 점에서 파라독스일 것이다.
게다가 화수분과 같은 이야기는 그렇다면 유머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54ULA)
**
§CC03.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34-35)
- 르 몽드(Le Monde)에 실린 글이다(1971년 6월 11일). -
모든 것은 루이스 캐럴에서 무서운 전투(un combat)에 의해 시작한다. 그것은 심층들의 전투이다: 사물들은 터지고[펼쳐지고], 도는 우리에게 터지게 한며, 상자들은 이것들의 내용을 [포함하기에는] 너무 작고, 영양분들은 독기 있거나 또는 해로우며, 내장[창자]들은 늘어지고, 괴물들은 우리를 덥석 문다. 한 작은 형제는 그의 작은 형제를 미끼처럼 이용한다. 신체들은 서로 뒤섞여 있고, 모든 것은 양분과 똥을 재통합하는 일종의 카니발리즘처럼 뒤섞여 있다. 심지어 단어들은 서로 잡아먹는다. (34)
모든 것은 심층적으로 무서우며, 모든 것은 무-의미이다. 훌륭한/굉장한 나라에서 엘리스의 모험들(1865)은 우선 엘리스의 지하 모험들이라 불리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34)
그러나 캐럴은 왜 이 제목을 간직하지 않는가? 그것은 엘리스가 점진적으로 표면을 정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스는 표면으로 오르고 또 다시 오른다. 그녀는 표면들을 창조한다. (34)
훨씬 더하여, 거울의 저편에(1871)는 거울의 표면에 투자하여, 장기 놀이[판]의 표면을 세운다[창설한다]. 순수 사건들은 사물들의 상태들을 회피한다. 사람들은 심층에서 더 이상 애쓰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은, 왼손잡이처럼 행하면서 또는 겉면으로 바꾸면서, 다른 측면으로 지나가려고 미끄러지기를 힘쓴다. (34)
캐럴에 의해 묘사하는 화수분(La bourse de Fortunatus)은 뫼비우스의 고리이며, 이 고리에서 동일한 똑바로(직선으로) 두 측면을 달린다(관통한다). (34)
캐럴은 수학자이고 또는 사진가이다. 그러나 심층들의 세계는 표면 아래에서 으르렁거리고, 표면을 파열하려고 위협한다. 심지어 전시되어 풀려진 괴물들은 우리를 시달리게 한다. (34-35)
캐럴의 셋째 위대한 소설인 실비와 브루노(Sylvie and Bruno, 1889)는 또한 진보를 조작한다(opérer). 사람들은, 오랜 심층이 그 자체로 평평하게 되어 있고, 다른 표면의 옆에서 표면이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두 표면들은 공존하고 있고, 따라서 거기에서 두 가지 인접된 이야기들이 글로 쓰여진다: 하나는 주류이고 다른 하나는 비주류이고; [그런데] 하나는 장조로(en majeur, 주류) 다른 하나는 단조로(en mineur, 비주류). 다른 이야기 속에 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이야기 옆에 한 이야기이다. 실비와 브루노(1889)는 틀림없이 동시에 두 가지 이야기를 해주는첫째 책이다. 두 가지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 속에 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인접한 두 이야기이다. (35)
미친 정원사의 노래. 캐럴이 묻는다: 노래는 사건들을 규정하는가? 또는 사건들이 노래를 규정하는가? 실비와 브루노(1889)와 더불어, 캐럴은 일본식 두루마리 족자 그림의 방식으로 두루마리 책을 만든다(그 두루마리 족자 속에 아이젠슈타인은 영화기법적인 몽타쥬의 예고자[전조]를 보았다. ...) (35)
실비와 브뤼노의 동시적인 두 가지 이야기들은 캐럴의 삼부작(la trilogie)의 마지막 항을, 다른 두 작품들과 동등한 걸작을, 형성한다. (35)
표면이 심층보다 덜 무-의지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똑 같은 무의미가 아니다. 표면의 무의미는 마치 순수 사건들의 – 즉 도달하는 것으로도 게다가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끝나지 못하는 본질들의 - “빛살퍼짐(Radiance, 사광, 射光)”과 같다. 뒤섞임 없이 순수 사건들은 뒤섞인 신체들 그 위에서, 신체들의 행위들 그 위에서, 신체들의 뒤엉킨 정념의 그 위에서 빛난다. 마치 토지의 증기처럼, 사건들은 표면에서 비형체적인 것을, 즉 심층들의 순순한 “표현된 것”을 구해낸다(dégager); 칼이 아니라 칼의 섬광을, 노래 없는 미소처럼, 칼 없는 섬광을. 의미를 아무것도 통과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 속에서 모든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은 캐럴에 속한다. 왜냐하면 무-의미의 다양성은 전 우주를, 즉 그것의 공포들(ses terreurs)을 마치 그것의 영광들처럼 고려하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심층, 표면, 부피 또는 [실뭉치처럼] 감겨진 표면(surface enroulée). (35) (54ULA)
**
1832 도지슨/캐럴(Charles Lutwidge Dodgson, Lewis Carroll, 1832–1898), 옥스퍼드 논리학 교수, 작가, 사진가. 대수학과 수학논리에 관한 저술도 많다.
- 훌륭한/굉장한 나라에서 엘리스의 모험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1865)(Les Aventures d'Alice au pays des merveilles, 1865)
- 거울의 저편에(Through the Looking-Glass, and What Alice Found There (includes "Jabberwocky(재버워키)" and "The Walrus and the Carpenter", 1871)(De l'autre côté du miroir, 1871)
- 스나크 사냥(The Hunting of the Snark, 1876)(La Chasse au Snark, 1876)
지하에서 엘리스 모험들(Alice's Adventures Under Ground. 1886)(Les Aventures d’Alice sous terre: publiées en 1886)
- 실비와 브루노(Sylvie and Bruno, 1889)(Sylvie et Bruno, 1889)
1898 아이젠슈타인(Sergueï Mikhaïlovitch Eisenstein, 1898-1948) 소련의 영화제작자, 영화 이론가, 파업(La Grève 1924제작, 1925년 상영), 전함 포템킨(Le Cuirassé Potemkine 1925), 시월, 세계를 뒤흔든 열흘(Octobre: dix jours qui ébranlèrent le monde, 1927)
1907 레리스(Pierre Leyris, 1907-2001) 프랑스 전문 번역가, 셰익스피어, 멜빌 등을 번역. 블레이크 전집을 번역했다.
1935 가떼뇨(Jean Gattégno, 1935-1994) 프랑스 지성인, 행정가. 영어로 교수자격, 파리 8대학 교수. 루이스 캐럴과 오스카 와일드 전문가.
* 카미소(Adelbert von Chamisso/ Louis Charles Adélaïde de Chamissot de Boncourt, 1781-1838) 프랑-독일 시인, 작가, 식물학자. 페터 슐레밀의 낯선 이야기(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 1814(L'Étrange Histoire de Peter Schlemihl ou l’homme qui a vendu son ombre, 프랑스에서 1822) 여기에 ‘화수분’ 이야기가 있다.
(4:05, 54U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