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세 번이나]
입고 나서는 옷이 가벼워졌다. 먼 길을 나서기 전 채비를 미리 한다. 두 시간 이상의 운전 길은 휴식이 먼저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와 국도를 따라간다. 길 떠나기 전 충분한 잠은 나와 가족의 안전을 이어간다.
도심을 벗어나 경부고속도로로 접어드는데 휴일 한꺼번에 몰려든 차량으로 정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5KM 정도를 이동하는데, 삼십 분은 걸리는가 보다. 시간적 여유를 두고 나선 길이라 조급함은 없지만 벌써 피로가 스며든다. 휴게소까지는 십여 킬로가 남았다. 미세 먼지에 시야는 좁다. 어느덧 휴게소 도착하여 진한 커피 한 잔으로 졸음까지 몰아낸다.
목적지로 가는 고속도로 나들목을 빠져나와 국도를 따라간다. 이전 관광버스를 타고 달렸던 구불구불한 도로는 한산하고 쭉 뻗은 우회 도로가 생겨 차의 흐름을 앞당긴다. 도 경계를 지나 도착지 행정 구역에 접어들었다. 여러 차례 오르내렸던 지나간 풍경이 새삼스럽다. 국가 경제의 근간이 되었던 철강 산업단지 굴뚝이 눈에 들어온다. 바닷가 해변에 펼쳐진 백사장의 모습이 낯설다.
예식장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승강기 앞에 섰는데 어딘가 얼굴이 이전에 본 사람이다. 혼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누굴까. 누구였더라. 6층 식장 앞에 이르러서 서로 이름을 부르고 확인을 한다. 바로 오늘 결혼을 하는 녀석의 고모들이다. 고향에서 같이 자랐다. 나에게 누나 되는 이는 중학교 졸업 후 도시로 나가 일 년에 한 번 볼 정도였고, 여동생은 같이 학교에 다니며 십 대를 시골 생활을 하며 서로 가깝게 지냈다. 성인이 되어 각자 가정을 꾸리고 지내면서 그간 왕래가 드물었다. 집안 길흉사 때만 얼굴을 내밀었으나 마주치는 일이 적어 단번에 아는 그것이 어려웠나 보다. 이제 장성한 자식들을 두고 짝을 만나기 직전에 있는 모양이다.
오늘의 주인공 신랑과 혼주인 친구에게 축하 인사와 덕담을 나누고 예식장 입구에 비켜서서 그간의 일들을 묻는다. 나의 일상은 친구를 통해 듣고 있었던 터라 얼굴이 훤하다며 농까지 건넨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고향을 떠나 각자 타지에서 지낸 시간이 길어, 길 가다가 마주쳤으면 알아보지 못한 채 비켜 가지 않았을까.
신부 입장과 함께 결혼식이 시작될 즈음 아래층에 준비된 뷔페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는다. 창문가에 자리를 잡고 아내가 음식을 가지러 가는 사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 멀리 영일대 해수욕장 모래가 길게 눈에 들어온다. 두 차례의 접시 가득 채운 음식으로 눌러앉은 배를 일으켜 세우기에 넉넉했다. 과일과 차 한 잔으로 마무리하고 인사를 나누며 예식장을 나선다.
집에서 나설 때부터 결혼식 참석을 마치면 근처 영일대 해수욕장 끝 해안 뒷동산에 우주를 걷는 듯한 스페이스워크가 설치된 환호 공원으로 나서기로 했다. 따뜻한 날씨 속에 공설주차장은 차 댈 곳이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고 기다려 차례가 되었다. 3주차장이 시설물 접근에 가깝다. 기다란 줄 서기에 이어 입구를 지나 철제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딛는데 얼마 가지 않아 다리가 후들거린다. 되돌아 나오는 이도 있다. 구조물이 좌우로 흔들리는 움직임에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위를 쳐다본다. 까마득하다. 출입이 허용된 곳까지 걸어간다. 이왕 올라왔으니 끝까지 가 봐야 하지 않겠나. 서녘 하늘에 햇살이 구름 사이에 비친다. 멀리 동해가 싱그럽게 다가온다. 일출과 일몰을 감상하지 못하는 아쉬움 속에 다음을 기약해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다. 넉넉잡아 세 시간은 걸린다. 7번 국도를 따라 석양 속에 하루를 서둘러 마감한다. 두 집 안에서 자란 성인 남녀가 새 가정을 꾸리는 첫발을 내딛는 자리에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하였다. 덤으로 축하의 공간에 지난날 시골에서 추억을 함께했던 이들을 만나게 되다니 기대하지 않은 일상에 기쁨이 크다. 만남이 있으면 언젠가는 헤어지는 이치가 삶이다. 현재에 얽매여 나 자신을 옭아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저마다 생각하고 펼치는 생각이 다르듯 같은 사물을 바라보는 처지도 차이가 있다. 주변을 아우르는 자세가 안타깝다. 나 위주로 판단하고 에둘러 결정짓는 현실을 주저한다.
자녀들이 하나둘 짝지어 가정을 꾸리는 과정을 보면서 작은 일을 해냈다고 자부한다. 결혼하는 나이가 늦어지고 혼인하지 않는 결혼 적령기의 사람들이 이전보다 늘어나면서 내 자식은 어떠한가. 이 비율에 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심지어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갖지 않는 가정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최근의 통계 결과는 암울하다. 절반 정도가 비혼이요 부부 둘만의 시간을 가지겠다는 비중이 높다.
시대에 따라 가치관과 사회 환경의 차이는 있다. 아이 울음소리가 집마다 들리고 초등학교는 시골조차도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수업을 받았던 것이 우리 세대다. 형제·자매가 네댓 명은 흔한 시절, 맞이가 아래 동생들을 돌보고 부모님 대신 키웠다. 반세기 만에 도시조차도 다른 모습이다. 개울을 따라 오가던 등굣길에 찔레꽃 꺾어 껍질을 벗겨 초식동물처럼 새순을 먹었다. 오솔길은 넓게 포장도로로 바뀌고 선산을 지키던 소나무는 가지가 휘었다. 시골 생활의 향수는 흔적을 찾기 어렵고 함께 동산을 휘젓던 동무는 뿔뿔이 흩어졌다.
지난날 소 몰고 나무하러 오르내리던 산길을 머릿속으로 따라간다. 산허리는 고속도로 개설 공사로 무참히 잘려 나갔다. 마을 왼쪽 저수지 뒤편 산자락에 높다란 콘크리트 구조물이 올려져 이곳에 4차선 도로가 생기는 것을 상상이나 해 보았겠는가. 산봉우리 바로 아래에 사각 시멘트 구조물에 접도구역이란 글귀가 훗날 도로가 얹힌다. 흐른 세월만큼이나 바뀐 것이 한둘이 아니다. 산천도 바뀌고 사람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대나무 말을 타고 흙먼지 날리며 골목길 누비던 꼬마들은 반백의 희끗희끗한 머리를 하고 허리가 꼿꼿한 사람이 드물다.
시간이 더 흐르고 하나둘 영원한 터를 잡는 이가 생기기 전에 한자리에 모여 옛 시절을 안주로 삼아 술잔을 기울여 보자. 고향의 추억은 늘 그곳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그 추억을 되새김할 또래들은 이런 일 저런 일로 미루어진다. 날씨가 포근해지는 이번 주말에는 함께 모여 손이라도 잡아보지 않으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