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의 문단 동향
해방(解放)이다!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알리는
일왕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 나온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자면 이 해방은 우리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이 전리품으로 챙겨 우리에게 던져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조선독립연맹 · 조국광복회 등은
우리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줄기차게 투쟁하고,
한국광복군 · 조선의용군 · 조선인민혁명군 같은
군사 조직이 무력 항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동아 공영권을 외치며 침략 전쟁에 나선
일제를 패망시키는 주체가 되지는 못한다.
세계 제패의 야망을 키우던 아시아의 맹주 일본과 싸워 이기기에는
우리의 민족 해방 운동 전선은 너무 영세하고 역부족이었다.
당연히 우리는 일본이 항복을 조인하는 자리에 나가지 못한다.
일제는 우리가 아니라 미국 · 소련 · 영국 · 중국으로 구성된
연합국에 항복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제의 무조건 항복에 의해 해방이라는
선물을 받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에 내재된 역사적 한계와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해방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 또는 들러리에 머물고 만 것이다.
1945년 8월 16일,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를 가득 메운 120만 서울 시민
ⓒ 시공사 |
함석헌의 말처럼 해방은 “한밤중에 도적같이” 온다.
국제 정세에 밝은 몇몇 사람을 빼고는 아무도
해방의 날이 이렇게 닥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다.
예리한 직감과 통찰력을 자랑하던 시인이나 소설가나 비평가 중에서도
이런 정국을 내다본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신문사에서 다른 기자의 말을 듣고 8월 11일에 낌새를 감지한 조용만이
그나마 빠른 편에 속하고, 백철 역시 신문사에서 일한 덕분에 하루 전인
8월 14일에 상황을 알아차린다.
반면 김동인은 15일 오전 11시까지도 총독부 출판과장에게 검열 관계로
애원을 하고 있었으며, 이광수는 해방된 다음날인 16일 오전에야
다른 사람을 통해서1) 소식을 들었을 정도다.
잃어버린 빛을 되찾은 것이라는 뜻에서
해방을 흔히 ‘광복(光復)’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되찾은 빛은 앞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혼탁한 것이어서,
한반도는 법과 질서의 부재 속에서 혼돈 그 자체로 빠져든다.
특히 문인들에게 해방은 엄청난 혼란을 몰고 온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작가들은 해방 뒤 하나둘씩
서울로 모여든다.
그들은 명동과 무교동 거리를 무리지어 쏘다니며
해방의 감격을 나누고 회포를 푼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는다.
차츰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무엇을 써야 할지를 몰라 방황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떳떳치 못한 일제 때의 행적을 돌아보며
불안에 몸을 떨기도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어디 나만 그랬나.’ 하며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수십 년 이어진 억압과 강요 속에서 자의건 타의건 일제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은가,
이럴 때일수록 기가 죽어 고개를 숙이기보다는 뭔가 하나를 선택한 뒤
대충 이론을 꿰맞춰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문인들 사이에 은연중 퍼지고,
나아가서는 어쩌면 바로 지금이
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까지 품게 된다.
해방을 맞아 서울 남산의 국기 게양대에 처음으로 태극기가 걸리고 있다.
눈치 빠른 몇몇 문인은 세계를 집어삼킬 듯 기고 만장하던 일본 군국주의가 무너지고
느닷없이 주어진 해방에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음을 이내 감지한다.
사태의 윤곽은 해방을 맞고 1주일쯤이 지난 8월 21일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고,
9월 2일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가 북위 38도를 경계로 미소 양군의 한반도
분할 점령책을 발표한 데 이어,
9월 8일 하지 중장의 미 24군단이 서울에 진주하면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8·15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쟁취한 해방이 아니라는 것,
강대국들의 전쟁에서 일제가 패배함으로써 이루어진 불완전한 해방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문인들은 저희의 투명하지 못한 과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또는 정치적 야심을 실현할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중에서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
물론 일제 강점기에 비하면 선택의 폭이 넓어지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내기와 다를 바 없었다.
대세 판단이 맞아떨어지면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지만,
자칫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성공하기 위해서, 온갖 상상력과 예지력을 동원한다.
해방 직후 일제 강점기 내내 억눌린 감정이 분출된 가장 큰 통로는
단체와 조직의 결성이었다.
네댓 명만 모여도 일경의 감시와 제재를 받던 지난 세월에
분풀이라도 하듯이 사람들은 정치 · 사회 ·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갖가지 단체와 조직을 결성하고 또 이에 가담한다.
간판과 결성 취지는 달라도 이들 단체와 조직은 모두 정치 주도권 장악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외세의 간섭을 극복하고 새 나라를 건설하는 데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이들은 생각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패를 갈라 서로 맞서게 된다.
문단 또한 정치 이념에 따른 파벌을 형성한 채 격렬한 대립 시기를 거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