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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59권
37. 교량사리품(校量舍利品)을 풀이함
【경】 부처님께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만일 염부제(閻浮提)에 가득 찬 부처님의 사리(舍利)를 한 몫으로 치고 다시 어떤 사람이 쓴 반야바라밀의 경전을 한 몫으로 친다면 이 두 몫의 가운데에서 그대는 어느 것을 취하겠느냐?”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염부제에 가득 찬 부처님의 사리를 한 몫으로 치고 반야바라밀의 경전을 한 몫으로 친다면 이 두 몫 중에서 저는 차라리 반야바라밀의 경전을 취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저는 부처님의 사리를 공경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존중하지 않는 것도 아니오나 사리는 반야바라밀 안에서 나오고 반야바라밀로써 훈수(薰修)되기 때문에 이 사리를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리불이 석제환인에게 물었다.
“교시가여, 이 반야바라밀은 취할 수가 없습니다.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고 상대할 수도 없는 한 모양이어서 이른바 모양이 없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취하려고 하십니까?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은 취하기 위하여 나오지도 않았고 버리기 위하여 나오지도 않았으며 더하고 덜함과 모이고 흩어짐과 손해되고 이익됨과 더럽고 깨끗함을 위하여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의 법이 편들지도 않고 범부의 법을 버리지도 않으며 벽지불의 법과 아라한의 법과 유학(有學)의 법에 편들지도 않고 범부의 법을 버리지도 않으며 무위의 성품[無爲性]에 편들지도 않고 유위의 성품[有爲性]을 버리지도 않으며 내공(內空)에서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까지에 편들지도 않고 4념처(念處)에서 일체종지(一切種智)까지 편들지도 않으며 범부의 법을 버리지도 않습니다.”
석제환인이 사리불에게 말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사리불이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 법에 편들지도 않고 범부의 법을 버리지도 않으며 나아가 일체종지까지 편들지도 않고 범부의 법을 버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잘 행하는 이요 반야바라밀을 잘 닦는 이입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두 가지의 법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니, 둘이 아닌 법의 모양[不二法相]이 바로 반야바라밀이요 둘이 아닌 법의 모양이 바로 선바라밀이며 나아가 단바라밀입니다.”
그때에 부처님께서 석제환인을 칭찬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교시가야, 그대가 말한 바와 같아서 반야바라밀은 두 가지의 법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둘이 아닌 법의 모양이 바로 반야바라밀이요 둘이 아닌 법의 모양이 바로 선바라밀이며 나아가 단바라밀이니라.
교시가야, 만일 어떤 사람이 법의 성품[法性]에서 두 가지 모양을 얻으려 하면 이 사람은 반야바라밀에서 두 가지 모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되느니라. 왜냐하면 교시가야, 법의 성품과 반야바라밀은 둘이 없고 구별도 없기 때문이니, 나아가 단바라밀까지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실제(實際)와 불가사의성(不可思議性)에서 두 가지 모양을 얻으려 하면 이 사람은 반야바라밀에서 두 가지 모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되나니, 왜냐하면 반야바라밀과 불가사의성은 둘이 없고 구별도 없기 때문이니라.”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온갖 세간의 사람과 모든 하늘과 아수라들은 반야바라밀에 예배하고 공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배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항상 선법당(善法堂) 위에 앉아 있습니다. 제가 만일 자리를 비울 때면 모든 천자들이 와서 제에게 공양하기 위하여 저의 자리를 향하여 예배하고 돈 뒤에 돌아가나이다. 그리고 그 천자들은 생각하기를, ‘석제환인이 이곳에 앉아서 삼십삼천(三十三天)의 모든 하늘들을 위하여 설법하신다.’고 합니다.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느 곳이든 반야바라밀을 써서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이를 위하여 연설하게 되면 이곳은 시방세계 안의 모든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 및 마후라가 등이 모두 와서 반야바라밀에 예배하고 공양한 뒤에 돌아가나이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모든 부처님과 모든 중생의 쾌락거리[樂具]가 나오기 때문이요 모든 부처님의 사리와 또한 이 일체종지가 머무르는 곳의 인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두 몫의 가운데에서 저는 반야바라밀을 취하겠습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제가 만일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마음 깊이 법 안으로 들어가면 저는 이때에 두려워하는 모양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모양[相]도 없고 모습[貌]도 없으며, 말[言]도 없고 설명[說]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모양도 없고 모습도 없으며, 말도 없고 설명도 없는 이것이 반야바라밀이며 나아가 이것이 일체종지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에 만일 모양이 있어야 하고 모양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온갖 법은 모양이 없고 모습이 없고 말이 없고 설명이 없다 함을 알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지 않으셨어야 하고 제자들을 위하여 ‘모든 법은 모양이 없고 모습이 없으며, 말이 없고 설명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실로 모양이 없고 모습이 없으며, 말이 없고 설명이 없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온갖 법들이 모양이 없고 모습이 없고 말이 없고 설명이 없다 함을 아시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셨으며 제자들을 위하여 모든 법은 또한 ‘모양이 없고 모습이 없으며, 말이 없고 설명이 없다.’고 말씀하셨나이다.
이 때문에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을 온갖 세간의 모든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들은 마땅히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꽃과 향과 영락 내지 번기와 일산으로 공양해야 합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고서 친근하고 독송하고 해설하면서 바르게 기억하며 그리고 베껴 써서 꽃과 향 내지 번기와 일산으로 공양하면 이 사람은 지옥과 축생과 아귀의 갈래[道]에 떨어지지 않고 또한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으며 이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항상 모든 부처님을 뵈옵고 한 부처님의 세계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의 세계에 이르면서 모든 부처님께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꽃과 향 내지 번기와 일산으로 공양하게 됩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부처님의 사리를 한 몫으로 치고 반야바라밀의 경전을 한 몫으로 친다면 이 두 몫의 가운데에서 저는 반야바라밀을 취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모든 부처님의 사리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리를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사리에 공양하고 공경하는 까닭에 천상과 인간 안의 복락(福樂)을 누리고 항상 3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으며 소원대로 되고 점점 3승(乘)의 법으로써 열반에 들어가나이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어떤 이가 현재 계신 부처님을 뵙는 것과 반야바라밀을 보는 것은 똑 같아서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과 부처님은 둘이 없고 구별도 없기 때문입니다.”
【논】
【문】 위에서 7보탑(寶塔)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반야바라밀을 공양하는 데에 대비하셨으므로 그 이치는 이미 완전하거늘 지금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사리로써 경전에 대비하시는가?
【답】 앞에서는 7보탑은 바로 사리가 머무르는 곳임을 밝히셨고 이번에는 단지 사리를 경전과 대비하는 것만을 밝히실 뿐이다. 사리는 비록 반야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염부제에 가득 찬 것이요 반야는 미묘하기 때문에 단지 경전만을 밝힌다.
또한 출가한 사람은 거의 모두가 지혜를 탐하나니 지혜는 바로 해탈의 인연이기 때문이요 집에 있는 사람[在家人]은 거의 모두가 복덕을 탐하나니 복덕은 바로 쾌락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출가한 사람은 대개가 의식(意識)으로 아는 바의 물건을 탐하고 집에 있는 사람은 대개가 5식(識)으로 아는 바의 물건을 탐한다.
석제환인은 이미 복락과 과보가 가장 위대한 이임을 증명했으므로 가장 높고 뛰어난 이이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석제환인에게 물으셨고 석제환인은 말하기를, “저는 두 몫의 가운데에서 반야바라밀의 경전을 취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이 가운데에서 스스로 인연을 말하면서, “세존이시여, 저는 감히 경망하고 오만해서가 아니요 사리를 공경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저는 겨자씨만큼의 사리를 공경하여도 그 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어서 이에 부처님이 되기까지 공덕이 다하지 않음을 알고 있거늘 하물며 염부제에 가득 찬 사리이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보살이 몸을 받아서 곧 사리가 있어도 사람들은 귀히 여기지 않거니와 성불했을 때의 사리는 반야로써 훈수(薰修)한 까닭에 사람들이 공경하고 존중하고 공양합니다. 그러므로 두 몫 중에서 저는 뛰어난 것을 취하겠습니다.”라고 한다.
【문】 사리불은 석제환인이 세속의 이치[世諦]로서 “반야바라밀을 취하겠다.”라고 말하는 줄 알면서도 무엇 때문에 따지는 것인가?
【답】 석제환인은 집 안에 있는 이라 번뇌에 속박을 받고 5욕(欲)에 가려 있으면서도 반야바라밀을 말할 수 있으므로 이 일이야말로 희유하다. 이 때문에 사리불은 질문하여서 석제환인으로 하여금 다시 부처님께 깊은 이치로 묻게 하려고 따지는 것이요 석제환인도 사리불을 뜻을 따르면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석제환인의 뜻은 온갖 법 가운데에는 두 모양[二相]이 없으므로 사리를 작은 것으로 삼지도 않고 반야바라밀을 큰 것으로 삼지도 않으며 반야바라밀은 둘이 없고 분별도 없는 모양이지만 새로 뜻을 낸[新發意] 보살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짐짓 세속의 이치로써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해설하면서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에 둘이 없고 분별이 없게 하는 것이니, 이런 이익 때문에 “저는 반야를 취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이때에 부처님은 석제환인을 칭찬하시면서, “참으로 훌륭하구나.”라고 하시는데 모든 법을 잘 분별하고 또한 반야의 모양을 잘 설명하기 때문이니, 이른바 둘이 없는 모양[無二相]이 그것이다. 이 때문에 칭찬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이 가운데에서 스스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만일 어떤 사람이 법성(法性)과 실제(實際) 등을 분별하여 두 부분으로 나누려 하면 그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분별하여 두 부분으로 나누려는 것이다.”라고 하신다.
제석은 스스로 반야를 해설하고 또한 부처님의 거듭된 해설을 듣고는 그 마음이 청정해졌으므로 깊이 믿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온갖 세간은 예배하고 공경해야 한다.”라고 하며, 제석은 여기에 대하여 스스로 인연을 말하면서, “온갖 보살은 이 반야를 배워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라고 한다.
또한 이 가운데에서는 자기의 몸으로써 비유를 삼으면서 자기의 몸을 부처님에 비유하고 반야의 경전을 앉은 자리에 비유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기의 몸은 반야에 비유하고 앉은 자리를 사리에 비유하나니, 이 때문에 ‘두 몫의 가운데에서 나는 반야를 취하겠다.’고 한다.
또한 “세존이시여, 제가 만일 반야를 받아 지니고서 읽고 외우면 이때에는 두려워하는 모양[怖畏相]까지도 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실제로 두려워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왜냐하면 온갖 법들은 모양이 없고 설명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나니, 반야바라밀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모양이 없는 법을 얻게 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
반야를 받아 지니고 공양하는 이는 3악취(惡趣)와 2승(乘)의 도에 떨어지지 않으며 세상에서마다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고 항상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게 되나니, 이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온갖 세간에서 마땅히 공양해야 한다.
또한 부처님은 처음에 사리로써 염부제에 가득 찬 것을 말씀하시고 제석은 이미 두 가지 일에 대한 승부(勝負)를 깨쳤지만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더더욱 삼천대천세계에 이르기까지 넓히면서 여기에 대하여 스스로 그 인연을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을 보는 것과 부처님을 뵙는 것은 똑 같아서 다름이 없다.”라고 한다.
【경】 “다시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세 가지 일[三事]의 시현(示現)에 머물러 12부경(部經)인 수다라(修多羅)ㆍ기야(祇夜)에서 우바제사(優婆提舍)까지를 말씀하시고, 다시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고 독송하고 해설한다면 이 두 가지는 똑 같아서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세 가지 일의 시현과 12부경의 수다라로부터 우바제사까지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세 가지 일의 시현에 머물러 12부경의 수다라로부터 우바제사까지를 말씀하시고, 다시 어떤 사람이 반야바라밀을 받고서 다른 사람에게 연설한다면 이 두 가지는 똑 같아서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모든 부처님이 나오시고 또한 12부경의 수다라로부터 우바제사까지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이가 시방으로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꽃과 향 내지 번기와 일산으로 공양하고, 다시 어떤 사람이 반야바라밀의 경전을 서사해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꽃과 향 내지 번기와 일산으로 공양하면 그 복은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은 모두가 반야바라밀 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반야바라밀을 듣고서는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바르게 기억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연설하면 이 사람은 지옥의 갈래나 축생의 갈래나 아귀의 갈래에 떨어지지 않으며 또한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바로 아비발치(阿毘跋致)의 지위 안에 머물러 있으며 이 반야바라밀은 온갖 고뇌와 쇠약과 질병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반야바라밀의 경전을 서사해 받아 지니고 친근하면서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한다면, 이 사람은 모두 두려움을 여의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비유컨대 마치 빚을 진 사람이 국왕을 친근히 해서 그 좌우(左右)에게 재물을 바쳐 놓으면 빚을 준 사람이 도리어 그 사람을 공양하고 공경하게 되며 그 사람은 다시는 두려움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국왕을 가까이하고 의뢰하면서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아서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의 사리는 이 반야바라밀의 훈수(薰修) 때문에 공양과 공경을 얻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은 마치 국왕과 같고 사리는 마치 빚쟁이와 같다고 아는 것입니다. 빚쟁이는 왕을 의지하는 까닭에 공양을 얻게 되고 사리는 또한 반야바라밀의 훈수를 의지하는 까닭에 공양을 얻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의 일체종지도 또한 반야바라밀의 훈수 때문에 성취하게 된다고 알게 됩니다. 이 때문에 세존이시여, 두 몫의 가운데에서 저는 반야바라밀을 취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의 가운데에서 모든 부처님의 사리와 32상(相)이 나오며 반야바라밀의 가운데에서 또한 부처님의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지(無礙智)와 18불공법(不共法)과 대자대비(大慈大悲)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의 가운데에서 다섯 가지의 바라밀이 나와 바라밀(波羅密)이라는 이름을 얻게 하며 반야바라밀의 가운데에서 모든 부처님의 일체종지가 나오나이다.
다시 세존이시여, 어디에든 삼천대천세계 안에 만일 어떤 이가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고서 공양하고 공경하고 찬탄하면 이곳에는 사람이나 사람 아닌 이[非人]가 그의 틈을 얻을 수 없으며, 이 사람은 점차로 열반을 얻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큰 이익이 됨이 이와 같아서 삼천대천세계 가운데에서 불사(佛事)를 능히 짓나이다.
세존이시여, 어느 곳이든 반야바라밀이 있으면 곧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 됩니다. 세존이시여, 비유컨대 마치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마니보(摩尼寶)가 있는 곳이면 비인(非人)이 그 틈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어떤 남자나 여인이 열병(熱病)에 걸렸을 때에 이 마니보를 그의 몸 위에 놓으면 열병이 즉시 낫게 되고 만일 풍병(風病)이 걸렸거나 냉병(冷病)이 걸렸거나 열병ㆍ풍병ㆍ냉병이 한 데 합친 병이 걸렸거나 간에 이 마니보를 그의 몸 위에다 놓으면 모두 다 곧 낫습니다.
또한 어둠 속에서는 이 보주(寶珠)가 밝게 하고 더울 때에는 시원하게 하며 추울 때에는 따뜻하게 하므로 이 보주가 머무르고 있는 그 땅은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서 기후가 온화하고 꼭 알맞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또한 여러 독이 있는 벌레도 없으며, 만일 어떤 남자나 여인이 독사에게 물리면 이 보주를 그에게 보이기만 하여도 독이 곧 없어져 버립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남자나 여인이 눈이 아프거나 흐리거나 어둡거나 소경이 되면 이 보주를 그에게 보여 주면 즉시 나아버리며 또한 어떤 이가 나병에 결려 악성 종기가 생겼어도 이 보주를 그의 몸 위에 다 놓으면 병이 곧 나아버립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이 마니보가 물속에 있으면 그 물은 그것에 따라 한 빛깔이 됩니다. 만일 청색 물건으로 싸서 물속에 넣으면 물의 빛깔이 곧 청색이 되고 만일 황색이나 적색이나 백색이나 옥색의 물건으로 싸서 물 곳에 넣으면 물을 그 빛깔에 따라 화색이나 적색이나 백색이나 옥색으로 되나니,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빛깔의 물건으로 싸서 물속에다 넣으면 그 물은 그의 빛깔에 따라 갖가지의 빛깔로 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물이 흐릴 때에 이 보주를 물속에 다 넣으면 그 물이 이내 청정하게 되나니, 이 보주의 덕이 이와 같습니다.”
그때에 아난이 석제환인에게 물었다.
“교시가여, 이 마니보는 천상의 보배입니까? 아니면 염부제의 보배입니까?”
석제환인이 아난에게 대답했다.
“이것은 천상의 보배입니다. 염부제의 사람에게도 이런 보배가 있습니다만 단지 공덕의 모양이 적어서 온전하지 못할 뿐이며 천상의 보배는 청정하고 가볍고 묘하여 비유로써는 견줄 수 없습니다.”
다시 석제환인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다시 세존이시여, 이 마니보를 만일 상자 안에다 넣어 두면 보주에서 그의 공덕이 나와 상자에 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가 사랑하고 공경하게 됩니다.
그와 같아서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쓴 경전이 있는 이곳에는 뭇 고뇌의 환난이 없사오니, 또한 마치 마니보를 놓아 둔 곳에 뭇 환난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사리가 공양을 얻는 것은 모두가 반야바라밀의 힘이며, 선바라밀에서 단바라밀까지와 내공에서 무법유법공까지와 4념처로부터 18불공법까지와 일체지와 법상(法相)ㆍ법주(法住)ㆍ법위(法位)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ㆍ불가사의성(不可思議性) 및 일체종지라는 이 모든 공덕의 힘입니다.
선남자ㆍ선여인은 생각하기를, ‘이 부처님의 사리는 일체지와 일체종지와 대자대비로써 온갖 결사(結使)와 습기(習氣)가 끊어져 항상 평등[捨]을 행하며 그릇되지 않는 법[不錯謬法] 등 모든 부처님의 공덕이 머무르는 곳이다.’고 하나니, 이 때문에 사리는 공양을 얻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는 곧 모든 공덕의 보배입니다. 바라밀이 머무르는 곳은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바라밀이 머무는 곳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바라밀은 들어가지도 않고 나오지도 않으며 바라밀은 더 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며 바라밀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나니, 바라밀은 곧 부처님의 사리이며 이는 모든 법상(法相)의 바라밀이 머무르는 곳이요 이는 모든 법상의 바라밀로써 훈수(薰修)하는 까닭에 사리는 공양을 얻게 됩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사리는 차치(且置)하고,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세계에 가득 찬 사리를 한 몫으로 치고 다시 어떤 사람이 쓴 반야바라밀의 경전을 한 몫으로 친다 하면 이 두 몫의 가운데에서 저는 반야바라밀을 취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의 가운데에서 모든 부처님의 사리가 나오며 이 반야바라밀의 훈수 때문에 사리는 공양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사리를 공양하면서 그 공덕을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 그의 과보는 그의 끝을 얻을 수 없으며, 인간 안에서 천상의 복락(福樂)을 받게 되오니, 이른바 찰리의 큰 성바지와 바라문의 큰 성바지와 거사의 큰 집안과 사천왕천에서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서 받는 복락이 그것입니다. 또한 이런 복덕의 인연 때문에 당연히 괴로움도 다하게 됩니다.
만일 이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고서 읽고 외고 해설하며 바르게 기억하면 이 사람은 선바라밀을 완전히 갖추고 나아가 단바라밀까지를 완전히 갖추며 4념처를 완전히 갖추고 나아가 18불공법까지를 완전히 갖추며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벗어나서 보살의 지위에 머무르게 됩니다.
보살의 지위에 머무른 뒤에는 보살의 신통을 얻으며 한 부처님의 세계로부터 또한 다른 부처님의 세계에 이르면서 이 보살은 중생들을 위하여 몸을 받아 그들의 알맞은 바에 따라 중생을 성취하니, 전륜성왕이 되기도 하고 또한 찰리의 큰 성바지가 되기도 하며 또는 바라문의 큰 성바지가 되기도 하면서 중생을 성취합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저는 경솔하고 오만하여 공경하지 않으면서 일부러 사리를 취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 선남자ㆍ선여인은 반야바라밀을 공양하면 곧 사리에 공양한 것이 됩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어떤 사람이 시방의 한량없는 아승기의 모든 세계 안에 현재 계신 모든 부처님의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을 뵙고자 하면 이 사람은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듣고 받아 지니면서 읽고 외고 바르게 기억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널리 연설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선남자ㆍ선여인은 당연히 시방의 한량없는 아승기의 세계 안에 모든 부처님의 법신과 색신을 뵙게 될 것이며,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또한 법의 모양[法相]으로써 염불삼매(念佛三昧)를 닦아야 합니다.
다시 선남자ㆍ선여인은 현재 계신 모든 부처님을 뵙고자 하면 이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고 또한 바르게 기억해야만 합니다.”
【논】 해석한다.
또한 부처님은 세 가지 일의 시현(示現)에 머무르며 12부경(部經)을 말씀하신다.
【문】 온갖 설법하는 사람 가운데에서는 부처님과 같을 이가 없으며, 부처님께서 12부경을 말씀하시면 두루 갖추지 않음이 없거늘 어떻게 선남자가 단지 반야를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는 것만으로 부처님과 똑 같아서 다름이 없다고 하는가?
【답】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은 반야를 찬탄하면서 가장 위대하다고 하기 위하여 “12부경 가운데에서 반야가 가장 뛰어나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을 해설하면 거의 모두가 보살의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12부경을 말씀하시면 함께 3승(乘)의 뜻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다.
보살의 공덕으로서 부처님의 한량없는 몸[無量身]에 비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법신(法身)보살은 단지 반야만을 해설하면서 대승(大乘)을 권유하고 인도하거니와 부처님은 여러 가지를 함께 말씀하시면서 3승(乘)을 권유하고 인도하기 때문에 똑같아서 다름이 없다고 설명한 것이다.
또한 세 가지 일의 시현과 12부경의 근본이 이른바 반야바라밀이니,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과 다시 어떤 이가 반야의 경전에 공양하는 것도 역시 똑같아서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반야가 복덕이 뛰어나다는 까닭을 말씀하시면서 이른바 “반야는 온갖 고뇌(苦惱)와 쇠병(衰病)과 두려움[怖畏]을 깨뜨리는 것이 마치 빚을 진 사람이 왕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왕은 반야에 비유하고 빛을 진 사람은 사리에 비유하고 있다.
사리는 바로 전생에 업의 인연으로 이루어지며 인연 가운데에서는 마땅히 모든 상대[對]를 갚아야 하나 반야바라밀로써 훈수한 까닭에 전생에 지은 인연의 모든 상대와 그리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춥고 더운 일들을 얻지 못하면서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들의 공양을 받게 되는 것이 마치 빚을 진 사람이 왕에게 의지하고 있으므로 도리어 빚쟁이의 공경을 받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먼저 모든 쇠병과 두려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안[內]을 밝히는 것이요 지금 마니보는 사람이나 사람 아닌 이가 틈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바깥[外]을 밝히는 것이다.
이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공양하기 때문에 이 세상과 뒷세상에 몸의 쇠약과 마음의 병이 모두 다 없어져서 모든 착한 소원과 일이 뜻대로 다 되며 이 반야바라밀의 큰 보배를 얻었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이 없고 모자라는 바가 없는 것이 마치 값을 매길 수도 없는 보주(寶珠)로써 소원을 모두 얻는 것과 같다.
【문】 마니보주(摩尼寶珠)는 파리(頗梨)와 금(金)과 은(銀)과 자거[車𤦲]와 마노(瑪瑙)와 유리(琉璃)와 산호(珊瑚)와 호박(琥珀)과 금강(金剛) 등의 가운데에서 어떤 보배에 해당하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보주는 용왕의 뇌(腦) 안에서 나오며 사람이 이 보주를 얻으면 독이 해칠 수 없고 불에 들어가도 태울 수 없나니, 이와 같은 공덕이 있다.”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제석천왕이 가지고 있는 금강(金剛)인데, 아수라와 싸울 때에 부서진 것이 염부제에 떨어진 것이다.”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과거 오래 전 여러 부처님의 사리인데, 법이 이미 멸망하게 되자 사리가 변하여 이 보주로 되어서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중생의 복덕의 인연 때문에 저절로 이 보주가 있게 된 것이다. 마치 죄의 인연 때문에 지옥 가운데에서 저절로 죄를 다스리는 기구가 있게 되는 것과 같다.”라고 한다.
이 보주의 이름을 여의(如意)라 하고 일정한 형상은 없으며, 맑고 사무치고 가볍고 묘하여서 사천하(四天下)의 물건들이 모두 다 환히 나타난다.
여의주(如意珠)라는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아서, 이 보주는 항상 온갖 보물과 의복과 음식 등을 바라는 바대로 모두 다 그에게 주며 또한 모든 쇠뇌(衰惱)와 병고(病苦) 등을 없애 준다.
이 보주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천상의 여의보주가 있고 인간의 여의보주가 있다. 모든 하늘들은 복덕이 후(厚)하기 때문에 보주의 덕도 완전히 갖추었지만 사람들은 복덕이 박(薄)하기 때문에 보주의 덕을 완전히 갖추지 못했다.
이 보주를 방사(房舍)에나 상자 안에 넣어 두면 그 곳에도 또한 위덕이 있게 된다.
“반야바라밀도 또한 그와 같다.”라고 함은, 마치 여의보주가 집에 있는 사람[在家人]에게 그의 바라는 바대로 부귀와 즐거움을 주는 것처럼, 반야바라밀은 출가하여 도를 구하는 사람에게 그의 원하는 대로 3승으로써 해탈하는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여의보주가 있는 곳에는 사람 아닌 이가 그의 틈을 얻을 수 없듯이 반야바라밀도 또한 그와 같아서 수행하는 이의 마음과 상응하여 나쁘고 삿된 나찰(羅刹)이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도의 뜻을 무너뜨리거나 지혜의 생명을 빼앗을 수가 없다.
또한 반야바라밀이 있는 곳에는 악마나 악마의 백성이나 지신(地神)ㆍ야차(夜叉) 등의 모든 나쁜 귀신들이 그의 틈을 얻을 수가 없다.
여의보주는 사백네 가지 병(病)을 없애 주며 그의 근본은 네 가지의 병이니, 풍병(風病)과 열병(熱病)과 냉병(冷病)과 이 세 가지 병이 합친 병[雜病]이다.
반야바라밀도 또한 8만 4천의 병을 없애 주며 그 근본이 되는 병은 네 가지의 병이니, 탐냄[貪]ㆍ성냄[瞋]ㆍ어리석음[癡]과 이 세 가지가 함께 합친[等分] 병이다.
음욕의 병을 분류하면 2만 1천 가지의 병이 있고, 성내는 병도 분류하면 2만 1천 가지의 병이 있으며, 어리석은 병도 분류하면 2만 1천 가지의 병이 있고, 세 가지가 합친 병[等分病]도 분류하면 2만 1천 가지의 병이 있다.
부정관(不淨觀)으로써는 탐욕을 없애고 자비관(慈悲觀)으로써는 성냄을 없애며 인연관(因緣觀)으로써는 어리석음을 없애고 위의 세 가지 약을 다 합쳐서 혹은 부정관으로 혹은 자비관으로 혹은 인연관으로써 세 가지를 합친 병을 없애는 것이다.
마치 여의보주가 어두운 것을 없애 주듯이 반야도 또한 그와 같아서 삼계(三界)의 어두운 것을 없애 주며 마치 여의보주가 뜨거운 열을 없애 주듯이 반야도 그와 같아서 음욕이 뜨거운 열과 성을 내는 열을 없애 준다.
마치 여의보주가 찬 냉(冷)을 없애 주듯이 반야도 또한 그와 같아서 무명(無明)과 불신(不信)과 공경하지 않는 것과 게으름 등의 냉한 마음을 없애 준다.
해와 달은 모두가 모든 보배로 이루어지며 해는 뜨거운 열을 내고 달은 찬 냉기를 내면서 비록 다 같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한다고 해도 둘을 다 겸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여의(如意)라고는 이름하지 않는다.
여의보주가 있는 곳에는 독사 등의 모든 나쁜 벌레가 침해할 수 없으며, 반야도 또한 그와 같아서 탐욕 등의 독이 병들게 할 수가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독사에게 물렸을 때에 이 보주를 가져다 그에게 보여 주면 즉시 낫게 되며 어떤 사람이 탐욕 등의 독사에 물려 있을 때에도 반야바라밀을 얻으면 탐욕과 성냄의 독은 즉시 제거되나니, 마치 난타(難陀)와 앙군리마라(鴦群梨摩羅) 등과 같다.
어떤 사람이 눈병이 나고 소경이 되었을 때에 이 여의보주를 그에게 보여 주면 곧 바로 나아버리며 반야바라밀도 또한 그와 같아서 어떤 사람이 무명(無明)과 의회(疑悔)와 뒤바뀜[顚倒]과 삿된 견해[邪見] 등으로써 혜안(慧眼)을 깨뜨릴 적에 반야를 얻으면 바로 그때에 분명하고 똑똑하게 된다.
마치 사람이 나병이나 악성 종기가 생겼을 때에 여의보주를 그에게 보여 주면 곧 바로 나아버린다. 반야도 또한 그와 같아서 5역죄(逆罪)의 나병에 반야를 얻으면 곧 바로 나아버린다.
마치 갖가지 빛깔로써 여의보주를 싸서 물속에다 넣으면 그에 따라 한 빛깔이 되는 것처럼, 반야도 또한 그와 같아서 수행하는 이가 반야의 힘을 얻기 때문에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집착하는 데가 없으며, 신수(信手)의 5근(根) 등을 따르고 또한 4선(禪)과 4무량심(無量心)과 배사(背捨)와 승처(勝處)와 온갖 입(入)을 따르게 되며, 또한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의 경지에 대해서도 따르고 두루 배우면서 어기는 일이 없다.
여섯 번째의 “옥색[縹色]”이라 함은 바로 허공의 빛깔이다. 수행하는 이가 반야를 얻어 모든 법공(法空)을 관찰하면서 마음도 또한 따르며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의 것으로 모든 법에 들어가며 모두를 따르면서 장애가 없다.
마치 물이 혼탁하고 여러 가지 뒤섞인 빛깔이며 깨끗하지 못할 때에 이 여의보주를 그 안에다 넣으면 모두가 청정해지면서 한 빛깔로 되는 것처럼, 반야도 또한 그와 같아서 사람에게 갖가지의 번뇌와 삿된 견해와 희론과 마음이 요란하고 혼탁함이 있을 때에 반야를 얻으면 곧 청정한 한 빛깔이 되나니, 마치 여의주에서 한량없는 공덕이 있는 것처럼 반야의 공덕도 또한 그와 같다.
이제는 각각의 모양[別相]으로 반야의 공덕을 설명하겠다.
이 여의주(如意珠)는 단지 나쁜 귀신만을 제거할 수 있고 악마의 하늘은 파괴할 수 없거니와 반야는 곧 이 두 가지의 일을 모두 제거할 수 있으며 이 여의주는 몸의 병은 다스릴 수 있으나 반야는 몸과 마음의 병을 모두 다스릴 수 있다.
이 여의주는 사람과 귀신이 다스릴 수 있는 병을 다스릴 수 있거니와 반야는 온갖 하늘과 용과 귀신들이 다스릴 수 없는 병도 다스릴 수 있으며 이 여의주는 세상에서마다 일찍이 다스렸던 병을 다스릴 수 있거니와 반야는 끝없는 세계로부터 일찍이 다스리지 못했던 병들을 다스릴 수 있나니,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의 차별이 있다.
이 여의주는 그가 머무르고 있는 처소에서 밤을 환히 비출 수 있으나 반야는 온갖 번뇌와 상응무명(相應無明)의 어두움과 그리고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온갖 법 가운데에서 분명하지 않은 어리석음의 어두움을 환히 비출 수 있다.
이 여의주는 단지 머무르고 있는 곳의 더운 열만을 파괴할 수 있고 그 밖의 다른 곳의 열은 파괴할 수 없으나 반야의 힘은 이에 한량없는 세계가 겁(劫)이 다할 때의 큰 불에 이르기까지도 한 번 불어서 끌 수 있거늘 하물며 한 곳에 있는 더운 열이겠는가?
이 여의주는 단지 형질(形質)이 있는 불과 해의 열만을 제거할 수 있으나 반야는 3독(毒)의 마음의 열을 제거할 수 있으며 이 여의주는 바람과 비와 추위와 눈의 찬 것만을 제거할 수 있고 반야는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의 중생들을 믿지 않고 공경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등의 찬 것을 제거할 수 있다.
이 여의주는 바깥의 독을 가지 벌레만을 물리칠 수 있고 4대(大)의 독사는 제거할 수 없거니와 반야는 마침내 이 두 가지의 독을 다 제거할 수 있으며 이 여의주는 삿된 견해[邪見]의 독을 제거할 수 없으나 반야는 제거할 수 있다.
이 여의주는 육안(肉眼)을 다스릴 수 있으나 반야는 혜안(慧眼)을 다스릴 수 있으며 이 여의주는 가까이 보는 눈을 다스릴 수 있으나 반야는 먼 데까지 보는 눈을 다스릴 수 있으며 이 여의주는 육안만을 다스릴 수 있고 육안을 여의주로 만들지는 못하나 반야는 혜안을 다스릴 수 있고 혜안은 곧 반야를 만든다.
이 여의주는 육안을 다스린 뒤에도 그 병이 다시 재발하게 되지만 반야는 혜안을 다스리고 나면 마침내 청정하며 이 여의주는 나병과 악성 종기를 다스릴 수 있지만 반야는 몸의 나병과 마음의 나병도 다스릴 수 있다.
【문】 네 가지의 병 가운데에서는 온갖 병이 다 포섭되거늘 무엇 때문에 눈병과 나병을 따로 말씀하시는가?
【답】 눈은 몸 가운데에서 제일 소용이 많고 가장 귀히 여기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따로 말씀하시며, 모든 병 가운데에서 나병은 가장 중병이요 전생에 지은 죄의 인연 때문에 치료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이 때문에 다시 말씀하신다.
이 여의주는 물로 하여금 그것을 싸고 있는 빛깔을 따르게 할 수 있지만 반야는 마음에 속한[心數] 착한 법을 따르게 할 수 있으며, 이 여의주는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지만 반야는 온갖 중생들의 심성(心性)에서 좋아하는 바와 바라는 바를 바꿀 수 있다.
이 여의주는 놓아 둔 곳의 흐린 물을 맑게 할 수 있지만 모든 물까지 맑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반야의 힘은 6각(覺)의 흐린 마음을 즉시 청정하게 할 수 있으며, 또한 모든 용왕과 귀신의 왕과 사람의 왕 등의 탐욕과 성내는 흐린 마음도 청정하게 할 수 있다.
이 여의주는 넣어 둔 상자나 방사(房舍)에 위덕이 있게 할 수 있지만 반야의 힘은 시방의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는 위덕이 있게 하며 이 여의주의 공덕의 힘은 상자 안에 들어가면 상자 안에서 사람들의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공덕이 없지만 사리(舍利)는 반야의 훈수(薰修)를 얻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공양하면 반드시 반야를 얻으면서 성불하게 된다.
이 상자는 범부들이 귀히 여기고 사리는 범부와 성인이 다 귀히 여기며, 상자는 세간에서 쾌락을 받는 사람들이 귀히 여기고 사리는 출세간과 세간에서 쾌락을 받는 사람들이 귀히 여긴다.
반야는 여의보주요 상자는 사리이니, 사리 가운데에 비록 반야가 없다 하더라도 반야에 훈수되기 때문에 공양을 얻는다.
또한 모든 성인의 법 가운데에서는 반야가 제일이어서 비유할 만한 것이 없지만 세간 사람들이 이 여의보주를 귀히 여기기 때문에 이 여의주로서 비유를 삼는다.
사람들은 여의보주를 보면 소원을 모두 얻고 또한 여의주가 머무르고 있는 데만을 보아도 역시 조그마한 소원은 성취하게 된다. 수행하는 이도 그와 같아서 이 반야바라밀의 이치를 얻으면 곧 부처님 도에 들어가며 또한 반야가 머무르고 있는 사리를 보아도 공양하기 때문에 금세와 후세의 한량없는 복락을 얻게 되고 오래 되면 반드시 도를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전체의 모양[總相]과 각각의 모양[別相]으로 알아야 한다.
【문】 반야에 만일 이와 같은 공덕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사리는 바로 다섯 가지 바라밀 내지 일체종지까지 머무르는 데이기 때문에 공양을 얻는다.”라고 말씀하시는가?
【답】 먼저 이미 설명하기를, “모든 법은 반야바라밀이 우두머리가 되어서 광명이 되고 길잡이가 되는 것이 마치 왕이 올 적에는 반드시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단지 그 왕의 이름만을 들어서 말하여도 그 밖의 수행하는 이들은 그 안에 모두 포함되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반야바라밀을 찬탄한다는 이 이치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경】 “다시 세존이시여, 두 가지의 법 모양[法相]이 있으니, 유위(有爲)의 모든 법 모양과 무위(無爲)의 모든 법 모양입니다.
무엇을 유위의 모든 법 모양이라 하는가? 이른바 내공(內空) 안의 지혜로부터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 안의 지혜까지와 4념처(念處) 안의 지혜로부터 8성도분(聖道分) 안의 지혜까지와 부처님의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지(無礙智)와 18불공법(不共法) 안의 지혜와 선법(善法)의 안과 불선법(不善法)의 안과 유루법(有漏法)의 안과 무루법(無漏法)의 안과 세간법(世間法)의 안과 출세간법(出世間法)의 안의 지혜이니, 이것을 유위의 모든 법의 법 모양이라 합니다.
무엇을 무위의 모든 법의 모양이라 하는가? 만일 법에 생김이 없고 소멸함이 없으며, 머무름이 없고 달라짐이 없으며, 더러움이 없고 깨끗함이 없으며, 더함이 없고 덜함이 없으면 모든 법의 자기 성품[自性]이다. 어찌하여 모든 법의 자기 성품이라 하느냐 하면 모든 법은 있는 바가 없는 성품[無所有性]이 바로 모든 법의 자기 성품입니다. 이것을 무위의 모든 법 모양이라 합니다.”
그때에 부처님께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교시가야,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고 과거의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도 역시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수다원의 도 내지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를 얻었느니라.
미래와 현재 세상의 시방의 한량없는 아승기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요 미래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도 역시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수다원의 도 내지 벽지불의 도를 얻을 것이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의 가운데에서 널리 3승(乘)의 이치를 설명하였지만 모양이 없는 법이기 때문이요 생김도 없고 소멸함도 없는 법이기 때문이요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는 법이기 때문이요 조작도 없고 일으킴도 없으며, 들어가지도 않고 나오지도 않으며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며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 법이기 때문이며 세속의 법을 쓰고 제일의(第一義)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높은 것도 아니고 낮은 것도 아니며, 같은 것도 아니고 같지 않은 것도 아니며,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며, 세간도 아니고 출세간도 아니며, 유루도 아니고 무루도 아니며, 착한 것도 아니고 착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교시가야, 반야바라밀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법을 취하지도 않고 또한 범부의 법을 버리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온갖 중생들의 마음을 알면서도 또한 중생(衆生) 내지 아는 이 [知者]ㆍ보는 이[見者]까지도 얻지 못하고 또한 이 보살도 얻지 못하며 물질[色]도 얻지 못하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도 얻지 못합니다.
눈[眼]과 뜻[意]까지도 얻지 못하고 빛깔[色]과 법(法)까지도 얻지 못하며, 눈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眼觸因緣生受]과 뜻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意觸因緣生受]까지도 얻지 못하고 4념처와 18불공법까지도 얻지 못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얻지 못하고 모든 부처님의 법도 얻지 못하며 부처님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법을 얻기 위하여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며,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의 성품은 있는 바가 없어서 얻을 수가 없고 소용되는 법도 얻을 수 없으며, 처소도 또한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교시가야, 내가 말한바와 같아서 보살마하살은 오랜 세월 동안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보살과 보살의 법이겠느냐?”
그때에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단지 반야바라밀만을 행하고 그 밖의 바라밀은 향하지 않는지요?”
부처님께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보살은 6바라밀을 모두 행하느니라. 얻을 수가 없기[無所得] 때문에 단(檀)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보시하는 이[侍者]를 얻지 못하고 받는 이[受者]를 얻지 못하고 재물(財物)도 얻지 못하며, 시라(尸羅)바라밀을 행하면서도 계율[戒]을 얻지 못하고 계율 지닌 사람[持戒人]을 얻지 못하고 계율을 얻지 못하고 계율을 깨뜨리는 사람[破戒人]도 보지 못하며,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지혜[智慧]를 얻지 못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얻지 못하며 지혜 없는 사람도 얻지 못하느니라.
교시가야, 보살마하살이 보시(布施)를 행할 때에는 반야바라밀이 광명이 되어 주고 길잡이가 되어 주기에 단바라밀을 완전히 갖출 수 있으며 보살마하살이 지계(持戒)를 행할 때에는 반야바라밀이 광명이 되어 주고 길잡이가 되어 주기에 시라바라밀을 완전히 갖출 수 있느니라.。
보살마하살이 인욕(忍辱)을 행할 때에는 반야바라밀이 광명이 되어 주고 길잡이가 되어 주기에 찬제바라밀을 완전히 갖출 수 있으며 보살마하살이 정진(精進)을 행할 때에는 반야바라밀이 광명이 되어주고 길잡이가 되어 주기에 비리야바라밀을 완전히 갖출 수 있느니라.
보살마하살이 선(禪)을 행할 때에는 반야바라밀이 광명이 되어주고 길잡이가 되어 주기에 선바라밀을 완전히 갖출 수 있으며,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諸法]을 관찰 할 때에는 반야바라밀이 광명이 되어 주고 길잡이가 되어주기에 반야바라밀을 완전히 갖출 수 있느니라. 모든 법을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니, 이른바 물질로부터 일체종지까지이니라.
교시가야, 비유컨대 마치 염부제(閻浮提)의 모든 나무에 갖가지의 잎과 꽃과 열매와 빛깔이 있지만 그의 그늘에는 차별이 없는 것처럼, 모든 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의 가운데에 들어가 살바야(薩婆若)에 이르면 차별이 없는 것도 그와 같나니,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큰 공덕의 성취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온갖 공덕의 성취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한량없는 공덕의 성취이고, 끝이 없는 공덕의 성취이며, 같을 이 없는 공덕의 성취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반야바라밀의 경전을 서사해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꽃과 향 내지 번기와 일산으로 공양하고 반야바라밀에서 말씀한 대로 바르게 기억하며, 다시 어떤 선남자나 선연인이 반야바라밀의 경전을 서사해 다른 사람에게 주면 그 복은 어느 편이 더 많겠는지요?”
부처님께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겠으니, 생각나는 대로 나에게 대답하거라. 만일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모든 부처님의 사리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꽃과 향 내지 번기와 일산으로 공양하고, 다시 다른 어떤 사람이 사리를 겨자씨만큼 나누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어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꽃과 향 내지 번기와 일산으로 공양하게 하면 그 복은 어느 편이 더 많겠느냐?”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으로부터 들었던 법의 이치로 만일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스스로 사리에 공양하고 나아가 번기와 일산으로 공양하며, 다시 어떤 사람이 사리를 겨자씨만큼 나누어서 다른 이에게 주어 공양하게 하면 이 사람의 복이 더욱더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이 복이 중생들을 이롭게 한다고 보시기 때문에 금강삼매(金剛三昧) 안에 들어가셔서 금강으로 된 몸을 부수어 가루 사리를 만드셨나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뒤에 부처님의 사리를 겨자씨만큼이라도 공양하게 되면 그 복의 과보는 끝이 없고 괴로움까지도 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교시가야, 만일 선남자ㆍ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의 경전을 서사해 공경하면서 꽃과 향과 또한 번기와 일산으로 공양하고, 다시 다른 어떤 사람이 반야바라밀의 경전을 서사해 다른 사람에게 주어 배우게 하면 이 선남자ㆍ선여인의 복이 더욱더 많느니라.
다시 교시가야, 선남자ㆍ선여인이 반야바라밀 안의 이치 그대로를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해설하고 열어 보이고 분별하면서 알기 쉽게 한다면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앞의 선남자ㆍ선여인의 공덕보다 더 뛰어나니, 반야바라밀을 듣고 나서는 그 사람을 마치 부처님과 같이 보아야 하고 또한 높고 뛰어난 범행의 사람[高勝梵行人]같이 보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이 곧 부처님이어서 반야바라밀은 부처님과 다르지 않고 부처님은 반야바라밀과 다르지 않다고 알아야 하기 때문이니,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은 모두가 반야바라밀 안에서 배워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고 그리고 높고 뛰어난 범행의 사람이 되느니라.
높고 뛰어난 범행의 사람이란 이른바 아비발치(阿毘跋致)이니, 보살마하살은 또한 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하느니라.
성문의 사람도 또한 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아라한의 도를 얻고 벽지불의 도를 구하는 사람도 또한 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벽지불의 도를 얻으며 보살도 또한 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교시가야, 선남자ㆍ선여인이 현재의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꽃과 향 내지 번기와 일산으로 공양하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공양해야 하느니라.
나는 이러한 이익을 보았기에 처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에 생각하기를, ‘그 누구에게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의지하고 머물러야 할까’라고 하였었느니라.
교시가야, 나는 온갖 세간 중에서 하늘과 악마와 범천과 사문과 바라문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이를 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보다 뛰어난 이가 있겠느냐?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얻게 된 법은 저절로 부처님이 되기에 이른다. 나는 이 법을 공양하면서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며 이 법에 마땅히 의지해야 하고 머물러야 한다.’고 하였나니, 무엇이 이 법이냐 하면 이른바 반야바라밀이니라.
교시가야, 나 자신이 이 반야바라밀을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한 뒤에 의지하고 머물렀거늘 하물며 선남자ㆍ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면서 반야바라밀을 공양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며 꽃과 향과 영락 내지 번기와 일산으로써 공양하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중에서 모든 보살마하살이 나오고 모든 보살마하살 중에서 모든 부처님이 나오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교시가야, 선남자ㆍ선여인으로서 부처님 도를 구하는 이나 벽지불의 도를 구하는 이나 성문의 도를 구하는 이는 모두가 반야바라밀을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며 꽃과 향 내지 번기와 일산으로써 공양해야 하느니라.”
【논】
【문】 무슨 인연으로 이 유위법과 무위법의 모양을 말하는가?
【답】 제석은 반야바라밀이 온갖 법을 포섭한다는 것을 찬탄하고 이 가운데에서 인연을 설명하면서, “유위법의 모양[有爲法相]은 이른바 18공(空)과 37품(品)과 18불공법(不共法)까지 포섭한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선(善)ㆍ불선(不善) 등과 세간과 출세간까지이니, 이것을 유위법의 모양이라 한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조작되는 모양이어서 먼저는 없었던 것이 지금은 있고 이미 있었던 것은 다시 없게 되기 때문이니, 위와 반대의 것이 곧 무위법의 모양[無爲法相]이다. 이 두 가지 법은 모두가 반야바라밀 가운데 속한다.
유위의 선법은 바로 행할 곳[行處]이요 무위법은 바로 의지하는 곳[依止處]이나 그 밖의 무기(無記)와 불선법(不善法)은 버리고 여읠 것이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새로이 뜻을 낸 보살이 배울 바이니, 만일 반야바라밀의 방편이 힘을 얻어서 무생인(無生忍)과 상응하게 되면 행하는 법도 사랑하지 않고 버릴 법도 미워하지 않으며, 유위법을 여의지 않으면서 무위법이 있게 된다. 이 때문에 열반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전 안의 반야바라밀을 설명하는 가운데 3승(乘)을 널리 말하면서도 모양이 없는 법[無相法]이기 때문에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 등도 없으며, 세속의 이치[世諦]로써 짐짓 이런 말을 함으로 첫째가는 이치[第一義]도 아니다.
보살은 이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향하면서 비록 모든 중생을 관찰한다 하더라도 마음에서는 역시 중생을 얻지 못하며 비록 온갖 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역시 모든 법을 얻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얻을 바가 없는[無所得] 반야바라밀을 얻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그의 찬탄을 옳다고 하시면서, “보살은 언제나 이 행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를 익히면서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그 밖의 법이겠느냐?”라고 하시자, 제석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되 ‘만일 반야가 곧 마지막 법[究竟法]이라면 수행하는 사람은 오직 반야바라밀만을 행할 뿐, 그 밖의 다른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한다.
부처님은 대답하시되, “반야바라밀의 얻을 바 없는 법으로써 화합하기 때문에 이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만일 단지 반야만을 행하고 다섯 가지 법[五法]을 행하지 않는다면 공덕이 완전하게 갖추어지지 못하며 아름답지 못하고 묘하지도 않다.”라고 하시니, 비유컨대 어리석은 사람이 음식이 여러 가지로 갖추어진 것을 알지 못하고 소금이 모든 맛의 주인이라도 듣고서 순전히 소금만 먹다가 맛을 잃고 병이 드는 것과 같다.
수행하는 이도 그와 같아서 집착하는 마음을 제거하려고 단지 반야만을 행하면 도리어 삿된 견해에 떨어져서 착한 법에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만일 다섯 가지 바라밀과 화합하면 공덕이 완전히 갖추어지고 뜻과 맛이 조화되고 적합하게 된다.
비록 뭇 행이 화합한다 하더라도 반야가 주(主)가 된다. 만일 보시 등의 모든 법에 반야바라밀을 여의면 갖가지의 차별이 있게 되지만 반야바라밀에 이르면 모두가 하나의 모양이어서 차별이 없어진다.
비유컨대 마치 염부제의 아나바달다못[阿那婆達多池]은 네 개의 큰 강[四大河]으로 흐르고 하나의 큰 강마다 5백의 작은 시내가 있으면서 거기로 돌아와 그 모두가 함께 큰 바다로 들어가면 그의 본래의 이름을 상실하면서 합하여 한 맛이 되고 차별이 없는 것과 같다. 또한 마치 수목의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며 뭇 빛깔은 다르지만 그 그늘은 차별이 없는 것과 같다.
【문】 그늘에도 차별이 있다. 나무가 크면 그늘도 크고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며 크고 작은 것이 갖가지로 다르거늘 어떻게 차별이 없다는 것인가?
【답】 빛을 가리기 때문에 그림자가 나타나고 빛이 없는 곳을 바로 그늘이라 하나니, 그늘은 크고 작은 다른 형상으로써 뜻을 삼지 않는다.
【문】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받고 외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는 이런 일들은 어려운 것이요 반야의 경전을 서사해 다른 사람에게 주는 일은 쉬운 것이다. 그 공덕조차도 오히려 같지 않아야 하거늘 어떻게 뛰어나다 하는가?
【답】 혼자 행하면서 읽고 외고 바르게 기억하는 것이 비록 어렵다 하더라도 혹 나라는 마음[我心] 때문에 공덕이 작지만 경전을 다른 이에게 주는 이는 대비(大悲)의 마음이 있고 부처님 도의 인연을 지으면서 나라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공덕이 큰 것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제석에 물으시되, “만일 어떤 사람이 스스로가 사리에 공양하고 다시 다른 어떤 사람이 사리를 다른 이에게 주어서 공양하게 한다면 그 복은 어느 편이 더 많겠느냐?”라고 하시자, 대답하기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 공양하게 하여 복을 얻는 이가 더 많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나니, 나라는 마음이 없고 자비로운 마음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비록 복덕에 관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크게 중생에게 이익이 있다고 보시기에 이 때문에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들어가셔서 스스로 그 몸을 부수시는 것이다.
【문】 만일 복덕이 마음에 있다면 부처님은 어째서 몸을 겨자씨만큼 부수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공양하게 하시는가?
【답】 믿음이 청정한 마음은 두 가지 인연으로부터 생긴다. 첫 번째는 안으로 바르게 기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밖으로 좋은 복전(福田)이 있는 것이다. 비유컨대 마치 좋은 씨앗이 있고 게다가 밭이 좋고 비옥하면 수확이 반드시 많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음이 비록 좋다 하더라도 반드시 사리(舍利)로 인한 뒤에야 큰 과보를 얻는다.
부처님은 이미 그의 말을 옳다 하시면서 다시 스스로 말씀하시되, “어떤 사람이 경전을 서사해 다른 사람에게 주고, 다시 어떤 사람이 대중 가운데에서 그 뜻을 널리 해설한다면 그 복이 앞 사람보다 뛰어나니, 이 사람을 마치 부처님처럼 보고 부처님 다음가는 이로 보야야 한다.”라고 하신다. 부처님 같은 이와 부처님 다음가는 이에 대한 이치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부처님은 두 가지의 인연으로써 반야바라밀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시기를, “첫째는 3세의 성인들이 반야에서 배워서 성인의 도를 이루는 것이요, 둘째는 나도 이법으로써 위없는 성인이 되었다. 나는 이제 도리어 이 법을 스승으로 우러른다. 이 법이란 바로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니, 이른바 반야바라밀이다. 교시가야, 나는 다시는 더 구할 바가 없는데도 오히려 반야를 우러르면서[推尊] 공양하거늘 하물며 선남자들이 갖가지의 공양 거리로써 반야바라밀을 공양하지 않겠느냐?”
이 가운데에서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반야는 바로 보살이 되는 근본 인연이요 보살은 바로 모든 부처님이 되는 근본이며 모든 부처님은 온갖 세간을 크게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는 인연이다.”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성문이나 벽지불의 사람으로서 안온하게 3해탈문(解脫門)에 신속히 들어가고자 하는 이도 오히려 반야바라밀을 공양하거늘 하물며 보살이겠는가?
“공양 거리[供養具]”라 함은, 이른바 한마음으로 듣고 받으며 또한 바르게 기억하는 것이요 그리고 꽃과 향과 또한 번기와 일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