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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빌립보서 제 8 강 메시지_아산UBF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말씀 / 빌립보서 4:10-23
요절 / 빌립보서 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빌립보서의 마지막입니다.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하며 빌립보 성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그는 이 선물을 놓고 자신이 배운 자족의 비결을 고백하고, 성도들의 나눔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해석하며, 그 모든 필요를 채우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편지를 맺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했기 때문에 빌립보 성도들의 선물 속에서 성도들의 사랑이 다시 싹튼 것을 보았고, 그것을 복음의 동역이며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족과 성도의 아름다운 희생과 동역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I. 주 안에서 다시 싹튼 사랑 (10절)
10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도 다른 어느 곳에서 궁핍 할 때도 몇 번이고 사람을 보내 바울을 도왔던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손길이 끊깁니다. 편지는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 이었든 한동안 소식도 없고 도움도 오지 않았습니다.
아무 소식이 없을 때, 그 단절을 어떻게 보느냐는 관점의 문제가 나옵니다. 보통 사람은 대개 이것을 쉽게 단정합니다. "연락이 없다"는 사실위에 "관심이 식었다"는 판단을 더합니다. 사도 바울도 긴 연락두절에 대해서 의문이 생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에바브로디도가 거의 죽을 고비까지 넘기며 빌립보 교인들의 선물을 들고 당도합니다. 이 순간이 전환점입니다. 바울에게는 두 반응이 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 이제야 왔는가, 나를 잊었던 것인가" 되묻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마음은 늘 있었으나 표현할 통로가 없었을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울은 후자입니다.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마음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표현할 기회까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섬길 기회가 없었다고 해서 마음까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의 오랜 연락두절에 대해서 변함없는 신뢰를 가진 것은 이런 이유였습니다.
본문 말씀의 "다시 싹이 남"이란 식물학 용어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겨울 동안 헐벗어 있던 나뭇가지에 봄이 되어 새순이 돋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무는 겨울동안 잎이 없습니다. 나무는 잎이 없는 계절에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봄이 되면 어김없이 새잎을 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연락두절을 겨울 나무 즉, 나무 자체가 살아 있지만 단지 잎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본 것입니다.
한편, 바울이 기뻐한 이유는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까? 바울의 기쁨이 "드디어 도움을 받아서" 생긴 것이면, 결핍이 채워진 데서 오는 일차적 반응일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이유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바울의 감사의 의미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보낸 선물이 바울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인 것은 맞습니다. 바울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쁨을 가진 이유는 바울에게 선물을 보낸 원천이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 안에 살아 있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난 열매입니다. 바울의 기쁨은 "주 안에서" 나타났고 보여진 것에 대한 기쁨입니다.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에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감사를 놓음으로써, 자신이 빌립보서 서신에서 가르친 것을 실천합니다. 아무 소식이 없어도 원망하지 않고, 자기 생활의 결핍 앞에서 흔들리지 않으며, 이제 필요를 채워주는 선물 앞에서 보낸 사람들의 근본 마음을 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볼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반대로 자기에게 집착해 있거나 탐욕에 빠져 있으면 보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많은 용서와 관용을 받고도 스스로 공격받았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에 묻혀 있어서 생기는 일입니다. 반면, 받은 용서에 감격 하고 받은 은총에 감사하면서 불리한 여건 불공평한 일 속에서도 긍정과 희망을 갖고 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관계가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II. 어떠한 형편에도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11-13절)
11절-13절을 보십시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먼저 오해를 막습니다. 궁핍해서, 또는 더 많은 후원을 바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자기 필요가 아니라 자신이 배운 비결입니다.
11절의 "배웠노니"(ἔμαθον)는 지식이나 기술을 습득했다는 뜻입니다. 12절의 "배웠노라"(μεμύημαι)는 어떤 비밀에 입문하여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두 동사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의 자족은 타고난 성격이나 낙천성에서 온 것이라기 보다는 여러 상황과 연단을 통하여 배운 것입니다. 그리하여 12절의 표현과 같이 자족의 비결을 깊이 터득했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은밀하고 특별한 수련법은 아니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자족"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우타르케스'(αὐτάρκης)는 당시 스토아 철학자들이 쓰던 단어입니다. 스토아 철학에서 자족은 외부 조건에 휘둘리지 않는 정신적 자기충족을 뜻했습니다. 바울은 같은 단어를 쓰지만 다른 내용을 채워 넣습니다. 그의 자족은 결핍에 대한 도움을 일절 거절하는 것이나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독립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성도들의 도움을 감사히 받았습니다. 바울의 자족은 자기의 형편이나 외부 환경 조건에 삶의 중심을 빼앗기지 않고 그리스도에게서 힘을 얻는 자유를 말합니다.
바울은 자족을 좀 더 확장시킨 고백을 합니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궁핍은 사람을 낙심과 원망에 빠지게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은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다는 의미로 “Money is coined liberty”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풍부는 교만과 하나님을 잊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먹고 배부르며 재산이 늘어날 때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을 잊을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신명기 8:11-14). 궁핍도 풍부도 믿음을 시험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구절은 많이 본 말씀입니다. 흔히 성공을 보장하는 말씀처럼 인용됩니다. 문맥을 따라 읽으면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은 11-12절에 나열된 형편들, 곧 비천과 풍부, 배부름과 배고픔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고백하는 것은 형편이 좋아지는 성공이 아닙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하는 능력입니다.
"능력 주시는 자"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2:6-8). 하나님은 그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2:9-11). 낮아짐과 높아짐의 모든 길을 걸으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궁핍과 풍부라는 인생의 모든 길에서도 그분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려움을 없애 주시는 분이기 이전에, 어려움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갈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배고픔을 배고픔으로, 궁핍을 궁핍으로 실제로 느꼈습니다. 다만 그 형편이 자신의 믿음과 기쁨의 최종 주인이 되도록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좋은 환경에 있고 많은 돈을 가져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소유를 가진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여깁니다. 많은 소유를 가졌지만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관계와 상황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소유가 부족하고 환경이 열악하여도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것, 하나님의 은총이 늘 함께 하는 것이 보여서 안도와 평안을 가집니다.
은샘이가 어릴 때, 아빠 닮은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왜 그렇게 여기냐고 물어보니, 아빠가 잘 나가서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문제는 그 때가 제가 가장 비참하고 어려운 때였습니다. 저의 입에서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도우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앞으로 크게 쓰신다’ 이런 말이 계속 나왔습니다. 늘 그런 말을 한 것이 사실인데, 저의 딸은 제가 고난을 괴로워하고 어려운 상황을 한탄하거나 미래를 두려워하는 말이 나오는 것을 듣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견고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연락 없음에도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자신의 결핍과 부족에도 자족을 가진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도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가져서 의심, 불안, 두려움, 불평을 멀리하는 자족과 평강의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III. 복음의 동역이며 향기로운 제물 (14-19절)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바울은 자신의 자족을 말한 후 나눔과 섬김을 실천한 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인사를 빼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자족한다는 말이 성도들의 섬김을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나눔을 칭찬합니다. 자족과 동역은 서로 대립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만을 궁극적인 의지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사람의 도움을 우상화하지도 않았고, 무시하지도 않고 감사하며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함께 참여하였다"(συγκοινωνέω)는 빌립보서에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교제·나눔)와 같은 어근의 동사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해 온 교회였습니다(1:5). 빌립보 성도들은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된 사도 바울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사회적 위험을 기꺼이 무릅썼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괴로움을 함께 짊어졌습니다.
15-16절은 그 섬김과 나눔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보여 줍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역 안에 있는 도시입니다. 바울이 복음 전파 초기에 데살로니가에 머물 때부터, 빌립보 교회는 두 번이나 그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그가 그 지역을 완전히 떠난 뒤에도 빌립보 교회만 사도 바울과 "주고받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바울이 영적 유익을 나누어 줄 때 빌립보 성도들은 물질의 필요를 채워주며 동역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그가 바란 것은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이 자라 하나님 앞에 열매로 쌓이는 것이었습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바울입니다. 하지만 그 선행을 통해 영적 유익을 얻는 사람은 빌립보 성도들입니다.
18절 전반부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자족은 도움을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다른 사람의 섬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했습니다. 동시에 빌립보 성도들의 선물이 자신의 필요를 실제로 풍족하게 채웠음을 인정하고 감사했습니다.
바울은 그 선물을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에서 "향기로운 냄새"라는 표현은 성막에서 드리는 번제와 소제뿐 아니라 화목제에도 쓰였습니다(레위기 3:5, 16). 빌립보 성도들은 선물을 바울의 손에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담긴 믿음과 사랑을 자신에게 드려진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고 필요를 채우는 나눔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필요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자신을 돌보아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도 풍성하게 돌보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 약속은 우선 그들의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필요와 관련됩니다. 하나님이 채우시는 기준은 인간의 욕망이나 헌금의 액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함 입니다.
복음의 동역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만의 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의 형편을 살피고, 그의 필요와 고난을 기도와 물질로 함께 담당하는 것도 복음 사역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2018년까지 우리센터는 센터 운영이 물질적으로 어려웠습니다. 항상 어려웠습니다. 2018년 가을부터 우리센터는 재정상태가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이 때, 별도로 한 목자님이 목돈을 헌금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까이에 와 있는 다른 큰 센터 목자 가정의 어려움을 위하여 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 센터는 서울에서도 큰 센터인데도 매우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섬기는 이 분들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 분들이 그동안 우리의 사역을 정말 많은 면에서 돕고 동역해 왔습니다. 양들을 위한 희생의 양을 따진다면 우리가 행한 희생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희생을 우리센터 양들 위해서 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런 사람의 필요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울 때 도리어 우리에게 얼마나 크고 은혜로운 보답으로 돌아오는지 실제로 배운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IV.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은혜로 마치다 (20-23절)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바울은 편지를 마치며 송영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성도들의 사랑, 바울의 자족,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 하나님의 공급, 이 모든 이야기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은 한 아버지를 모신 한 가족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고 부탁합니다. 바울은 공동체를 하나의 덩어리로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문안을 전합니다.
22절에는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 사람이 문안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가이사의 집 사람들’이란 황제의 친족으로 보기 쉬운데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가이사의 행정과 재산에 속한 노예나, 해방노예, 관리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봅니다. 바울의 매임은 시위대 안과 여러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1:12-14). 그 열매가 편지의 마지막 인사말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눈에 불리해 보이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은 복음을 전진 시키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빌립보 교회를 세운 것도, 그들을 복음에 참여하게 한 것도, 고난 중에도 기뻐하게 한 것도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였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결심과 능력으로 신앙생활을 완성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어떤 선행도 자랑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오늘 우리는 옥에 갇힌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다시 싹튼 것을 보며 주 안에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는 이미 비천과 풍부, 배부름과 배고픔, 그 어떤 형편에서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빌립보서 4:10).
우리도 각자의 형편 속에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쁨은 지금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의 형편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자족하기를 배우고 있습니까. 내게 맡겨진 물질과 시간과 은사로 누구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각 사람이 어떠한 형편에서도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받은 은혜를 나눔으로 복음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모든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산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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