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문 >
우크라이나에 사는 우리 고려인 동포의 현황과 러시아 침공에 대응하는 우크라이나 국민성을 좀 더 살펴보고,
크림반도와 관련된 ‘얄타 회담’의 배경과 문호 톨스토이, 시인 푸시킨, 소설가 체호프 등에 관한 얘기도 전해봅니다.
유명한 ‘마산드라’ 와이너리와 가장 비싼 와인 가격도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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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토폴 6 (작전 전야)
“쌀밥을 좀 지을 걸 그랬나요?”
주인장이 창선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쌀밥은 매일 먹는걸요. 완전 우크라이나 전통음식을 맛보고 싶었는데, 아주 잘 됐습니다. 좋습니다.”
창선이 식탁 위에 차려지는 음식을 둘러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크림반도의 바닷가 구석진 시골 마을.
은밀히 잠수정 기지를 마련했는데 마침 집주인이 고려인이다.
우크라이나에 고려인이 1만2천 명 정도 살고 있다고 한다.
다른 구소련 연방국들의 고려인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위해 스스로 조국을 등졌거나 2차대전 때 일본에 의해 강제 징용에 끌려왔다가 해방을 맞이하고도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하게 된 우리 조선족 동포의 후손들이다.
러시아 흑해함대가 주둔하고 있는 세바스토폴 항구에서 북서쪽으로 100Km 거리에 있는 ‘스테파냐’라는 작은 마을인데, 고려인 주인장은 관광 여행객을 상대로 소위 민박집을 운영하면서 타국 땅에서의 힘겨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창선은 이란에 나와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 사장이고, 회사의 한국인과 이란인 직원들이 단체 휴가로 크림반도에 1주일 관광여행을 나온 것으로 얘기되었고, 민박집 한 채를 통째로 빌렸다.
전체 직원 50여 명은 내일 도착할 예정이고 선발대로 어제 온 창선과 데킨, 괴닐과 운전병 두 명이 주인장이 차려주는 저녁 식사에 합석하고 있다.
오늘 낮에 창선 일행은 러시아 흑해함대가 주둔하고 있는 세바스토폴 항구를 둘러보고 왔다.
내일 새벽에 전체 대원들이 멀리 압하지야 공화국의 알락해치에서 잠수정을 타고 와서 몰래 상륙하면, 낮 동안 이곳 거처에 숨어서 휴식을 취하며 기다렸다가 밤중에 세바스토폴 항구로 잠입해서 러시아 함정을 습격할 예정이다.
크림반도는 ‘크림 자치공화국’의 수도가 된 심페로폴에서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까지 철도로 연결되는 국제적인 관광 휴양지이다.
하늘과 바다, 크림산맥이 그림처럼 어우러진 해변에는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비는데 주로 러시아인들이 많이 찾는다.
크림반도의 남쪽 해안은 세바스토폴을 비롯한 페오도시아, 수다크, 얄타 등의 관광 휴양도시가 즐비하다.
얄타는 독일의 패망이 짙어진 1945년 2월에 전후 문제에 대한 사전 논의를 위해 영국, 미국, 소련의 수뇌부가 모여 ‘얄타 회담’을 벌인 장소로 잘 알려진 바로 그곳이다.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소련의 스탈린이 만난 그 얄타회담에서 우리 한반도의 남북분단은 이미 운명적으로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때는 연합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해서 일본을 항복시키는 전투가 심각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소련의 대일전쟁 참전이 필요했고, 그 대가로 소련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게 되었다.
나중에 예상치 못한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은 상륙전을 벌일 필요도 없이 항복하고 말았지만, 소련은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얄타회담 약속대로 우리 한반도 북쪽 절반을 차지하고 만 것이다.
얄타회담이 열렸던 리바디아 궁전은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여름 궁전이었지만 스탈린 시대에는 요양소로 쓰이기도 했다. 궁전에서 바라보는 흑해는 가슴을 뻥 뚫리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장관이다.
얄타의 언덕에는 단편소설의 거장 ‘안톤 체호프’가 폐결핵으로 고생하며 죽기 전에 5년간 살았던 집이 있다.
배우였던 부인은 모스크바에 있었고 이곳에서는 어머니와 누이들이 살았는데, 의사이기도 했던 체호프는 이웃을 돌보면서 이곳 2층에 있는 서재에서 ‘벚꽃 동산’을 집필했다.
또한 위대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머물렀던 ‘구르주프’의 휴양소 2층에는 그의 이름을 딴 박물관도 있는데, 그가 사용했던 책상과 종이, 펜 그리고 자화상을 볼 수 있다.
구르주프는 체호프의 여름별장인 ‘다차’가 있던 곳이기도 한데, 다차는 건물 전체가 흰색이라 ‘하얀 별장’이라고도 부른다.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1854년에 발발한 제1차 크림전쟁 때 포대장의 신분으로 참전했다.
그는 349일간 항전했던 처절한 경험을 살려 ‘세바스토폴 이야기’라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가 근무한 포대 진지에는 지금도 대포가 거치돼있고, 그 앞에는 톨스토이 참전 기념비가 서 있다.
톨스토이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다시 한번 세바스토폴을 방문했는데, 당시 그가 묵었던 건물에는 그가 묵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동판이 붙어있다.
얄타에서 가까운 ‘마산드라’ 지역에는 제정러시아 황실의 포도주를 만들었던 마산드라 와이너리가 유명하다.
마산드라 와이너리는 100만 병 이상의 와인이 저장되어 있다고 기네스북에 올라있으며, 가장 비싼 와인은 1775년에 생산된 ‘헤란스프란 떼라’라는 브랜드로 병당 100만 유로(13억 원?)의 가치를 지니며 현재 4병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크림반도 동쪽 끝에는 로마가 지배하던 땅 ‘케르치’가 있는데, 크림전쟁과 2차대전 때 격전지였으며, 러시아가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전에 세운 도시국가 중에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어 러시아인들이 사랑하는 도시이다.
크림반도의 크림은 ‘요새’를 뜻한다고 하는데, 초기 기독교인들의 피난처이자 예배당 겸 무덤이기도 한 ‘카타콤’을 비롯해 스키타이 원주민 분묘,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등 공공건물 유적과 게릴라들이 은신하고 싸우던 석회암 채석장 동굴인 ‘아지뮤수카이’등을 둘러볼 수도 있다.
“이건 빵이 시커멓네요? 일부러 태운 건가요?”
창선이 식탁 위에 썰어놓은 거무스레한 빛깔의 빵 조각을 집어 들며 물었다.
“아, 그건 홀렙이라고 부르는 호밀 빵입니다. 빵 조각 사이에 꿀과 생크림을 넣어서 케이크로 만들어 먹기도 합니다.”
“아, 호밀 빵이군요. 꿀.. 생크림은 안 보이는데요?”
“생크림 대신 그 옆에 있는 하얀 비계 같은 살로를 발라서 드십시오.”
주인장이 꼭 돼지 수육 썰어놓은 것 같은 음식을 가리켰다.
“아, 이게 돼지 비계에요? 살로라고요?”
“예, 맞습니다. 홀렙 빵에 버터처럼 발라서 드시면 비리지 않고 고소한 맛이 날 겁니다. 홀렙은 보르쉬 국물에 그냥 찍어 먹어도 맛있어요.”
보르쉬(Borsche)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통적인 수프(soup)이다.
흔히 어린 송아지 고기로 육수를 내고 붉은색 무와 다양한 야채를 넣어서 끓이는데, 그 맛이 아주 좋다.
새큼한 느낌의 크림을 가운데 얹어서 먹기 때문에 그 상큼한 느낌이 오래간다.
보르쉬는 흔히 Morning After Soup라고 해서 한국으로 치면 해장용으로 많이 먹는다고 한다.
“이건 꼬치구이 샤슬릭이네. 와우, 이거 순대 맞지요? 엄청 큰데?”
“그건 말고기로 만든 순대인데, 말례라고 불러요. 옆에 있는 건 말고기 소시지 카지고요. 카지나 말례는 우크라이나 전통요리는 아닙니다.”
“그럼 어느 나라 전통요리인가요?”
“러시아 자치공화국 바시코르토스탄 음식입니다. 볼가강 동쪽에 있는데, 모스크바에서 1,300km 거리에 있어요. 전에 거기에 살다가 여기로 왔어요.”
“아, 그래서 이 말고기 순대와 소시지를 직접 만드시는군요. 맛이 좋은가 보죠?”
“한국 사람들이 말고기를 안 먹어서 그런데, 돼지고기는 비교도 안 되고, 소고기보다 더 부드럽고 훨씬 맛있지요.”
“아, 그래요? 오늘 좋은 경험 하겠네요. 아직 더 차려야 됩니까?”
“아니요, 이제 다 됐어요. 이게 청어로 만든 전채입니다. 콜드 애피타이저라고 하지요. 제가 스페셜 메뉴로 한번 만들어 봤어요. 비리지 않고 깔끔할 겁니다. 이제 잡수시지요.”
“이건 삶은 감자인가요?”
청어 전채 접시 위에 빨간 무와 함께 놓여있는 작고 동그란 감자를 보고 물었다.
“예. 여기서는 샤토라고 부르는 삶은 감자에요. 그리고 이건 통밀을 발효 시켜 만든 음료수인데, 크바스라고 부릅니다. 약간 단맛이 나는데, 흑빵 홀렙과 청어 전채 먹을 때 마시는 겁니다.”
주인장이 유리 와인 잔에 붉은색이 나는 음료수를 따라주며 설명했다.
“자, 그럼 이제 먹읍시다. 주인장도 오세요. 함께 드시지요.”
창선이 데킨과 괴뉠에게 먹자고 권하며 주인장도 함께 먹자고 손짓했다.
“예, 그럴게요. 맛있게들 드십시오.”
고려인 주인장도 식탁 끝에 자리 잡고 앉았다.
배가 고팠던 참이라 게걸스럽게 이것저것 먹느라고 한동안 대화가 끊겼다.
데킨과 괴뉠도 우크라이나 전통음식은 처음인지 맛있게 쩝쩝거리며 먹느라고 정신이 없다.
“이 크림반도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강제로 접수한 게 맞지요?”
아무 말 없이 식사만 하는 게 멋쩍었는지 창선이 주인장에게 물었다.
“예, 그럼요. 여기는 이미 러시아 땅입니다. 그건 왜요?”
“어제 세바스토폴 항구에 다녀왔는데, 러시아 군인들이 보이지 않아서요. 명색이 흑해함대가 주둔하는 군항인데, 저렇게 경계가 허술해도 괜찮은가요? 우크라이나에서 도로 탈환하려고 기습공격 같은 거 하지 않을까요?”
“어이구. 우크라이나는 그럴 힘이 없습니다. 지난번에 러시아가 크림반도 접수할 때 병력을 꼴랑 2천 명 보내서 접수했어요.”
“겨우 2천 명으로 이 크림반도를 접수했다고요? 그때 우크라이나 군대는 가만히 있었답니까?”
“아니에요. 정식군대인 내무군은 돈바스 지역 전쟁에 투입되어 있으니까 예비군을 소집했대요.”
“아, 여기도 예비군이 있겠군요. 몇 명이나 되는데요?”
“편제상 100만 명이나 되는데, 동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편이니까 제외해도 40만 명은 될 겁니다.”
“아이구, 40만 명이면 그냥 밀고 내려와도 러시아 군대 2천 명은 도망치겠는데, 어째 접수됐을까요?”
“예비군 동원령을 발동했더니 글쎄, 고작 4만 명만 모였답니다.”
“겨우 4만 명이요? 그래도 러시아 군대 2천 명은 쫓아낼 수 있지 않습니까?”
“그 4만 명도 지급할 무기가 없어서 2만 명은 근위군으로 배치했답니다.”
“저런! 아니 무기가 없어서 공격도 못 했다는 말인가요?”
“그런 셈입니다. 우크라이나 군대가 얼마나 엉망이냐 하면요, 그때 해군 사령관이 임명된 지 하루 만에, 기함을 이끌고 러시아군에 투항했답니다.”
“예? 세바스토폴 항구를 탈환하랬더니 함정을 끌고 가서 항복해버려요?”
“그랬답니다. 그러니 병사들도 알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뭐 완전 개판이었나 봅니다.”
“아니, 무슨 나라가 그 모양이에요? 그때 정부는 있었을 거 아닙니까?”
“있기는 했는데, 임시정부의 야체뉴크 총리는 ‘내 아내도 러시아어를 쓴다’며 말장난을 했고, 법무부 장관도 ‘우크라이나 시민을 위해 수용소를 설치하겠다’고만 했을 뿐이랍니다.”
“아니, 듣기로는 오렌지 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야당 지도부가 막강했던 것 같은데 야권도 가만히 있었답니까?”
“그 우크라이나의 잔다르크라고 칭송받던 야권 여성 지도자 율리야 티모센코 전 총리는 자국 영토가 러시아에 합병되는 순간에 하필 허리 디스크 때문에 독일의 병원 침상에 누워있었답니다.”
“아, 그래서 적극적으로 러시아군에 대한 저항운동을 할 수 없었군요.”
“그런 셈이죠. 그런데, 설령 티모센코 전 총리가 정상이었다 해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정부를 상대로 데모했던 야권 지지자 중에 막상 조국을 지키겠다며 러시아 군대를 상대로 목숨 걸고 나설 애국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어요? 반정부 데모하고 전쟁은 다르지 않겠어요?”
“그렇기는 하지만 듣고 보니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좀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얽힌 과거의 역사를 다 알고 보면 꼭 그렇지 만도 않습니다. 지금은 순수한 우크라이나 백성이 얼마 안 된다고 봐야 될 겁니다. 전쟁에 하도 시달려서 이젠 조국을 생각하기에 너무 지쳤는지도 모르지요.”
우크라이나 국적의 고려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요? 그것참 불쌍한 백성들이구먼. 누군가 우크라이나 백성을 대신해서 세바스토폴항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 함대를 깨부숴주면 좋다고는 하겠죠?”
“글쎄요.. 괜히 관광객만 줄어든다고 싫어할 것 같은데요? 저라도 그렇겠는데요. 하하.”
고려인 주인장이 고개를 저으며 도리질을 했다.
우크라이나를 강제로 점령한 나쁜 러시아 군대에 대한 복수는 괜히 옆에서 구경하는 제삼자의 쓸데없는 정의감의 발로일 뿐이고, 실제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누가 크림반도를 차지하든 전쟁 없이 돈이나 벌어서 편안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를 잃고 난 뒤에야 장애인 복지비를 국방비로 전환하고 육군도 4천 명을 증원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무력을 포기한 국가의 말로(末路)는 이렇게 비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