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도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한상림
폭염 속에서 치러지는 격렬한 축구 경기에는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Hydration Break)’라는 제도가 있다. 경기 흐름이 한창 고조되어 있어도, 주심은 휘슬을 불어 경기를 잠시 멈춘다. 선수들은 물을 마시며 치솟은 체온을 낮춘다. 이 짧은 휴식은 단순히 선수들에게 탈진과 부상을 예방해 경기 끝까지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도록 돕는 과학적이고 전략적인 장치다. 승부를 늦추기 위한 멈춤이 아니라, 더 좋은 경기를 완성하기 위해 경기를 잠시 살려두는 시간인 셈이다.
요즘 대한민국의 정치판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이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가 간절해진다. 거대 양당 모두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 본래 당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은 축제여야 마땅하다. 당의 미래 비전을 설계하고, 시대에 발맞춘 정책을 개발하며, 이를 통해 국민에게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는 공론의 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풍경은 축제와 거리가 멀다. 가치와 정책을 두고 벌이는 치열한 경쟁 대신, 철 지난 계파 대결과 상대를 향한 인신공격성 공방만이 미디어를 도배하고 있다. 축구로 치자면, 같은 팀 선수들이 상대 골문을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거친 태클을 날리며 제 살을 깎아 먹는 기이한 모습이다.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어느 한 명의 화려한 스타플레이어가 아니다. 팀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끝까지 승리를 향한 기량을 유지하는 조직력에 있다. 아무리 뛰어난 공격수라도 경기 내내 동료와 으르렁거리며 감정을 소모한다면 그 팀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당권 경쟁은 민주주의 정당 체제에서 필연적인 과정이지만, 선출 이후 정당은 다시 하나의 팀으로 묶여 국민 앞에서 책임 있는 정치를 선보여야 한다. 경쟁 과정에서 상처와 불신, 배제의 언어만 남발된다면, 전당대회가 끝난 뒤 단상 위에 오를 ‘승자’는 존재할지언정 정당이라는 ‘팀’은 회복 불가능한 내상을 입고 약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정치야말로 과열을 막아줄 신호등이 시급하다. 서로를 향해 겨누고 있는 날 선 언어와 증오의 정치를 잠시 내려놓고, 문밖의 국민이 지금 무엇을 가장 절실히 원하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보는 시간이 절실하다. 정치의 온도가 지나치게 과열되면,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가장 먼저 증발해 버리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이성’과 공동체 간의 ‘신뢰’이다.
아무리 마력이 뛰어나고 디자인이 수려한 최고급 자동차라 할지라도, 엔진 내부의 냉각수가 바닥나면 더 이상 단 1미터도 달릴 수 없다. 경고등을 무시한 채 오직 속도만을 위해 가속 페달을 계속 밟아댄다면, 엔진은 결국 과열되어 시뻘건 연기를 내뿜으며 멈춰 서고 말 것이다.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권력을 향한 질주 속도만 높일 뿐 갈등을 식히는 냉각수를 채우지 못한다면, 가장 먼저 과열되어 망가지는 것은 정당이라는 기계고, 그 차량에 탑승한 승객인 ‘국민’은 고스란히 그 피해를 짊어지게 된다. 당내 정쟁에 매몰되어 정작 민생 법안과 경제 위기 대응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실이 바로 냉각수가 고갈된 정치의 단면이다.
물론 정당 내부의 치열한 경쟁과 대립은 민주주의의 자연스럽고 건강한 과정이다. 다양한 가치관이 부딪히고, 날카로운 토론을 거쳐 지도자를 선택하는 일은 정당정치를 지탱하는 단단한 주춧돌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경쟁이 상대를 인정하는 ‘토론’이 아니라 상대를 궤멸시켜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적대’가 될 때, 그리고 이성적인 ‘정책’이 아니라 감정적인 ‘복수심’이 앞설 때 발생한다. 선을 넘어서는 순간, 경쟁은 동력이 아니라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악순환의 늪으로 변질된다.
과열된 경기 속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 선언이 필요한 것처럼, 지금의 여야 정치인들에게도 스스로 멈추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것은 민생을 구하겠다는 명분 아래 네거티브 공방을 전면 중단하겠다는 신사협정일 수도 있고, 국가적 위기 앞에서는 계파를 초월해 머리를 맞대겠다는 원포인트 선언일 수도 있다.
당대표 선출을 넘어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정당들이라면, 이제는 잠시 거친 숨을 고르고 민심의 바다를 바라보아야 한다. 계파의 이익보다 국민의 삶을 먼저 살피고, 당장의 당권 승리보다 공동체의 건강한 내일을 고민하는 ‘정치적 휴식’을 가질 때다. 물을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가 잃어버린 민심과 이성을 되찾기 위해, 지금 우리 정치에는 반드시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가 켜져야 한다.
2026.8월 서대문자치신문 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