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06. 응현 석가탑과 상(上) 하(下) 화엄사
가장 높고 오래된 목탑 웅장한 外觀 천하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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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응현의 석가탑 산서성 응현에 있는 목탑. 높이 67.3m인 이 목탑은 중국에서 가장 높고 오래됐다. |
2002년 10월12일 토요일. 중국에 들어온 지 오늘로 정확히 한 달이 된다.
키르기스스탄 제2의 도시 오쉬를 출발해 중국 신강성 카슈가르에 도착한 것이 2002년 9월12일. 그 날 새벽5시 오쉬를 출발, 천산산맥 넘어 중국 국경을 돌파하니 오후4시였다. 벌써 한 달 전 일이다.
한 달 만에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의 오아시스 도시들과 돈황, 안서, 주천, 무위, 장액 등 하서주랑 일대를 견학하고, 서안.낙양.소림사.정주.태원을 지나 오대산에 도착한 날이 2002년 10월10일. 그 사이 힘든 일도 많았다.
오대산 은도산장 1209호에 앉아 지나온 도시들을 파노라마처럼 되살렸다.유적을 보고 감탄도 많이 했고, 훼손된 불상을 보곤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서안과 낙양에선 중국 역사에 취했고, 소림사에선 우리나라 선(禪)의 원류를 고찰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오대산을 떠나 응현에 있는 석가탑 참배에 나선다. 아침8시 탑원사.현통사를 보며, 오대산 대회진을 가로질렀다. 오대산 북쪽 산허리를 타고 넘어갔다.
중국 농촌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두 시간 정도 달리니 철도가 지나가는 큰 마을이 나타났다. 산서성 응현(應縣)에 도착한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우뚝 솟은 목탑이 멀리서도 보였다. 응현 목탑, 정확하게 말해 ‘불궁사 석가탑’이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석가탑을 말하기 전에 ‘중국 건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대.웅장함을 자랑하는 중국 사원건축은 섬세.정교함을 또 다른 특징으로 갖는다. 웅장한 건물도 결국은 건축 부재(附材)들의 섬세하고 정교한 결구(結構)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불교가 중국에 전래.정착된 이후 전각(殿閣)을 지을 때마다 스님들과 장인(匠人)들은 “어떻게 하면 부처님 가르침을 건축으로 구체화 해 중생들의 미혹을 끊어줄까”를 고심했다. 현실에서 정토를 보여주지 않으면, 현실적인 중국인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것이란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들과 장인들은 고민 끝에 ‘웅장하고 화려한 사원 건축 모형’을 탄생시켰다. 경전에 근거하고 시대 흐름을 분석해, 지상에 정토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으리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건축술은 더욱 정교해졌고, 자연스레 사원건축술도 최고조로 발달했을 것이다.
현존하는 불궁사 석가탑, 융흥사 전륜장전 등은 웅장.섬세함을 겸비한 중국 사원건축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특히 요나라 청녕(淸寧) 2년(1056)에 건립된 불궁사 석가탑(응현 목탑)은 “중국에서 가장 높고 오래된 목조 불탑”이다. 바닥 층의 벽돌담과 지붕을 제외하곤 전체가 목재로 만들어졌다.
900년 넘게 지탱돼온 탑은 팔각형이며, 외관상 5층에 불과하다. 그러나 4층의 암층(暗層)을 가지고 있어 실제로는 9층이며, 높이가 67.3m, 바닥 직경은 30.27m에 이른다. 실로 거대한 몸체를 자랑하는 탑이다. 몸체만 거대한 것이 아니고, 화려하고 정교함의 극치를 달린다.
완벽한 결구술(結構術)을 자랑하는, 아니 중국 건축의 진수가 이 탑에 함축된 듯, 탑은 그 자체로 절경(絶景)을 선사한다. 멀리서 보면 우뚝 솟은 하나의 탑이지만, 가까이 갈수록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숱한 세월 동안 여러번 지진의 충격을 받았지 지금까지 우뚝 서, 목조 건축의 ‘내진(耐震) 능력’마저 과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불가사의한 목탑이다.
높이 67.3m…외관상 5층이나 실제는 9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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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석가탑(응현 목탑) 3층에 봉안돼 있는 불.보살상. 정교하고 화려한 불.보살상은 보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
차는 어느 순간 석가탑 입구에 멈춰 섰다. 과연 거대했다. 눈을 탑에 고정시킨 채, 입장권을 구입했다.
공원으로 변한 사찰 안으로 들어갔다. 웅장하고 정교하며, 그러면서도 화려한, 대단한 목탑이 그 자리에 있었다. 탑 안에 들어갔다. 1층에 거대한 부처님이 계셨다. 삼배를 드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삐이걱 삐이걱…” 무너질 것 같은 소리를 내는 ‘나무 계단’을 밟고 2층에 올라서니, 아름다운 부처님과 보살님들 조상(彫像)이 모셔져 있다. 화려했다. 채색된 옷자락, 섬세하게 조각된 얼굴과 손, 잘록한 허리 등 모든 것이 잘 조화된 멋진 불상이었다. 사진 찍으려 살피니 관리인이 “안 된다”는 손짓을 했다.
다시 나무 계단을 밟으며 3층으로 올라갔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협시한 보살님들이 반겨준다. 2층보다 더 화려하고 정교한 불.보살상이었다. 다행히 관리인이 없었다. 잽싸게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그리곤 난간(欄干)으로 나갔다. 외경(外境)을 보기 위해서였다.
목조 난간과 난간을 바치고 있는 부재들은 정교하게 연결돼 있었다. 손으로 흔들어 보았지만, 끄떡도 안했다. 고개를 드니 바로 위에 ‘석가탑(釋迦塔)’이라 적힌 편액이 걸려 있었다. 3층에서 바깥을 구경한 다음 밑으로 내려왔다. 탑에서 약간 떨어져 다시 바라보니 과연 절묘했다. “인간의 손으로 어떻게 이런 탑을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뛰어났다. 차를 타고 ‘대동(大同)’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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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오대산 대라정에서 바라본 대회진 전경(사진 위). 탑원사에 있는 모택동 주석을 그린 그림. 모주석은 국공내전 당시 탑원사에 잠시 머물렀었다. |
중국 산서성 북부에 위치한 대동은 북경 동쪽으로 380km, 남쪽 태원시에서 352km 떨어져 있는 화북의 교통중심지.
도시 전체면적은 2000㎢, 총인구는 108만 정도. 산서성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중국이 공포한 24개 역사문화 명승지의 하나다.
대동은 황토고원지역이며,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해발 1000m정도. 2000년이 넘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이 도시는 금(金)나라 때 대동으로 개명됐다.
금나라 시절에 건축된 화엄사(華嚴寺).선화사(善化寺)는 대동을 대표하는 사찰. 대동시 서쪽 30리 지점에 있는, 북위(386~534) 때 조성된 운강(雲岡)석굴은 중국 3대 석굴의 하나로 꼽힌다.
현재의 대동시는 중국에서 석탄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도시로, 1989년 원탄(原炭) 생산량이 5600만 톤이었다. 물론 전력.건재.화공.기계공업도 발달한 중국의 중요 공업도시이다.
응현을 출발한지 1시간 30분 만에 대동에 도착했다. 오호십육국시대를 종식시켰던 북위의 수도였던 대동, 당시 이름은 평성(平城)이었다.
사실 대동은 북위 덕분에 번창했다. 한(漢)나라 땐 현(縣)이 설치됐고, 흉노(匈奴)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부도위(東部都尉)가 있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한 고조(高祖) 유방은 대동 백등산에서 흉노군에 포위, 굴욕적인 협약을 맺고 풀려났다.
이후 4세기 말 북위 도무제(道武帝. 386~409)가 이곳을 수도로 삼아 웅장.화려한 궁성을 쌓자, 평성은 일약 도성으로 번창하게 된다. 북위가 494년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기 전까지 평성은 화북을 대표하는 도시였다.
대동시 경원영(京原迎)빈관 3003호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었다. 곧바로 운강석굴로 - 다음호에 운강석굴을 다룬다 - 달려갔다. 대동에 도착한지 이틀 째인 2002년 10월13일 아침9시, 대동 시내에 있는 화엄사에 참배하러 갔다.
화엄사는 글자 그대로 웅장했다. 현판 글씨도 컸고, 외관(外觀)도 엄청났다. 상(上) 화엄사의 대웅전으로 나아갔다. 대웅전은 금나라 때인 천권 3년(1140)에 중건됐는데, 가로 전체 길이 54m, 세로는 27m가 넘는다. 중국 고대 단층목조건축 가운데 가장 큰 체형이다. 1020년에 세워진 의현(義縣) 봉국사 대웅전이 48.2m. 이것도 크다고 하는데 54m라면 얼마나 굉장한가.
상.하 화엄사 대웅전.박가교장전도 일품
기둥과 기둥 사이를 한 칸으로 볼 때, 상화엄사 대웅전은 정면 9칸, 측면 5칸. 지붕은 근사한 위엄을 돋보이게 하는 우진각 지붕. 가히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게다가 기둥도 벽에 가려져 있었다. 둔중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대웅전 안에 들어섰다. 중국의 다른 사찰처럼 이곳 역시 신발을 신고 들어가게끔 돼 있다. 내부도 웅장했다. 뒷벽을 배경으로 늘어선 부처님들의 위용(威容)은 놀랄 정도였다. 크기도 크지만, 문에서 불상에 이르는 거리 또한 멀었다. 사진 찍는 것을 엄금해 촬영하지는 못했다.
상화엄사를 나와 하화엄사로 걸어갔다. 거리가 얼마 되지는 않았다. 하와엄사에 들어서니, 하(下)대웅전으로 불리는 박가교장전(薄伽敎藏殿)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중국인들이 입구에 모여 법회(法會)를 보고 있었다. 중국인들의 법회 장면을 지켜보다 발걸음을 박가교장전으로 돌렸다.
요나라 중희(重熙) 7년(1038)에 지어진 박가교장전은 요나라 건축을 대표하는 뛰어난 걸작이다. 박가교장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참배하고 내부를 둘러보았다. 내부 벽에 경전을 안치하기 위해 고안된 ‘벽장 38칸’은 조영자의 창의성이 얼마나 탁월한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박가교장전 내부를 디자인한 사람은 아마도 당시 최고의 ‘문화혁명가’였을 것이다. 전통을 아우르면서 독창성을 가미,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가구(架構)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벽장은 이층 누각형태. 상하 2층으로 나뉘어졌고, 앞과 뒤 벽장 사이는 5칸 정도 벌어져 있다. 그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 소위 ‘천궁누각(天宮樓閣)’. 5칸 규모의 누각은 무지개다리 위에 얹혀져 있었다. 무지개다리는 참으로 멋졌는데, “요나라 목조건축의 품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실례”로 평가받을 만한 아이디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자세히 보고 있노라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화엄사 경내를 둘러보고 다시 대동 시내 거리로 나왔다. 시내엔, 어제 도착할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메케한 석탄 냄새가 가득했다. 하늘도 뿌옇고,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도 대부분 검었다. 중국에서 석탄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도시답게, 거리를 점령한 석탄 먼지 덕분에 생긴 현상인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의 얼굴에서 불심(佛心)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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