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제145강 : 제주도 전설 강의 (2)
서 론
앞의 리포트들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제주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를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신화에서 벗어나 전설의 내용을 보고하고자 한다. 제주도의 전설은 거의 대부분들이 구전되어서 변형이 된 부분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전설로 전해지는 이야기들 가운데 대부분이 인물전설이니만큼 더욱 그 비중이 큰 것을 이번 리포트를 쓰면서 느낀 점이 많았다.
본 론
● 「천지연 설화」 起承轉結 - 자연전설 : 제주도청 홈페이지에 있는 ‘제주소개’에 있는 전설 자료를 인용함
옛날 조선시대 중엽에 서귀포, 당시 서귀진이란 마을에 얼굴이 어여쁘고 마음이 고우며 행실이 얌전하다고 소문이 난 순천이와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총각인 명문이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음씨 곱고 얼굴이 예쁘던 순천이가 열아홉이 되자 부모가 정해준 대로 이웃 마을 법환리 강씨 집으로 시집가고야 말았다. 그러자 서귀진의 모든 총각들이 서운한 건 두말할 것도 없었지만 명문이는 그보다 더욱 아파 마음을 이루 헤아릴 길이 없어 형편없이 흐트러진 채 술과 노름과 싸움을 벌여가며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렇게 되어 이제 사람들도 명문을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하여 꺼려하였다. 그래서 그도 차차 마음만 멀어져갔고 그의 생활은 점점 흐트러져 가고야 말았다.
시집을 간 순천은 여자의 도리를 다하는 가운데 화락한 결혼생활을 하며 동리 사람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고 안락하게 정성껏 집안일을 처리하고 일가친척들은 물론, 온 동리에서 소문난 며느리로 시댁 식구들의 칭찬이 자자하고 남편의 사랑을 받았지만 명문은 정반대로 타락해져가 부모에게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큰 재산도 없는데 부지런히 일하는 덕택에 살아가는 처치에도 노름 밑천을 달라고 앙탈을 부릴 정도로 막돼먹은 존재가 되어갔다. 어느 가을 오랜만에 친정나들이를 가던 순천은 서귀진에서 법환까지 이어지는 천지연 입구에서 명문이라는 건달을 만나게 된다. 때마침 그녀를 기다리던 명문을 알 리 없는 순천은 해질녘이 되어서 돌아오다가 들입다 명문을 맞딱드린다. 그 순간 순천이 깜짝 놀라자 명문이 누군인지 모른다는 식으로 말하는 순천을 향해 자신을 밝히지만 사랑이니 뭐니 하는 것도 모르던 순천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데 명문이 순천의 손을 와락 잡고서 애걸을 하지만 남의 아내가 된 몸을 두고 어떤 행패를 부리느냐고 말하지만 순천을 와락 껴안는 순간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우르릉 거리는 소리와 함께 명문이를 낚아채고는 하늘로 솟아오른 것이다. 여자가 깜빡 순식간 정신을 잃고 깨어나 보니 하늘이 환하게 밝아 있는데 교룡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뒤에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다음 순간 교룡이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가 눈을 주위로 돌렸을 때였다. 반짝이는 구슬이 그의 발 밑에 구르고 있었다. 그것이 여의주였는데 그녀가 소리를 치며 손에 넣고 밤길을 걸으며 시집으로 향했다. 그 후 여의주를 간직하고 있던 그녀는 모든 일이 잘 되었다. 집안이 차차 넉넉해짐은 물론 아들 딸을 두루 두었으며 아들들이 모두 똑똑하여 모든 일이 형통하자 그 집안에서나 일가에선 모두 며느리의 덕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한다.
― 「서귀포시 문헌자료집」 현기철 씨
● 「고종달이」 起承轉結 : ※ <제주도 전설>이란 자료에 의하면 ‘고종달이’에 대한 전설이 세 가지로 전해져오고 있다. - 역사전설
첫 번째 전설
기 : 중국 秦始皇 때 만리장성을 쌓아 나라를 든든히 해놓았으나 지리서를 펼쳐 보고서 제주도의 지리가 穴이 인걸들을 쉴 새 없이 배출할 지도 모른다고 인식하여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다.
승 : 진시황이 이를 간파하여 그 혈들에 인걸들이 못나오게 해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종달이라는 이를 불러내어 제주의 물 혈을 끊으라고 지시한다.
전 : 고종달이는 왕의 명령을 받아 종다리 바닷가로 배를 붙여 들어온다. ‘윤드르목’이라는 산 앞에 ‘넙은드리’라 불리는 평지가 있었는데 이 평지에 ‘대머들’이라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한다. 이 당시에 마을을 이루게 한 것이 바로 토질이 좋을 뿐만이 아니라 그 곁에 ‘물징거’라는 좋은 생수가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 : 이를 눈치 챈 고종달이는 이 섬에 오자마자 맨 먼저 종다리의 ‘물징거’ 물의 혈을 떠 버리고 물이 나오지 않게 하였다. 그 후로 물이 끊어져버려 지금은 물이 솟아나왔던 구멍만 남아 있을 뿐, 동네 사람들은 차차 물을 찾아 바다 쪽으로 내려와 지금의 종다리가 이루어져 있다 한다.
두 번째 전설
기 : 옛날 대국(중국)의 왕비가 세상을 하직하고 왕이 후궁을 구하고자 신하들을 사방에 풀어놓아 미인을 구해들이라 명한다. 여러 곳에서 신하들이 미인이란 미인들을 다 골라 바쳤으나 왕은 마음에 들지 못한 듯 고개를 내젓자 신하들을 다시 미인을 찾고자 제주에까지 오게 된다.
승 : 신하들은 제주에 도착하고서 의외로 천하일색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을 임금에게 바치니 그토록 까다롭게 굴던 임금의 희색이 좋아진다. 그 천하일색인 여인은 백정 집안 출신인데 그렇게 미모가 좋았던 것이다. 후궁은 얼마 안 있어 태기가 있어 열 달 만에 커다란 알 다섯을 낳았다. 알은 점점 커져서 집안에 가득해지더니 하루는 깨지면서 장군 오백이 튀어나온다. 오백 장군은 매일같이 ‘칼을 받아라!’느니, ‘활을 받아라!’느니 하며 뛰어나오더니 이 장군들로 나라가 망할 듯했다. 임금인 진시황은 이 장군들로 인해 공연한 근심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용하다는 점쟁이를 불러들여 제주에 있는 장군혈의 정기로 장군이 태어난 것이니 장군혈을 떠버려야 한다고 말하자 고종달이를 곧바로 시켜 제주의 모든 혈을 떠버리라고 칙명을 내리니 고종달이는 곧바로 제주로 향하여 구좌면 종다리에 이른다.
전 : 종다리에 상륙한 고종달이가 인가를 찾아가 이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종다리’라고 한다고 말하자 이에 분노한 고종달이는 무엄하게 자기 이름을 동네 이름으로 썼다고 하고서 화풀이로 종다리의 물 혈을 뜨기 시작한다. 물 혈을 떠서 흐르는 샘물을 막고 서쪽으로 향해 온갖 혈을 떠온다. 그러다 한 혈을 발견하여 정혈에다 쇠꼬챙이를 쿡 찌르니 옆에 밭을 갈던 어떤 농부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쇠꼬챙이를 빼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고 다음 혈을 뜨러 떠나가고 얼마 안 있어 어떤 백발이 된 노인이 나타나 쇠꼬챙이를 빼달라고 애원을 하자 농부가 하는 수 없이 쇠꼬챙이를 뽑은 순간 구멍에서 피가 콱 솟아오르자 노인이 얼른 피를 막았는데 다행히 평소 상태로 돌아오니 노인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오늘날 말혈〔馬穴〕이라 부르는 것이었는데 제주도에서는 말이 나되 말의 몸집이 작아진 것이 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한편 화북리에 이른 고종달이는 ‘고부랑나무 아래 행기물’이란 물 혈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어 이 혈을 끊고자 하였는데 화북리에서 또 어떤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는데 백발노인 한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행기(놋그릇)로 한 그릇 떠다가 소 길마 밑에 잠시 숨겨달라고 급한 하소연을 하는 통에 그것에 대해 물어볼 겨를도 없이 그대로 노인의 말에 따라 해주니 물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긴 듯 사라졌는데 이 노인이 수신, 즉 물의 신이었던 것이다.
결 : 농부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려나보다 생각하면서 밭을 마저 가는데 어떤 부리부리한 사람이 개를 데리고 나타났는데 이가 바로 고종달이다. 그가 어떤 책을 들여다보며 행기물이라는 물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그는 여태까지 이 마을에 살아도 그런 말은 없다고 대답하니 고종달이 중얼거리며 주위를 샅샅이 뒤진다. 지리서를 가지고 바라보며 이 책이 어떻게 잘 되어 있는 책인지 도통 알 리가 없다는 듯 길마 밑에 숨은 것까지 다 알고 기록하였건만 고부랑나무라는 것이 길마라는 것이고 행기물이란 행기 그릇에 떠 놓은 물이라는 것을 몰랐던 고종달이니 농부도 그것을 알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던 찰나에 고종달이가 데리고 온 개가 코를 킁킁거리면서 물 냄새를 맡은 채 길마 밑으로 가는데 농부가 길마 밑에다 햇빛을 받지 않도록 점심을 놓아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먹는다는 생각이 앞서 막대기를 들어 그 개를 때리니 개가 저만큼 도망을 가고 고종달이는 샘물이 암만해도 없다고 하며 지리서가 엉터리라고 중얼거리면서 투정을 부린 채 그 지리서를 찢어버리고 개를 데리고 가버리니 화북리의 물 맥이 그대로 지금까지 샘물이 솟는다고 전해진 채 그 행기 그릇 속에 담겨 살아난 물이라 하여 ‘행기물’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세 번째 전설
기 : 표선면 토산리에 ‘거슨샘이’라는 샘물과 ‘너단샘이’라는 샘물이 있다. 水源은 같은데서 흘러나오는데 하나는 한라산으로 올라가고, 다른 하나는 바다 쪽으로 흘러내린다. 곧 거슨샘은 거슬러 흘러가는 샘, 너단샘이는 오른쪽으로 흐르는 샘물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한데 이 두 샘물에게 고종달이와 연관이 되어 있는 설화가 전해진다고 한다.
승 : 옛날 호종달이(또는 고종백이)라는 사람이 구좌면 종달리에 이르러 물 혈을 뜨기 시작한다. 표선면 성읍에 와서도 뜨고서 다시 토산리의 거슨샘이와 너단샘이의 물을 뜨려고 내려오자 이 샘을 지키던 뱀이 어떤 농부가 밭을 가는 데 가서 소 길마 밑에 숨는다.
전 : 하지만 호종달이는 지리서를 보고 그 밭에 이르지만 찾지 못한다. 이에 지리서가 틀렸다고 하여 그것을 불로 질러 없애 버린다.
결 : 뱀이 몸을 피한 덕분에 이 물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데 이 물을 상수도로 만들어 토산리와 세화리 주민들이 먹고도 남아 삼천 여 평의 논밭까지 만들어놓았으며 이 물 혈을 끊지 못하여 남은 샘물에는 서귀포의 ‘샘이물’이 있다.
● 「논한이」 起承轉結 : 역사전설 - (허기져 죽은 장사)
기 : 남원면 옷귀라는 마을하고도 역대 監牧官을 지낸 경주 김씨댁에 논한이라는 종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체구가 원래 큰데다 힘세어 일을 잘했다한다. 그에 맞추어 배의 크기가 이만저만 아니어서 제대로 배를 채워 본 적이 없었다. 상전인 김씨댁서도 이 종이 얼마나 배가 크고 얼마만한 힘을 지녔는지를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에 꼴밭으로 가서 꼴을 베어 들이려고 논한이를 부른다.
승 : 논한이는 백 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서 다음날 백 사람의 먹을 점심을 준비해서 논하니를 깨웠다. 그런데 논한이는 소에 점심을 실어 밭으로 나가고 나서 상전은 낮이 가까울 즈음에 작업광경을 보고자 말을 타고 밭으로 나아가는데 상전이 논한이만 혼자서 낫을 슬슬 갈고 있었다. 백 명의 일꾼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나머지 당황하여 그에 대해 물어보니 백 놈이 와서 무얼 하느냐고 말대꾸를 하자 기가 막혀서 욕을 못하고 그대로 내려와 버렸다.
전 : 논한이는 무심코 그저 낫을 갈아놓고서 머리털을 끊어보고 되었다고 생각하고 백 사람의 점심을 말끔히 먹고서 꼴을 훔쳐 베기 시작한다. 해질녘이 되어 그 꼴밭에 백 사람이 베어야할 것을 모두 베어놓고 상전에게 보고하니 믿지 못한다는 듯 상전이 그곳에 나아가니 꼴밭을 벤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자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감탄한다. 그러고서 일꾼을 쉰 사람이나 빌러 놓으라고 하여 다음날 상전은 그 꼴밭으로 나아가며 보다 솔개 여남은 마리가 그 위의 하늘을 빙빙 맴돌아가자 종놈이 죽었다고 생각하였는데 그곳에 이르니 그렇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알고 보니 그 많은 꼴을 묶으면서 휙 내던지고 재빨리 일을 하였고 쉰 사람의 것을 모두 다 먹어치운 것을 눈치채게 된다.
결 : 상전은 가을날 제사가 끝나자 논한이에게 산 뒤에 가서 베러 가라고 명령하지만 그가 명령을 거부하자 상전은 하는 수 없이 산 뒤로 나아가니 밭벼가 모조리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제야 논한이가 혼자 일하였다는 것을 눈치 챈다.
● 「한연 한배임재」 起承轉結 : - 역사전설 (아기장수에 관한 이야기)
기 : 구좌면 김녕리라는 곳에 있는 동네인 ‘거욱대우영’이란 곳에 韓氏墓(한씨묘)가 있었는데 이곳은 풍수지리로 보아서 지네 형국의 지형이라 하는데 이 묘가 바로 지네의 머리부분에 해당되는 곳에 쓰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묏자리를 蜈蚣穴(오공혈)이라하니 지관은 이 묏자리를 보아주면서 틀림없이 장군이 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묘를 쓰고서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 게다가 이 묘에서 어떤 장군이 군졸을 많이 거느리고 군악을 요란스레 치며 동네 구석구석 돌아다니더니 동네마다 불을 지르는 것이다. 하여 동네 사람들이 큰 팻말을 가지고 그것에다 ‘惡將軍의 墓’이라 써서 무덤 앞에 박아놓았지만 장군이 그 팻말을 부수어 뜨리고서 오히려 행패를 부리자 결국 동네 사람들이 돌에다 새겨놓고 세웠는데 동네가 갑자기 조용해져 묘의 영기가 눌려졌다지만 얼마 못가 김녕 한씨 집에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승 : 동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이 묘의 영기로 태어났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하기도 하였는데 그 배경 속에서 아기는 날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 다르게 크고 풍모가 달랐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를 구덕에 눕혀 젖을 먹이고는 잠이 들면 밖에 나가 일을 본다. 한데 바깥에 나갔다 왔다 하면 아이가 없어지는 것이다. 꼭 바깥에 나왔다하면 저대로 황급히 들어가 누운 눈치였다. 이상히 생각한 어머니는 아이의 동정을 살피려고 젖을 먹이고 잠을 재워놓아 바깥에 나가 문틈으로 몰래 지켜보니 아이는 잠시 후에 구덕 밖으로 펄쩍 뛰어나와서 겨드랑이의 날개를 펴 천장을 휘휘 날아다니다가 인기척이 나자 황급히 아이구덕으로 들어가 잠자는 척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어머니는 겁이 나서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렸는데 이것이 관아에서 발각되면 三族을 멸한다는 것을 두고서 두려워하는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날개부분을 달궈진 불을 지져 태워 장수로서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지만 집안의 몰락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안타까움을 감수하면서까지 날개를 지진 것이다.
전 : 아이는 여느 아이처럼 조용했지만 힘이 세어 바닷가 마을인 김녕리에는 마을의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이 배를 한 척 지어내어 많은 물고기를 낚고 육지에서는 장사 짐도 나르곤 하였는데 이런 그를 두고 ‘한연 한배임재’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어떤 해에는 육지에서 쌀을 사서 배에 가득 싣고 제주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水賊(수적)이 나타나 배를 가까지 대놓고 위협을 가하니 한배임재는 좁쌀 멱서리를 사정없이 돌멩이를 던지듯이 내던지며 수적의 배를 가라앉히니 이에 굴복한 수적들을 포박하여 관아에 바친다. 한번은 그가 거느리는 선박에 식수가 떨어지자 진도 벽파진에 배를 대어 선창에 내렸다. 그곳의 어부들이 이때 큰 닻을 운행하고 있었는데 이 광경을 보고 무심코 한배임재는 개미새끼들처럼 달려들어서 무얼 하나하고 중얼거리며 말하는 순간 어떤 사람이 자기들을 모욕하였다고 주민들에게 알려주고 분을 일제히 토하여 경을 칠 준비를 하게 된다.
결 : 하지만 벽파진 주민들의 시비에도 굴하지 않고 닻을 두 손으로 잡아서는, 저 멀리 개펄에 가 푹 박히고 끄트머리만 나오게 하자 이를 모르던 주민들이 용서를 청하였다. 그래서 군중들은 한배임재에게 술을 권하니 이에 대해 한배임재는 개펄에 갇힌 닻가지를 꺼내어 휙 던진다. 그러나 이에 의심을 한 벽파진 사람들이 역적이 났노라고 관가에 보고하니 관가에서 즉시 잡아다 서울로 보내었지만 조정에서 조사하고 보니 제주에서 進上(진상)하여 물건을 올릴 때 단 한번도 피해를 입은 바가 없이 잘 바친 한배임재는 그것을 조사하고 본 후 조정에서 죄보다는 오히려 나라의 공로자라 하여 후한 상을 주고 돌려보내었다고 한다.
● 「吳察訪」 起承轉結 : 역사전설 - ※ <제주도 전설>이란 자료에 의하면 ‘오찰방’에 대한 전설이 두 가지로 전해져오고 있다.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異人)
첫 번째 전설
기 : 조선조 현종 임금 때 대정 고을에서 태어난 오찰방의 이름이 榮寬인데 그의 아버지가 튼튼한 자식을 낳으려고 부인이 임신하여 소를 열두 마리를 잡아 먹였는데 그에 따른 효험으로 아들을 얻고자하였지만 딸을 낳고야 만다. 하지만 소를 아홉 마리나 먹인 탓인지 아들을 낳게 되었다. 한데 열두 마리의 소를 잡아서 먹일 것을 후회해한다. 이 아이가 훗날 찰방이 되는 것이다.
승 : 소를 아홉 마리나 먹인 탓인지 오찰방은 어릴 때부터 힘이 세었는데 대정고을에서 씨름을 한다고 하면 항상 그가 독판을 몰았을 정도로 제주도하고도 세 개의 고을에서 그를 당해낼 이가 없을 정도가 되니 누이에게 힘센 자랑을 하자 누이는 다시 씨름판이 있으니 그곳에 나가보면 너를 이길 자가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는 웃어젖힐 뿐이다.
전 : 다시 힘을 과시하려고 대정 씨름판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어김없이 씨름판에서 평정하다시피 하던 찰나에 조금 연약해 보이는 사내가 한판 붙자고 하자 어이없다는 듯 웃어젖히며 씨름을 하였는데 의외로 그 사내가 힘이 세었다. 그러나 실은 오찰방의 누이였다. 끝내 자신이 진 탓에 분통을 터뜨린 채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사내가 자신의 누님이란 것을 모른 채 억울하다는 듯 누이에게 하소연을 한다. 그러고서 바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차에 서까래 틈에 껴있는 신을 빼내려고 힘을 쓰는데 소용이 없게 되자 누님이 뭘 그렇게 힘을 쓰느냐며 그 신을 빼내주자 비로소 씨름판의 그 장사가 누님이란 것을 알게 된다. 오찰방이 워낙 어린 탓에 아버지가 아들을 책망하여 때린 일이 있었는데 이때 오찰방이 나막신을 신고 바깥으로 달아난다. 바금지오름에까지 오르던 아들을 행실을 고쳐나가겠다고 윽박지르다 ‘상봉’이란 봉우리의 칼바위까지 이른 아들이 그곳이 가파른 자칫 잘못했다가 죽음을 면치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 곳에 이르고 아버지가 그를 잡으려고 오르던 순간 아들이 절벽으로 떨어지자 아들이 죽었다는 생각에 겁을 낸다. 하지만 아들이 살아있는 것을 모른 채 시신을 거두려고 하다가 그가 지나가기에 집으로 어이없이 들어간다. 집에 돌아온 그는 ‘목숨이 살았으니 다행이다’고 생각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밤중에 아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렸는데도 살아있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낀 아버지는 깊이 잠든 아들의 옷을 벗겨 들여다보니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있는 것을 보고 겁이 난다. 그래서 이 말이 새나오지 않도록 입을 막는다.
결 : 오찰방이 자라서 벼슬을 한다고 서울로 올라가 호조판서의 호적 궤에 도둑이 자꾸 들어 중요한 문서와 돈을 잃어버려, 이 도둑을 잡은 자에게 상을 千金을 주는 것과 동시에 萬戶라는 벼슬을 주겠다는 방이 붙어져 있는 것을 보고 도둑을 찾고자 좋은 말을 빌려가면서 도둑을 찾았지만, 도둑이 보통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았지만 용기를 내어 덤벼들었는데 이처럼 용감히 덤비는 놈이 처음이라고 한다. 한데 도둑이 天機를 눈치 채었는지 제주에 사는 오 아무개에게 죽게 되어있다고 판단한 도둑이 오 찰방의 신변을 물어보고 ‘네 손에 죽으라고 되어있으니 할 수 없다’며 모가지를 순순히 내놓는다. 하여 도둑의 목을 베어 말꼬리에 단 채 장안으로 들어가는데 말을 탄 채로 들어선 것을 보고 호통 소리가 떨어지자 마음이 졸해서 말에서 내린다. 하지만 전하께 도둑의 모가지를 바치자 전하는 상을 주기는커녕 옥에 얼른 가두라고 명하여 하옥시키고야 말았다. 이렇게 무서운 도둑을 그대로 두었다가 역적을 도모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된 탓에 옥에 가두어진 오찰방을 문초하고 보니 제주 사람이요, 또 궁중에서 들어올 때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온 것을 알았다고 하자 비로소 안심한 임금이 사형을 면하게 하여 겨우 찰방이란 벼슬을 내주었다고 한다.
두 번째 전설
기 : 오찰방이 담이 워낙 크고 재담이 좋았다한다. 어느 해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갔다가 상시관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과거를 보아야하는데 팔도 선비들이 이미 들어서서 장사진을 이루고 있기에 인사를 올릴 도리가 없었다.
승 : 그런데 그가 워낙 힘이 센데다 담대한지라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상시관 앞에 나아가 꾸벅 엎드려 절을 하다가 방귀가 나왔는데 그것도 모른 채 팔도 선비들을 향해서 尊前앞에서 방귀는 왜 뀌느냐고 소리치자 상시관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물으니 그만 과거를 준다니 대단히 고맙다고 다소 엉뚱한 말을 꺼내고서 물러나와 버렸다. 그곳에 앉아있던 선비들이 당돌하게 한 자리 부탁한다는 말을 할 수 없어 다소 많은 이들이 말문을 열어 보인다. 그러자 상시관이 선비들을 다 쫓아 버리고 문과급제를 주어 찰방이란 벼슬을 내리게 한다. 그래서 ‘방귀찰방’이라 불리는 것이다.
전 : 벼슬을 얻은 오찰방은 제주에서 입고 온 솜바지의 바짓가랑이를 뒤집어 놓아 쌀알만 한 이를 잡기 시작한다. 이 자리에 팔도 선비들이 몰려들어 힐긋 보고 트집들을 잡는다. 그러나 그 트집들을 당연하다는 듯 태연히 대답하는 것이다. 그러던 찰나에 선비들이 씨름을 벌이자고 하자 씨름을 상대로 하는 이가 수백을 헤아리는데 판을 마쳐지는 지 눈치를 보았다. 상대방들도 해가 저물어 내일 아침에 씨름을 벌이자고 의견을 돌리고서 돌아가자 그는 저녁에 모래톱 가에 매어진 배를 찾아가 화장에게 오늘 저녁 배의 굵은 닻줄 속을 칼로 썰어서 곧 문질러 끊을 수 있게 해두었다가 다음날 씨름판에서 허리띠를 가지고 오라고 하거든 여긴 한닻밖에 없다고 하라고 그것을 가져오라고 이른다. 그러면 그 공은 잘 갚겠다는 것이다.
결 : 다음날 아침에 약속을 해놓은 씨름판에 나갔다. 서울 장안의 선비, 팔도 선비들이 구름떼같이 몰려드니 오찰방을 죽이려는 심사를 가지고 동원되어 온 것인데 오찰방이 앞에 나아가서는 어제 이야기한대로 한 뒤 몇 놈이 지고 끌고 해서 한닻을 날라 오자 그는 그 닻을 손으로 잡아 북북 문지르고 허리를 졸라매어 다시 북북 문지르고 무릎에 턱 졸라매고서는 나하고 씨름을 하자고 하며 사방을 휘휘 둘러보니 모였던 선비들이 모두 도망치고 그렇게 방귀 덕으로 찰방 벼슬을 했다고 한다.
● 「심돌강씨할망」 起承轉結 : 역사전설 - (힘센 여걸)
기 : 일백년 전 심돌 강씨 할망이 같은 마을 부씨에게 시집을 왔다한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었다는데 강씨 할망이 살던 시집 앞길에 들음돌이 놓여있었다 한다.
승 : 그 들음돌을 젊은이들이 매일같이 모여들어 들음돌을 들었다. 이 들음돌은 이 근처 마을들 가운데서 제일 무거웠다한다. 시흥리 사람들이 그만큼 힘이 세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시흥리 사람들이 이웃 마을 五照里란 곳의 주민들의 들음돌을 보고서 ‘저것이 수제비 주들음돌’이냐고 나무랄 정도로 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전 : 강씨 할망이 시집 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침 일찍 물을 길러 다니다가 이 들음돌이 아직 채 밝지 않은 때 생소한 길을 걷는 데에 있어서 발에 채었는데 이 돌이 귀찮게 발을 귀찮게 한다면서 진채 들음돌을 번쩍 들어다 옆의 논밭으로 던져버렸다. 그러자 들음돌이 흙속에 깊이 움푹 패어져 들어갔다.
결 : 이튿날 청년들이 논밭으로 들어간 그 들음돌을 보고서 저마다 누구의 힘인가를 찾고자 했으나 알 수 없게 되자 청년들이 그 돌을 빼내려고 논밭에 들어가서는 힘을 다해 빼려고 보았으나 꺼낼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이 광경을 보던 강씨 할망이 하도 우스워 다리를 걷어 올리고 들어가 번쩍 들어 길거리로 내던져주었다고 한다.
● 「高典籍」 起承轉結 : 신앙전설
기 : 조선 현종 때 사람으로 제주 梨湖洞 가물개란 곳에 살고 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학문을 머리가 총명하여 明道 선생의 밑에서 제자로 들어가 학문을 닦고 후에 지리에 통달했다. 또 國地理로 유명한 소목사도 같은 문하에 공부한 이였다. 그때가 아직 典籍이란 벼슬을 얻지 못한 때라서 가물개 고생원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가 본 묏자리라면 도내서는 누구도 터를 잡으려 드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전적은 서자 출신으로 집안에서 적잖이 어려움을 겪었는데 더욱이 벗들은 물론이고, 스승이었던 명도 선생에게도 적잖이 차별을 받았다. 그로 인해 고생원은 사무치게 한이 맺히게 되었다한다.
승 : 어느 해 명도 선생이 세상을 하직하자 장사를 치르는데 구산을 누구에게 맡기느냐고 논의를 하다가 그의 제자인 고생원이 지리에 통달하기로 유명하니 그에게 의뢰를 요청하였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고생원은 서귀읍 토평리 서쪽 큰 더리굴이라는 곳에 자리를 보았다. 여기는 局勢가 좋기로 소문이 나 이름난 곳인지라 다들 쓸 만한 곳이라고 수긍할 뿐 아니라 고생원이 골랐으니 믿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장사를 치렀다.
전 : 몇 년이 지나고 소목사가 제주목사로 부임해오자마자 첫 巡歷을 하기 시작한다. 그때 동쪽으로 돌아와 서귀에 이르러 선생의 묘소를 참배코자 선생의 묘소에 참배를 하겠다고 하면서 선생의 소식을 듣고 여기에 모셨다는 것을 이미 아는 터였기에 명도선생의 집으로 곧바로 전갈을 부쳐 참배를 준비하도록 하니 선생의 아들이 향화를 준비하여 앞장서서 안내를 받은 목사가 그 묘소 앞에 이르러 제자리를 깔아 참배준비를 하니 소목사가 이를 둘러보고서 다른 쪽으로 펴라고 지시를 한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고 지시한 자리에 펴 준비하니 거기에 와 분향을 하고 拜禮하는 것이다. 선생의 아들은 그 목사의 태도에 대해서 이상하게 여겨 그 연유를 물으니 오히려 목사가 묘소를 누가 보았느냐고 물어보기에 스승의 아들이 고생원이 보았다고 말하자 목사는 아무 말도 않고 가버리더란다. 묘소는 風疾에다 쓴 것이란 것을 알고서 봉분 밑에 있지 않고 저만치 바람 길에 이동하여 옆의 평지에 가 있는 것을 확인하던 찰나에 목사가 선생의 묘소를 곧 이장하여 모셔야겠다고 생각하고 제주 삼읍의 神眼을 가진 지관들을 모두 불러들이니 지관들은 모두 목사의 스승 묘가 있는 곳으로 집합하였다. 그러자 목사가 선생의 묘소 근처에 군막을 쳐 좌정하고, 지관더러 정자리를 찾으라 이르니 지관들이 저마다 정자리를 짚어대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가물개의 고생원 만은 목사 앞 쪽에 가만히 앉아서 머리만 수그리고 자리를 보려고도 하지 않자 목사가 왜 가만히 앉아만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고생원은 목사님이 앉아계신 곳이 정확한 묏자리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실은 이미 정혈을 이미 보고서 꼭 그 자리에 앉아 지관들의 눈에 띠지 않도록 해서 시험한 것이었는데 이 말을 듣던 목사가 속으로 감탄하여 어성을 높이며 그 연유를 물으니 스승에 대한 자신의 서자로 태어났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서운함을 토로하며 그 억울함으로 일부러 풍질에다 자리를 보아놓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던 목사는 화를 내어 서운함이 있다한들 스승을 그럴 수 있느냐고 호통을 쳐 고생원을 하옥시킨다.
결 : 고생원을 하옥시킨 며칠 후 인통을 무릎에 올려놓으면 떨어지고 올려놓으면 떨어지며 세 번이나 계속 떨어지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된다. 소목사는 은근히 겁이 나 이튿날 조회 때 곧 해몽을 잘 하는 자를 천거토록 하였다. 한데 제주에 해몽에 능한 자가 있을 리 없다고 판단한 부하들은 모두들 고생원이야 해몽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통에 하는 수 없이 고생원을 불러내려고 하였으나 번번이 사또가 하나인데 둘이냐고 묻되 어느 사또가 하옥시키고 또 어떤 사또가 나오라고 하느냐며 나오기를 거부하지만 관속이 정중히 목사가 논의할 일이 있어 청하신다고 이른 끝에 고생원이 가보니 소목사가 자신의 꿈에 대해 해몽해줄 것을 청하자 정신이 혼미하여 며칠 후에 알려주겠다고 하며 여유를 달라고 하자 고생원에게 사또가 후하게 대접을 하며 휴양을 한 끝에 해몽을 한다. 모레 사오시가 되면 첫 번째로 떨어진 인통이 곧 좌익 유지를 대령한다는 것이고 다음은 우익 유지, 마지막에는 御營都大將 유지가 당도한다고 말하자 목사는 그의 말을 믿어보기로 하고 만일 그 해몽이 틀리다면 자신의 목을 베겠다고 약속을 하고, 그날 사오시가 가까워지자 고생원과 함께 만경루에 올라 눈이 빠지게 바다를 응시하였으나 시간이 되어서도 四時가 되어서도 五時가 되어서도 오지 않자 그만 실망한 나머지 소목사는 생원을 죽이고야 말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오시 말에 이르러서 바다의 저 수평선에서 배 한척이 떠오는 것이 보이더니 배가 차차 들어와 포구로 대는 것이다. 또 두 척, 세 척의 배가 각각 들어오더니 과연 좌익유지, 우익유지, 어영대장의 유지를 갖다 바쳐오는데 목사가 그의 神統에 감탄한 나머지 차비를 해 어영대장으로 부임차 서울로 올라가며 같이 고생원을 데리고 갔다. 서울에 나아간 고생원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문과에 한번 참예해지면 좋겠다고 하자 곧 소목사가 ‘전적’이란 벼슬을 시켜주었다 한다.
결 론
오늘을 끝으로 모든 제주도의 신화와 전설들에 대한 기승전결들을 간추려보았다. 비록 앞서서 써왔던 리포트들, 특히 신화에 대한 리포트 내용이 제대로 된 형식을 갖추지 못한 채 막무가내로 조사한 점을 예로 들어 그에 따르는 미흡함 때문에 제대로 갖춘 꼴이 되지 못했지만 그에 따르는 느낀 점을 받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제주도 전설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로부터 들어온 이야기보다 더욱 재미가 있으며 감칠맛을 지니고 있다. 물론 권선징악이라는 이미지도 있는 것만으로 이야기하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이란 존재로 태어나 전설이라는 구비문학이란 장르 가운데에서 자신의 행적을 전하고 있다는 점은 인간들의 무한한 열망과 그에 따르는 사람들의 소박한 입담으로 승화되어 우리들도 흔하게 듣지 못하는 허구 속의 재미, 또 그 재미에 따라 달라지는 우리 입으로 맛보기 힘든 진정한 감칠맛, 그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각박한 상황에서 정신과 육신이 지쳐있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엔도르핀이란 물질을 공급해주어 웃음을 자극해주며 우리들 스스로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힘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지금까지 구비문학을 배우면서 새롭게 우리들에게 일상적인 삶을 해학과 재치로써, 애환과 희로애락을 아우를 수 있게 전개되었던 부분들을 강의로 들으면서 무심코 지나친 우리들의 유산을 버렸다는 점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앞으로 구비문학에 따르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특히 제주도의 신화와 전설을 통해서 특히 그곳에서 쓰이고 있는 방언이 너무나 재미가 있었다. 샤머니즘의 영향 때문에도 그렇겠지만 서울에 살고 있던 탓에 지금까지 제주도가 어느 곳인지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아쉬움이 남았다. 단순히 관광지로만 다니고서 제주도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만을 하고서는 수박겉핥기 식으로밖에 인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주도를 여행하고자 한다면 제대로 제주에 살고 있는 토박이처럼 구석구석 여행객들이 드나들지 않는 소시민들의 조화 속에서 살아가야 되지 않겠는지에 대해 느낀바가 매우 컸다. 이렇게 리포트를 겨우 맺게 되니 새록새록 기억이 남을 뿐이다.
참고문헌
현용준, 「제주도 전설」 (개정판), 서문당, 1996.
제주특별자치도 홈페이지 - 제주소개 - 제주의 문화 - ‘제주의 전설’ 코너에서 인용함.
현용준, 「제주도 신화」 (개정판), 서문당, 1996.
※ 참고
외돌개 전설
제보자 : 김성민 (남성 32세) 지역주민
제보일자 : 2011년 5월 22일
제보장소 : 외돌개 부근
조사자: 안녕하세요. 저희가 외돌개에 얽힌 전설에 대해 알고자 나왔는데요.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뭐 좀 여쭈어봐도 될까요?
제보자: 무사? 뭐 물어본건디?
조사자: 여기 외돌개에 얽힌 전설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제보자: 에, 나도 잘 모르큰디, 그냥 저기 관광지 표지판 보면 안되크냐.
조사자: 네, 저희가 지역주민들에게 전설을 직접 듣는다는 점에서 의의를 두고 있어서요. 그냥 편안하게 이야기해주시면 되는데, 안될까요?
제보자: 음, 게민 내려오는거는 한 두 개정도 이신디, 일단 장군석이라고행으네 예전 최영장군 알아?
조사자: 네
제보자: 그 사람이 저기 범섬으로 적들이 숨으난, 그 사람들을 잡잰 외돌개를 저 모양으로 장군모양으로 치장시켠 적들이 놀라서 목숨을 끊었다는 전설이 이서.
조사자: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혹시 다른 전설도 아세요?
제보자: 음 , 다른 전설이라고 해봤자 할망바위랜행이넹, 할망 하르방이 고치 살당 하르방이 고기 낚으래 바다에 갔당 안 돌아완으넹. 겅해부난 할망이 저기강 울당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주게. 그 옆에 있는 돌이 하르방바위고.
이 자료들은 오늘날 현대문학사에 있어서 새로운 소재들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의 근원이다. 이 근원은 곧 현대문학사를 이루는 기둥임을 알리는 바이다.
개국621년 1월 8일
천손서당 훈장 정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