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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에 남편 유호공 협을 보내고 여섯살 타와 갓난얘기씨 위를
훌륭히 키운 음성 박씨 어머니 (1571~ 1637)
박씨 어머니는 자식 둘이 모두 효자이었고 임진왜란 초에 돌아가신 친정 아버지도 매우 훌륭한 분이셨네요
현재의 광주 광역시 남구 주월동에서 나주로 가는 회재로가 친정아버지 박광옥 공의 호 회재를 기념한 것이군요
회재 박공은 아드님이 없고 따님만 넷을 두었다는데 아래 글에 사위들의 기재순서, 친정아버지와의 나이 차이
(45년)로 미루어 박씨 어머니는 막내 따님으로 여겨집니다
둘째 아드님 동리 임위의 효심은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의 아래 글에 너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큰 아드님 타는
두째아드님 위가 세상의 명리를 초월한 현인 인데 비하여 큰 아드님 타는 활발한 공직 생활을 하셨습니다
큰아드님 타가 과거에 합격하여 공직에 처음 나가신 때가 광해10년 (1618년)인데 이 해는
인목대비 페위가 있었고 이 사건이 5년후 인조반정 (1623년) 시발점이 됩니다
인조반정때 큰아드님 타는 31세 두째아드님 위는 26세 ,집안의 어른 시아주버니 석촌공 서는 54세이셨습니다.
기록으로 미루어 큰아드님 타는 인조반정에 적극 참여 , 석촌공 서(1570~1624)는 인조반정은 참여치 않고
함경도관찰사로 인조반정 성공이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어난 이괄의 난 진압에 공적이 있습니다.
인조 반정은 서인이 세력을 잡는 계기가 됩니다
두째 아드님 위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인조 초기에 익위사 사직에 잠깐 도임하고 사직한 이후 여러 벼슬에
수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의 당파 갈등에 휘말리지 않고 형님 타 대신 집안을 지키고
홀로계시는 어머님을 봉양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 생각해 보는데 이는 두째 아드님 위가 후일 노론의 영수가 되는
우암 송시열 公과는 사계 김장생 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가까운 사이인 점을 감안한 저의 뇌피셜입니다
큰 아드님은 타는 세 분의 부인에게서
9남3녀를 두셨습니다 (첫째 부인 3남1녀
두째부인 4남 .세째 부인 2남2녀 )
그 중 큰 아드님 휘 일유가 저희 소뫼 임가
직계선조입니다
두째 부인의 소생 4분이 전북 진안 용담에서 일가를 이루어 몽촌공 타를 입향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두째 아드님 동리 위 께서는 1남2녀를 두셨습니다.
아버지 유호공이 좌승지로 어머님 박씨가 숙부인으로 추증되었는데 타 아드님의
정사 원종공신의 공적때문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찍이 돌아가신 부친 협의 묘갈명병서와 어머니 박씨의 묘기도 잘 전해져 국문으로 번역한 것이
대종가627 135쪽부터138쪽에 있는데
큰 아드님 타의 벗인 청음 김상헌이 짓고 글은 두째 아드님 위가 書하였군요
세 부자의 시를 엮은 것이 회진 세고 유호 몽촌 동리유고에 남아 있고
어려서 편모슬하에 두분이 외롭게 자라고 후세에 기록된 두분의 행적으로 미루어 형님 타가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하며 동생 위의 든든한 방패로 자랐을 듯 싶습니다
박씨 어머니의 인품은 친정아버지이신 회재 박광옥 공의 기록으로 보아 미루어 짐작이 가는군요..
두 형제의 우애에 관한 일화와 주고 받은 시문 등 좋은 글들이 있습니다
박씨 할머니는 39년을 남편없이 사셨지만 두 아드님이 효심이 남 달랐고
손주도 많으셔서 조금은 위안 받는 삶이 되셨으리라 감히 짐작 해봅니다.
큰아드님 몽촌(夢村) 임타 (林㙐) (1593~1664)
사진 : 관해정 (觀海亭: 무안 일로읍 회산 백련지 인근구릉 2009년 복원 )
종중에서는 상주공이라 칭하는 데 상주 목사를 지내셨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에 권비(權鞞)에게 수학하였고 천성이 어질고 재주가 뛰어나서 호남(湖南) 제일의 인물로 이름이 높았다. 1618년(광해군 10)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가 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 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금오랑 의금부 도사(金吾郞義禁府都事)를 제수 받았다.
이후 태인 현감(泰仁縣監),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 칠곡 부사(漆谷府使), 서산 군수(瑞山郡守), 함흥 판관(咸興判官), 오위장(五衛將), 금산 현감(錦山縣監), 이천 부사(利川府使), 상주 목사(尙州牧使), 부호군(副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며, 목민관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만년에 무안 회산마을에 관해정을 짓고 유유저적하셨다
지금의 관해정은 2009년 공을 기리기 위해 복원한 것이다.
속인도 아니요 ,승려도 아니면서 건도 아니쓰고 버선도 안 신었네
말쑥한 늙은이가 스스로 선계(仙界)가 서툰 것을 우스워하네
이글은 만년에 몽촌공께서 자신을 표현한
것으로 당신의 인간적 기품과 매력 그리고 삶의 여정을 압축하여 전해 주시는 듯하네요.
두째 아드님 동리(東里) 임위 (林㙔) (1597.12~1668)
동리(東里) 임공(林公)의 휘(諱)는 위이고 자(字)는 평중(平仲)인데, 나주(羅州) 회진(會津) 사람이다.
젊었을 때 어머니 명에 따라 초시(初試)를 보아 합격하였으나 번번이 성시(省試)는 보지 않았다.
인조(仁祖) 초기에 추천을 받아 상의원 별좌(尙衣院別坐)ㆍ경양도 찰방(景陽道察訪)ㆍ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에 임명되었는데, 일찍이 경양에 잠시 도임했다가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고 그 나머지는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효종(孝宗)이 큰 뜻을 분발하여 재야의 현인(賢人)들을 대대적으로 초빙할 때 품계를 뛰어넘어 공을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임명하였는데, 이때부터 연달아 금부 도사(禁府都事)ㆍ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ㆍ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ㆍ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임명하자, 공이 또 말하기를, “무릇 사람이 나가고 물러남에 있어 때와 힘을 헤아려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끝내 명에 따르지 않았다.
고을의 선비들과 방읍(旁邑)의 유생들이 공을 추대하여 산장(山長)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공이 또한 굳이 거절하자,
모두 읍하고 물러갔으니, 공은 지조가 견고하여 확연히 동요하지 않은 분이라고 이를 만하다.
현종(顯宗) 때에 특별히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하였는데, 소명(召命)이 문전에 이르렀을 때
공이 세상을 떠났다.
세상 사람들이 공이 시종 초연하여 세상에 물들지 않은 것을 보고 청신(淸新) 준일(俊逸)의 지조가 있다고 말하였으나
집과 향리에서 생활할 때 지성(至性) 순행(純行)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자세히 알지 못한다.
공이 태어나 돌이 채 되기도 전에 아버지 승지공이 세상을 떠나 장사를 치렀다.
가족이 왜구(倭寇)를 피하여 호서(湖西)로 갔다가 5세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고을의 경계에 이르자
공이 문득 “아버지 묘소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면서, 눈물이 흘러 그치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매양 외로움에 비통해 상심하면 또 곁에서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조금 장성하자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어머니를 섬기었는데, 항상 어머니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려고 힘쓰며 말하기를,
“어버이를 섬긴 사람은 도둑질을 제외하고 따르지 않을 것이 없다.”고 하였다.
날마다 곁에서 모시고 즐겁게 해드렸으며 비록 밤에도 번번이 떠나지 않고 어머니가 물러가라고 명한 다음에 물러갔다.
그러나 여전히 문밖에다 귀를 대고 편안히 잠든 것을 안 다음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동하여 몸에 땀이 나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어머니 침소로 달려가 보니,
병환이 이미 위독하여 어쩔 수 없게 되었으나 공이 급히 약을 썼기에 병이 나았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일기(一氣)가 감동하여 통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나 인욕(人慾)이 가려 막히게 되면 완고하여 깨닫지 못한다.”고 하니, 공은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게 어질다고 이를 만하다.
그 뒤에 또 대변의 맛을 보아 병세의 차도를 징험하였다.
어머니가 먹고 싶은 음식물이 절기에 나지 않았으므로 구할 수가 없는데다가 어머니 목숨이 사경에 놓였는데,
공이 하늘에 울부짖어 기도한 끝에 10여 일을 연명하였고 또한 그 음식물을 구하여 드리니, 어머니가 “매우 맛이 있다.” 하고,
그 뒤 며칠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공이 상례(喪禮)에 지나칠 정도로 거상(居喪)하였고 이미 상(喪)이 끝난 뒤에도 또 3년간 안방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또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헌자(獻子)는 보통 사람보다 한 층 더 높다고 하였는데,
1) 지금 공은 또 헌자보다도 더 높다.”고 하였다. 제사를 지낼 적에 엄숙과 공경을 극도로 하였고
나이 60이 지나도 여전히 몸소 예절대로 하였으며, 장마를 만날 때마다 묘소를 걱정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물이 혹시 스며들어가지 않은지 모르겠다.” 하고, 침식을 편안히 하지 못하였다.
백씨(伯氏)를 섬길 때 우애가 독실하고 지극하였는데, 백씨가 먼 곳에 부임하여 날짜가 오래되면 슬프게 생각하여
눈물을 흘렸고 또한 잘못이 있을 경우에는 깨우쳐 바로잡으면서도 화기 애애(和氣靄靄)하였다.
자제들을 가르칠 때는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일에 따라 올바른 도리로 지도하였으며,
가난한 일가를 도와줄 때는 유무를 계산하지 않았다.
흉년이 들었을 때 집안사람이 때를 틈타 전택(田宅)을 불리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비록 굶은 사람에게 두루 베풀지는 못할망정 어찌 차마 기회를 이용하여 스스로 이익을 챙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노복이 저자에 물건을 팔면서 지나치게 값을 받았을 경우에는 책망하여 되돌려 주게 하였으며,
항상 문을 닫고 자신을 지키면서 성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수령이 혹시 선물을 줄 경우에는 사양하거나 받는 바가 절도가 있었고
친구가 귀하여 출세해도 일찍이 문신(問訊)을 통하지 않았다. 대체로 공의 미덕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이른바 행실이 사람의 입에 자자한 자라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취향이 달라 험담을 잘 하는 사람이라도 감히 하자 하나도 덮어씌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도를 물어 마음에 터득하고 몸에 체험한 것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또 알지 못한다.
공이 일찍이 김 문원공(金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문하를 찾아가 수업하였는데, 선생이 애지중지하였고
그 가르친 바는 어느 하나도 자신을 위해 근독(謹獨)하는 실질적인 공부가 아닌 것이 없었으므로
공이 마음을 집중해 실행하여 무언중에 합치되는 바가 있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의 방법은 다른 것이 없고
다만 경의(敬義)일 뿐이다. 이 두 가지 중에 공경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어려우니, 한 순간이라도 간단되면
이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겉에 드러난 모양새에 있어 정말로 뚜렷한 허물과 후회를 면하려고만 한다면 그리 심하게 어렵지 않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조용히 앉아서 마음에 두어 책을 펴놓고 묵묵히 보아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끊임없이 순환하면 의미가 저절로 달라질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옛사람이 이르되 ‘천만 사람 가운데서 항상 자신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혼자 방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신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니,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공이 공부했음의 소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상 율곡(栗谷) 선생을 추존하면서 말하기를, “도(道)의 전체에 대해 저절로 자득(自得)하여 비교할 사람이 없다.” 하고,
출처(出處)의 의리에 대해 논함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자신과 시대를 헤아려 하여 시종 하자가 없는 사람은 퇴계(退溪) 선생 같은 분이 없다.”고 하였는데,
논자(論者)들이 “식견이 있는 말이다.”고 하였다.
대체로 공이 소유한 바가 이와 같은데도 항상 숨기고 겸양하여 가볍게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으려고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의 덕기(德氣)가 보통 사람보다 다르다는 것만 보고 본말과 천심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다 알 수 없었다.
시조(始祖) 임비(林庇)는 고려 충렬왕(忠烈王)을 섬겨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는데, 그 공훈은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다 증조(曾祖) 임붕(林鵬)은 조선조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참판(參判)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일찍이 태학생(太學生)의 신분으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억울한 점을 밝히어 중대한 명성이 있었다.
할아버지 임복(林復)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판서(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임협(林悏)은 선교랑(宣敎郞)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 박씨(朴氏)는 지평(持平) 박광옥(朴光玉)의 딸이다.
공은 참봉(參奉) 오언표(吳彦彪)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임지유(林之儒)는 참봉(參奉)이고, 딸은 박세해(朴世楷)와 양화남(梁華南)에게 각각 시집갔다.
참봉은 6남을 낳았는데, 임수(林滫)ㆍ임명(林溟)ㆍ임철(林澈)ㆍ임옥(林沃)ㆍ임식(林湜)ㆍ임해(林澥)이고,
박세해의 아들은 박태우(朴泰宇)ㆍ박태형(朴泰衡)ㆍ박태항(朴泰恒)이다.
나는 공과 동문(同門)의 벗이다.
나의 성품은 치우치고 박잡하며 거칠고 얕으므로 매양 공의 차분하고 순후한 것에 감복한 나머지 항상 만분의 일이라도
본받으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공의 종손(從孫)인 덕함(德涵) 임영(林泳)이 지은 행장을 보니, 사실만 기록하고 쓸데없는 것을 삭제하여
그의 말이 질박해 증거할 수 있으므로 공이 금세의 선비가 아닌 것에 대해 더욱 감탄하였다.
전(傳)에 이르기를, “세상이 어지러울 때 법도를 고치지 않는 군자를 생각한다.”고 하였는데, 공을 두고 이른 말이 아니겠는가?
공은 만력(萬曆)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태어나 숭정(崇禎) 무신년(戊申年, 1668년 현종 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묘소는 고을의 경내 삼향리(三鄕里) 군산동(君山洞)에 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석담(石潭)과 퇴계(退溪)의 방 이름에 경의(敬義)가 있다고 하였도다.
삼가 생각건대 문원공은 바로 그 문하를 거치었도다. 공이 찾아가 도를 물었으니 여기에 대해 들은 것이 있었도다.
매양 마음속으로 경계하여 그 마음을 보존하였도다. 이로써 바깥 행실을 바르게 하매 단정하여 분란하지 않았도다.
공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이 말을 질정해보기 바라노라.
출처 : 임위의 묘지명(墓誌銘) 저자 송시열(宋時烈 원전 :국조인물고 권35 휴일(休逸)
각주 1) 성인은 공자(孔子)이고 헌자는 노(魯)나라 대부 맹헌자(孟獻子)이다.≪예기(禮記)≫ 단궁상(檀弓上)에 “맹헌자가 담제(禫祭)에 이르러 상복(喪服)을 벗은 뒤에도 악기를 걸어놓은 채연주하지 않고 안방에도 들어가지 않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헌자는 보통 사람보다 한층 더 높다.’”고 하였음.
친정아버지 회재(懷齋) 박광욱 (1526~1593)
(회재로는 광주광역시 남구 주월동과 나주 남평읍 광이리를 연결하는 도로 총길이15.5km 6차선 도로로
회재의 도로명칭은 임진왜란시 의병장을 이끌었던 박광옥의 호에서 유래되었다 )
선생의 성은 박이고 이름은 광옥(光玉)이고 자(字)는 경원(景瑗)이다.
그 조상의 본관은 음성(陰城)인데,
4대조 태학 생원(太學生員) 박계양(朴繼陽)이 비로소 광주(光州)에 살아서 자손이 드디어 광주 사람이 되었다.
선생은 지극히 착한 성품이 있었다. 7세에 아버지가 별세하였는데 곡읍(哭泣)하여 상례(喪禮)를 지켰으므로
이미 선행으로 알려졌고, 자라서는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집에서는 조상을 제사할 때에
예절이 매우 갖추어졌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어질게 여겼다.
21세에 상상(上庠)에 올랐고,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년~1566년) 중에 향교를 중수하였는데,
선생이 학규(學規)를 만들고 재물을 내어 학전(學田)을 늘렸으며,
가숙(家塾)을 세워 생도를 가르쳤는데 제자가 날로 진취하였다.
어머니가 별세하였을 때에 장사하고 나서도 죽을 먹고 곡읍하여 거의 목숨을 잃게 되었으므로,
목사(牧使) 최응룡(崔應龍)이 예(禮)로 권면(勸勉)하여 신주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우리 소경왕(昭敬王, 선조)이 즉위하고 재주와 학문이 있는 선비를 징소(徵召)하여 서용(敍用)할 때에
어느 대신이 천거하여 내시 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다.
3년 뒤에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에 오르고, 곧 운봉 현감(雲峯縣監)에 보임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으므로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였다.
도임하고 나서는 현학(縣學)을 중수하고 납세한 여분 수백 곡(斛)의 곡물을 내어 유생(儒生)들에게 공급하고
고을 안 자제를 뽑아 날마다 거처하며 강학(講學)하게 하였다.
고을을 떠나고 나서 부로(父老)가 비석에 새겨 그 치적을 기념하였다. 그 뒤에 전라도ㆍ충청도의 도사(都事)가 되었다. 기묘년(己卯年, 1579년 선조 12년)에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들어오고 기주관(記注官)을 겸하였다.
1년 뒤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옮기고 이윽고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개차(改差)되었다.
여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되어 성절(聖節)을 축하하고 돌아와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으며,
여러 번 옮겨서 상례(相禮)가 되고 편수관(編修官)을 겸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에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나갔고,
이듬해에 성균관사예 지제교(成均館司藝知製敎)로 소환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고,
3년 뒤에 다시 밀양(密陽)으로 나갔다.
선생이 번번이 수령(守令)이 되면 반드시 사대부(士大夫)를 예(禮)로 접대하여 정치의 요령을 논하고 오로지 학교를 일으키는 것을 힘썼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다시 사예로 들어오고 사섬시 정(司贍寺正)을 거쳐 곧 봉상시(奉常寺)로 옮겼는데 병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여름에 왜구(倭寇)가 있어 고을들이 다 궤산(潰散)하였다.
적이 상주(尙州)를 함락하게 되니, 선생이 목사 정윤우(丁允祐)를 만나 말하기를,
“적이 재[鳥嶺]를 넘으면 서울이 위급해질 것인데, 공은 어찌하여 관찰사에게 말하여 급히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경기로 가서 서울을 방위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정윤우가 옳게 여기고 곧 그 계책을 따랐으나, 관군이 이미 잇달아 패하고 적이 장구(長驅)하였다.
5월에 임금이 서쪽으로 거둥하고, 또 전라도의 군사가 공주(公州)에서 패하였으므로 인심이 크게 어지러웠는데,
선생이 김천일(金千鎰)ㆍ고경명(高敬命)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칠 것을 꾀하였다.
약속이 정해지고 나서 고경명이 담양(潭陽)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선생은 병 때문에 가지 못하고
자제를 불러모아 군량과 기계를 준비하여 병세(兵勢)를 도왔다.
김천일이 선생에게 글을 보내어, “대군(大軍)이 한번 나가면 근본이 굳지 못하여 믿을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용병(用兵)이 이롭고 이롭지 못한 것은 그 권모(權謀)가 오로지 족하(足下)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이때 권율(權慄)이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는데, 수성(隋城)에서 불리(不利)하고부터 늘 분하게 여기고
날마다 군현(郡縣)에 격문을 전하여 의병을 불러모으니, 흩어진 군사들 중에서 조금 응하는 자가 있었다.
선생이 부로(父老)들을 근방 고을에 나누어 보내어 깨우쳐서 수천 인을 보내니,
권율이 크게 기뻐하여 매사에 반드시 선생에게 자문하였다.
7월에 판교(判校)에 제수되고 이윽고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개차되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병이 심하기는 하나 의리가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 하고,
고을에 이르러서는 어려움을 견디며 사람들의 마음을 합하게 하고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다시 적을 칠 성세(聲勢)를 펴려 하였다.
계획은 정해졌으나 병이 위독하여 해직되어 돌아와 그해 10월 병오일(丙午日)에 별세하니, 사람들이 다 애석히 여겼다. 임종에 검소하게 장사하라고 유언하였으므로 윤달 정유일(丁酉日)에 곽(槨)을 쓰지 않고
운동(雲洞)에 장사하였는데, 운동은 그 선대 묘소가 있는 곳이다.
선생은 덕기(德器)가 매우 도탑고 화평하되 능히 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되 두려워하게 하였으며,
남을 대하여 남의 잘못을 말한 적이 없고 남의 착한 것을 칭찬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의리에 어그러지면 남에게서 받지 않고 남에게 주지도 않았다.
그 학문은 만년에 더욱이 역경(易經)ㆍ예경(禮經)에 마음을 썼고, 또한 널리 배우고 많이 통달하였으므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ㆍ옥계(玉溪, 노진(盧禛))ㆍ사암(思菴, 박순(朴淳)) 등 노덕(老德)들이 칭찬하고 허여하였다 한다. 절검(節儉)을 좋아하였으므로 고을을 여러 번 맡았으나 음식이나 객사를 꾸미지 않았는데,
혹 이것을 말하면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마시고 먹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니,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고 따랐다.
일찍이 운동에 숭본당(崇本堂)을 세우고 노비를 내어 분묘의 제사에 이바지하게 하고,
번번이 초하루ㆍ보름에 종족의 자제를 거느리고 성실하게 설명하고 예를 행하였으며,
향리(鄕里) 사람들과 약조를 세웠는데 한결같이 풍속을 도탑게 하고 인륜을 도탑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그 거처하는 실(室)에 편액(扁額)하여 회재(懷齋)라 하였으므로 학자가 ‘회재 선생’이라 칭하며,
선생이 별세하고 9년 뒤에 남방의 학자가 사당을 세워서 향사(享祀)를 끊지 않는다.
선생의 3대 전부터 광주에 살았다. 큰아버지 박붕(朴鵬)은 한림(翰林)이었고 아버지 박곤(朴鯤)은 사예(司藝)이었으며, 선생은 남방 고을에서 존중되므로 명족(名族)이라 부른다.
어머니 윤씨(尹氏)는 본관이 해평(海平)이며 경안도 찰방(慶安道察訪) 윤인손(尹仁孫)의 딸이다.
선생은 명나라 세종(世宗) 가정(嘉靖) 5년 곧 우리 공희왕(恭僖王, 중종) 21년(1526년) 정월 기유일(己酉日)에
출생하여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萬曆) 21년 곧 우리 소경왕(昭敬王, 선조) 26년(1593년)에 별세하였으니,
향년 68세이다. 선생은 아들이 없고 사위가 네 사람인데,
예조 정랑(禮曹正郞) 유사경(柳思敬)과 사인(士人) 노사첨(盧士詹)ㆍ김융지(金隆址)와 선교랑(宣敎郞) 임협(林悏)이다. 지금 노사첨과 유사경은 후사가 없고
외손은 전 상주 목사(尙州牧使) 임타와 전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 임위와 사인 김기(金圻)인데 다 자손이 매우 많다.
저희 소뫼 임가의 직계는 17세 협-타-일유- 정-회 으로 이어집니다
사진 : 소뫼 나주임씨 직계 : 17세 음성 박씨 할머니 족보기록
2023.6.13 정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