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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회 마카베오기 상권 1장-8장
이제 드디어 역사서의 마지막 장 '마카베오기'를 읽을 차례이다. 상ㆍ하권 2권으로 이뤄진 이 책의 이름은 기원전 167년에 유다를 지배하던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항해 일어난 유다인 항쟁의 중심 인물인 유다의 별명인 '마카베오'에서 유래한다. 뜻은 분명치 않지만 '원수를 때려 눕히는 망치'를 의미한다고 통속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마카베오기 상 하권은 유다교 경전에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예로니모 성인은 이 책을 외경으로 여겼고 나중에 개신교에서도 그렇게 분류하였다. 그렇다고 교부들이 마카베오기를 덜 인용하거나 낮게 평가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4세기 말부터서야 경전 목록에 나타나는데, 가톨릭교에서 이 책이 경전에 속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논란이 끝나는 것은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 때였다. 루터는 마카베오 상권이 경전에 속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였다.
마카베오 상하권은 헬레니즘 시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려 주는 유일한 책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셀레우코스 4세 통치 말기인 기원전 176년부터 유다의 대사제 요한 히르카누스가 즉위하는 기원전 134년까지 반세기 가량의 역사만을 다룬다. 그 때에 유다 땅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속국이었다. 안티오키아를 수도로 하는 셀레우코스 제국은 지중해에서 이란의 평원 지대까지 넓게 펼쳐져 있었으나, 로마인들과 파르티아인들의 압박과 끊임없는 왕위 계승 분쟁으로 급속히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마카베오 상권과 하권은 주제가 비슷하다. 유다 마카베오와 그 형제들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유다 민족의 자주 독립을 되찾고,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기원전 175-164년) 말살하려던 종교의 자유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책은 서로 독립적이면서 다루는 시기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마카베오기는 전부 그리스 말로 전해진다. 그리고 하권은 본디부터 그리스 말로 쓰여졌다.
이 두 책에서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양음력(태양력과 태음력)에 따라 사건들을 기록한다. 곧 태양의 한 해 주기와 달의 한 달 주기를 혼합하여 계산하는 달력으로 춘분이나 추분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보는 달력이다. 상권은 일반적으로 가을을 기준으로 하는 계산법을, 반면에 하권은 봄을 기준으로 하는 계산법을 따른다. 가을 기준 달력에 따르면 셀레우코스 왕조가 안티오키아에서 시작한 것이 (기원전 46년부터 사용되는 율리우스력으로) 기원전 312년 10월 7일이 되고, 봄 기준 달력에 따르면 기원전 311년 니산 달(춘분 다음 첫째 달) 초하룻날 곧 (율리우스력으로) 4월 3일이 된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이 양음력은 바빌론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이용되었다. 이렇게 하여 봄 기준의 달력은 1마카 1,54; 2,70; 4,52; 9,3.54; 10,21; 13,41.51; 14,27; 16,14에 해당된다. 여기에서는 성전과 관계된 일이나 유다 내부의 역사와 관련된 연대들이 제시된다.
주요내용
마카베오기 상권은 유다 마카베오, 그리고 그의 두 형제 요나탄과 시몬의 무용담을 차례로 엮은 삼부작이다. 시몬은 유다 땅에 하스몬 왕조를 창시한 사람이다. 저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 후계자들, 특히 유다 지방에 그리스 관습과 문화를 강요하려고 했던 에피파네스의 시도를 입문으로 간략하게 소개한 다음(1장), 마타티아스 사제와 그 아들들의 반란 이야기로 들어간다(2장).
첫째 부분은 마타티아스의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베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유다 군대의 장수로 임명된 마카베오는 기원전 166년부터 160년까지 여섯 해 동안 독립 투쟁을 지휘한다(3장 - 9,22). 그는 먼저 에피파네스라고 불리는 안티오코스 4세가 페르시아에 원정을 가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유프라테스 강 서쪽 지역을 담당한 리시아스 총독을 공격한다(3장 - 4,35). 마카베오 상권은 이어서, 에피파네스가 더럽힌 성전을 유다가 정화시킨 일과 주위 민족들을 굴복시킨 사실을 다루고(4,36 - 5장), 에피파네스의 죽음도 알린다(6,1-17). 같은 내용을 마카베오 하권도 전하는데, 먼저 9장에서 에피파네스의 죽음을, 그리고 10장에서 성전 정화를 이야기하는 이 하권의 순서가 더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하권에도 순서의 혼동이 없지는 않다. 11장에 나오는 편지들이 그 좋은 예이다.
에피파네스의 아들 안티오코스 5세의 통치 때에 리시아스가 시도한 제2차 원정은 마카베오에게 이로운 쪽으로 결말이 난다(6,18-63). 그 뒤에 셀레우코스 4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자기 조카 안티오코스를 밀어 내고 왕위를 차지한 다음, 리시아스를 바키데스로 교체한다. 그리고 데메트리오스 1세와 바키데스는 유다의 대사제 알키모스의 사주를 받고, 유다 마카베오의 유격 부대를 추격하게 한다. 그러나 마카베오는, 데메트리오스 1세가 유다 지방 담당 장수로 임명한 니가노르에게 대승을 거둔다(7장). 바로 이 날에(기원전 160년 3월 28일) 니가노르가 죽는데, 하권은 이 사건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상권은 로마인들에 관한 특이한 찬사에 이어(8장), 바키데스가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돌아와 전투를 벌이는데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마카베오가 명예롭게 전사한다는 이야기를 전한다(9,1-22).
둘째 부분에는 요나탄이(기원전 160-143년) 등장한다(9,23 - 12장). 요나탄은 데메트리오스 1세와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2세가 처음에는 에피파네스의 손자 노릇을 하는 알렉산드로스 발라스와, 다음에는 트리폰과 싸우는 기회를 적절히 이용한다. 트리폰은 먼저 알렉산드로스의 어린 아들 안티오코스 6세의 이름으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나중에는 자기가 직접 다스린다.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152년에 대사제로 임명한 요나탄은 트리폰과 동맹을 맺지만, 트리폰이 배신하는 바람에 붙잡혀 포로가 되고 만다.
그래서 시몬이 요나탄의 뒤를 잇는다. 그러나 트리폰이 시리아로 돌아가기 직전에 요나탄을 처형하는데(기원전 143년 말; 13,23-24) 시몬은 이 일을 막지 못한다. 이 불행한 사건을 빼면, 대사제이며 영주인 시몬의(기원전 143-134년) 업적을 다루는 셋째 부분의(13 - 16장) 시대는 평온한 때였다.
시몬은 유다의 성읍들을 튼튼하게 하고 야포와 가자라, 그리고 예루살렘 성채를 점령한다(기원전 141년 6월; 13,51). 기원전 142년 5월에 시몬이 데메트리오스 2세와 다시 관계를 맺는데, 데메트리오스 2세는 기원전 145년에 가서야 협약 내용을 인준한다(13,35; 11,30). 데메트리오스 2세의 동기로서 파르티아인들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안티오코스 7세도 기원전 139년에 유다인들에게 특전을 인정하지만(15,1), 트리폰을 제거한 다음에는 시몬에게 등을 돌린다(15,25-41). 시몬은 나이를 먹자 자기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에게 전권을 이양한다. 이 요한은 안티오코스 7세가 해안 지역 수장으로 임명한 켄데배오스를 패배시킨다(16,1-10). 얼마 뒤에 시몬은 사위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살해되지만, 요한 히르카누스는 자기까지 죽이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흉계를 미리 알아차려 암살자들을 처단하고 정권을 장악한다(16,11-24). 그 전에 시몬은 스파르타와 로마와 맺은 계약을 갱신하고(14,16-24; 15,15-24), 지중해 동쪽 전 지역의 왕국들과 성읍들과 관계를 맺어 놓았다(15,22-23).
문학형식과 목적
요세푸스 시대부터 우리 시대까지의 역사가들은 마카베오기 상권을 역사적인 가치 때문에 높이 평가한다. 영웅들의 승리만이 아니라 패배까지 묘사하는 저자의 정직성뿐 아니라 지형과 연대의 세부사항들이 이 가치를 증언한다.
그러나 저자의 궁극적인 집필 목적은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들”(5,62)인 마카베오 사람들을 찬미하는 데 있다. 그는 홍보가의 관점을 취한다. 그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가들의 문체를 본뜨면서 마카베오 사람들의 승리를 강조할 목적으로 파견된 군대의 규모를 과장한다. 비록 저자가 패배를 기록하기는 하지만 승리를 더 부각시키고 패배는 축소한다. 저자는 마카베오의 독립 투쟁을 세계를 뒤흔든 사건, 로마와 스파르타에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본다.
이 특이한 역사 장르에는 사건에 대한 윤리적인 비난과 냉정한 서술이 포함되어 있다. 스타일은 때로는 직접적이고 단순하며, 때로는 저자가 상세한 역사에서 시적 찬미가로 바꿀 때처럼 생동감있고 열정적이다.
① 저자와 저술 시기 : 마카베오기 상ㆍ하권의 저자와 저술 시기는 서로 다르다. 먼저 상권을 살펴보면, 저자는 분명치 않지만 유다교 전통과 문화를 지극히 존중하고 하스모네아 가문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유다인으로 여겨진다. 상권이 로마에 대해 호의적이고 대사제 요한 히르카노스(기원전 134~104)에 관한 기사로 끝나는 것으로 봐서 기원전 140~100년 사이에 히브리어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히브리어 원본은 없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역본만이 남아 있다.
하권은 오히려 상권보다 먼저인 기원전 124~63년경(2마카 1,9 참조)에 이집트에서 그리스어로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키레네 출신 유다인 야손이 유다 마카베오에 관한 기록과 전설 등을 모아 5권으로 저술한 내용을 1권으로 요약ㆍ편찬한 것으로 볼 때 그리스어 수사법에 매우 능숙하면서도 하스모네아 왕조에 비판적인 정통 유다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② 상ㆍ하권의 관계 : 상권은 안티오코스 4세의 즉위가 있던 기원전 175년에서 시작하여 시몬 마카베오의 죽음(기원전 134년)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권은 기원전 176년에서 161년까지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그 결과 마카베오기 상권 1-7장은 마카베오기 하권 4-15장과 거의 병행을 이룬다. 특별히 마카베오기 상권은 마카베오 가문의 이야기를 집중하여 그들의 정치, 종교적 권위를 정당화하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두 책이 전하는 내용이 상이하다. 상권과 하권의 관점이 서로 다른 것이다. 상권이 민족주의적인 차원에서 마카베오 가문의 항쟁을 전함으로써 정치적 차원에서의 독립을 부각시키고 있다면, 하권은 종교적 차원에서 하느님의 권능과 다가올 메시아 왕국을 부각시키고 있다. 특별히 대사제를 둘러싼 유다 내부 사회의 갈등, 성전에 대한 강조와 이를 모독하려는 니카노르의 파멸, 박해에 성실한 신앙으로 무장한 모범들을 강조하는 내용을 통해 보다 전례적이고 신앙적인 차원에서의 내용을 전개한다. 하권은 상권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는 책이 아니고 그 속편도 아니다.
또한 상권은 팔레스타인적 기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본래 히브리말로 기록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하권은 헬레니즘적 기원을 가지고 있어서 본래부터 그리스말로 저술되었다. 사용하고 있는 달력도 모두 셀레우코스 달력을 사용하고 있지만 상권은 한 해의 시작을 가을로 설정하고 있고, 하권은 한 해의 시작을 봄으로 설정한다. 따라서 셀레우코스력 제1년 1월1일은 상권에서는 기원전 312년 10월 7일이고, 하권은 311년 4월 3일이 된다.
③ 신학적 메시지 : 마카베오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신학적 특성은 철저한 유일신 사상에 있다. 그래서 하느님이란 호칭 대신에 '하늘'(1마카 3,19.50; 4,10 등), '그분'(1마카 2,61), '당신'(1마카 7,37.41)이란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또 한 가지 특성은 자비하시고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고 도와주신다. 그런 의미에서 마카베오 형제들이 거둔 놀라운 승리는 그들의 용맹이나 군사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뤄주신 일이라고 마카베오기는 고백한다.
그 밖에도 마카베오기는 엘아자르와 일곱 형제의 순교 장면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 책은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순교신학과 의인의 부활사상을 전해주고 있다.
④ 구조와 내용 : 마카베오기 상권은 기원전 175년부터 134년까지 일어난 마카베오 전쟁의 역사를 소개하는데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문에 이어 유다, 요나탄, 시몬을 다루는 세 부분이 이어진다.
㉠ 1마카 1,1~64 : 머리말.
㉡ 1마카 2,1~70 : 저항운동을 시작한 마타티아스.
㉢ 1마카 3,1~9,27 : 유다 마카베오의 항쟁과 승리.
㉣ 1마카 9,28~12,53: 새 지도자인 요나탄의 승리.
㉤ 1마카 13,1~16,24 : 영구적 지도자가 된 시몬.
△ 마카베오기 하권 역시 다섯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 2마카 1,1~2,18 : 이집트의 유다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 2마카 2,19~32 : 저자의 머리말.
㉢ 2마카 3,1~4,50 : 대사제직의 타락.
㉣ 2마카 5,1~7,42 : 안티오코스 4세와 그리스화 운동.
㉤ 2마카 8,1~15,39 : 유다 마카베오의 승리와 성전 재봉헌.
1마카 1,1-63 안티오코스 4세와 박해
마카베오기 상권의 서문은 알렉산드로스의 행적을 알림으로써 앞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역사가 소개될 것을 암시한다. “키팀 땅 출신의 마케도니아 사람으로, 필리포스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인들과 메디아인들의 임금 다리우스를 쳐부순 다음, 그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 이전에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를 다스리고 있었다”(1). 키팀은 본디 키프로스의 키티온에 살던 주민들을 가리킨다. 그러다가 키프로스 섬 전체, 그리고 에게 해의 섬들과 마케도니아의 해안지방을 가리킨다.
마케도니아의 임금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정복 활동을 펼쳐 페르시아 제국을 정벌하고 온 세상의 임금들을 죽여 넓은 영토와 제국을 확보한다. 그는 12년간(기원전336년-323년) 통치하였고, 안타깝게도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제국은 그의 부하 장수들에 의해 나뉘고 통치하였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분할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기원전 301년에야 결정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이민족의 풍습을 따르며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쳐 정복했다. 또한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박해했다.
1장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해 짧게 요약한 후(1,1-9), 안티오코스 4세 이야기와 기원전 169년에 일어난 그의 성전 약탈(2마카 5,15-26 참조), 그리고 기원전 167년에 있었던 ‘미시아의 수령’의 두 번째 공격으로 빠르게 전개된다.
“그들에게서 죄의 뿌리가 나왔는데, 그가 안티오코스 임금의 아들로서 로마에 인질로 잡혀갔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이다. 그는 그리스 왕국 백삼십칠년에 임금이 되었다”(10).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안티오코스 3세의 막내 아들이다. 기원전 190년 말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 군대에게 패배한 안티오코스 3세는 에페소에서 막내 아들을 로마인들에게 인질로 넘겼다. 이 막내 아들은 로마에서 13년간 인질 생활을 하였다. 한편 안티오코스 3세는 기원전 187년에 죽고 에피파네스의 형인 셀레우코스 4세가 그 뒤를 잇는다. 그러자 로마인들은 에피파네스를 풀어주고 그 대신 셀레우코스 4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인질로 삼는다. 기원전 175년 셀레우코스 4세가 죽자 그의 어린 아들 안티오코스가 왕위에 오르지만, 우여곡절 끝에 에피파네스가 실권을 잡는다. 그는 나이 어린 임금을 양자로 삼았다가 마침내 기원전 170년에 죽여 버린다. 이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75년부터 기원전 164년까지 셀레우코스 왕국을 다스린다.
기원전 200년경에 셀레우코스 왕조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되면서 예루살렘의 하느님 백성은 셀레우코스 지배에 굴복해야 했다. 처음 안티오코스 3세 치하에서는 그 복종이 그렇게 굴욕적이지만은 않았다. 사실 안티오코스 3세는 폭군이었지만 종교적으로는 관대한 편이었다. 셀레우코스 가문의 임금들은 북시리아에 있는 자기네 수도 안티오키아에서 통치했다. 그들은 로마의 세력에 대항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많은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에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로마인들은 설레우코스 왕조에게 과중한 조공을 강요함으로써 그들에게 자기네 의지를 관철시켰고, 조공을 확실히 징수하기 위하여 조공을 받을 때까지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을 인질로 삼아 로마에 잡아 두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인들의 뜻대로 조공을 고스란히 갖다 바치지는 않았다. 그의 계승자인 셀레우코스 4세도 역시 그 목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했으면서도 조공을 전부 바치지는 않았다. 셀레우코스는 자신의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그러자 로마는 셀레우코스 가문의 왕위를 물려받게 되어 있는 인질을 풀어 주기로 결정했다. 이 인질이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이름으로 왕좌에 올랐는데, 그 이름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에피파네스는 ‘발현, 공현’이라는 뜻으로, 이 경우에는 그리스의 최고 신인 제우스의 발현을 뜻한다. 그는 자신이 바로 신 자체는 아닐지라도 신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에게 복종하기 싫어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에피파네스라는 그의 이름을 에파마네스, 즉 ‘미친놈’을 바꾸어 불렀다.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헬레니즘이라는 공통된 문화 안에 자신에게 예속된 모든 사람들을 통합하고자했다. 그러기에 그는 예루살렘 안에 헬레니즘에 호의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고는 기뻐했다.
안티오코스는 기원전 175년에 통치를 시작했다. 이때에 대사제 오니아스 3세의 동생 야손이 예루살렘의 “변절자들”(11절)을 이끌었다. 이 야손(이 이름은 그리스식 이름이다)은 헬레니즘을 장려하고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환심을 사려고 안달을 했다(2마카 4장). 야손은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에게 많은 돈을 갖다 바침으로써 자기 형인 오니아스 3세를 내쫓고 대사제직을 ‘샀다’. 그러나 야손의 지위는 안전하지 못했다. 메넬라오스라는 사람이 대사제직에 대한 값으로 더 많은 돈을 안티오코스에게 바치고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메넬라오스는 오니아스를 암살하도록 했고, 야손은 목숨을 구하려면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분개한 야손은 용병을 사서 예루사렘을 공격했으나, 꽤 심각한 유혈 사태를 벌인 후 전투에서 패하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다시 도망가야 했다(2마카 5장 참조)
헬레니즘에 동조하는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세우고 싶어했던 경기장은 그리스식 체육 ‘궁전’이며 문화 센터 역학을 하는 곳으로, 운동 경기와 경신례, 그리고 연구가 함께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세운 경기장은 충실한 하느님 백성들에게는 충격적이고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이 재난의 신학적 배경은 어떤 유다인들이 ‘거룩한 계약’을 지키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들은 “거룩한 계약”(1,15; 2마카 4장 참조)을 저버린 “변절자”(1,11)로 묘사되는 헬라계 유다인들이다.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렸다. 이렇게 그들은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15). “할례 받은 흔적을 업애고”의 직역은 “자신들을 위하여 포피를 만들고”라고 말할 수 있다. 할례는 근동 지방의 많은 민족들 사이에서 실시되었지만, 그리스인들은 몸의 일부를 제거하는 이러한 관습을 보기 흉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식 경기장에서는 모두 발가벗은 채 경기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유다인들은 물론 다른 민족들에게도 충격적인 관습이었지만, 그리스화된 유다의 젊은이들 가운데 그리스인들처럼 발가벗고 운동 경기를 할 때 할례의 표시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그 흔적을 지우려고 수술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안티오코스의 억압은 충실한 유다인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2마카 6-7장 참조)와 ‘황폐의 혐오스러운 것’을 세우는 것으로 묘사된 성전 파괴에서 절정에 이른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성전에서 보화를 약탈하는 행위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반란은 진압하고, 헬레니즘 운동을 팔레스타인에서 기어코 성공시키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성전 약탈 후 2년쯤 뒤에 안티오코스는 아폴로니우스(2마카 5,24)라 불리는 자기네 미시아인 용병들의 사령관을 예루살렘에 보냈다.
“이태 뒤 임금이 유다의 성읍들에 조공 징수관을 파견하니, 그자가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들어왔다. 그가 평화로운 말로 주민들을 속이자 그들은 그를 믿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그 도성을 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히고 이스라엘 백성을 많이 죽였다.또한 이 도성을 약탈한 다음 불을 지르고 집들과 주위의 성벽을 허물었다.”(29-31).
“이태 뒤”란 기원전 167년에 발생한 사건이다. 안티오코스의 부하는 음험하게도 속임수를 써서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들을 방어하지 못하게 했고, 성벽을 파괴하여 예루살렘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그들은 또 성채를 세워서 셀레우코스 군인들과 민족을 배반하고 안티오코스 군인들 편으로 넘어간 예루살렘의 반역자들을 주둔시킬 요새로 삼았다.
이제 예루살렘은 밤낮으로 에피파네스의 군인들에게 감시를 받게 되었다. 요새가 성전을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높게 세워졌다. 하느님 백성 가운데 경건한 모든 사람에게 이는 크나큰 치욕이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최악의 사태가 닥쳐올 것이다.
“임금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 이민족들은 모두 임금의 말을 받아들였다.”(41-42).
하느님 백성들은 과거에도 많은 사람들이 박해와 고통을 당했는데, 그들은 참된 신앙을 지키고자 생명까지도 바쳤다. 그러나 종교 박해가 노골적으로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이제 그들은 다름 아닌 바로 자신들의 신앙과 종교 행위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된다.
우상을 숭배하느니 신앙을 위해 차라리 죽음을 택한 이들은 참된 순교자들이었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칙령을 내려 팔레스타인에 사는 하느님 백성의 공식적인 법률이던 모세의 율법을 폐지하고 헬레니즘 법률을 강요했다. 하지만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율법을 공식적인 법률로 삼도록 허용했었다. 뿐만 아니라 ‘미친놈’이라 부리던 에피파네스의 아버지 안티오코스 3세 역시 모세의 율법을 인정했었다. 하지만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모세 율법의 준수를 불법적이며 사형에 처할 행위로 간주하여 그것을 폐지하였던 것이다. 이 칙령의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백성 중에는 안티오코스의 세력과 결탁하는 이들이 있었다(52절). “백성 가운데 많은 이들이 저마다 율법을 저버리고 감독관들에게 동조하여, 이 땅에서 나쁜 짓들을 저질렀다”(52).
치욕의 절정은 안티오코스가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54절)을 세운 일이었다. 그는 기원전 167년 12월 8일 주님의 성전 정면, 희생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번제 제단 꼭대기에 이교 제단과 우상을 세웠다(54.59절). “백사십오년 키슬레우 달 열닷샛날, 안티오코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54-55).
경건한 하느님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라도 그것은 독성(瀆聖)이었다. 그러나 하느님 백성 가운데에는 여전히 그에 동조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현대적’이고 ‘시대에 맞는’ 백성이 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배타주의는 오히려 이스라엘에 불이익을 가져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1마카 1,11 참조). 그들이 보기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민족들 사이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열성가들은 단지 득세하고 있는 헬레니즘화 운동에서 예루살렘과 그 주민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완고하고 편협한 마음의 소유자들일 뿐이었다. ‘결국 천상의 주 하느님이라고 부르건 제우스라고 부르건 최고의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지.’ 하고 그들은 생각했다.
기원전 167년 12월 17일 이교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이 바쳐졌다. 적어도 하느님 백성 가운데 충실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행위는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헬레니즘 문화가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정신을 가졌다고 믿는 헬레니즘 옹호자들에게는 틀림없이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일이었으리라.
1마카 2,1-70 마타티아스의 혁명과 죽음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호의적인 움직임은 작은 마을들에서보다 더 많은 추종자들이 있던 예루살렘에서 활발하게 일어났으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칙령은 시골 마을과 촌락들에도 똑같이 영향을 주었다. 그 칙령에 대한 공개적인 저항의 첫 신호는 작은 마을들 중 한 곳에서 나타났다.
“그 무렵에 요야립 가문의 사제로서, 시메온의 손자이며 요하난의 아들인 마타티아스가 예루살렘을 떠나 모데인에 자리를 잡았다. 그에게는 아들이 다섯 있었는데, 가띠라고 하는 요하난, 타씨라고 하는 시몬, 마카베오라고 하는 유다, 하우아란이라고 하는 엘아자르, 그리고 아푸스라고 하는 요나탄이다”(1-5). 1역대 24,7에 따르면 요야립(여호야립)은 24개조로 나뉜 사제들 가운데 제1조의 수장이었다(느헤 11,10). 마타티아스는 ‘주님의 선물’을 뜻하는 히브리 말 이름 마티트야 또는 마티트야후를 그리스 말식으로 음역한 것이다.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마타티아스를 하스모네오스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하스몬 왕조’의 이름이 유래한다. 모데인은 예루살렘 북서쪽 28킬로미터 지점에 있던 곳으로, 나중에 시몬이 이곳에 가족묘와 기념비를 세운다(13,27-30). 마카베오라는 뜻은 ‘망치, 망치같은 이, 망치질하는 이’ 또는 ‘주님의 표지’ 등으로 이해된다. 아무튼 이 이름이 장차 이 집안 전체의 이름이 되고 책 이름까지 된다.
마타티아스의 다섯 아들 가운데, 세 아들 유다와 요나탄과 시몬이 아버지의 뒤를 잇는다. 요하난은 유다가 전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되고, 엘아지르는 벳 즈카르야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율법은 예루살렘 밖에서는 참되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라도 희생 제사를 바칠 수 없도록 금하고 있었다. 사제 마타티아스는 거룩한 성전 밖에서 희생 제사를 바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사람이었다. 이 이야기에는 희생 제사가 바쳐지는 신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그 신이 어떤 신인가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희생 제사가 예루살렘 밖에서 거행되려 하고 있었고, 이교인 임금의 사신에 의해 지시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타티아스에게 있어 그것은 우상 숭배였다. 희생 제물을 바치려고 왔던 다른 사람은 아마도 마음속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세세한 것까지 구별 짓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 마타티아스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버려 둔 채 아들들과 함께 외딴 산 속으로 피신했다. “그가 이 말을 마쳤을 때, 어떤 유다 남자가 나오더니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왕명에 따라 모데인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그것을 본 마타티아스는 열정이 타오르고 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달려가 제단 위에서 그자를 쳐 죽였다. 그때에 그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 제단도 헐어 버렸다”(23-25).
그동안 희생 제사에 협력하는 것은 거절하면서도, 조직적인 저항 운동을 추진할 만한 큰 뜻이나 용기가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경건한 사람들 역시 마타티아스를 따라 산으로 피신했다.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아들과 아내, 그리고 가축까지 그렇게 하였다. 불행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명을 거역한 이들이 광야의 피신처로 내려갔다는 보고가 예루살렘의 다윗 성에 있던 임금의 신하들과 군사들에게 들어갔다”(29-31). 임금의 부하들은 외딴 곳으로 피신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들을 찾아내어 공격했다. 그런데 이 저항자들은 율법을 거의 광신적으로 준수했기 때문에 임금의 군대가 안식일에 그들을 공격하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모두 동굴에서 타 죽었다고 말았다. “이렇게 그들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아내와 자녀와 가축과 더불어 죽어 갔다. 죽은 이는 천 명이나 되었다”(38).
마타티아스와 그의 일행은 이 소식을 듣고서 안식일일지라도 싸울 것을 맹세했다. 그들은 항쟁단을 조직하여 안티오코스의 칙령을 따르는 자들에게 맞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날에 그들은 이렇게 결의하였다. ‘안식일에 우리를 공격해 오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든 맞서 싸우자. 그래야 피신처에서 죽어 간 형제들처럼 우리가 모두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때에 한 무리의 하시드인들이 그들과 합류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용맹한 전사들이며 모두 율법에 헌신하는 이들이었다”(41-42).
이제 폭력과 폭력이 만나게 되었다. 경건한 율법 추종자들인 하시드의 무리가 마타티아스에게 합세했다. 저항 세력은 아직 소규모이고 힘도 약했지만 점차 조직화되어 꽤 세력이 커졌다. 마타티아스는 죽을 날이 다가오자 아들들에게 복을 빌어주고 투쟁을 계속하며 이민족의 잘못된 행위에 복수하고, 무엇보다도 조상들의 계약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임무를 맡긴다. “마타티아스는 죽을 날이 다가오자 자기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지금은 교만과 냉소가 득세하고 있다. 멸망의 때며 격렬한 분노의 때다. 얘들아, 이제 너희는 율법을 위하여 열성을 다하고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라’(49-50). 마타티아스는 하느님 백성의 처지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상황을 살아서 보지는 못했다. 그는 칙령이 발표된 다음 해인 기원전 166년에 죽었다. ”그는 백사십육년에 죽어 모데인에 있는 자기 조상들 무덤에 묻혔다. 온 이스라엘이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였다“(70). 마타티아스는 저항 운동의 주도권을 자신의 아들들에게 넘겨주었다. 마카베오기는 이어서 그 아들들의 활약상을 전한다.
1마카 3,1-60 유다 마카베오가 지도자가 되다
“마카베오라고 불리는 그의 아들 유다가 그 뒤를 이었다. 유다의 모든 형제와 아버지에게 합세하였던 이들이 모두 그를 도와 기쁘게 이스라엘을 위하여 전쟁을 하였다”(1-2).
저자는 마카베오로 불리는 유다가 전쟁에서 아버지 자리를 계승했다고만 말하고 왜 더 자격이 있는 형 시몬이 제외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의 전쟁은 국가의 적들뿐 아니라 사악하고 ‘무법’을 일삼던 자들과 싸워 그 나라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무도한 자들은 그가 두려워 움츠러들고 무법을 일삼던 자들은 모두 어쩔 줄 몰라 하였다. 그의 손으로 구원이 순조로이 이루어졌다”(6).
유다는 형제들과 다른 모든 이의 지지를 받아 성공적으로 아폴로니우스를 물리친다. “아폴로니우스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이민족들과 일부 사마리아인들을 모아 큰 군대를 조직하였다. 이를 알고 유다가 마주 나가 그를 쳐서 죽여 버렸다. 그 밖에도 많은 적군이 부상하여 쓰러지고 나머지는 달아났다”(10). 셀레우코스 제국의 미시아의 수령 아폴로니우스는 기원전 166년 봄에 출정하였다.
이어서 벳 호론에서 시리아의 사령관인 세론을 물리친다. 세론은 기원전 166년 여름에 출정한다. 이에 시리아 군대의 장수 세론은 아폴로니우스의 잔류 군대와 합류해 다시 큰 군대를 조직해 원정을 떠났다. 세론이 벳 호론의 오르막길로 가까이 왔을 때 유다 마카베오와 얼마 되지 않는 군사들을 이끌고 그의 군대를 급습해 무려 800명이 전사하고 세론과 남은 군사들은 모두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달아났다. 유다는 자기 군대에게 하느님의 권능에 주목하라고 지시한다. “전쟁의 승리는 군대의 크기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에 달려 있다”(19). “유다가 말을 마치고 세론과 그의 군대를 급습하자, 그들은 유다 앞에서 무너졌다. 유다는 벳 호론 내리막길을 달려 들판까지 뒤쫓아 갔는데, 그들 가운데 팔백 명이 쓰러지고 나머지는 필리스티아 땅으로 달아났다”(23-24).
이에 유다 마카베오와 이스라엘 군대가 주변의 이민족들에게 알려졌고 그의 명성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 안티오코스 4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 지방 정벌을 대비해 매우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고 모든 국력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국고가 떨어짐에 따라 기원전 165년 봄 안티오코스는 페르시아 지역으로 가 조공을 거둬 돈을 모으기로 결심했고 떠나면서 왕족 리시아스에게 유프라테스 강과 이집트 지역에 이르는 모든 행정과 아들 안티오코스 에우파토르를 맡겼다.
이리하여 셀레우코스 제국 서부의 전 행정을 맡게 된 리시아스는 도리메네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니카노르, 고르기아스를 뽑았고 보병 4만 명과 기병 7000명을 주어 유대 지방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그 원정군은 엠마오 부근에 진을 치고 주둔했는데 이스라엘인들을 노예로 사려는 많은 상인들과 시리아 군대, 블레셋 군대 등도 합류하였다. “리시아스는 도리메네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그리고 니카노르와 고르기아스를 뽑았는데, 이들은 임금의 벗들 가운데에서도 유력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보병 사만과 기병 칠천과 함께 그들을 유다 땅으로 보내면서 임금의 명령대로 그곳을 쳐부수라고 하였다”(38-39).
이에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형제들은 예루살렘 맞은 쪽에 있는 미츠파로 가 나지르인들을 불러 모아 1000인 대장과 100인 대장, 50인 대장, 10인 대장 등을 임명해 군사들을 지휘하게 하였다. “그들은 함께 모여 예루살렘 맞은쪽에 있는 미츠파로 갔다. 전에 이스라엘의 기도소가 미츠파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날 단식하고 자루옷을 둘렀다. 또 머리에 재를 뿌리고 옷을 찢었다”(46-47).
성경에는 여러 곳의 ‘미츠파’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은 베냐민 지역의 미츠파다. 정확한 위치에 대해선 학계에서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지만 베냐민 지역의 미츠파는 예루살렘 북방 12㎞ 지점에 있는,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장소였다. 특히 이곳은 초기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 종교적 활동의 중심지였다.
판관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불안정한 과도기에 당시 이스라엘 최고의 지도자였던 사무엘이 전국을 공식 순회하던 중 자주 방문해 영적 운동을 전개했던 장소가 바로 미츠파다. “그러고 나서 사무엘이 말하였다. “온 이스라엘 백성을 미츠파로 모이게 하시오.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를 드리겠소”(1사무 7,5).
유다 멸망 후 바빌론에서 파견된 총독 그달야는 미츠파를 수도로 삼았다. “바빌론 임금이 그달야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는 소식을 군대의 모든 장수와 그 부하들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 곧 느탄야의 아들 이스마엘, 카레아의 아들 요하난, 느토파 사람 탄후멧의 아들 스라야, 마아카 사람의 아들 아잔야와 그 부하들은 미츠파에 있는 그달야에게 갔다”(2열왕 25,23).
미츠파는 사무엘이 제사를 드리는 동안 습격해온 필리스티아인들을 쳐서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둔 곳이었다. “사무엘이 아직 번제물을 바치고 있을 때,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다가왔다. 그날 주님께서 필리스티아인들 위에 큰 소리로 천둥을 울리시어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시자, 그들은 이스라엘 앞에서 패배하였다”(1사무 7,10).
그러나 미츠파가 유명한 것은 무엇보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등극한 장소라는 것이다. 사무엘은 판관직을 자신의 두 아들에게 물려주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백성들은 더 이상 판관에 의한 지도체제가 아닌 왕정제도의 도입을 사무엘에게 요구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미츠파에 불러모아 사울을 왕으로 즉위시켰다.
유다 마카베오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종교적 뿌리를 갖는 미츠파에서 전투를 준비하면서 나지르인들을 모았다. 그리고 율법에 따라 집을 짓던 사람이나 갓 장가든 사람이나 포도밭에서 포도나무를 심던 사람들이나 겁 많은 자들을 돌려 보내고 엠마오 남쪽에 진을 쳤다. 유다는 엠마오 전투를 준비하면서 군사들도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때에 유다가 말하였다. “무장을 갖추고 용사가 되어라. 아침 일찍 이민족들과 싸울 준비를 하여라. 그들은 우리와 우리 성소를 없애 버리려고 모여 있다. 우리 민족과 성소가 잘못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다. 하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58-60). 그는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도 여전히 전쟁에서 죽을 각오를 한다. 사실상 유다는 이 문제를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긴다.
1마카 4,1-51 유다의 엠마오 승리, 성전정화와 재봉헌
먼저 고르기아스가 보병 5000명과 정예 기병 1000명을 이끌고 밤중에 출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다 마카베오도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엠마오의 진지를 치려 출발했다. “고르기아스는 보병 오천과 정예 기병 일천을 데리고 나섰는데 그 부대는 밤중에 출발하였다. 유다인들의 진지에 들이닥쳐 그들을 급습하려는 것이었다. 성채에서 몇 사람이 나와 고르기아스를 안내하였다”(1-2).
날이 샘 무렵 유다 마카베오와 군사 3000명이 들판에 나타났으나 갑옷과 칼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이에 리시아스의 군대는 방비가 튼튼하고 그 둘레를 기병대가 에워싸고 있었고 모두 정예병들이었다. 리시아스의 군대가 진지에 나오자 유다의 군대도 맞서 싸웠다.
치열한 전투 끝에 리시아스의 군대는 패배해 이두매아 평야와 아스돗, 얌니아까지 추격당해 무려 3000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남은 군사들은 모두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달아났고 유대 군대는 많은 전리품들을 거두어 들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리시아스는 크게 낙담했다.
이듬해 기원전 164년, 리시아스는 정예 보병 6만 명과 기병 5000명을 이끌고 다시 유대 지방을 정벌하려고 했다. 원정군은 이두매아로 들어가 벳 추르에 진을 쳤고 이에 유다 마카베오도 보병 1만 명을 이끌고 맞섰다. “이듬해에 그는 유다인들을 제압하려고 정예 보병 육만과 기병 오천을 소집하였다. 그들이 이두매아로 들어가서 벳 추르에 진을 치자, 유다는 보병 일만으로 그들에게 맞섰다”(28-29). 그리고 전투를 치렀고 결국 리시아스의 군사 5000명이 전사했고 리시아스는 안티오키아로 퇴각했다. 그리고 다시 유대 지방을 정벌하려고 더 많은 군사를 모집했다.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형제들을 모든 적들을 무찌르자 성소 정화와 봉헌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온 군대를 이끌고 시온 산으로 올라가 성소를 복구했고 성채 안에 있는 자들을 공격해 흠이 없고 율법에 헌신하는 사제들을 뽑았고 더럽혀진 번제 제단을 헐어버렸다.
다시말해 종교적,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려는 운동은 기원전 166년부터 유다 마카베오의 지도 아래 조직화되었다. 율법에 대한 사랑과 안티오코스 에파피네스의 억압 정책에 대한 증오,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유다 마카베오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던 것이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유다와 그의 추종자들의 세력을 과소평가했기에, 처음에는 단순히 그들이 일으킨 소요를 진압하려고 소규모의 병력만을 파견했었다. 그제야 반란군의 세력을 깨달은 안티오코스는 리시아스를 섭정으로 파견하고 그의 휘하에 꽤 큰 병력을 배치시켰다.
셀레우코스 사람들의 무력함을 알아차린 유다와 그의 추종자들은 기원전 164년 12월에 그 어느 때보다도 대담하게 힘을 과시하는데, 이때 성전을 탈환하고 예루살렘의 상당 부분을 관할하게 된다.
유다의 부하들 중 일부가 요새를 점령하고 있는 셀레우코스 군대를 공격하여 그들의 주의를 다른 데로 유도하는 동안(41절), 나머지 사람들은 이민족들의 예배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은 이 민족들의 제단을 허물고, 새로운 제단을 세웠다(43-47절). 성전 복구 작업이 끝나자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은 모여와서 새로운 제단을 봉헌하고(54절) 초막절의 축제 기간과 똑같이(레위 23,33-36) 8일간 계속 제단 봉헌 축제를 지냈다(56절). 즉 하누카는 셀레우코스 군에 의해 모독되었던 성전과 성전 제단을 유다 마카베오 형제들의 승리로 다시 하느님께 봉헌하게 된 사건(기원전 165년-164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축제이다. 이처럼 키슬레우 달에 지내는 초막절 축제(2마타 1,9.18 참조)는 또한 축제 기간 동안 계속해서 촛불을 켜 놓고 지내기에 ‘성화(聖火)의 축제’라고도 부른다. 유다인들은 이 축제를, 봉헌을 뜻하는 ‘하누카(Hanukkah)’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도 지내고 있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과 이스라엘 온 회중은 해마다 그때가 돌아오면, 키슬레우 달 스무닷샛날부터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 축일로 기쁘고 즐겁게 지내기로 결정하였다”(59). 이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가 요한복음서에서 성전 봉헌 축제(요한 10,22) 또는 빛의 축제로 알려진 하누카 축제다. 후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짜를 확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초대교회는 유다인의 하누카 축제인 키슬레우 달 25일을 예수님 탄생일로 확정하였다. 성탄은 유다인 명절인 하누카에 신약 성경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수용되었던 것이다. 성탄이야말로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님의 몸을 ‘봉헌한 날’이기 때문이다.
성전 정화는 팔레스타인과 트랜스요르단 전역의 다른 헬레니즘 반대자들에게 용기를 복돋워 주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여러 도시들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때로는 유다와 그 부하들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기원전 164년 후반에 죽었다. 그의 계승자 안티오코스 5세 치하에서 리시아스는 기원전 163년에 벳 즈카르야에서 유다를 패배시켰지만(1마카 6,43-46), 그래도 유다는 아직 예루살렘에 대한 지배를 유지할 수 있었고, 하느님 백성은 율법을 공공연히 실천하도록 허용받고 있었다(1마카 6,59). 박해가 잠시 동안 종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는 유다와 친헬레니즘파 사이에, 특히 대사제 임명을 둘러싸고 세력 다툼이 수없이 일어났기에 유다와 그 추종자들에게는 쉴 틈이 거의 없었다. 알키모스를 지지하는 반헬레니즘파 하시드인들과 율법 학자들이 친헬레니즘파에 합세한다(기원전 163-159년). 하시드인들은 알키모스가 사제 가문이었기 때문에 그가 헬레니즘적 성향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했다. 뒤에 알키모스는 자기 지위를 튼튼히 하려고 하시드인들을 공격해 그들 중 상당수를 죽였다. 유다는 결코 알키모스를 믿지 않았기에 그의 대사제 임명을 반대했다(1마카 7,5-17).
유다와 그의 동지들이 용감하기는 했지만,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안팎에서 압력이 커지자 그것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종교의 자유를 위한 그들의 투쟁이 노골적인 정치적 독립 전쟁으로 발전해 가자 데메트리오스 1세 치하의 셀레우코스 왕가는 마음껏 힘을 과시하며 그에 대응하였다. 장군 바키데스와 대사제 알키모스가 이끄는 셀레우코스의 대군대는 기원전 160년에 예루살렘 북쪽의 전투에서 유다와 그의 지지자들을 맞아 싸웠다.
1마카 5,1-68 유다 마카베오의 항쟁
주변 이민족들은 제단이 복구되고 성소가 봉헌되자 몹시 화가 나 유대인들은 죽이고 제거하기 시작했다. “주변 민족들은 이전처럼 제단이 복구되고 성소가 봉헌되었다는 말을 듣고 몹시 화가 났다. 그래서 그들은 저희 가운데에 사는 야곱의 후손들을 없애기로 작정하고, 그 백성을 죽이고 제거하기 시작하였다”(1-2). 유다는 자신들의 동족을 포위한 이두매아의 에사우 자손들과 아크라바테네에서 전투를 벌여 큰 타격을 입히고 전리품을 빼앗았다. 이 전투는 기원전 163년 초에서 그해 가을 사이에 전개된다. 아크라바테네는 스켐 남서쪽 지방의 이름이다.
그리고 길목에 숨어 있다가 유대인들에게 올가미와 덫을 씌우던 브온인들을 정벌해 여러 탑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또한 티모테오스가 이끄는 암몬 군대도 무찔렀고 야제르와 그곳에 딸린 마을들도 점령했다.
이에 길앗의 이민족들은 자기 영토 내의 유대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티모테오스가 지휘하는 군대는 톱을 공격해 유대인들을 잡아가고 장정 1000명을 붙잡아 학살하였다. 그러자 그곳에 남은 유대인들은 다테마 요새로 피신해 유다 마카베오에게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스와 티로, 시돈 등과 갈릴래아 지역의 모든 주민들이 유대인들은 죽이려고 집결하자 유다 마카베오는 동생 시몬과 논의해 시몬은 군사 3000명을 이끌고 갈릴래아로 가고 유다 마카베오는 군사 8000명을 이끌고 길앗으로 갔다. 그리고 남은 군대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셉과 아자르야의 지휘 아래 유대 지역을 방어했다. “유다가 자기 형 시몬에게 말하였다. ‘형님은 병사들을 골라 갈릴래아로 가서 동포들을 구해 내십시오. 나는 동생 요나탄과 길앗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다 땅을 지키기 위하여, 즈카르야의 아들 요셉과 백성의 지도자 아자르야에게 나머지 군대를 맡겨 그곳에 남겨 놓았다”(17-18).
시몬은 갈릴래아에서 이민족들을 격파하고 프톨레마이스 성문까지 뒤쫓아 3000명을 죽이고 전리품들을 거두어 들였으며 갈릴래아와 아르바타에 살던 유대인들이 크게 기뻐해 유대 지역으로 왔다.
유다 마카베오는 동생 요나탄, 군사 8000명과 함께 요르단 강을 건너 광야에서 3일 동안 진군해 나바태아인들을 만나 유대인들이 보소라, 보소르, 알레마, 카스포, 마켓, 카르나임 등지와 길앗의 나머지 성읍들에 갇혀 있다는 정보를 얻는다.
유다와 그의 군대는 재빨리 광야를 가로질러 보소라를 공격해 이민족들을 죽이고 다테마 요새로 진군했다. 이에 이튿날 티모테오스가 이끄는 수많은 이민족들이 공성 무기들을 이끌고 요새를 공격했다. 이에 유다는 전투를 시작해 이민족들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8000명을 사살했다.
유다는 마아파로 방향을 돌려 그곳을 점령하고 이민족들을 죽였으며 카스포와 마켓, 보소르, 길앗 지역의 나머지 성읍들도 모두 점령하였다. 그러자 티모테오스는 다른 군대를 모아 강 건너 라폰 맞은쪽에 진을 치고 전투를 치렀다. 그러자 모든 이민족들이 카르나임의 신전으로 달아났으나 유다는 그곳까지 공격해 모두 죽이고 불태웠다.
그리고 길앗의 모든 유대인들을 이끌고 돌아오는 길에 에프론을 공격해 밤낮을 싸워 그 성읍을 점령하고 사람들을 죽인 뒤 불태웠다. 요르단 강을 건너 벳 스안 맞은쪽의 큰 평야에 이르러 많은 낙오자들과 백성들을 모으고 유대 지방으로 돌아왔다.
유다 마카베오와 요나탄이 길앗 지역에 주둔하고 그의 형 시몬이 프톨레마이스 맞은쪽 갈릴래아 지역에 주둔해 있을 때, 유대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즈카르야의 아들 요셉과 아자르야는 유다와 그의 형제들의 용맹과 전공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들도 이민족들과 싸워 이름을 떨치기로 해 군대를 이끌고 얌니아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고르기아스가 이끄는 셀레우코스 군대에게 패배해 군사 2000명이 전사하고 요셉과 아자르야는 유대 지역의 경계선까지 쫓기게 되었다.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형제들은 더 나아가 에돔과도 싸워 헤브론과 거기에 딸린 마을들을 점령하고 요새들을 허물고 둘레에 있던 탑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블레셋의 영토로도 쳐들어가 메라사를 점령하고 아스돗에서도 제단을 헐고 신상들을 불태워버렸다.
6,1-16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죽음
한편 리시아스에게 유대 정벌을 명하고 내륙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던 안티오코스 4세는 페르시아의 엘리마이스라는 은과 금, 옛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남겨 둔 금 방패와 가슴받이 갑옷, 무기가 있는 부유한 도시를 공격했다. “안티오코스 임금은 내륙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페르시아에 있는 엘리마이스라는 성읍이 은과 금이 많기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성읍의 신전은 무척 부유하였다. 거기에는 마케도니아 임금 필리포스의 아들로서 그리스의 첫 임금이 된 알렉산드로스가 남겨 놓은 금 방패와 가슴받이 갑옷과 무기도 있었다”(1-2).
그러나 그 계획이 미리 주민들에게 알려져 오히려 크게 패해 쫓기게 되어 바빌론으로 향했다. 하지만 유다 땅 정벌에 실패했다는 보고가 전해지자 결국 기원전 163년 자신의 벗 필리포스를 불러 자신의 왕국을 맡기고 병사했다. 안티오코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것에 대한 후회의 마음을 갖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 뿐더러,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던 거야.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 땅에서 죽어 가네”(12-13).
안티오코스는 기원전 164년 9월에 죽었다. 그의 부하 리시아스는 안티오코스의 아들 안티오코스 에우파토르를 안티오코스 5세로 즉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2년 후 데메트리오스 1세에게 살해당한다(7,1-4 참조).
한편 예루살렘 성채에 있던 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소 주변의 유대인들의 출입을 막고 온갖 못된 짓을 하며 이민족들을 지원하였다. 그러자 기원전 162년 유다 마카베오는 군사를 일으켜 공격 무기들까지 갖추고 그들을 포위하였다. “이렇게 백오십년에 유다인들은 함께 모여 그들을 포위하였다. 유다는 투석기와 다른 공격 기구들을 만들었다”(20).
그런데 그들 중 몇 사람이 포위망을 뚫고 나가 유대 지방의 또 다른 반란자들과도 합류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5세에게로 달아나 이 소식을 알렸다.
그러자 안티오코스 5세는 모든 군대 장수와 기병대 장수들, 다른 여러 나라와 바다의 여러 섬의 용병들까지 동원해 보병 10만, 기병 2만, 전투용 코끼리 32마리에 달하는 거대한 대군을 조직하여 원정을 떠났다. 이 군대는 이두매아를 거쳐 벳 추르로 향하며 많은 공성기구들을 만들었고 이에 유대인들도 그 기구들을 불태우며 전투를 치렀다. “그의 군대 수는 보병 십만, 기병 이만, 그리고 전투에 익숙한 코끼리가 서른두 마리였다. 이들은 이두매아를 지나 벳 추르를 향하여 진을 치고 여러 날 동안 싸우며 공격 기구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유다인들도 나가서 그 기구들을 불태우며 용감하게 싸웠다”(30-31).
유다 마카베오도 군대를 이끌고 셀레우코스 군대의 진영 맞은쪽 벳 즈카르야에 진을 쳤다. 그러자 안티오코스 5세가 아침 일찍 급히 군대를 이끌고 나가 전투용 코끼리에게 포도즙과 오디즙을 보여 자극시키고 전열로 나누어 배치하여 코끼리마다 쇠사슬 갑옷으로 무장하고 청동 투구를 쓴 보병 1000명과 정예 기병 500명을 배치하였다. 외경인 제3마카베오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는 알렉산드리아의 경기장에 유다인들을 몰아 넣고 그들을 짓밟게 하려고 코끼리들을 위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코끼리의 등에 단단한 나무 탑을 얹고 특별한 기구들로 고정시켜 군사 4명과 인도인 1명이 이를 타 전투를 지휘했다. 인도 사람은 코끼리 조련사를 가리킨다. 코끼리와 함께 거의 모든 조련사도 인도에서 왔다. “코끼리 등에는 단단한 나무 탑을 얹어 덮고, 그것들을 특별한 기구로 고정시켰다. 나무 탑에는 전투를 벌이는 군대의 병사 네 명과 인도 사람 하나가 타고 있었다”(37).
안티오코스는 나머지 기병들도 군대 양쪽에 배열해 진군했다. 그러나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군대가 다가가 전투를 치렀고 셀레우코스 군대 600명이 전사했다. 전투 중 유다 마카베오의 동생 엘아자르가 코끼리들 가운데 안티오코스 5세가 탄 코끼리를 발견하고 이를 공격해 군사들과 코끼리를 죽여 쓰러뜨렸다. 그러나 엘아자르 자신도 코끼리가 자기를 덮치며 땅에 쓰러지는 바람에 죽었고 유대인들도 셀레우코스 군대가 강력하고 사기가 높은 것을 보고 물러났다.
안티오코스의 군대 일부는 유대인들을 추격하며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주력 군대는 유대 지역과 시온 산을 향해 진을 쳤다. 그리고 벳 추르의 주민들과 화친을 맺어 그들을 성읍에서 나오게 하고 그곳을 점령해 군대를 주둔시켰다.
또한 공격 탑과 공격 기구들을 가져와 배치해 난공불락 요새로 개조시켰다. 이에 유대인들도 공격 무기를 만들어 싸웠으나 식량이 떨어지는 바람에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모두 철수해 성소에는 몇 사람만 남고 말았다.
한편 왕족 리시아스는 안티오코스 4세가 죽기 전 벗 필리포스에게 자신의 아들을 키워 왕으로 세우라고 부탁했는데 필리포스가 안티오코스 5세와 함께 출정했던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와 메디아로 돌아와 정권을 잡으려 한다는 것이였다. 이에 리시아스는 급히 철군하기로 작정해 안티오코스 5세와 군대 지휘관들을 철수하도록 설득했다. 그러자 안티오코스 5세는 유대인들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하고 유대인들도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안티오키아로 철수했다. 하지만 안티오코스는 철군 과정에서 약속을 어기고 시온 산의 요새 성벽을 모두 허물어 버렸고 안티오키아가 이미 필리포스에게 점령당했다는 것을 알고 무력으로 그 성읍을 점령했다. “그러나 임금은 시온 산으로 들어가 그곳의 요새를 보고는, 자기가 맹세한 약속을 저버리고 그 둘레의 성벽을 헐어 버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서둘러 그곳을 떠나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그는 필리포스가 그 성읍을 장악한 것을 보고, 그와 싸워 무력으로 그 성읍을 점령하였다”(62-63).
1마카 7,1-49 데메트리오스 1세가 시리아 임금이 되다
기원전 161년 셀레우코스의 아들이던 데메트리오스가 로마에서 빠져 나와 쿠데타를 일으켜 사촌 안티오코스 5세와 리시아스를 죽이고 데메트리오스 1세로 시리아의 왕위에 올랐다. 사실은 데메트리오스의 아버지 셀레우코스가 안티오코스 3세의 후계자이자 임금으로 지목되었으나 형제인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그 자리를 빼앗았다. 이스라엘에서 데메트리오스는 알키모스라는 “무도한 자들과 사악한 자들”에게 지지를 받는다. “이스라엘에서 무도한 자들과 사악한 자들이 모두 그에게로 갔는데, 대사제직을 탐내는 알키모스가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5).
데메트리오스의 지휘관 바키데스는 강력한 군사작전을 펼쳤으나 유다를 파멸시키는 데는 실패했다(7,5-25). 이 작전은 바키데스와 알키모스가 거짓 평화 조약을 맺고자 하였고, 이를 받아들이고 나서 80명을 잡아 단 하루에 죽였던 것이다. 이에 분개한 유다 마카베오와 백성들은 강력히 저항하여 그들을 이겼다. 이에 “알키모스는 유다와 그의 군사들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맞설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임금에게 가서 그들을 두고 악의에 찬 고발을 하였다”(25).
한 번 패배를 한 데메트리오스는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는 임무를 니카노르에게 맡긴다. 이스라엘을 미워한 니카노르는 유다에와 그의 형제들에게 거짓 화친을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유다와 그의 형제들에게 거짓으로 평화의 말을 전하였다. ‘우리 싸우지 맙시다. 나는 당신들과 평화롭게 만나기 위하여 병사 몇 명만 데리고 가겠습니다”(27-28). 니카노르는 자신의 계획이 탄로난 것을 알고 카타르살라마에서 전투를 하였다. 니카노르 편에서 병사 500명이 죽어 유다가 승리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161년 유다는 하다사에서 거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니카노르의 목숨을 거두게 되었다. 니카노르의 머리와 오른손은 승리의 전리품으로 예루살렘에 옮겨졌다. “유다의 군대는 전리품과 노획물을 거둔 다음, 니카노르의 머리와 거만하게 내젓던 그의 오른손을 잘라 가지고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 밖에 걸어 놓았다”(47). 니카노르에게 승리를 거두기 전에 성전 안에서 사제들의 간절한 탄원기도(7,36-38)와 유다 자신의 기도(7,40-42)가 선행된다. 그 승리의 날은 경축일이 되었다.
“사제들은 안으로 들어가 제단과 성전 앞에 서서 울며 말하였다. ‘당신께서는 이 집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고 당신 백성이 기도하고 간청하는 집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자와 그 군대에게 원수를 갚으시고 저들을 칼로 쓰러뜨려 주십시오. 저들이 저지른 불경을 잊지 마시고 저들을 그대로 두지 마십시오”(36-38).
“유다도 병사 삼천 명과 함께 하다사에 진을 쳤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임금이 보낸 자들이 불경을 저질렀을 때, 당신의 천사가 나와서 그들 가운데 십팔만 오천 명을 쳐 죽였습니다. 오늘도 저희 앞에서 저 군대를 치시어, 니카노르가 당신 성소를 두고 악한 말을 하였음을 살아남은 자들이 알게 하시고, 그의 악행에 따라 그를 심판하여 주십시오”(40-42).
1마카 8,1-32 로마인들에 대한 찬사
유다는 로마인들의 명성을 듣었다. “유다는 로마인들의 명성을 들었다. 그들은 대단히 강력하면서도, 저희 편에 서는 이들은 누구에게나 호의를 베풀고, 저희에게 다가오는 이들은 누구와도 우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었다”(1). 로마는 자기에게 완전히 굴종하지 않는 왕국을 약화시키려고 그 반란 세력들을 적극 지원하였다.
유다는 아코츠의 손자이자 요한의 아들 에우폴레모스와 엘아자르의 아들 야손을 뽑아 로마로 보내 우호 동맹을 맺게 하였다. “유다는, 아코츠의 손자이며 요한의 아들인 에우폴레모스와 엘아자르의 아들 야손을 뽑아 로마로 보내어, 우호 동맹을 맺게 하였다”(17). 유다 민족과 로마가 위험에 처하면 언제든지 도와주겠다고 서로 약속했다. “우리 로마인들은 데메트리오스 임금이 유다인들에게 저지른 악행에 관하여 그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다. ‘어찌하여 그대는 우리의 벗이며 우리와 동맹을 맺은 유다인들에게 멍에를 씌워 무겁게 하였소? 그들이 또다시 그대를 고발하며 탄원해 오면, 우리는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바다에서든 육지에서든 그대와 싸울 것이오’”(3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