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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 속의 여자
신동일
눈발이 앞을 가리는 2월 하순경이었다. 졸업을 앞둔 기영은 분주했다. 대학가의 거리마다 희망과 기대감으로 벅찬 젊은이들의 행렬이 대학로마다 뜨거운 열기로 추위마저 느낄 수 없는 분위기 그 자체였다. 선술집마다 대학생으로 술렁거렸고, 어둠침침한 카페마다 연인들의 속삭이는 장면이 진풍경을 이룬다.
기영은 요즈음 잠을 뒤척이는 밤의 연속이다. 내일은 장교로 임관하는 날이기에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기쁨의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면 학사학위를 받는 학위 수여식 날이니 가슴이 벅차지 아닐 수 없었다. 더욱 그를 잠 못 이루게 하는 것은 지금껏 정성을 다하여 뒷바라지 해주신 부모님의 사랑에 가슴이 뭉클하여 뜬 눈으로 새벽을 맞은 오늘, 바로 임관식 하는 날이다.
기영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주름 잡힌 각진 장교 정복을 반듯하게 입었다. 식장에 들어설 때 객석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느라 눈빛을 반짝였다. 그러나 은영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허전한 그였다. 곳곳마다 축하의 하객들이 꽃다발을 들고 식장을 가득 메우며 사진을 찍느라 야단법석을 떨었다.
군악대가 임관을 축하하는 축하의 곡이 울려 퍼지고 부모님이나 애인들이 나와 장교들의 어깨에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기영의 부모님도 기쁜 얼굴로 나와 기영의 양어깨에 광채 나는 다이아몬드 계급장을 부착해 주었다. 기영의 가족들과 신임 장교들의 가족들은 아들에 대한 대견함과 앞으로의 고된 훈련을 생각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창밖은 2월 하순, 봄이 문턱 가까이 다가왔지만 겨울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지 바람마저 세차게 불어 살을 도려내는 듯 강추위였다. 기영의 눈빛은 유난히 빛났지만 입술은 굳게 닫혀 말이 없었다. 드디어 대한의 자랑스런 남아로서 초급장교의 자격으로 국가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국방의 의무를 짊어지고 제2의 삶을 향해 새롭게 출발할 계기를 맞는 순간이었다.
오늘이 있기까지 우연의 일이 아니다. 어린시절부터 꿈이었고 고교시절부터 준비해온 일이 바로 오늘의 결실을 얻은 것이다. 이제 초급장교로서 복무방침은 기영에게 주어진 소대원들을 강도 높은 교육과 훈련으로 다져서 최강의 전투력을 갖출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할 것이었다. 우선은 자신의 심신부터 단련할 것이라고 굳게 다짐하며 기영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에서 다짐을 하는 순간에도 은영이 곁에서 환한 미소로 힘찬 손뼉을 쳐주고 있다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며칠 후 학사학위를 수여하는 대학졸업식 날, 기영의 가족들과 동료들의 축하화한을 가슴 가득 안고 학위증과 교육자로서의 교사자격증을 손에 쥐고 교문을 나서던 그 순간 가슴이 벅차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했다.
국민 모두가 보릿고개의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대학 4년의 세월은 10년처럼 지루한 시간이었던 기영은 대학 졸업장을 만지작거리며 졸업이 기적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난으로 인해 등록금을 내지 못한 친구들이 중도 탈락하기도 했다. 기영은 부모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배우는 학생신분을 벗어나 경쟁력이 필요한 사회인으로서 국가를 위해 첫 발을 내딛는 군복무로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했다.
16주 동안의 강도 높은 지휘관 교육과 훈련을 수료하고 나니 보병 소대장으로 부임하라는 사령장은 강원도 산골 첩첩산중에 있지만 외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항상 힘과 용기를 주는 포근한 어머니 같고 누나 같은 은영의 격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힘들고 지칠 때가 되면 은영이 찾아와 주었고 매주 편지를 보내주어 행복했었다.
피와 땀방울로 범벅된 3년의 세월은 산골에 묻혀 푸른 제복만을 걸치고 소대장과 중대장 직책을 무사히 마치는 과정에서 기영은 리더십과 불굴의 의지 강인한 정신력을 배양한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귀향길 열차에 올랐다. 창가에 기대어 그간의 제복생활 동안의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직 국가를 위한 일념 하나로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의 마음으로 포옹해야하는 성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기영은 험악한 숲속의 고지를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연마했으니 사회생활이 아무리 어려워도 군 생활에 비하면 거뜬히 해낼 수 있으리라 자신감이 들었다. 더군다나 졸병도 아닌 장교의 신분이요, 지도자로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와 지휘 통솔력 그리고 인내력을 배양했고, 앞으로 어떠한 풍파가 몰아치더라도 기영은 능히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큰 자산이라고 여겼다.
기영은 귀향하자마자 부모님을 먼저 뵙고 은영을 만났다. 그녀와 함께 하는 일주일을 하루처럼 보내고, 모교 캠퍼스를 향해 발길을 옮기던 날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우선 은사님들께 인사를 한 다음 정 담긴 클럽 회의실을 찾았는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앳된 신입생들이 그 동안 성숙한 모습으로 변모하여 인사를 하려고 다가섰다.
캠퍼스의 돌계단을 느린 걸음으로 내려오면서 기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낭만과 꿈으로 가득찼던 대학을 마치고 푸른 제복의 군 생활도 필했으니 이제는 사회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태산처럼 느껴졌다. 지금껏 오늘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토록 쉬이 다가올 줄 몰랐다. 그래서 역사는 가파른 세월의 변화와 질주 속에 희미한 삶의 자취만이 새겨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다시 밤 열차로 귀가하여 텅 빈 방에 홀로 누워 내일을 설계해 보았다. 내일은 기영이 평생 근무할 학교를 찾아가는 날이다. 낮에 지도교수가 추천해 준 바닷가에 자리 잡은 진도고등학교의 교정을 그려보았다. 학생들이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모습과 아늑하고 고즈넉한 사찰 같은 시골 학교 전경을 상상하며 설레이는 마음에 쉽게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꿈꾸어 왔던 교사의 길이었다. 비록 낙후된 낙도에서 섬마을 선생으로 시작하기는 하지만 순박한 학생들의 미래에 꿈을 심어 주는 것이 소원이었던 기영은 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교단생활은 처음인가요?”
교장 선생님의 질문이었다.
“그렇습니다. 성장시절부터 지금까지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일찍이 마음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장교로 군 생활을 필했으니 남다른 희생정신과 지휘 통솔력이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어려운 일에는 제가 먼저 몸과 마음을 던지는 사도정신으로 교육의 현장에 임할 것입니다.”
“차후 전화로 통보 하겠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교사 채용의 마지막 관문인 심층면접시험을 마치고 학교 정문을 나서는 순간 나도 몰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초조하게 기다리실 부모님 얼굴이 쉼 없이 스쳤다.‘지성이면 감천인 것을 설마 이 아들이 질주하는 인생항로가 막힐 리가 있겠습니까.’자신감이 넘쳤다.
이 순간이 오기를 학수고대했던 오늘이 아니던가! 줄곧 한 길만을 고집하며 준비해 온 교단생활이 나의 행복이요, 전부였다. 이 행복의 길을 은영과 함께할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9월 1일부터 출근을 하시지요.”
기다리던 전화를 받고 보니 기영은 온통 자신을 위해 준비된 세상처럼 느껴졌다. 준비된 자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말이 오늘따라 새삼스레 느껴지는 기영이었다. 사회인으로서 기영의 서막이 열려지는 영광스런 첫날이 기대되었다.
부임 후 기영은 줄곧 남다른 희생과 봉사 정신을 발휘하여 산골의 삭막한 학교 주변에 아늑한 정원을 만드는데 솔선했다. 나날이 학생들과 정이 깊어만 갔다. 학부형들은 물론 지역사회까지도 관심과 사랑은 대단했다. 이렇게 학교생활에 만족하며 지내느라 한해가 가고 두 해가 물 흐르듯 흘러서 만 3년이 지나고 있었다. 깊어 가는 가을 밤 사색에 잠긴 기영은 장래를 위해 시골생활을 청산하고 도회지로 직장을 옮길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은영에게 연락을 끊은 까닭은 이 작은 섬에서 은영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고 싶고 그리울 때마다 기영은 시와 수필을 쓰며 위로를 받았다. 항상 모정을 느끼게 하는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함께할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 해 겨울 기영은 방학을 맞아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오후, 하늘에서 느닷없이 눈이 내렸다.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는 하얀 눈꽃송이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 눈 속에 은영이가 서 있다 사라졌다. 은영은 기영보다 3살 위였다. 은영과 함께 손을 마주잡고 흠뻑 낭만에 젖어 정신을 놓았던 그 때, 기영은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싶었던 그 순간들이 오늘따라 가슴에 사무치도록 저려왔다.
싸늘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가을 날 기영과 은영은 들국화와 구절초의 그윽한 향기에 흠뻑 젖어 시간가는 줄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첫 데이트인 셈이었다. 뒷산에서 내려다보이는 황갈색 출렁이는 들녘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와 같아 기영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을 때, 은영은 그늘이 드리워진 평평한 잔디밭 한 구석으로 가 핸드백에서 신문지를 꺼내어 잔디밭 위에 가지런히 펼쳐놓았다.
“기영아, 이리 와 앉아.”
그녀가 은은한 목소리로 기영을 불렀다.
기영은 은영이 깔아준 신문지 위에 조심스레 앉았다. 때 마침 몸을 간질이며 지나가는 산바람이 너무나 시원했다.
“기영이 나이가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스무 살 입니다.”
“대학 신입생이겠네.”
“저도 나이를 물어봐도 되나요?”
“대학졸업을 하고 전년도에 충현 중학교 교사로 발령 받았으니 짐작이 가지 않니?”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대답했다.
“그럼 누나라고 불러도 돼요.”
“좋을 대로 해.”
장남인 기영은 누나를 둔 친구들이 항상 부러웠었는데 그녀의 제안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런데 누나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서산 위의 해가 반쯤 얼굴을 감추자 산천에는 주황색으로 물들어 황혼이 찾아들고 있었다. 쉬이 어둠이 산을 덮기 시작했고, 쌀쌀한 늦가을의 밤바람이 살 속을 파고들었다.
블라우스를 걸친 은영은 살포시 일어나 만발한 들국화를 꺾으며 콧노래까지 불렀다. 정신없이 들국화를 꺾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이 너무나 소박하고 순수해 동화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이쁜 주인공처럼 환상적으로 보였다. 기영은 그녀가 연상이라는 것도 잊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의 매력에 빠져 넋을 놓고 있었다. 은영은 어둠이 짙어지는 줄도 모르고 들국화를 지속적으로 꺾고 있었다. 기영은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일어섰다.
“누나, 뭐해요. 빨리 내려가요.”
“어머, 들국화를 꺾느라 어둠이 찾아온 것도 몰랐네.”
“이 들국화 누구 주실려구 이렇게 많이 꺾으셨어요?”
그녀는 배시시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었다.
“누구 줄 건데요?”
기영은 또 다시 물었다.
“바로 너야, 너에게 주고 싶어서….”
한 아름의 들국화 묶음을 받아 든 기영은 어리둥절해졌다. 단 한 번도 이성으로부터 꽃다발을 받아본 적이 없는 기영이었다. 어둠이 깔린 굽이굽이 휘어진 산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동안 기영은 은영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잡아주었다. 은영의 손은 작고 실크처럼 부드럽고 따사로워 기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며 수컷의 본능이 아랫도리를 빳빳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은영이 아는지 모르는지 기영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다만 은영의 손만 꽉 쥐었다 놓았다 하며 하산했다.
출퇴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차량도 줄어들고 인파도 뜸했다. 이따금 가로등과 가정집 창가를 통해 새어나오는 불빛이 거리의 어둠을 밝혀주고 있었다. 도란도란 가족들의 정담과 구수한 된장찌개 내음이 문틈으로 새어나와 기영은 갑자기 허기를 느꼈다.
“기영아, 저녁 먹고 갈까?”
그를 바라보는 은영의 눈빛이 그윽해 보였다.
“집에 가서 먹을 게요.”
기영은 아직도 가슴이 뜨거워 진정이 되지 않아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았다.
“아니야, 나 때문에 시간도 늦었는데, 사 줄 테니 먹고 가.”
그녀가 가자는 대로 따라간 곳은 어느 골목길에 위치한 중국 음식점이었다. 벽마다 산수화가 웅장하게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식사시간이 지난 뒤여서인지 손님들이 별로 없었다. 기영이 은영과 마주보고 앉아 어색해 있을 즈음 주문했던 음식이 들어왔다. 기영은 수줍기도 하여 앞에 놓인 짬뽕 한 그릇을 열심히 먹다보니 금세 바닥이 났다. 만두를 먹던 은영이가 기영이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뭐 좀 더 시킬까?”
기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만두 한 접시를 비우며 많은 말을 했지만 기영은 수줍고 어색하여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묻는 말에 대답만 꼬박꼬박 했던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지금쯤 부모님께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얼른 가 봐. 또 연락하기로 하자.”
기영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총총 걸음으로 집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뒤돌아보니 그녀가 고개를 수그린 채 한 발 두 발 내딛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기영은 그녀가 꺾어준 한 아름의 들국화를 화병에 담고 물을 가득 부으며 그녀가 기영을 좋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집안 전체가 국화 향기로 진동하며 그녀를 느끼게 해주었다. 향기도 향기지만 가을을 느낄 수 있는 실내의 분위기가 새로워보였다. 어둠으로 감싸고돌던 칙칙했던 공부방도 은영의 선물로 여성의 방처럼 향기롭고 환해졌다.
한 주가 물 흐르듯 흘러가 주말을 맞은 오후 기영이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틈을 내어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가 매우 반가워하며 전화를 받았다.
“누나, 고향에 가면 누나의 집을 방문해서 책도 보고 가족들께도 인사드리고 싶어요.”
“알았어. 가족들에게 미리 이야기 해 둘게.”
기영은 오늘따라 마음이 앞서 열차보다 더 빨리 고향을 향해 질주했다. 들뜬 발걸음으로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부모님을 비롯한 형제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고 집안을 빙 둘러보았다. 웅장한 건물에 잘 정돈 된 가구들과 책으로 둘러싸인 실내의 공간이 보통 집안과 다름을 느낄 만큼 조선시대 지체 높은 선비의 집을 연상케 했다.
거실에는 부유한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고급 피아노 한대가 뚜껑이 열린 채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기영은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음반의 자리도 모르면서 그냥 차례대로 건반을 눌러보았다. 평소 장만하고 싶었던 악기 중의 하나가 피아노였던 기영이었다.
“기영아, 우리 산책이나 하고 올까.”
서산으로 해가 넘어갈 즈음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나섰다. 첫 만남이었던 그 자리로 나도 모르게 발길이 향해가고 있었다. 아직은 늦가을이 가기 전이라 곳곳마다 들국화가 어우러져 있었고, 키 큰 갈대꽃이 곧게 뻗은 머리카락처럼 바람결에 휘날렸다. 들녘에는 농부들의 일손이 분주하고 고을마다 풍년가가 메아리치는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이다.
수다스럽지 않는 차분한 그녀는 마치 나이 지긋한 산골 아주머니와 같기도 했고,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성품이었다. 이미 체험한 듯 크고 작은 일에도 별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그저 세상을 초월한 사람처럼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는 눈매는 포근한 인상이 부처님의 자애로운 형상과 같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산골에 숨어있는 사찰에 대웅전의 금동불상에서 볼만한 부처님 미소여서 더욱 친근감이 갔다.
“기영아, 넌 장래 뭘 하고 싶은지 궁금하다.”
“저는요, 섬마을 선생이 되고 싶은데요. 좀 더 욕심을 부린다면요 작가가 되고 싶기도 하구요.”
“정말 좋은 뜻을 가지고 있었네. 그러나 작가가 되는 길은 만만찮을 건데….”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기영은 원래 사업가 집안의 장남으로 출생한 탓으로 대체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했지만 아버지 사업이 기울어 어려운 시절도 있었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소질을 잘 알고 있었던 기영이었기에 황폐한 삶은 싫었다. 그냥 먹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정신적으로 여유롭고 평화로운 가정을 꾸미며 자신의 전문성을 기르고 그곳에서 보람을 찾는다면 바로 그 길만이 행복한 인생이라고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나아가 자연을 벗 삼아 산천의 아늑하고 평화로움에 만족할 수만 있다면 최고의 낙원생활이란 것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그의 정신세계를 압도하였기 때문에 이미 장래의 인생설계를 해둔 셈이었다.
동서고금의 명작을 읽다보면 젊어서 남다른 꿈이 있어 열심히 공부한 후 부자가 되고 출세했던 사람들이 명예를 쫒고 재력과 주색에 현혹되어 불미스럽게 인생을 망치는 예를 책을 통해 알았던 기영은 단단히 결심한 듯 잘난 것 보다 평범한 삶을 택하기로 했다.
“그런데 기영아, 작가가 되고 교육자가 되려면 책도 많이 구입해서 독서를 많이 해야 하고 다음에는 현장 체험 학습도 많이 해야 하고 여행도 자주 해야 해, 그래야 언어능력도 늘고 탁월한 지도자가 될 수 있으리라 누나는 생각해.”
“명심하겠습니다.”
기영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화답했다.
불과 몇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서녘하늘엔 석양놀이 짙게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누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이제 내려가야죠.”
“기영아, 잠시만 앉았다가 내려가자.”
차분하면서도 은은한 그녀의 음성은 아마도 종교생활에서 묻어나오는 종교인다운 분위기를 풍겼다.
“혹시 누나는 종교 생활을 하나요.”
“아니, 어떻게 알았어?”
“누나의 넉넉한 마음에서 느껴져요.”
“어머나 정말?”
“그럼요. 우리 어머니도 동네 인접한 사찰에 다니시는데 저 역시 함께 따라다니면서 불교에 심취한 적이 있는데, 좀 더 깊이 불교에 대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 입교해야 될까 봐요.”
“등교하면 대학 내에 있는 불교클럽이 있는데 입회원서를 제출하고 활동하면 장점이 더 많을 거야.
“네, 그래야겠어요.”
그날따라 가을 달빛이 유난히 빛났다. 오랜 시간 함께 하는 동안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 밤이슬이 촉촉이 내릴 즈음 은영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기영은 들뜬 기분에 젖어 뒤척이다가 잠에 떨어졌다.
기영은 그녀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4년간의 대학생활을 심심치 않게 보냈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 심리학 등 심오한 이론과 학문의 세계를 익혀나갔다. 남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 사고와 주인정신을 발휘하여 단체생활에 리더로 익숙해질 수 있었다. 궂은일은 서둘러 솔선했으며, 특히 동서양의 사상 및 철학적인 강좌로 학문적인 식견과 교양을 넓혀나갔다. 더군다나 기영의 전공분야인 문학의 심오한 이론과 학문적 연구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는 캠퍼스 생활에 잘 적응하며 하루하루를 분주한 생활로 장래의 꿈을 키워가며 보람찬 나날을 보냈다.
평소 밝고 명랑하며 적극적인 성품인 기영은 그 생활에 만족하면서 매일 환한 얼굴로 기쁜 일 그리고 슬픈 일까지도 동료들과 더불어 사는 삶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처음으로 순정을 바쳤던 그녀를 잊고 지냈던 지난날 기영은 세월이 갈수록 은영의 충고했던 그 말이 스친다. 세월 속에 묻히는 것이 인간사인데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이란 아무리 신분이 변하고 나이가 들어도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닌 인연임을 뼛속 깊이 절감하는 요즈음이었다. 때 묻지 않은 학창시절 무지갯빛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고 밤하늘에 영롱한 별빛을 바라보며 장래를 설계했던 그 시절, 하루도 못 보면 식욕마저 잃었던 그녀와의 만남이 차츰 나이가 들면서부터 둘 사이엔 건너지 못할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기영이 자신의 어리석음에 자책을 하는 동안 어느 사이 그녀의 근무처인 군민신문사에 다다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사무실에 앉아 열심히 기사 정리에 여념 없을 은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낯선 직원이 그녀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 실례합니다. 최은영 씨, 어디 가셨습니까?”
그녀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일 년 전 학사편입 한다면서 그만두었는데요.”
의자에서 일어난 사내가 슬리퍼를 찍찍 끌며 기영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혹시 어느 대학교로 갔는지 알고 계신가요?”
기영은 다급히 물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성서대학교라고 한 것 같아요. 그리고 수녀가 되기 위해 준비 중이란 말도 들은 적 있어요.”
사내는 기영을 아래 위로 훑어보며 수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럼 여길 떠난 이후 한 번도 은영 씨의 소식을 들은 적 없습니까?”
“네, 여자로서 감당키 어려운 일을 겪었으니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겠습니까.”
“그럼, 무슨 큰 봉변이라도 당했단 말입니까?”
“글쎄, 말씀드리기가… 좋은 일도 아닌데 더 이상 묻지 마세요.”
사내는 손을 휘저으며 대답을 거부했다.
“저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기영이 포켓에서 담배를 꺼내어 사내에게 건네며 간절히 애원하듯 말했다.
“한 사람의 슬픈 과거를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럽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또 다시 거부했다.
“제발 부탁합니다. 은영 씨가 무슨 변을 당했는지 꼭 알아야 합니다.”
마지못해 사내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맘 때 쯤이었을 겁니다. 평소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은영 씨란 것을 알고 계시죠?”
“그럼요, 얼마나 마음이 정갈하고 따뜻한지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지요.”
기영은 입에 침이 말라 목이 타들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아 글쎄 월급을 받으면 전액을 없는 놈들을 위하여 쓰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 중에 한 놈과 인연이 닿아 학비와 생활비를 대어 주고 있었는데….”
사내가 하던 말을 중단하고 가래를 캭캭 뱉다말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기영은 은영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알고 싶어 얼른 커피자판기로 달려가 커피 두 잔을 뽑아와 한 잔을 사내에게 건넸다.
“은영 씨가 교사직에서 물러나게 된 원인도 다 그놈 때문이랍니다.”
연신 담배연기를 푸푸 내뿜다가 커피를 물 들이키듯 마신다.
어느 날 갑자기 교정을 떠난 후 몇 달 동안 여행만 다니던 그녀가 지역신문사에 근무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당황했었던 기영은 이제야 그 궁금증을 명확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은영 씨가 그 놈 혼자 사는 집에 갔다가 큰 봉변을 당할 뻔 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마침 그 순간을 목격하여 간신히 모면하게 되었지요.”
“그런데요?”
“그래도 은영 씨는 이튿날 그 놈을 만나서 설득하며 타일러보았지만 은영 씨에게 일방적으로 사랑을 호소하는 스토커 환자였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지요. 매일 퇴근 시간에 맞추어 교정 앞에서 은영 씨를 기다리고 있는 그 놈을 피해 후문으로 퇴근하며 별 방법을 동원해도 그 놈의 열애가 더 악화하여 결국 교장을 찾아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짓말까지 지껄여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아 파직을 당하고 말았죠. 이후 은영 씨는 여행을 다니며 한동안 방황을 했었죠. 그러던 중 성당을 다니는 신문사사장에게 신부님이 은영 씨를 소개하여 신문사에서 일을 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은영 씨의 그 고통을 생각하면 많이 안타깝고 슬퍼져요. 좋은 마음으로 선행도 할 수 없는 이 세상이 얼마나 싫어지고 실망스러웠을 까요? 에이 더러운 사람들….”
기영은 사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그녀를 찾아 나서는 기영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여자의 길을 포기하고 외롭고 고독한 수녀의 길을 택했을까, 짐작이 갈 것 같았다. 그녀가 택한 길이 옳은 길인지 아닌지 아니면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녀는 기영의 친절한 누나인 동시에 이성이었다.
어깨에 힘이 쭉 빠진 기영은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아 몸을 실었다. 기영은 넋 나간 사람처럼 차창 밖의 풍경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차창에 그려지는 은영의 모습을 가만히 손으로 더듬어보는 그의 눈가엔 어느 새 눈물로 번져가고 있었다.
진솔한 허구의 세계 구상을 위해
‘제복 속의 여자’란 저의 처녀작을 엄선하여 당선시켜 주신 심사위원들께 사의를 표합니다. 10여 년 시와 에세이 작품 습작으로 일관하다가 하옥이 주간님의 권고로 허구의 세계를 그려보았습니다. 요사이 세간에서 볼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 장면에서 주인공은 계산적이고 열정적이면서 자기중심적인 남녀간의 노골적인 사랑이야기가 인기 있는 작품인데 반해서, 필자는 보리 고개인 60-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남녀간의 순박한 연정을 한 장의 추억을 반추하듯 전개한 작품이어서 혹시 이 시대와는 동떨어진 작품이지 않을까 가슴을 안고 밤잠을 뒤척였으나 다행스럽게도 소작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여 희망을 주셨기에 더욱 분발하여 보다 나은 작품을 습작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겸허한 마음으로 수용하렵니다. 앞으로 틈날 때마다 진솔한 허구의 세계를 구상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한대의 가능성을 지닌 작가
이 소설 속에는 남녀가 등장한다. 남자의 이름은 기영이고 여자의 이름은 은영이다. 철저하게 작가시점 중심의 3인칭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기영은 육군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후 교사로 부임한다. 즈음에 연상의 여인 은영이 기영의 시야에 든 후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지 못한다. 캐릭터 상으로는 기영의 성격은 우유부단이다. 그는 작가가 되고 싶어 하지만 그런 성격으로 해서 작가가 되기 위한 공부 역시 열중할 수가 없다. 그럴 동안 은영은 중증 스토커한테 걸려 학교에서 파직을 당한 후 신문사로 직장을 옮긴다.
드디어 기영은 은영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신문사로 향한다. 그러나 한 사내가 은영의 근황을 일러준다.
악질 스토커를 피해 결국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들은 기영은 자신의 우유부단으로 인해 은영을 잃은 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이상의 이야기만 보더라도 신동일은 스토리 텔러로서의 재능이 돋보인다. 문장이나 구성능력이 아직 초보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최소한도 소설이 무엇인가는 알고 있다.
어차피 인내만이 작가로 성공할 수 있는 열쇠다. 부지런히 노력해 이 시대의 의미 있는 작가로 대성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