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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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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스크랩 상주관계 글 [얻어 온 글]
혜명 추천 0 조회 64 13.07.03 16: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출처 : 상주 파이데이아  cafe.daum.net/sjpaideia

 

박인호 금오공대 교수의 『조선시기 상주 사회의 변화와 갈등』 강의를 듣고

(2011.6.27. 오전 6시 30분 - 8시, 상주박물관 전통 문화 대학 강좌)




1. 재지사족의 세력화와 중앙 진출

과거엔 집안 행세를 하려면 과거 합격자가 있어야 하였다. 과거는 소과(사마시)와 대과(문과)가 있었다. 대과는 정시와 별시로 구분된다. 별시는 일종의 특별시험으로서 시험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고 갑자기 공고되어 치루어지기 때문에 서울과 그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유리하였다. 별시엔 그만큼 지방 합격자수가 적었다. 그러나 중앙세력과 밀접하게 연계된 지방세력은 중앙지도층과 상호소통되었기에 상대적으로 별시에 대한 정보 공유도 잘 이루어져 응시의 기회를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대과 정시는 지방의 유력 집안 자재가 성균관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후에 합격이 가능하였다. 소과는 서울가서 오랫동안 공부하기 힘든 지방 토호 집안에서 상대적으로 많이 응시하여 중견간부로 진출하였다.




거주지별 소과입격자를 보면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입격자를 배출한 지역은 안동(783명)이고 그 다음은 개성(559명),원주(535명), 평양(529명),충주(515명),상주(470명)순이다. 경북지역만 보면 안동, 상주, 선산(328명), 영주(286명), 성주(282명), 경주(194명), 대구(170명), 예천(166명), 예안(137명), 순흥(132명), 의성(120명), 함창(118명), 김산(116명),용궁(102명), 풍기(90명) 영천(88명), 영해(82명)순이다. 유력 성관별 소과 입격자수는 장수황(27명), 풍양 조(23명),상주 김(23명), 진주 정(22명), 진주 강(19명), 연안 김(16명), 전주 이(15명), 창녕 성(14명), 개성 고(13명), 흥양 이(12명), 인천 채(11명), 안동 권(9명), 경주 이(8명), 연안 이(8명), 청도 김(8명)순이다. 함창의 경우 평산 신(19명), 의령 남(16명), 인천 채(13명), 전주 이(11명), 안동 권(9명)순이다.



대과에 급제하면 중앙 관료군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따라서 문과 급제자를 다수 배출한 집안은 지역 뿐 아니라 중앙과도 일정하게 연결 관계를 가지고 있는 세력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경북 지역의 문과 급제자수는 안동(228명), 상주(163명), 영주(122명), 성주(91명), 예천(84명), 선산(79명), 예안(65명), 경주(59명), 함창(44명), 대구(42명), 의성(41명), 영천(38명), 용궁(36명), 영해(34명), 풍기(32명), 칠곡(26명), 순흥(26명), 인동(22명)순이다. 상주의 대과 급제자는 인조이후 조선 후기에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합격자를 내고 있다. 지속적으로 문과 급제자를 낸 집안은 상주 김씨, 진주 정씨, 풍양 조씨, 진주 강씨, 장수 황씨, 경주 손씨, 흥양 이씨등이 있다. 숙종 이후에는 일부 서얼출신 가운데서도 문과 급제자가 나오고 있다. 이것은 그전까지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던 서얼 출신이 입신출세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울이지만 능력있으면 과거 합격을 통해 중앙 관료 사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조 연간에 상주지역에서 대과에 급제한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관직을 받기도 전에 죽거나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았다. 상주 유력 인사가 중앙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함으로써 상주 지역 사회와 서울 중앙 사회의 연결 고리가 그만큼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는 상주 유력 집안의 번성에 걸림돌이 되거나 상주 사회침체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2. 재지사족의 지역에서의 동향

예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는 서울 중심이다. 조선 시대는 과거를 통해 서울과 지방의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였고 이렇게 선발된 인재 대부분은 서울에서 근무하였다. 스폰지처럼 인재를 빨아들여 이들이 서울에서 근무함으로써 중앙 집권이 가속화되었고 지역 사회는 침체될 수 밖에 없었다. 조선 시대 서울 근교권은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까웠기에 상대적으로 서울 진출에 유리하였다. 대과에 합격하여 서울에서 고위 관료를 지냈던 유력 정치인도 서울근교권에 거주하면서 중앙 정계 막후 인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서울근교권에서 약간 떨어진 지역인 원주권,충주권,상주권도 서울 진출에 유리하였다. 상주는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까웠기에 타영남지역이 남인 세력으로 서울 집권층과 거리가 멀어졌으나 상주 지역은 서울 집권 노론세력과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다. 상주 지역의 실용적인 면이 여기에 드러난다. 상주 유학은 김굉필-소재 노수신으로 이어져 이후 퇴계학, 한강학,여헌학으로 이어진다. 18세기가 되면 한강학과 여헌학은 자취를 감추고 퇴계학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번성한다.

노수신은 김굉필의 문인으로 중앙 정치계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자신의 고향은 부모가 있는 상주라고 생각했다. 젊었을 때 상주에 낙향하기도 했고 부모 상중에는 상주에 있었다. 그의 인심도심설은 주자설과 달라 이항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기론에서는 이기를 나누어보려는 성향과는 달리 명나라 나흠순의 이기일몰설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주장으로 이식으로부터 ‘조선의 육상산’이라 평가받았고, 현재 학계에서도 조선의 양명학자로 주목받고 있다. 노수신의 학문적 제자는 상주 목사로 내려온 강복성으로 이어진다.

유성룡은 상주에 퇴계학 번성에 기여하였다. 1580년 상주 목사로 부임하여 상주의 유학 부흥을 위한 행정을 실시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그는 매월 향교에 나가 교생을 교육시켰고 각 면에 훈장을 두어 자제들을 교육시키도록 하였다. 유성룡의 학맥은 우복 정경세로 이어지고 가학으로는 수암 유진, 졸재 유원지, 입재 정종로, 강고 유심춘, 낙파 유후조를 거쳐 계당 유주목으로 이어진다.

서원은 1606년 도남서원을 시작으로 서원 건립이 이어졌다. 지역 선비들이 지역 선현들의 문집을 판각하거나 간행함으로써 지역의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세력 집단을 형성하거나 지역 여론을 주도해 나갔다.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교육 기능을 갖고 있었다. 교육 기능 없이 봉사 기능만 갖고 있을 때는 사우라고 하였으나 기능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상주에 세워진 서원을 보면 처음에는 국가에서 인정하는 걸출한 인물을 제향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나 17세기 초중반으로 가면서 차츰 가문의 선조를 제향하기 위한 문중 중심 서원이 세워진다. 지역 문중이 주체가 되어 서원을 건립하였지만 설립 주체의 정치 성향에 따라 중앙 정치와 연계된 지역 사족 사이의 갈등 양상도 확대되어 나타났다.


서원이 복원되고 있다. 서원의 복원은 특정 집안의 이해관계를 떠나 상주의 전통 문화 유산을 복원하는 일이므로 상주의 문화적 자산을 확충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3. 향촌 사회의 동요

조선 사회를 지탱해오던 양반, 중인, 평민, 노비라는 계급 구조가 17세기 이래의 사회 경제적 변화를 거치면서 차츰 변화를 일으켰다. 화폐경제와 농업 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유한 평민들이 양반의 족보를 매득하거나 납속을 통해 양반이 되기도 하였다. 유학을 도용하거나 서원이나 향교에 등록하여 양반신분으로 상승하는 자도 생겨났다. 이에 반해 일부 양반층의 경우 오랜 기간 동안 관직에 진출하지 못해 몰락하면서 평민과 다름없는 처지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분 변동은 조선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전통적 신분제를 붕괴의 위기로 몰고 갔다.

신분제 붕괴 위기는 이에 연계되어 있던 조세수취제도에도 영향을 미치게되었다. 일부 진상이나 군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조세는 토지세로 전환되었고 이에 따라 국가의 인민에 대한 지배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춘궁기에 관청에서 농가에 곡식을 나누어주고 가을에 이자를 걷는 환자 제도가 부세화되어 지방 군현의 주요한 재정원이 되었으며 환곡 부담량이 커지고 이자 부담이 늘면서 환자는 농민 수탈의 수단이 되었다. 환자 제도의 경우 농민들에게 나눠줄 땐 부패한 것을 주거나 저울을 속여서 양을 적게주지만 가을에 거둘 때는 품질이 나쁘면 받지 않기도 하고 양도 고봉으로 받아 불만을 초래하였다. 향리 서리들이 이렇게 지역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게다가 조세 수취도 군현 단위의 총액제 개념으로 부과되면서 부농이나 지주의 면탈액을 빈농층이 모두 담당토록 하여 조세 편중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19세기에 들어와 순조가 11세 왕위에 오르면서 안동 김씨 중심의 세도 정치가 ?가되었다. 순조 말년과 헌종 때는 풍양조씨가 권세를 누리다가 철종이 죽위하면서 다시 안동 김씨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세도 정치는 극에 달하였다. 관리들을 문벌 배경으로 등용하면서 토색과 수탈로 사복을 채우기에 급급하였으며 향촌의 양반들은 면탈과 매관매직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세도 정치로 국가 재정이 바닥을 보이자 중앙으로의 상납분을 증대토록 하였으며, 이에 따라 재정이 감액된 지방 관청은 환곡, 고리대 혹은 각종 명목의 잡세를 통해 재정 부족을 채우려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지방에서 조세 수취는 전정, 군정, 환정이라는 삼정으로 표현된다. 전정은 토지에 부과하는 모든 조세를 일괄 수취하는 것으로 원래는 지주가 전결세를 납부하여야 하나 삼남 지방의 경우 전호 농민이 납부하는 관례화되었다. 19세기 이후 전결세는 화폐 징수로 바뀌어 1결당 결가로 징수하였는데 수령이나 서리의 농간이 개입하면서 수취와 상납시의 가격 차이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원래 보다 고액화되었다. (특산품 진상의 경우 중간 서리가 품질이 나쁘다고 퇴짜를 놓으면 뇌물주고 봐달라고 하게됨) 또한 수취의 편리함 때문에 기존의 전결세 뿐만 아니라 군역이나 환곡의 부족분도 모두 토지에 부과하는 도결이 이루어지면서 조세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군정은 양인을 대상으로 한 군포 징수인데 군역 부담자인 양인의 감소에 따른 백골징포, 황구첨징, 인징, 족징등의 중복된 역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환정은 춘궁기의 대여와 추수기의 상환, 환곡의 원곡 중 반은 창고에 두고 반만 분배하는 것이 원칙이나 군현 단위로 모든 곡식을 분배하는 진분과 중간 횡령으로 인해 창고에는 곡식이 한톨도 없는 허류를 메우기 위해 수탈이 가중되었다.


이와 같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 문란, 중간 관리의 횡령, 지방 수령과 재지 양반의 유착등으로 농민층에 대한 수탈이 가중되면서 삼정은 파탄이 날 지경이었다. 이에 농민들은 정소, 의송등의 합법적인 반대 운동을 벌였으나 지방관의 탄압으로 좌절되면서 항조 운동을 벌여나가게 되었으며 이러한 항세 투쟁이 폭력적인 봉기의 방식으로 전화되면서 농민 봉기로 나아가게 되었다. 당시 경상도 대부분의 읍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지만 특히 심하였던 곳은 남쪽의 진주, 함양, 울산과 북쪽의 선산, 상주, 고령 등지였다.


상주에서는 1862년 봄 관아에서 군포가를 각 집당 6냥 8전으로 메긴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3월 장터에 모였던 무리들이 관가에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시위에도 불구하고 군포가 하향 조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월 15일 인근 지역에서의 봉기 때문에 중앙에서 파견되었던 선무사 이참현이 상주에 들어왔다. 이참현은 상주 주민들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효유문을 내어놓았다.(시끄럽게 굴면 처벌하겠다는 내용) 또한 포탈된 환곡을 충당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소민이 분쟁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지금 포탈한 양이 얼마인지 조사도 하지 않고 그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유보해 두었다. 또한 결세는 10냥, 군포는 동포로 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서 이참현은 상주를 떠났다.(4000여조 이자를 두고 유지 집단에서는 집집마다 배당하자고 제안하였고, 가난한 집에서는 토지의 양에 따라 부과하자고 제안함. 이참현 선무사는 이를 조정하지 않고 다시 조사해서 조정하라고 함. 이에 격분한 농민 중 한명이 ‘이참현이 나를 시험하는구나’라면서 이참현 선무사를 향해 돌멩이를 던져 돌멩이가 천장에 맞았다가 바닥에 떨어지자 이참현은 ‘석가래 사이 흙덩이가 떨어지는 예도 있구나’라고 말하며 그 자리를 피하였다. 후에 이참현은 그 때 이 일에 말려들지 않은 것이 잘된 일이라고 일기에 기록하였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1862년 5월 두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농민들은 중앙에서 벼슬을 하였거나 혹인 지주적 농장을 가지고 권세를 부리던 이와 지역 토호의 집 13호, 수탈을 일삼던 이서배의 집 100여호를 불질렀다. 관아의 속오청, 세초청을 불태우고 군안, 환곡 대장을 불살랐다.


(김일복은 지금의 동장 정도되는 인사로서 타지역은 결냥이 8냥인데 상주지역만 10냥인 것은 잘못되었다. 내가 바로 잡도록 하겠으니 시위를 하지 말아달라고 농민들에게 요청하고 관아에 가서 8냥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관아에서 결정을 하지 않았다. 이에 농민들이 읍내에 모여들었다. 관이 급해졌다. 김일복을 시켜 8냥으로 해줄테니 해산시켜달라고 요청하였다. 농민들은 지역 유지 양반을 내세워 결의문을 작성하려하였고 붙잡혀 갇힌 사람을 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1862년 5월 14일 결의문 작성을 부탁하려고 김성지집에 갔으나 김성지가 도망가고 없었다. 이에 김성지집을 불태웠다. 양반으로서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는데 앞장서면 양반 집안이 몰락하게 되므로 김성지로서는 도망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성지가 도망가고 없자 농민들은 조성지집으로 갔다. 조성지는 김성지 집이 불태워진 것을 알고는 집안의 중요한 문서들을 들고 도망갔다. 김성지 집도 불태워졌다. 성참봉 집도 불태워졌다. 이렇게 13호가 불태워졌다. 당시 상주 목사 황규석은 서울로 도망갔다. 부모 병을 핑계로 상주에 오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조영하를 상주 목사로 임명하였다. 1862년 5월 14일부터 6월 까지 상주지역은 치안공백상태였다. 6월초에 관군이 들어오고 6월 24일 경상감사에게 주동자 문초하여 보고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때에 이르어 지역사회를 평정했음을 보여준다. 정낙우(별명 당나구)는 효수되었고 가난한 농민층이거나 머슴으로 보이는 김말대, 조뚜거비는 도망갔다. 당시 도망가면 잡기도 어려?다. 임진왜란 이전엔 노비가 도망가면 주인이 통제하지 못하였다. 주인이 도망간 노비를 잡으면 ‘왜 왔어요.’함. 임진왜란 끝나고 이러한 문제 때문에 ‘예의와 도덕을 지켜야한다.’하여 어느 정도 통제됨. 농민과 관을 중재하려했다가 농민 해산에 앞장섰던 김일복은 곤장을 맞아 죽었다. 주동자급은 체제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인물이나 도망가면 잡을 방법이 없었다. 통제불능이었다. 일부 주동자는 상주관아와 대구 관아에서 곤장을 맞아 죽었고 일부는 유배되었다. 1866년 박규수의 사촌인 박선수가 상주지역에 암행어사로 오게되었다. 성씨, 정씨, 강씨 토호이다. 토호들이 너무하다. 징치(죄다스림)해야한다함. 1888년 민용연 상주목사는 상주의 폐단 20여개를 말함. 백성의 요구 받아들여지지 않음. 지역토호들이 받아주지 않음. 따라서 상주지역민 중에 동학에 다수 들어가게된다. 동학농민전쟁시 상주 지역의 동학이 가장 번성하였다. 상하가 화합되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지역 유지 집단이 농민층을 받아주지 않았기에 그들이 동학에 투신한 것이다. )


상주의 농민 봉기를 살펴 보면 전결세에서는 상주의 농민들은 결가의 징수 담당자인 호수의 수탈에 대한 부란이 컸다. 호수는 일반 조세 부담자가 내야하는 조세를 모아서 관에 바치는 자들인데 이들은 조세의 수납 과정에서 할당된 액은 바치되 그 나머지는 자신들이 착복하거나 혹은 이를 이용해 고리대까지 행하였다. 호수는 대부분 토호이거나 양반이었으며 항쟁 과정에서 가장 원한의 대상이 되었다.


환곡에서는 관에서 포탈한 환곡 4만섬과 그 이자를 두고 대민과 수민이 대립을 보였다. 대민은 각 집에 나누어 분담하자는 주장을 내어 놓았으나 소민은 토지의 대소에 따라 나누어 분담하자고 주장하였다. 각 집에 나누어 분담하면 빈부의 구별이 없이 같이 부담하게 되므로 결과적으로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오는 반면에, 토지를 기준으로 분담하면 토지를 많이 가졌던 양반들의 부담이 늘어나게 된다.


한편 통영 경영을 위해 마련하였던 환곡으로 매년 이식을 놓아 경비로 사용하였던 삼량미는 1560여석이었는데 줄 때는 부패하거나 모래가 섞인 것을 내어 주었다가 거두어 들일 때는 세밀히 검사하여 중간에 착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돈으로 받을 때는 매석당 이자를 3냥 정도로 규정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8-9냥을 이자로 징수하여 명목은 환곡이지만 실제로는 세미와 다를바 없었다.


특히 상주 농민 항쟁에서 향촌 사회의 동요를 볼 수 있는 것은 대민과 소민의 대립이다. 선무사로 내려왔던 이참현도 왕에게 보고하기를 상주 민란의 원인으로 소민들의 대민들에 대한 원한이 쌓였기 때문이라고 보고한 것은 상주 지역사회에서의 계급적 대립이 농민항쟁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 때의 대민은 유명 사족이면서 부유한 지주를 의미하며, 소민은 대민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층으로 빈농이거나 소작농, 자작농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민과 대민의 대립은 기존 질서의 유지를 주장하면서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대민과 기존 질서의 굴레 내에서 맹열히 성장하고 있는 소민이 이제까지의 상하적 관계를 청산하고 동등 관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과정이며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이제 상주와 같은 지역에 있는 사회에서조차 그 변화를 받아들여야할 단계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기득권 세력도 변화해야 한다. 기득권 세력이 변화하지 않으면 민초들과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 대민회합시에 대민(양반, 유력집안, 높은 신분)은 마루위에, 소민(빈농, 자작농, 낮은 신분)은 바닥에서 회의를 하였다. 두 세력간의 대립이 컸다. 선무가 소민의 대민에 원한 때문에 농민 동요가 있었다고 하였다. 새사회, 새 변화를 요구하는 소민과 기존 질서 유지에 급급한 대민 사이의 갈등에서 농민 동요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 시대 과거 급제를 통해 중앙 무대 활동이 기대되던 상주 지역 엘리트들이 일찍 죽고 상주 사회 지배 집단은 변화보다 기득권 유지에 급급하였다. 따라서 현재 상주 지역 기득권을 가진 엘리트 집단은 항상 전향적으로 생각하고 후발 세력과의 대화에 앞장섬으로써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여 살기 좋은 상주 사회를 만드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갈등 구조 해소는 지도층이 밑바닥 민심을 끌어안고 포용할 때 가능하다할 것이다. 내가 가진 기득권을 유지 확대하고 내 주장만 옳다고 고집하면 언제든지 지역 사회 갈등이 심화 확대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경북대 주보돈 교수의 『역사와 픽션』 강의를 듣고

(2011.5.2. 오후 6시 반 상주박물관 전통문화대학 강좌)



1. 드라마 선덕여왕의 교훈

 KBS 역사 스페셜은 역사적 사실 이해에 도움을 준다. 광개토대왕편에서 경주 촬영이 있었다. 광개토대왕이 직접 내려오진 않았지만 고구려군 5만 병력이 내려왔다.  5세기 50년 동안 고구려가 신라를 식민지배했다.  경주의 큰 무덤의 내부 문화를 보면 고구려 계통 문화이다. 진흥왕은 세종을 제외하고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17세에 왕위를 계승하여 30여년간 왕위에 있다가 40여세에 사망했다.  아직 진흥왕편이 역사 드라마로 제작되지 않아 아쉽다.


 역사 스페셜이나 드라마는 일반인들의 역사적 사실 이해에 도움을 준다.  최근 드라마 선덕여왕의 인기에 힘입어 일반인들이 경주 선덕여왕릉을 방문하고 신라 역사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역사 드라마가 사실에 충실한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구성은 탄탄하고 재미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기본 구성이 엉터리란 것이다.  선덕여왕은 삼촌과 결혼했으나 삼촌 사망 후 독신으로 지냈다. 귀족들 간 정치 싸움 방지 위해 왕위에 올랐으나 정치 싸움으로 골치를 앓았다. 16년 간 왕위에 있었으나 10년을 아팠다. 스트레스로 사망했다. 선덕여왕 사망 이후 난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선덕여왕을 이어 사촌 여성이 왕위를 계승했다.  선덕여왕을 사막의 여우 처럼 묘사하고 미실존 인물인 미실이 정치를 좌우하는 것으로 나오는 화랑 세기는 99% 거짓이다. 7세기 격동의 시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는 좋으나 그 자체를 역사적 사실로 믿도록 하는 것은 드라마가 국민을 상대로 사기치는 것이다. 이러한 사기극에 속아넘어가는 국민도 많다. 역사적 안목과 수준이 낮은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다.


 사료는 기록에 남은 자료이다. 사료에도 A,B,C,D등급이 있다. A등급 사실 자료를 갖고 말해야 신뢰 얻는다. 드라마에선 선덕여왕이 강건한 여왕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사료에 나와 있는 선덕여왕은 강건한 여왕 아니다. 신라시대는 귀족들이 화백회의를 통해 의사결정을 하였다. 여왕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사료에 근거하지 않은 드라마는 일반인들에게 허구를 사실로 믿게할 우려가 있다.


 역사 드라마는 일반 드라마와 다르다. 사랑 가족 관계 드라마의 배경이 1950-60년대라도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 오늘날 시청자의 호응을 얻기 어렵다. 그래서 2010년 배경으로 재해석하여 시나리오를 엮게 된다.



2. 역사와 픽션의 차이

 역사는 사료로 말한다. 사료가 없으면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기 어렵다. 사료에 충실하면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사료를 떠난 역사학은 존립할 수 없다.  우리 나라에선 중국이 동북공정한다고 비난한다. 우리의 소수 사학자들도 백제의 요서 경략설을 주장한다. 북중국 역사기록에 요서백제군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와 직접 교류한 남조 쪽 기록엔 이런 기록이 없다. 백제의 요서 경략설은 사실상  무게있는 사료가 뒷받침해주지 않기에 근거가 빈약한 것이다. 사료에 근거하지 않고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중국은 중국 마음대로, 일본은 일본 마음대로 입맛에 맞는 사료를 찾아 근거 자료로 삼는 것도 문제지만 사료도 없는데 과거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어느 민족이든 민족의 생성 과정이 있다. 주류의 흐름을 분석하면 된다. 우리의 경우 고려 시대 지배 이데올르기를 위해 단군의 자손임을 강조했다. 그 이전엔 우리 조상을 하늘로 보았다. 하늘이 나라를 열었다고 하였다.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이 역사 왜곡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실 기반을 중국이나 일본 보다 단단하게 해야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중국이나 일본보다 나으면  중국의 만주나 일본의 대마도가 우리와 가까워진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중국이나 일본보다 열악하면 만주나 대마도는 영원히 우리와 먼 이웃 나라가 되어 버린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응하는 방식이 우리의 과거 역사를 날조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서는 안된다.  뻥튀기를 하면 어느 집이든 자기 집에 금송아지 없는 집이 없고 초등학교 다닐 때 공부 못한 사람 없다.  역사 연구의 목적은 이렇게 사실과 허구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사실에 근거한 역사라야 설득력이 있고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역사기록에서 당대의 기록은 과거의 기록보다 정확도가 높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 조차도 사실에 근거했는가를 검토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6면체를 정확하게 볼 수 없다. 보는 사람, 보는 때, 보는 상황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하물며 시대가 앞선 기록일수록 정확도는 떨어진다. 따라서 사료는 반드시 비판을 거쳐야 한다.


 일반적으로 소설은 허구이다. 그러나 역사 소설은 2011년 상황 이야기하면서 1950년 배경으로 그려선 안된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적 기록에서 없는 부분도 많다. 그러나 남아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를 근거로 없는 부분을 상상해야 한다.  없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남아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를 각색하면 안된다.  선덕여왕의 신라시대는 골품제 사회였다. 골품제 사회를 양반사족사회로 묘사하면 안된다.  그것은 대중적 사기이다. 선덕여왕을 픽션화하게 된다. 역사 드라마를 공상과학드라마로 떨어뜨리게 된다.  따라서 역사 소설이든 역사 드라마든 있는 사실을 없다고 하거나 없는 사실을 있다고 하면 안된다.  화랑세기는 허구 소설이다. 작가가 마음대로 쓴 것이다. 작가가 마음대로 쓴 것을 믿으면 객관성이 떨어진다. 사실에 근거한 픽션이라야 역사 교육의 효과가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경우 조선 시대 이후 배경을 신라 시대 배경으로 잡았기 때문에 역사적 사기이다. 경주 남산 중턱에 선덕여왕릉이 있다.  이 릉이 선덕여왕릉인지는 묘지발굴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사천왕사 도리천에 묻어달라.’는 다른 기록으로 추정할 뿐이다.  고대 왕릉 중에서 주인공 알 수 있는 유일한 왕릉은 무녕왕릉이다. 무녕왕릉은 해방 이후 최대의 발굴이다.


 드라마가 왜 자꾸 픽션화되는가? 이는 역사 논문의 난해성에 크게 기인한다.  역사는 사실에 근거하고 사실은 남겨진 기록(사료)에 근거한다. 역사는 사료학이다. 기록에 남긴 사료가 없으면 역사를 말할 수 없다. 우리 나라 재야사학자들은 사료에 부실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사학에 입각해서 2000년 전 소설을 역사로 믿고 교과서 반영을 요구한다.  Fact+Fiction =Faction(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 이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재미있는 소설이나 드라마 만들 수 있다.  일제시대 3대 천재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홍명희는 1930년대 『임꺽정』을 썼고 1939년, 1946년에 책으로 출간했다.  북한의 국학자인 홍기문의 아들 홍석중이 써서 국내에서 소개되었다. 홍명희는 조선왕조실력을 모두 읽고 명종 연간을 꽤?어 그 시대를 오늘에 되살려내었다.  황석영의 『장길산』은 한국일보에 연재한 소설이다. 황석영은 원고료를 선불로 받아서 모두 술값으로 탕진했다.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이 원고료를 다시 주어 황석영은 자료 조사와 역사 전공자 면담을 통해 장길산이란 대작을 만들게 된다.  박경리의 『토지』도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대하 역사 소설이다.


 “지평선 너머 물체가 가까이 오면 사람과 동물 크다 작다 알 수 있다. 즉 왜곡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저 멀리 있으면 누구라도 추측해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할 수 있다.” 고대사 영역이 그렇다.  고대사에 대해 잘 몰라도 누구든지 자기 마음대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다. 고대사를 사극으로 엮을 경우 바로 이러한 왜곡이 심할 수 있다.  현대사는 사료가 풍부하기에 어떤 사료는 꼭 안봐도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고대사에 대한 사료는 부족하기에 하나의 사료라도 무시할 수 없다. 현대사의 징검다리는 촘촘히 이어져 건너뛰어도 되지만 고대사의 징검다리는 듬성듬성하기에 건너뛸 수 없다.  고대사의 드문 사료를 갖고 고대사 전체를 살피는 일이 역사학자가 해야할 일이다. 즉 작은 사료를 갖고 고대사의 말뚝을 박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 말뚝을 내 마음대로 옮겨서는 안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직선으로 가는 것이다.  광물에서 1차로 해야할 일은 옥석을 가리는 일이다. 옥의 티를 가려내야 한다.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가 중요하다. 순수한 옥을 가려내어 순서대로 끼워야 이쁜 목걸이가 된다.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 일은 보물을 만드는 작업이다. 뛰어난 역사 소설은 한결같이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  당시 사정의 이해의 바탕 위에서 픽션이 이루어져야 한다.  역사 기록이 단 한줄인 경우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생긴다.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일본의 라쇼몽이란 흑백영화가 있다. 1951년 베니스영화제 금상을 수상했다. 구로다 아끼라는 1950-60년대 작가이다. 일본 헤이안 시대 10세기에 한 무사가 여자를 데리가 길을 가다가 도적과 칼 싸움하다가 죽었다.  여성을 겁탈하는 장면을 보고 농부가 관아에 신고한다. 재판을 한다.  같은 사건을 두고 죽은 무사, 죽인 도적, 여성, 농부의 말이 서로 달랐다. 이 영화는 인간 인식론에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이 사실을 어떻게 보는가? 진실에 근접할려고 노력하는 사실이 진실인가? 역사가는 있는 그대로의 기록 즉 사실에 충실한다.  역사를 전부 픽션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3. 관점의 차이와 픽션의 기능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관점이 달라진다.  한 사람이 보는 경우라 해도 상황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 어떤 경우엔 좋게 보이다가 어떤 경우엔 나쁘게 보인다.  1999년 12월에 한달 이상 새로운 세기, 새천년을 앞두고 전세계 사람들이 초조해하였다. 2000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문제였다.  우리 나라에서 지난 1000년간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로는 세종대왕, 이순신이 뽑혔다. 세계사적으로는 첫째가 후덴 베르크였다. 후덴베르크는 포도주 젖짜는 기계에 접목해서 인쇄기계를 발명했다. 당시 성경책 필사가 힘들었기에 제일 먼저 찍어낸 책이 성경책이었다.  일반인들이 성경책을 읽게 되자 사제가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알게 되었다.  예수의 말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면죄부를 팔자 종교 혁명이 일어났다. 인쇄기 발명으로 하여 인류는 비로서 근대사회로 접어드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우리 나라 금속활자는 서양보다 200년 앞섰으나 지배층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소수의 지배층에서만 소유하였다. 고금상정예문이 최초의 인쇄본이나 현재 남아있는 인쇄본은 직지심체요절이다. 인쇄본을 적게 찍어 소수이 돈있는 사람만 소유하였다.  17세기까진 동양이 서양 보다 선진국이었다. 17세기 이후 서양 인쇄술이 발달한다.


 지난 1000년 동안 일본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는 첫째, 토쿠가와 이에야스, 둘째 토요토미 히데요시, 셋째, 오다노부나가이다. 역사 소설가에 의해 세계적인 인물로 발굴된 사례도 있다. 첫째가 사카모토 료마이다.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1960년까지 역사속에 잠자고 있던 인물을 시바 료타로는 작가가 발굴하였다. 시바 료타로는 일본의 사마천이 되기 위해 열심히 역사 공부를 해서 작가가 되었다. 1960년 신문연재소설에 3-4년 동안 ‘료마가 간다.’를 연재하였다. 2차 대전 패전의 아픔 속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이 소설은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이 소설로 인해 일본은 제2의 경제부흥의 꿈을 꾸게된다. 시바료타로는 일본 국수주의자, 일본 제일주의자이다.  시바료타로가 재일동포와 친하다고 친한파가 될 수 없다.  일본인들은 일본사의 제일 자랑스러운 일로 러일전쟁 승리를 든다. 그들은 일본이 동양을 대표해 서양을 이겼다고 생각한다. 사카모토 료마는 제국주의 일본의 팽창을 환영하고 메이지유신의 성공에 기여했다. 보사현 출신이다. 에도시대엔 지방에 번이 있고 중앙에 막부가 있었다. 교토에 왕이 있었지만 막부의 최고 우두머리인 쇼군이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군사정권이었다.  지방에는 지방마다 지방번이 있고 우두머리를 다이묘라 하였다. 도쿠가와도 다이묘에서 쇼군이 되었다. 샤스마번(사이고다카모리)와 죠수번이 협상을 하여 천왕지지하기로 하고 쇼군과 싸운다. 다카모토 료마는 이 시대에 뛰어난 검객이나 눈이 나빠 30대 초반에 암살된다.  시바료타로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논문, 책, 단행본을 보고 그 당시 상황을 이 잡듯이 살펴서 역사소설을 쓴 것이다.  자료를 트럭에 실어날랐다. 그래서 허구가 역사처럼 쓰여진 소설을 만든 것이다. 다카모토 료마를 지난 천년 동안 일본사 최고의 인물로 만들었다. 


 그 밖에 미야모토 무사시가 있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17세기 에도 시대 전반에 활동한 고베 효고현 출신 일본 제일의 검객이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요시가와 에이찌가 신문 연재 소설을 써서 일개 검객을 세계적인 인물로 만들어 놓았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전국 검객을 상대로 60여회 싸워서 이긴다. 이기기 위해 단련한다. 바람의 파이터란 영화에서 이 인물을 모방해 제일동포 최영희(최배달)이 황소와 싸워 이기고 검객을 찾아 돌아다닌다. 최배달은 일본에 귀하하였고 가라테의 세계화에 기여하였다.


 요즘 우리 나라 젊은 작가들은 논리력이 아닌 상상력으로 사극을 픽션화하고 있다. 박종화, 이광수는 역사 공부를 엄청나게 한 작가이다. 요즘 작가들은 감각성이 발달했으나 역사 공부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엉터리 작품을 쓰게되고 사기극으로 국민을 현혹한다. 과거 작가들은 역사 교육에 기여했지만 요즘 작가들은 역사 교육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2000년 봄에 ‘료마가 간다.’는 우리 나라에 ‘제국의 아침’이란 이름으로 책방에 보급되었다. 제국주의 아침은 일본 제국주의의 성장을 말한다. 『료마가 간다』는 시바 료타로라는 작가를 일본 국민 작가로 추앙받게한 작품이다.  시바료타로는 진흙밭의 인물을 세계적 인물로 만들어내었다.  중국 사대 기서인 삼국지연의는 소설이지만 기본 골격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상상력을 가미해 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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