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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과 다윗 Ⅵ (삼상 21:10-22:5)
영적적용 : 영적승리론-2
요약
사울을 피하던 다윗이 저지른 실수는 영적인 생활에서 성도가 자주 격는 시행착오를 보여준다. 다윗이 블레셋에 피함은 은둔과 신비주의의 위험성을, 아둘람 굴로 피신하여 방랑자들이 모여 옴은 영성에 있어서 사랑과 겸손의 원리를, 혈연의 모압 땅에서 유다 땅으로 피신함은 영성이란 안식이지 안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설명
본문도 계속되는 영적 승리론에 관한 내용이다.
5. 영성이란 은둔과 신비주의가 아니다.
10절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1) 블레셋 - 은둔과 신비라는 가장 통상적인 그러나 가장 위험하다.
2) 미친 체 - 은둔과 신비에 빠지면 악령에게 잡히는 현상이 온다.
6. 영성이란 낮은 자리에 처하는 것이다.
22장 1-2절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명 가량이었더라"
1) 아둘람 굴 - 피난처로서 십자가 아래 낮아짐을 보여준다.
2) 사백명 - 내가 낮아질 때 여러 방향에서 심적인 안정이 찾아온다.
7. 그러나 영성이란 안식이지 안일이 아니다.
4-5절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이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1) 모압 - 외가의 혈연을 의지함으로 안일의 상징이다.
2) 갓 선지자 - 안일하면 영적인 결박이 찾아옴을 보여준다.
3) 유다 땅 - 사울과의 긴장관계가 있는 약속의 유다 땅처럼 신앙 안에서 긴장감 있는 투철한 신앙생활이 필요하다.
4) 헤렛 수풀 - 긴장감 있는 신앙생활과 하나님의 분야는 하나님 주권에 맡기고 쉬는 곳에 참된 안식이 존재한다
강해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사울과 다윗' 즉 영적 승리론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의 말씀을 잠시 복습하면 죄에서의 승리란 나 홀로가 아니라 기도를 통한 성령의 붙드심이 있어야 하고, 내 공로가 아니라 말씀을 통한 예수 공로의 복음에 서야 하며, 마음의 평안과 큰 능력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영성이란 실패했을 때에도 언제나 하나님께 묻고 나를 내려 놓는 제물되는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영성훈련의 기본 원리입니다.
그 동안 많은 성도들이 영성을 사모했지만 늘 실패했던 이유는 무언가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시행착오는 주관적 차원에서 볼 때 우리들의 번번히 범하는 시행착오의 예표입니다. 오늘도 이어서 영적 승리론을 약 세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5. 영성이란 은둔과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10절에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했습니다.
본문 10-15절은 다윗이 놉에서 양식과 무기를 구한 다음 블레셋으로 피신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성막이 있는 놉은 준비과정이고 본격적인 첫 피신은 이방 땅 블레셋입니다. 그런데 그가 간 가드는 블레셋의 수도요 전에 자기가 죽인 골리앗이 살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적진에 피신한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다급했으면 블레셋을 피신지로 택했는지 연민의 정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가장 큰 이유는 최대의 적대국가로 피신함이 사울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요, 당시 적의 요직자가 귀순하면 이용 가치가 있기 때문에 대개 환영하는 것이 국제적인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1절을 보면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말합니다. 그들은 다윗의 신분을 곧 알아 보았을 뿐 아니라 전에 블레셋을 무찌른 전적을 잘 기억하고 있었고 그 땅의 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다윗이 그만큼 백성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상황을 판단한 다윗은 행동을 변하여 미친체하면서 쫓김을 받아 피해 나오게 됩니다. 이 사건은 신령한 의미에서 잘못된 영성의 길인 은둔과 신비주의의 예표입니다.
즉 다윗이 사울의 최대의 적대국가인 원수의 나라로 피함이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인정되었듯 사람들이 죄악을 피하기 위한 최고의 안전한 방법으로 은둔과 신비주의의 길을 택한다는 점입니다. 이 길은 사람들에게 가장 흔한 방법이요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 속에서라도 이 방법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토대에서 여러 종교들이 생겨났고 우리 기독교에도 비정상적인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죄를 피하려면 아예 현실과 등지고 하나님만 날마다 추구하고 살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사단과 손을 잡고 동거하는 길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특수한 현실 속에서 거기서 부딪혀서 숨겨진 내가 드러나고 또 거기서 주의 말씀대로 죽어지고 만들어지고 사랑하고 늘 점검되어지면서 영성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현실 도피는 나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나려는 계산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들고 블레셋에 간 모양을 보십시오. 이 모습은 전에 골리앗이 죄악의 거성이었다면 이 다윗의 모습은 영적인 대 거성이 되고자 하는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나 영적 거성은 현실도 피의 신비주의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을 보세요. 수십년 간의 현실적인 연단을 거쳐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 역시 40년의 미디안의 고독스런 연단이 있었습니다. 다윗 역시 지금 현실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연단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영에 속한 성도나 주의 종들이 이러한 연단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연단없이 왕이 되었기에 조금도 그에게는 영성이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12-15절에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했습니다.
이 구절은 비현실 속의 신비주의는 언제나 악령을 불러온다는 교훈입니다. 여기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 골리앗 을 죽이던 다윗의 팔이 대문짝에 그적거리는 낙서나 하고 아론의 수염처럼 보배로운 기름이 흘러야 할 그 수염에 저주와 부정과 수치의 침이 흐릅니다. 이것이 은둔과 신비주의의 결과입니다.
오늘날 건전한 성령운동이 외면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많은 지도자들이 신비주의의 폐해를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이 신비주의를 하다가 문제가 생기고 정신병자가 되거나 교회 문을 닫는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바른 목적의 은사운동은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신비주의란 한 마디로 천국을 십자가와 부활의 과정이 아닌 다른 문으로 들어가려는 주의입니다. 놀라운 것은 안식교나 여호와 증인이나 몰몬교나 통일교나 전도관 등 대부분의 세계적 국내적 이단들이 그 교주의 신비주의
운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잘못 나가면 사단과 손을 잡는 적과의 동거가 되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운동은 분명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원칙을 지난 시간부터 말씀하고 있습니다.
6. 영성이란 사랑과 겸손의 낮은 자리에 처하는 것입니다.
22장 1-2절에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명 가량이었더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유대 아둘람굴로 피신한 내용입니다. 아둘람굴은 '피난처'라는 뜻으로 유대 산간에 위치한 많은 굴 중의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 등 극도의 환난을 당할 때 피난처로 이러한 굴들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앞의 블레셋과는 달리 다윗의 일차적인 성공이 나타납니다.
전에 다윗과 함께 하던 사람이 불과 몇 명이었는데 이제는 백 배나 되는 사백 명 가량이 되었습니다. 즉 환난을 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방황하던 모든 자들이 아둘람 굴의 다윗을 찾아와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군사까지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내가 낮아질 때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지는 그만큼 마음이 모아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이제야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 가는 장면입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에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영성적으로 큰 힘을 얻는 법칙을 이 시간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곳은 사울이 통치가 잘 미치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랑과 겸손에 거하면 육신의 세력이 주관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영성이 중요한 법칙 중 하나가 사랑과 겸손입니다. 겸손의 자리에 내려갈 때 믿음으로 살아집니다.
또 산 골짜기에 물이 흐르듯 사랑과 겸손의 골짜기에 성령의 강수가 흐릅니다. 사랑과 겸손은 언제나 비례합니다. 사랑은 믿음과도 비례합니다. 또 믿음은 은혜를 누림과도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낮은 향제는 자기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약1:9-10) 했습니다.
7. 그러나 영성이란 안식이지 안일이 아닙니다.
3-5절에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이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했습니다.
여러분 블레셋에서 실패한 다윗이 자기 부모를 이끌고 모압 왕에게 나아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윗의 증조모 룻의 고향이 바로 모압이었기 때문에 혈연적인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룻4:13-22, 마1:5-6). 그런데 혈연이란 가까울수록 유리하기 때문에 늙었지만 생존한 부모를 모시고 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모를 모압 왕에게 은신시키고 자기는 요새에 거하게 됩니다.
이 곳은 미스베 즉 미스베는 미스바의 남성형으로 '전망대'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이 곳이 다윗에게 가장 안전하고 편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보고 사울이 죽어 좋은 상황이 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습니다(3절). 그런데 유대에서 선지자 갓이 황급히 찾아와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대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갓은 '행운, 요행'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이름의 선지자를 보내시는 것도 사역의 한 방법입니다(사7:3).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이름의 선지자를 보내셨을까요? 가만히 앉아서 요행을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곳을 떠나 다시 쫓고 쫓기는 파란만장한 유다 땅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영성의 중요한 원리는 안식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안식과 안일은 다릅니다. 안식은 믿음과 순종이라는 행함있는 믿음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이 주신 평안이지만 안일은 믿음의 행함이 없는 육신적인 편안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육신적인 수고는 따르지만 마음의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일은 육신적인 수고가 없는 반면 마음의 불안은 점점 가중됩니다. 이것이 다윗이 부모를 강력한 모압의 왕권에 의지했으면서도 다윗은 요새에 거해야 했던 비유적인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곳에 오래 거하면 큰 일납니다. 지금은 모압 왕의 보호 속에 있지만 만약 사울이 다윗을 요구하면 모압 왕이 전쟁을 불사하며 다윗을 지켜줄리 만무합니다. 거기다 부모까지 인질로 잡히는 격이 될 것이니 꼼짝없이 당하는 꼴입니다. 이것이 안일이 가져다 주는 결과입니다. 즉 안일은 사단의 큰 시험을 불러 옵니다. 그러므로 안일의 결과는 영적인 결박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이란 쫓고 쫓기는 유다 땅과 같이 긴장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돌아 온 그 곳이 바로 헤렛 수풀이었습니다. 헤레스는 태양이요 그 태양을 가리는 수풀이니 숨거나 쉬기에 좋은 그늘입니다. 아 2:3에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한 것처럼 안일하지 않는 믿음의 행함 속에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성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신앙생활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려놓는다고 신앙생활까지 내려놓는 것이 아닙니다. 안일하면 결박되어 끌려가는 비극을 당합니다. 그래서 삼손처럼 시드기아처럼 신령한 눈까지 빼이고 쇠사슬에 매여 끌려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성이라는 고급 용어를 몰라도 됩니다. 철저히 주일성수 하십시오. 철저히 새벽기도하십시오. 열심히 성경보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봉사하고 전도하십시오. 마음이 우울하여 침체하거나 세속적인데 관심 둘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마십시오. 생명을 찾는 자에게 쫓기는 유다 땅처럼 신앙생활은 긴장감이 필요합니다.
이 긴장이 풀리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긴장 속의 안식이라는 특수한 구조입니다. 그래서 히 3:18-4:11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 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여기 믿음과 순종이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한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맡길 것과 내가 열심히 할 것을 구분 할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염려나 근심 등은 하나님의 권한이지 우리의 권한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실 일을 우리가 열심히 하면 안식은 사라집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가 할 일을 찾아 열심히 행하면 안식이 찾아옵니다. 이 분리와 행함을 히브리서 기자는 폭은 다르지만 믿음과 순종이라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내 주권에서 하나님 주권으로 바꾸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영성이란 은둔과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영성이란 사랑과 겸손의 낮은 자리에 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이란 안식이지 안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생명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배워서 그대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 다윗의 방황은 끝나고 왕이 된 것처럼 진정한 왕적인 신분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