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두 가지 사건[17장-21장]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반드시 연대적 순서인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 두 가지는 단지파의 이주와 우상(신상) 만드는 사건 그리고 또 하나는 레위족 첩 강간사건이다. 이것은 사사시대를 통해 나타난 이스라엘의 모습을 단적으로 요약 총괄해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에브라임선지 미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이 사건의 경위를 본문을 보면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어머니에게서 은 천백을 취하니 어미가 저주를 하고 또 취한 은을 다시 어미에게 돌려주자 어미가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또 이 은을 성별하여 신상 곧 우상을 만든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영적 부패 영적 무지 등을 암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뒤죽박죽이다. 이렇게 해서 미가라는 한 개인에게 속한 하나님의 집, 개인성소가 존재하게 된다. 드라빔과 에봇을 만들고 그 아들 중 하나를 제사장으로 만들었다. 이에 대한 평가를 당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기 제 눈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이스라엘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보면 영적으로 이스라엘은 이미 갈갈이 찢어져서 전혀 영적 결속감이 없이, 전혀 질서가 없이 각기 제 눈에 옳은대로 소견대로 행했다. 그래서 전혀 통제불능 상태가 되어서 제각기 제 마음대로 행한다.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을 세우고, 그렇다고 이 사람이 전혀 하나님의 규례를 모르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레위인 소년이 들리니까 그 사람을 잡아놓고 제사장을 하라고 했으니까 제사장은 본래 레위인 그것도 아론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개인 차원에서의 신앙의 변질 곧 하나님의 섬김, 예배의식과 관련해서 생겨난 하나의 변질이라고 하면 여기에는 묘한 요소가 하나 덧붙게 된다.
단지파는 앞서 이야기했지만 아모리 족속을 정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쫓겨났다. 유업을 얻지못하고 빙빙 돌아다니다가 결국 여기 이르러서 미가라는 사람의 집에 있는 개인성소를 지키는 레위인 제사장 소년을 만나게 된다(17:13절 참조).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는 하나의 성소 밖에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납치하여 이 때에 이미 단지파에는 독립된 성소를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의 섬김의 도리에 있어서, 의식영역에 있어서 특히 성소와 관련해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무지하고 타락했는가를 알 수 있다. 뻔히 율법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도리에 벗어난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레위 족속인데 여기에도 꼭 같은 말로 시작된다. 당시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제 눈에 좋은대로 행했다. 레위 사람이 첩이 음행을 해서 쫓아 보냈는데, 연연해서 쫓아가서 데리고 오다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밝을 때) 이방인들이 사는 마을에 가서 자면 될텐데 그래도 하나님 백성(교인) 집에 가야 된다고 해서 찿아갔는데 아무도 맞아 주는 사람이 없다. 그때 한 노인이 맞아 주어서 들어간다. 그런데 같은 교인들이 맞아 주기는 커녕 비류들이 찾아와서 남자를 내어 놓으라고 한다(homo-sex). 그럴 때 노인이 자기 딸을 주겠다고 해도 안된다고 해서 결국 레위 자손의 그 첩을 내어 놓는데 그들은 그 첩을 밤새 괴롭혀 죽게 한다. 그러자 그 시체를 12조각 내어서 12지파에게 돌리고 온 이스라엘은 분노한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들고 일어난다.
이 내용이 소돔, 고모라시대와 흡사하다. 사건의 구체적 내용까지 거의 흡사하다. 소돔 고모라 사건이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모든 선악간에 심판을 하시겠지만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너무 극악해서 특별히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불로 심판하심으로서 불의와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어떤가 표본적으로 보여 줄 수 밖에 없는 타락의 상징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다.
이스라엘이 그와 동일한 죄를 범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는 교회가 주도권 쟁탈로 인해서 분열되고 또 지도층이 권력욕에 사로 잡혀 족벌정치를 한다든지 통혼을 한다든지 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가장 극악한 두 개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타락의 정도가 얼마나 깊었는가, 심했는가를 보여주는 두 사건을 기록하고 마지막에서는 온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여서 이런 악을 행한 베냐민 사람의 처리를 하나님께 묻는다. 유다지파가 선두에 서고 그 일을 처리하는데 너무 분개해서 베냐민 지파의 600명만 남기고 다 죽여 버린다.
죽여 놓고 선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한 지파가 궐이 났다고 통곡을 한다. 남자만 600명 남아서 광야로 도망쳤는데 이 사람들을 짝지을 일이 걱정이다. 그리고 또 길르앗 야베스 사람은 이번 전쟁에 오지 않았으니까 멸하자 해서 다 죽여버리고 남은 과부를 짝지어 주고 그것도 모자라니까 실로에가서 축제 때 무조건 잡아 오라는 등 되어가는 꼴이 전혀 교회답지가 않다. 한마디로 제 눈에 옳은대로 행했다. 완전히 질서가 붕괴된 교회 모습을 사사기는 그리고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왕이 없었으므로라는 말씀을 덧붙임으로서 지도자, 목자없는 회중에 닥치는 여러가지 어려움, 확실한 리더쉽이 없는 교회가 겪는 붕괴과정을 말씀하는 동시에 앞으로 어떤 소망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간접적으로 암시하기도 한다.
참된 왕 다윗 그를 통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 그가 이러한 상태에서 소망 임을 말씀하는 것으로 사사기는 끝이 난다. 그래서 그 다음 성경(곧 룻기, 사무엘상, 하)은 바로 사사시대가 대망하던 강력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메시아 바로 그 통치권이 확립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사사기는 뚜렷한 교회 지도자 없이(인간 지도자 없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 이상적인 상태에서 출발한 역사라고 보지 않고 오히려 뚜렷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시대를 통해서 요셉지파에서 부터 유다지파에로 지도권이 넘어가는 이행기간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고 분명히 말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좁은 시각에서 보면 분명히 리더쉽이 없어서 발생한 일이다. 그 후에 일어난 여러가지 타락의 악순환마다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보내셨지만 간헐적인 사사들의 출현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고,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왕조의 필요성, 왕권확립의 필요성과 메시아 출현에 대한 기대를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사사기는 통상적인 이해와는 달리 교회에 있어서의 리더쉽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가장 강조하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그 리더쉽의 본질과 성격이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지도자를 통해서 실제로 그 교회를 다스리시는 그러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아비멜렉과 같이 강력한 통치를 행사하려고 했으나 그가 행사한 통치 자체가 하나님의 통치와 거리가 멀 때는 교회를 패괴케 하는 촉진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사기를 통해서 교회가 타락, 붕괴, 와해되어가는 과정이 어떠했는가? 어떻게 시작되어서 어떤 현상들이 수반되었고, 어떤 결말로 끝나게 되었는가 한번쯤 깊이 생각해야 하겠다. 개 교회마다 사정이 다를 것이고, 교단마다 사정이 다를 것이고, 나라마다 교회 사정이 다르겠으나 각 교회가 어느 수준에 있는지, 정상 수준에 있는지, 타락해 가는 과정에 있는지, 타락하고 있다면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 한번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사기의 사건들이 그 당시에만 의미있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고 한다면 성경으로 남겨 둘 필요가 없다. 기록한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함이요 후세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의 경고로 기록하신 만큼 이러한 일들을 깊이 상고하고 우리도 이런 결말로 교회가 끝장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힘을 떨치고 일어나서 일을 벌린다고 될 일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마음으로 예의주시해야 할 것이다. 경성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