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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9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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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설교자들은 보통 이사야서를 다섯 번째 복음서(the fifth gospel)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탄생과 삶,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록한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보다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은 말씀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인 이사야 35장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복음시대의 상황을 세 가지 단락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먼저 1-2절에서는 이방 국가들의 개종을 언급합니다. 복음시대가 되면 이방의 국가들도 복음을 믿게 될 것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광야나 사막은 이방 나라들을 상징하며, 레바논, 갈멜, 사론은 이스라엘의 훌륭한 땅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광야나 사막 같은 나라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영광과 축복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3-7절은 복음의 축복을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능력과 용기와 보수와 위로와 기쁨과 기적과 구원의 은혜, 이것이 복음의 축복입니다.
마지막으로 8-10절은 복음의 두 가지 성격을 이야기합니다. 8절에는 거룩이, 10절에는 즐거움이 강조됩니다. 다시 말해 복음은 거룩하고 즐거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35장을 본문으로 탁월한 강해를 했던 존경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분은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고, 다른 한 분은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이 본문을 통해 ‘시온의 대로란 어떤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시온의 대로를 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본문을 강해했습니다. 저는 오늘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관점을 따라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청교도들의 설교는 대개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먼저 본문의 주제가 무엇인가를 관찰하고, 그 본문이 말씀하는 교리를 파악하며, 마지막으로 이 진리를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것인지를 살펴봅니다. 저도 청교도들의 설교양식을 따라 주제와 교리, 그리고 적용의 3단계로 오늘 본문을 관찰하도록 하겠습니다.
1. 본문의 주제
오늘 본문의 주제는 구원의 길입니다. 죄인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느냐는 질문에 오늘 본문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8절은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라고 말씀하며, 10절 전반에는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본문은 ‘시온의 대로’에 관해 말씀하는데, 이 시온의 대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 길은 시온에 이르는 길입니다.
원래 시온은 다윗이 여부스족에게서 빼앗은 예루살렘 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시온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영적 시온인 교회를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하나는 지상에 있는 교회인데, 이 교회는 마귀와 계속되는 전투를 하고 있다고 해서 ‘전투적인 교회(militant church)’라고 불렀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천상에 있는 교회인데, 승리한 성도들이 가 있는 곳이라고 해서 ‘승리적 교회(triumphant church)’라고 지칭했습니다. 본문의 시온은 궁극적으로 승리한 교회가 있는 천국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시온에 이르는 길은 천국에 가는 길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둘째로 천국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한 길 뿐입니다.
본문 8절에 있는 ‘거기 대로가 있어’라는 구절은 영어성경에서 ‘And a highway will be there’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오직 하나의 대로, 즉 천국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여러 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보통 예수님을 믿어도 천국 가지만, 부처나 마호메트를 믿어도 천국 간다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사상이 종교다원주의입니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는 거짓 진리입니다. 마귀에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종교다원주의는 기초도 없고, 토대도 없는 마귀의 거짓말, 속임수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거짓말에 속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이 길은 거룩한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오직 거룩한 사람들뿐입니다.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8-10).
이 말씀을 보면 거룩한 길에 올라가지 못할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먼저 죄로부터 깨끗하지 못한 자는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또한 우매한 행인은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영어성경에는 ‘우매한 행인’을 ‘wicked fools’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람이 지능이 모자라면 대개는 착한 편입니다. 그런데 이 바보들은 사악한 바보들입니다. 그래서 우매한 행인들을 시온의 대로를 갈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욕심을 위해 다른 이들을 고려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9). 사자나 사나운 짐승이 자기의 욕심을 위해 다른 동물들의 생명을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만을 위해 다른 이들을 피 흘리게 하고 배 채우는데 만족하는 사람은 시온의 대로를 걷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속함을 얻은 자만이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볼 수 없던 사람이 보고, 들을 수 없던 사람이 듣고, 걸을 수 없던 사람이 걷고, 말할 수 없던 사람이 노래하며 사막에 시내가 흐르고 메마른 땅이 온천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성령으로 영혼이 변화된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구원을 얻은 사람만이 시온의 대로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2. 본문의 교리
오늘 본문은 세 가지 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첫째로 거룩한 자만이 시온의 대로 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간다는 진리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는 축복을 받는다고 하면 누구나 박수를 치며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에는 거룩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합니다. 거룩해야 한다는 진리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시온의 대로가 거룩한 길이며, 오로지 거룩한 자만이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거룩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흔히 바리새인 같은 모습을 떠올립니다. 걸음걸이도 느리고, 별로 웃지도 않으며, 낡은 성경책을 옆에 끼고 다니면서 인상을 쓰고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이야말로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날카롭게 비난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를 좋아하는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이라고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 같은 모습은 거룩함에서 제외해버려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함의 진정한 본질은 무엇일까요? 거룩함이란 본래 피조물의 속성이 아닙니다. 인류 가운데는 거룩한 존재가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거룩함이란 본래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고 불렸고, 천사들도 하나님을 찬송할 때에는 언제나 거룩을 세 번 반복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지 못한 백성들을 택하여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 거룩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레위기를 어려운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가운데서 제사 부분은 공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 많다고 해도 레위기의 궁극적인 정신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거룩함이며, 이 거룩함의 본질은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 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레위기 11:44-45).’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닮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 본체의 형상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닮아 가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4복음서를 읽어야 합니다.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을 닮는 것이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새벽에도 기도하시고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하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전도하시고 약한 사람들을 치료하셨습니다. 따라서 힘이 있을 때 전도하고 약자를 돕는 것이 거룩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분이셨지만,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들에게는 용서와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회개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처럼 용서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하셨습니다. 0.0001%도 불순종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는 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은 기록된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거룩함(written holiness)’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전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며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 모세는 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지만, 이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게 되었습니다. 거룩이란 이처럼 하나님을 닮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며,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시온의 대로를 가는 사람이요, 천국에 이르게 될 사람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두 번째 교리는 바로 거룩함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시온의 대로를 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진리입니다. 이는 첫 번째 교리를 역(逆)으로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아무리 외부적으로 종교행사에 참여하고, 선행을 많이 하며,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을 해봤자 내부적으로 거룩함의 은혜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온의 대로가 아니라 장망성으로 향한 길을 걷습니다. 이름은 좋아 보이지만 사실 장망성은 ‘장차 망할 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큰 영적 능력을 나타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내적인 거룩함이 없으면 주님께서 그 사람을 모른 체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그렇다면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 천국에 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세 번째 교리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명백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천국에 간다면 더 이상 천국은 천국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 도적질 하는 자, 간음하는 자, 살인하는 자, 거짓말 하는 자들이 죄도 회개치 않고 천국에 들어와서 더러운 냄새를 풍긴다면 그것이 무슨 천국입니까? 만약 천국이 그런 곳이라면 거룩한 사람들은 천국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던 죄인들이 함께 있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거룩하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거룩하지 못한 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벌을 주고, 의에 대해서는 상을 주는 것이 공의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회개도 하지 않으며, 거룩하지도 않은 사람이 천국에 가서 영원한 축복을 누린다면 더 이상 의를 행하고 믿음의 삶을 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지 않은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3. 본문의 적용
사람에게는 거룩함이 중요합니다. 거룩한 사람만이 시온의 대로를 걸어 천국에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세가 얼마나 있는가, 돈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유명한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거룩한 사람인지 아닌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내가 거룩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다음의 다섯 가지 점검 리스트를 통해 한 번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성품과 나의 성품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는지를 찾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과 나의 성품 사이에 일치하는 점이 있다면 거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는 인간과 공유할 수 없는 속성들이 있습니다. 전지전능(全知全能)이나 무소부재(無所不在)가 바로 그런 속성입니다. 이런 속성은 ‘비공유적 속성’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심, 자비로우심, 용서하심, 오래 참으심 같은 속성들은 인간과 공유할 수 있는 속성들입니다. 이와 같은 공유적 속성을 생각할 때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런 성품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거룩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삶과 나의 삶에 비슷한 점이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자신의 삶과 예수님의 삶 사이에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은 늘 예수님을 닮아 유혹을 물리치고, 기도와 전도의 소망을 가지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의 삶과 내 삶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이상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셋째로 기록된 거룩함(written holiness)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내 영혼에 기쁨과 깨달음이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전에도 성경을 읽지 않았지만, 지금도 읽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성경을 읽을 계획이 없는 사람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졸리기만 하고, 자신의 영혼과 도무지 공통점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무작정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마십시오.
넷째로 다른 성도들의 삶과 내 삶에 유사성이 있는지를 찾아봐야 합니다.
다른 성도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지, 아니면 세상의 친구들을 만나서 옛날 방식대로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옛날 친구들을 만나서 술 한 잔 나누는 것보다 성도들과 의 교제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성도들의 모임에 가면 왠지 어색하고, 대화도 맘에 안 들고, 예배를 드려도 맨 뒤에 앉아 있다가 다시는 예배 안 나올 사람처럼 돌아가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바울과 같은 성경 위인들의 이야기를 접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왜 들어야 하느냐고 따지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을 때, 자신과의 공통점도 찾고 고쳐야 할 점도 찾으면서 적극적인 자세로 듣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천국 백성의 성품을 소유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죄를 즐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물론 인간은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사람은 죄를 짓고 나면 벌써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자백하고 돌이킬 줄을 압니다. 반면에 거룩하지 않은 사람은 죄를 짓는 것을 즐거워하고, 거룩한 사람을 오히려 조롱합니다.
결 론
오늘 말씀은 거룩한 자만이 시온의 대로를 거쳐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지만 이 거룩함은 단시일 내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에는 출발과 과정이 있습니다. 거룩함의 출발점은 과거에 자신이 거룩하게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회심(conversion)입니다.
우리가 고속도로를 이용하려면 일단 톨게이트를 통과해서 고속도로 위로 진입해야 하는 것처럼 거룩함에도 반드시 올라서야 하는 출발점이 있습니다. 이것을 ‘위치적인 거룩함’(positional holiness)이라고 부릅니다. 위치적인 거룩함을 입은 사람들은 이미 시온의 대로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자동차가 고속도로 위에 올라왔으면 정지해 있거나, 역주행하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야 하는 것처럼, 시온의 대로 위에 올라온 성도들은 대로를 계속 진행하면서 실천적인 거룩(practical holiness)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이루며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매일 예수님을 닮아가며 살 수 있는지를 늘 고민해야 합니다. 매일 내 삶에 죄가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살고 있는지를 고민하며 실천하는 것이 실천적인 거룩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성화’라고 합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성화의 길을 가게 됩니다. 성화의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은 애당초 출발하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은 하나님께서 어마어마한 값을 들여 지으신 길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 피 값으로 건설하신 값비싼 도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길을 가리켜 ‘왕의 고속도로(king's highway)’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왕의 고속도로이기 때문에 이 길의 안전을 왕 되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 고속도로에는 ‘공사중’ 표지판도 없고, 길이 파여 자동차 바퀴가 터지는 일도 없습니다. 게다가 이 길은 중간에 출구(IC)가 없습니다. 그냥 쭉 가면 됩니다. 이 도로에 한 번 올라간 사람은 끝까지 달려서 결국 시온에 이릅니다. 한 번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생을 얻은 사람들은 다시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 교리’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었을지라도 나중에 상실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알미니안주의는 복음도 아니고 진리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길은 사막 한복판에 세워져 있지만 사나운 짐승과 전갈이 위협해도 안전합니다. 왕이 닦아놓으신 ‘높은 길(highway)’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은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밑에서 사자와 개가 짖는다고 해도 그들은 고속도로 위로 올라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무서운 짐승이 으르렁거린다 해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왕되신 하나님께서 이 도로의 안전과 통행을 책임지시기 때문에 이 길에 올라온 사람은 끝까지 달려서 시온에 이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길은 괴로운 길이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괴롭게 보였습니다. 새벽마다 일어나서 교회에 갈 뿐만 아니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심지어 일요일 아침까지 교회를 찾아가야 하니 무척 괴로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재미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도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이 거룩한 길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10). 슬픔과 탄식과 고통은 거룩하지 못한데서 찾아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마실 때는 기분이 좋았지만, 다음 날 찾아오는 속쓰림과 외상빚은 저를 다시 한 번 고통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간음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있는 사람이 바람을 피우면 잠깐은 즐거운지 몰라도 결국 가족들과 자기 자신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인생의 고통은 거룩하지 못한 데에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거룩함이 없으면 잠깐의 쾌락도 고통이 됩니다. 그러나 거룩한 길에는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고통 섞인 잠깐의 쾌락이 아니라 영원히 노래하며 즐거워하는 기쁨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메시지를 통해서 아직도 시온의 대로에 올라오지 못한 분들은 망설이지 말고 시온의 대로에 올라오십시오. 왜 국도로 가다가 장망성에 빠지려고 하십니까?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시온의 대로에 올라오십시오. 그리고 시온의 대로에 올라오신 분들은 멈추거나 역주행하지 마시고 날마다 달리십시오. 실천적인 거룩함을 날마다 이루어 예수님의 형상을 닮고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