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衆人熙熙(중인희희) : 뭇 사람들 희희낙락하여
如享太牢(여향태뢰) : 큰 소 잡아 잔치하는 듯하고
如春登臺(여춘등대) : 봄날 망루에 오른 듯 한데
我獨泊兮其未兆(아독박혜기미조) : 나 홀로 드러나지 않고 어울릴 조짐마저 없으니,
如嬰兒之未孩(여영아지미해) : 채 웃을 줄 모르는 갓난아이 같구나.
乘乘兮若無所歸(승승혜약무소귀) : 막막하고 막막함이여, 돌아갈 곳 하나 없는 신세로다.
衆人皆有餘(중인개유여) : 뭇 사람들 여유가 넘쳐나는데
而我獨若遺(이아독약유) : 나 홀로 남겨져 있으니,
我愚人之心也哉(아우인지심야재) 沌沌兮(돈돈혜) : 내 마음 왜 이리 어리석은가, 아둔하고 또 아둔함이여.
俗人昭昭(속인소소) : 뭇 사람들 밝음이 넘쳐나는데
我獨昏昏(아독혼혼) : 나 홀로 어둡고,
俗人察察(속인찰찰) : 뭇 사람들 똑똑함이 넘쳐나는데
我獨悶悶(아독민민) : 나 홀로 어설프구나.
澹兮其若海(담혜기약해) : 출렁임이여, 바닷물 같고,
飂兮若無止(료혜약무지) : 어지러움이여, 그칠 날이 없구나.
衆人皆有以(중인개유이) : 뭇 사람들 제 나름 뜻을 갖고 잘도 살아가는데
而我獨頑似鄙(이아독완사비) : 나 홀로 시골 촌뜨기같이 고루할지나,
我獨異於人(아독이어인) : 나 홀로 뭇 사람들과 다르고자 하고
而貴食母(이귀식모) : 먹여 살리는 어미(食母)를 귀하게 여긴다.
(만물을 생장시키는 생명의 원천을 끔찍하게 여기는 것이리라.)
왕필 주해 및 최경열 해석 필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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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學)을 끊으면 우환이 없다.
‘네’라고 답하는 것과 ‘응’이라고 답하는 것에 그 차이가 얼마이고,
선(善)과 악(惡)에 그 차이가 얼마인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바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지나,
헛되고 또 헛됨이여,
이 얼마나 미혹된 일인가?
뭇 사람들 희희낙락하여
큰 소 잡아 잔치하는 듯하고 봄날 망루에 오른 듯한데,
나 홀로 드러나지 않고 어울릴 조짐마저 없으니,
채 웃을 줄 모르는 갓난아이 같구나.
막막하고 또 막막함이여,
돌아갈 곳 하나 없는 신세로다.
뭇 사람들 여유가 넘쳐나는데
나 홀로 남겨있으니,
내 마음 왜 이리 어리석은가.
아둔하고 또 아둔함이여.
뭇 사람들 밝음이 넘쳐나는데
나 홀로 어둡고,
뭇 사람들 똑똑함이 넘쳐나는데
나 홀로 어설프구나.
출렁임이여, 바닷물 같고,
어지러움이여, 그칠 날이 없구나.
뭇 사람들 제 나름 뜻을 갖고 잘도 살아가는데
나 홀로 시골 촌뜨기같이 고루할지나,
나 홀로 뭇 사람들과 다른 게 있다면,
먹여 살리는 어미(食母)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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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강남 역>
배우는 일을 그만두면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예' 라는 대답과 '응' 이라는 대답의 차이가 얼마이겠습니까?
선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의 차이가 얼마이겠습니까?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 나도 두려워해야합니까?
얼마나 허황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입니까?
딴 사람 모두 소 잡아 제사 지내는 것처럼 즐거워하고,
봄철 망루에 오른 것처럼 기뻐하는데,
나 홀로 멍청하여 무슨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아직 웃을 줄도 모르는 갓난아이 같기만 합니다.
지친 몸으로도 돌아갈 곳 없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 여유 있어 보이는데
나 홀로 빈털터리 같습니다.
내 마음 바보의 마음인가 흐리멍텅하기만 합니다.
세상 사람 모두 총명한데 나 홀로 아리송하고,
세상 사람 모두 똑똑한데 나 홀로 맹맹합니다.
바다처럼 잠잠하고, 쉬지 않는 바람 같습니다.
딴 사람 모두 뚜렷한 목적이 있는데
나 홀로 고집스럽고 촌스럽게 보입니다.
나 홀로 뭇사람과 다른 것은 결국
나 홀로 어머니(젖) 먹음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노바당 역>
배우는 일을 그만두면 근심이 없어질 것이다
<예>라는 대답과 <아니오>이라는 대답의
차이가 얼마이겠는가
<선>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의
차이가 얼마이겠는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허황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인가
딴 사람 즐거워하기를
모두 소 잡아 제사 지내는 것처럼 하고
봄철 망두에 오른 것처럼 기뻐하는데
나 홀로 멍청하여 무슨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아직 웃을 줄도 모르는 갓난아이 같기만 한다
지친 몸이나 돌아갈 곳 없는 사람과 같다
세상 사람들 모두 여유 있어 보이는데
나 홀로 빈털터리 같습니다
나 바보인가 봐
흐리멍텅하기만 한다
세상 사람들 모두 총명한데
나 홀로 아리송하고
세상 사람들 모두 똑똑한데
나 홀로 맹맹하다
담담하기가 바다같고
바람불기가 멈춤이 없는 거 같다
사람들 모두 여유있는데
나 홀로 고집스럽고 촌스럽게 보인다
나 홀로 뭇사람과 다르다
그러나 나 홀로 식모를 귀히 여긴다
<임채우 역>
20 배우기를 포기하면 걱정이 없나니
배우기를 포기하면 걱정이 없나니,
공손하게 대답함과 적당히 응대함이 서로 얼마나 다르며,
선과 악이 서로 어떻게 다른 것인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바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구나.
넓고 망망하기가
끝이 없음이여!
사람들은 희희낙락 큰 잔치를 즐기는 듯하고,
봄날에 누대에 놀러온 듯한데,
나 홀로 담박(淡泊)함이여,
아무런 분별도 없는 것이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웃을 줄도 모르는 것 같고,
고달프기가,
돌아갈 곳조차 없는 듯하구나.
사람들은 모두 넘치고 남으나
나만 홀로 잃어버린 듯하니,
나는 어리석은 이의 마음이로다.
흐리멍텅하구나!
세상 사람들은 아주 밝으나
나만 홀로 어둡고,
사람들은 살피고 따지는데
나만 홀로 몽매하구나.
바다와 같이 잠잠하다가,
바람처럼 쉼없이 나부끼도다.
사람들은 모두 하는 게 있는데,
나만 홀로 어리석고 고루하구나.
나는 홀로 사람들과 달라
생명의 어머니를 귀히 여긴다.
<James Legge 역>
1. When we renounce learning we have no troubles. The (ready) 'yes,' and (flattering) 'yea;' -- Small is the difference they display. But mark their issues, good and ill; -- What space the gulf between shall fill? What all men fear is indeed to be feared; but how wide and without end is the range of questions (asking to be discussed)!
2. The multitude of men look satisfied and pleased; as if enjoying a full banquet, as if mounted on a tower in spring. I alone seem listless and still, my desires having as yet given no indication of their presence. I am like an infant which has not yet smiled. I look dejected and forlorn, as if I had no home to go to. The multitude of men all have enough and to spare. I alone seem to have lost everything. My mind is that of a stupid man; I am in a state of chaos. Ordinary men look bright and intelligent, while I alone seem to be benighted. They look full of discrimination, while I alone am dull and confused. I seem to be carried about as on the sea, drifting as if I had nowhere to rest. All men have their spheres of action, while I alone seem dull and incapable, like a rude borderer. (Thus) I alone am different from other men, but I value the nursing-mother (the Tao).
<Lin Derek 역>
Cease learning, no more worries
Respectful response and scornful response
How much is the difference?
Goodness and evil
How much do they differ?
What the people fear, I cannot be unafraid
So desolate! How limitless it is!
The people are excited
As if enjoying a great feast
As if climbing up to the terrace in spring
I alone am quiet and uninvolved
Like an infant not yet smiling
So weary, like having no place to return
The people all have surplus
While I alone seem lacking
I have the heart of a fool indeed—so ignorant!
Ordinary people are bright
I alone am muddled
Ordinary people are scrutinizing
I alone am obtuse
Such tranquility, like the ocean
Such high wind, as if without limits7
The people all have goals
And I alone am stubborn and lowly
I alone am different from them
And value the nourishing mother
<장 도연 역>
제20장 학문을 버리면 근심이 사라질 것이다
학문을 버리면 근심이 사라지며
공손하게 ‘예’라고 대답하는 것과
불손하게 ‘응’이라고 대답하는 차이가 얼마나 되는가?
아름다움과 추악함의 차이가 얼마나 되는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풍속은 옛날부터 그러하였거늘
허황하여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구나.
사람들은 떠들썩하게 웃고 즐거워하면서
소와 양을 잡아 성대한 연회를 베풀 듯
봄날에 들뜬 기분으로 누각에 올라
아름다운 경치를 관망하는 것 같은데
나만 유독 고요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흐리터분하고
웃을 줄 모르는 갓난아기처럼 고달프구나.
마치 갈 데 없는 나그네 같구나.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데 나만 아무것도 없으니
내 마음 어리석기 그지없고
사람들은 모두가 눈부시도록 빛나는데
유독 나 혼자만 흐리멍덩해 있고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똑똑한데
유독 나만은 어리석고 순박하구나.
내 마음은 마치 바다처럼 고요하고
용솟음치며 표류하는 듯하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쓸모가 있건만
유독 나만 완고하고 비천한 것은
만물을 낳은 어머니와 같은
道를 귀히 여기기 때문이니라.
<왕필 노자주 / 임채우 역>
배우기를 포기하면 걱정이 없나니, ‘네’ 하고 공손하게 대답함과 ‘응’ 하고 적당히 응대함이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 것인가? (세상에서 말하는) 착함과 악함이 서로 얼마나 다른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주석>
성현영은 “유는 공경스럽게 대답함이요, 아는 경솔하게 응답함이다(唯, 敬諾也, 阿, 慢應也)”라고 했다.(성현영, 『노자의소』 참조.)
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 善之與惡, 相去若何? 人之所畏, 不可不
하편(48장)에서 “학문을 하는 것은 날마다 더하는 것이요, 도를 구하는 것은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학문이란 능력을 길러서 지모를 늘려가는 것이다. 만약 아무런 욕심 없이 만족한다면 어찌 기르려고 하겠으며, 알지 못해도 맞춘다면 무엇 때문에 늘려나가려고 하겠는가? 저 제비와 참새도 배필이 있고 비둘기도 짝지을 줄 알며, 추운 지방 사람들은 반드시 솜옷과 가죽옷을 (지어 입을 줄) 안다. 스스로 그런 대로 이미 족하니 덧보태면 걱정이 생긴다. 그러므로 오리 다리를 (길게) 잇는 것이 학의 다리를 자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명예를 걱정하면서 출세하는 것이 형벌을 두려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공손하게 대답함과 적당히 응대함,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나도 두려워하니 감히 이를 믿어 쓰임으로 삼지 않는다.
<주석>
『노자』 13장 「총욕약경」(寵辱若驚)의 내용 참조.
<주석>
『장자』 「변무」(騈拇)에 “길다고 그것을 남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리는 비록 다리가 짧지만 그것을 길게 이어주면 괴로워하고, 학의 다리는 길지만 그것을 짧게 잘라주면 슬퍼한다. 때문에 천성으로 길게 타고난 것을 자를 바가 아니며 본성이 짧은 것을 이어주어서도 안 된다.(長者不爲有餘, 短者不爲不足. 是故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斷之則悲. 故性長非所斷, 性短非所續)”라고 한 데서 취한 것이다.
<주석>
『중용』에 “성이란 애쓰지 않아도 맞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으며 가만히 도에 맞으니 성인이다(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라고 했다.
下篇[云], 爲學者日益, 爲道者日損. 然則學求益所能, 而進其智者也. 若將無欲而足, 何求於益? 不知而中, 何求於進? 夫燕雀有匹, 鳩鴿有仇; 寒鄕之民, 必知旃裘. 自然已足, 益之則憂. 故續鳧之足, 何異截鶴之脛; 畏譽而進, 何異畏刑? 唯[訶]美惡, 相去何若. 故人之所畏, 吾亦畏焉. 未敢恃之以爲用也.
망망하구나, 그 다하지 못함이여!
荒兮其未央哉!
<주석>
성현영은 ‘앙’(央)을 ‘진’(盡)의 뜻으로 보았다.(성현영, 『노자의소』 참조) 고형(高亨)은 이 부분을 “바삐 달리기만 할 뿐 마칠 줄 모른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세속과 크게 상반됨을 탄식한 것이다.
歎與俗相[反]之遠也.
사람들은 희희낙락 큰 잔치를 즐기는 듯하고, 봄날에 누대에 오른 듯한데,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사람들은 좋아서 끌리는 것에 미혹되고, 영리에 현혹되어 욕심이 치닫고 마음이 뛰논다. 그러므로 큰 잔치를 즐기듯, 봄날에 누대에 오른 듯이 들떠 기뻐한다.
衆人迷於美進, 惑於榮利, 欲進心競, 故熙熙如享太牢, 如春登臺也.
<주석>
앞의 『노자』 2장 왕필주에 “美者, 人心之所進樂也”라고 나온다.
나 홀로 담박함이여, 그 아무런 조짐이 없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옹알거릴 줄도(혹은 웃을 줄도) 모르는 것 같고,
我獨泊兮其未兆, 如嬰兒之未孩,
<주석>
백서본에는 ‘해’(咳)로 되어 있다. 『설문해자』에는 ‘해’(咳)의 고문(古文)이 ‘해’(孩)라고 하여 아이가 웃는 모양으로 보았다. 『고사변』에는 어린아이가 말하기 전 옹알거리는 소리를 해(孩)라고 해석했다.
나는 텅 비어서 이름 붙일 만한 모양이 없고, 별다른 조짐이 없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가 옹알거릴 줄도 모르는 것과 같다.
言我廓然無形之可名, 無兆之可擧, 如嬰兒之未能孩也.
고달픔이여, 돌아갈 곳이 없는 듯하구나.
儽儽兮若無所歸.
머물 집이 없는 듯하다.
若無所宅.
사람들은 모두 넘치고 남으나 나만 홀로 잃어버린 듯(혹은 버려진 듯)하니,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사람들은 모두 생각과 뜻을 품고 있어서 가슴속에 차고 넘치므로 ‘모두 넘쳐 남는다’고 했다. 나만 홀로 멍청히 하는 일도 없고 욕심도 없으니 마치 잃어버린 듯하다.
衆人無不有懷有志, 盈溢胸心, 故曰: 皆有餘也. 我獨廓然無爲無欲, 若遺失之也.
나는 어리석은 이의 마음이로다!
我愚人之心也哉!
아주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속에 나누고 가르는 바가 없고, 뜻에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바가 없어서 그 정(情)을 볼 수 없으니, 나의 쓸쓸함이 이와 같다.
絶愚之人, 心無所別析, 意無所[美惡], 猶然其情不可覩, 我頹然若此也.
흐리멍텅하구나!
沌沌兮!
나누고 가르는 바가 없으므로 이름 지을 수 없다.
無所別析, 不可爲[名].
세상 사람들은 아주 밝으나,
俗人昭昭,
그 빛을 번쩍거린다.
耀其光也.
나만 홀로 어둡고, 세상 사람들은 하나하나 살피고 따지는데,
我獨昏昏; 俗人察察,
구별하고 분석한다.
分別別析也.
나만 홀로 몽매하도다. 잠잠함이여, 마치 바다와 같고,
我獨悶悶. 澹兮其若海,
정을 볼 수 없다.
情不可覩.
바람처럼 몰아침이여, 쉼이 없구나.
飂兮若無止.
매여 있는 곳이 없다.
無所繫縶.
사람들은 모두 쓰임(혹은 까닭)이 있는데,
衆人皆有以,
‘이’(以)는 쓰임이다. 모두 쓰이는 바가 있기를 바란다.
以, 用也. 皆欲有所施用也.
나만 홀로 어리석고 고루하구나.
而我獨頑似鄙.
바라고 작위하는 바 없으므로 어둡고 멍청한 것이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므로, ‘어리석고 촌스럽다’고 했다.
無所欲爲, 悶悶昏昏, 若無所識, 故曰頑且鄙也.
나는 홀로 사람들과 달라 먹여주는 어머니를 귀히 여긴다.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식모’(食母)는 삶의 근본이다. 사람들이 모두 백성을 살리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이나 장식하는 화려함을 귀하게 여기므로, “나는 홀로 사람들과 다르고자 한다”라고 했다.
食母, 生之本也. 人皆棄生民之本, 貴末飾之華, 故曰我獨欲異於人
<Stefan Stenudd 역>
What’s the difference between yes and no?
What’s the difference between beautiful and ugly?
Must one dread what others dread?
Oh barbarity! Will it never end?
Other people are joyous, like on the feast of the ox,
Like on the way up to the terrace in the spring.
I alone am inert, giving no sign,
Like a newborn baby who has not learned to smile.
I am wearied, as if I lacked a home to go to.
Other people have more than they need,
I alone seem wanting.
I have the mind of a fool,
Understanding nothing.
The common people see clearly,
I alone am held in the dark.
The common people are sharp,
Only I am clumsy,
Like drifting on the waves of the sea,
Without direction.
Other people are occupied,
I alone am unwilling, like the outcast.
I alone am different from the others,
Because I am nourished by the great mother.
I Am Alone
In this the 20 th chapter, Lao Tzu’s tone suddenly changes. It gets personal, which is very rare in the Tao Te Ching . There is even something close to anguish showing. He watches people enjoy themselves in their ignorance, while he is unattached. Therefore, his soul finds no immediate gratification.
The personal tone has made researchers question the authenticity of this and similar parts of the book.
In the oldest known manuscript (from Guodian, c. 300 BC), all the lines of this personal nature are missing – from “Oh barbarity!” and down.
In the two next to oldest versions (from Mawangdui, around 200 BC), though, the lines are present. This suggests that they have been added in this period. If so, it was probably done by a commentator reflecting on the text while copying it.
But one single manuscript of old is not conclusive. It’s just as likely that the copier of the Guodian manuscript skipped these lines for some reason. That manuscript is far from complete.
In any case, the text as a whole is definitely written with both mind and heart, so personal reflections are not out of context. Human folly is a recurring theme, and this chapter is more about that than about the author’s frustration – although the latter can come as no surprise.
So, whether it’s written by Lao Tzu or somebody sympathizing with him, doesn’t make that much of a difference. I have no problem believing that Lao Tzu, in the process of writing his text of 5000 words, had occasional outbursts of grief, frustration – even desperation. The world he studied was his own habitat, so how could he not react to his findings about it?
Uncertainties
There are other uncertainties about this chapter. In many versions of the Tao Te Ching , it starts with what is here the last line of chapter 19: “Abandon knowledge and your worries are over.” Most researchers into the text would agree with my choice, for several obvious reasons.
It must be remembered that the text was originally written without any division into chapters. That was introduced several centuries later. Lao Tzu’s text should really be read as a flowing continuum from a mind eager to get it all out. This is shown by how the themes evolve and get treated, one after the other. It’s also hinted by the rhythm of repetitions, and the manner in which some themes return later on in the text.
Tao Te Ching gives a strong impression of being written by one person, who allowed ideas that appeared during the writing of one line to lead to the next. The same seems to be the case with the themes treated. The structure of the whole text is more like a river floating through a changing landscape, than a building raised according to plan. There is spontaneity, and order is found more in each part than in the whole.
With this in mind, the last line of chapter 19 makes more sense there, than as a start of chapter 20.
Actually, the book should probably be divided into significantly more than 81 chapters, judging from its content. The number of chapters was decided for symbolic reasons, creating the symmetry of 9 X 9.
This leads to several oddities in the chapters. Some of them start off with one subject, then suddenly switch to another, changing form and rhyme patterns accordingly.
That’s evident in this chapter, where the first four lines differ from the following ones. True, they form what can be seen as an introduction to what follows, but they could very well also be seen as a chapter in its own right. This is even more obvious in several other cases.
Finally, regarding this chapter, the second line does in most versions of the text read: “What’s the difference between good and bad?” But the oldest known manuscripts, the two discovered in Mawangdui in the 1970’s and the one found in Guodian in the 1990’s, all say “beautiful and ugly” instead.
The difference is not that great. Good and bad should not be understood in a strictly moral way, but similarly to pleasing and displeasing, whereas beautiful and ugly must be understood as something other than mere facial value.
I have chosen the latter, because the oldest manuscripts support it, and because it connects to the thoughts about opposites presented in the second chapter.
Fear
The chapter starts with the questioning of polarities that can be recognized from earlier chapters. Are opposites really that different? Then Lao Tzu asks if we must dread what others dread. He seems to imply that judgments on what is preferable or not in society are based on fear. If so, this is in accordance with a lot of modern thinking.
Upon examination, mankind is revealed to make many of its decisions – as individuals as well as groups – based on fear. In particular, many of our very worst decisions have that ingredient.
Personal fear is treated in chapter 13, but the dread Lao Tzu mentions here is more of a social one. People foster prejudice about what is acceptable and what is not. Fear lurks inside this prejudice.
Surely, the ancient time when Lao Tzu walked the earth was no different from ours in how people hurried to live as they believed was expected of them, and cursed anything else without a moment of consideration.
Man is a social beast, and that urge in us often leads to beastly behavior. This is especially true as soon as fear is somehow involved – fear of the unknown, fear of anything different, fear of not conforming. We foster a lot of fears.
Being Different
One of the things that people in just about any society fear the most is being different, which is exactly what Lao Tzu concludes that he is. Others live their lives, seemingly without a care in the world, but Lao Tzu is unable to participate. He is an outsider, and the reason for this is his insight into the true nature of existence.
What he has discovered sets him so much apart from all the others that he is unable to play along with them. He is utterly alone, but not without pride. In the last line he concludes that what sets him apart is the fact that he lives by Tao, the Way.
He may lack a human family to embrace, but his mother is the very law and creator of the universe.
So, this outcast has cast himself out. Lao Tzu’s isolation is a result of the path he has chosen. He could not do differently, without denying what he had come to realize about life. Although his isolation is a high price to pay, denying his findings would be even more costly to him.
That is, as they say, a hard act to follow. But it’s not unique. People who stand by their ideals and convictions experience it, and through history there are countless souls who have paid for it with their lives.
Not all of them nourished beliefs with which we would agree. Some of them even fought for things that we have for good reasons come to condemn. But the mechanism of exclusion from society is much the same, whether people leave their fellow men to pursue the path of truth or that of deception. In any case, they are themselves the last to know.
This is the fate of fanatics, but to some extent it’s true for each and every one of us. In the core of our hearts, we are all alone.
Our fear of standing out stems mostly from the suspicion that we actually are different from everybody else, which is something we struggle frantically to hide.
It’s a strange thing. If we could stop and observe the desperate loneliness in the depth of everybody else’s eyes, maybe we could finally grow out of this the most superfluous of fears. That single discovery would bless mankind more than any other I can think of.
Probably, we would at that moment discover that we are all doing the same as Lao Tzu – nourishing from the great mother, and following her cou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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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을 끊으면 걱정이 없다
공손한 대답과 불경스러운 대답이 얼마나 차이가 있으며
아름다움과 추악함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남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아득하구나 끝이 없도다
뭇사람들은 즐거워하며
마치 잔치 고기를 먹고 봄에 누대에 오르는 듯한데
나는 덤덤하여 드러나질 않으니
마치 갓난아이가 아직 웃지 못하는 것 같고
피곤하여 돌아갈 데가 없는 것 같다
뭇사람들은 여유가 있는데
나만 홀로 버려졌다
이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바보같다
세속 사람은 환히 빛나는데 나만 홀로 어두우며
세속 사람은 똑똑한데 나만 홀로 어리숙하다
없는 듯하되 마치 어두컴컴한 것 같고
있는 듯하되 마치 멈출 데가 없는 것 같다
뭇사람들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나만 홀로 어리석고 비루하다
나만 홀로 남과 다르게 되고자 하여
유모를 귀하게 여긴다.
絶學无憂. 唯與阿其相去幾何, 美與惡其相去何若. 人之所畏, 亦不可以不畏. 恍呵其未央哉. 衆人熙熙, 若饗於太牢而春登臺. 我泊焉未兆, 若嬰兒未咳. 累呵如无所歸. 衆人皆有餘我獨遺, 我愚人之心也憃憃呵. 俗人昭昭, 我獨若昏呵. 俗人察察, 我獨悶悶呵. 忽呵其若晦, 恍呵其若无所止. 衆人皆有以, 我獨頑以鄙. 吾欲獨異於人而貴食母.
[絶學无憂]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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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노자의 번뇌와 서성임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
그럼에도 노자철학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장
가장 마음에 든다 싶은 장
無知(學) 도덕경 비교
(3장)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10장)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嬰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知乎
(20장) 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 善之與惡, 相去若何
(48장)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64장) 是以聖人欲不欲, 不貴難得之貨, 學不學, 復衆人之所過, 以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
嬰兒 도덕경 비교
(10장)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嬰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知乎, 天門開闔, 能無雌乎, 明白四達, 能無爲乎
(20장)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我獨泊兮其未兆, 如嬰兒之未孩, 沌沌兮若無所歸
(28장)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
母(牝, 陰) 도덕경 비교
(1장)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6장)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20장)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25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료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52장)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59장) 有國之母, 可以長久, 是謂深根固柢, 長生久視之道
(61장)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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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법과 등불 공부방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hdoy&logNo=221197083112&categoryNo=84&parentCategoryNo=&from=thumbnailList
노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의 지식인들은 자기들이 익힌 갖가지 학문과 기술로 왕에게 쓰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며 왕들에게 자기의 학문이 부국강병에 큰 효과가 있다고 선전하고 다녔습니다. 이것을 유세(遊說)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쓰는 선거 유세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지요.
학자들은 왕에게 벼슬을 얻으면, 법을 만들어 백성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백성들은 가족을 떠나 노예처럼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젊은이들은 국경에 끌려나갔으며, 집에 있는 부녀자나 늙은이들은 베를 짜고 쌀을 경작하는데 내몰렸습니다. 나라에서 정하는 이 모든 세금은 높게 책정되어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늘 헐벗고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법을 어긴 백성은 가혹한 형벌에 처해졌으니, 정치를 해서 늘어나는 것은 백성의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법을 어긴 사람을 고문하는 도구와 형벌을 강화하는 법령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참상과는 달리, 벼슬을 얻은 사람들은 화려하게 장식한 옷을 입고 호의호식하며 살았습니다.
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예법에서 ‘예’ 하는 것과 그냥 ‘응’ 하는 것이 서로 멀다면 얼마나 먼가? 학문에서 말하는 훌륭함과 악함이 서로 멀다면 무엇이 멀다는 것인가?
예법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지만, 또한 예법을 따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거칠구나! 이런 현실이 그치지를 않는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희희낙락하며 마치 먹을 것이 많은 큰 제사를 지내는 듯하고, 또 마치 봄날에 누각에 올라가는 것과 같이 마음이 들떠 있다. 나는 홀로 지내며 이런 뜻이 없으니, 마치 어린 아기가 아직 웃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의욕이 없는 듯 지척지척함이여! 돌아갈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모두 재물이 넘치는데, 나는 홀로 잃어버린 것 같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인가! 흐릿하기만 하다. 세상 사람들은 밝은데 나 홀로 깜깜하고, 세상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는 홀로 멍청하다.
나는 바다와 같이 고요하고, 바람에 흔들리듯 고집이 없다. 뭇 사람들은 쓸모가 있는데, 나는 홀로 완고하고 촌스럽다. 나는 학문을 한다는 사람들과 다른 길을 혼자 걷겠으며, 식모를 귀하게 여기겠다.
(노자도덕경 20장)
노자는 당시 지식인들의 위선을 보고, 스스로 출세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참다운 지식인의 이상적인 모습을 식모(유모)라고 주장했습니다. 유모는 아이를 먹이고 기르지만 아이를 노예 취급하거나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지 않지요. 노자는 위정자들이 겉으로는 백성들을 기른다고 하면서 실상 백성들을 착취하는 현실을 보며, 학문하는 자들이 배우지 못한 식모보다 못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사람들은 쓸모가 있는데, 나는 홀로 완고하고 촌스럽다. 나는 학문을 한다는 사람들과 다른 길을 혼자 걷겠으며, 식모를 귀하게 여기겠다.
衆人皆有以(중인개유이) 而我獨頑似鄙(이아독완사비)
我欲獨異於人(아욕독이어인) 而貴食母(이귀식모)
도덕경 20장의 마지막 구절은 혼란한 세상을 살아간 한 지식인의 고뇌와 결단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인간의 이상으로 설정하고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현실 학문의 모순과 위선을 밝혀냈습니다. 나아가 정치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어리석음(愚), 쓸모없음(無用), 그리고 예절을 거부하는 소박함 등 무위자연의 도를 주장했습니다.
성인을 끊어버리고 성인의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배가 된다. 인(仁)을 끊고 의(義)를 버리면, 백성이 다시 효도하고 자애로워진다.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없어진다. 이 세 가지, 즉 성인과 지혜, 인과 의, 기교와 이익은 배울 만한 글(文)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권할 만한 것을 내놓는다.
“소박함을 지키며, 사사로운 욕심을 줄인다.(견소포박 소사과욕)”
<원문> 見素抱樸(견소포박: 물들기 전의 천을 보고, 다듬기 전의 원목을 지킨다) 少私寡欲(소사과욕: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인다)
(노자도덕경 19장)
도가의 가르침은 욕심을 줄이고 자연(素樸 소박)의 조화를 추구하는 오래된 길입니다.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예와 법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시비와 선악을 떠나 소요하며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내관(內觀)입니다. 소박하면 백성들이 행복해진다고 말하는 것은 노자 스스로 내관을 통해 생명에 자연적 질서가 있는 것을 통찰했기 때문입니다.
(如雲 2018.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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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을 끊으면 걱정이 없다
絶學无憂
내가 보기에 이 글(20)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세상의 변화를 조심스러워하고 사회적 가치보다는 개인의 생명을 더 존중하자는 것이다. 글의 앞부분은 변화가 초래할 재앙에 대한 걱정을 담고 있고, 마지막 문장은 생명의 소중함을 환기시킨다. 나머지는 그러한 『노자』의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다른 식의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령 성현영 같으면 무엇보다도 분별심을 버리라는 게 이 글의 교훈이라고 말할 것이다. 글의 길기 때문에 미리 해석의 관점을 밝혀둔다.
이 글은 세부적으로도 논란이 많다. 첫 번째 문장도 그렇다. 이 문장은 전체 논지와 잘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다. 글 전체를 나처럼 보는 경우에도 이 문장이 반드시 글머리에 와야 할 당위성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미 이 문장은 이 글(20)이 아닌 앞글(19)의 마지막에 붙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 주장의 증거는 조공무의 『군재독서지』이다. 조공무에 따르면 지금은 실전된 장군상(張君相)의 『노자주』에서 이 문장이 앞글(19) 마지막에 붙어 있었다고 한다. 앞글은 전체적으로 예교와 문식을 버리고 소박의 덕성을 회복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이 문장과 호응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초간문 발굴 이후 위축되었다. 초간문에서는 앞글 마지막에 글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표시(■)가 붙어 있고, 이어서 다른 글(66)이 나오기 때문이다.
초간문 이후에는 오히려 이 문장이 통행본 48장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하게 되었다. 초간문에는 통행본 48장에 해당하는 글에서 "학문을 하는 자는 날마다 더하고 도를 들은 사람은 날마다 덜어낸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무위에 이르니 무위하면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부분만 실려 있는데, 지금 문장은 그 뒤를 이어 나온다. 붙여서 읽어보면 알겠지만 글의 흐름이 대단히 매끄럽다. 만약 순서가 초간문처럼 되어서 이 문장까지 하나의 글로 취급했다면 이 문장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없었을 것이다. 원래 문장은 이렇게 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초간문이 어떻든 우리는 백서의 기본 골격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초간문을 참고하고 『노자』를 해석해야 한다. 또 이 문장이 통행본 48장에 속한다는 것은 주장일 뿐이지 확정된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약간의 무리가 있더라도 이 문장을 아래 글과 연결시켜 설명해보자.
이때는 왕필의 해설을 참고할 수 있다. 왕필은 "학문을 하는 자는 날마다 더하고, 도를 행하는(왕필본은 이렇게 되어 있다) 사람은 날마다 덜어낸다(48)"는 글을 언급하면서 학문을 하여 무엇인가 증진시키려는 시도는 자연의 본성을 해치므로 근심을 낳고, 무엇인가 증진시키려는 좋은 의도가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처럼 아름다움과 추악함이라는 대립면도 그리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므로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는 논지로 이 문장을 설명한다. 대충 이런 정도의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여기에서의 배움도 역시 배움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위의 학문(현종어주본)이나 세속의 학문(육희성)을 가리킨다. 또는 하상공이 이미 설명한 대로(48) 정교와 예악의 학문, 특히 예의 법도와 관련된 학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좋다.
이런 학문에 대한 비판은 상당히 일찍부터 있었던 것 같다. 『좌전』 「소공」 18년조에는 노언(魯焉)이라는 사람이 "배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니 배우지 않으면 해로움이 없다〔無學不害〕"고 말하곤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그의 말은 지금 『노자』의 말과 차이가 없다. 『좌전』은 민자마(閔子馬)의 입을 빌려 이런 주장을 방치하면 윗사람을 능멸하는 풍조가 일어나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비판하지만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이런 주장이 그토록 일찍 가능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소공」 18년이면 기원전 524년이다. 이때 노언이 말하는 배움도 역시 예학이다. 그 주장을 그대로 놔두면 윗사람을 능멸하는 풍조가 생긴다는 민자마의 비판이 그 학문의 성격을 가늠하게 한다.
공손한 대답과 불경스러운 대답이 얼마나 차이가 있으며, 아름다움과 추악함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唯與阿其相去幾何, 美與惡其相去何若
『예기』 「곡례」에 따르면 "부모가 부를 때는 '네에〔諾〕'라고 하지 않고, 나이 많은 사람이 부를 때도 '네에'라고 하지 않으니 '예〔唯〕!'라고 대답하면서 일어나야 한다."2) 곧 '유'는 공손히 응대하는 것이다. '아(阿)'는 갑본에는 '가(訶)'로 되어 있다. '아'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느릿느릿 불경스럽게 응대하는 것이고, '가'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꾸짖는 것이다. 초간문에는 '가(可)'이므로 '아(阿)'일 수도 있고, '가(訶)'일 수도 있다. 보통은 '가'라고 많이 본다. 백서 발견 이전에 유사배는 갑본에 의거하여 '가'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흔히 '유'와 대응되는 말은 '아'이다. 공손한 대답〔唯〕과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꾸짖는 것〔訶〕은 전혀 다른 일이고, 윗사람이 부르면 재빨리 대답하여 공경을 보이는 것〔唯〕과 느릿느릿 대답하여 불경스러움을 보이는 것〔阿〕의 차이는 미묘하다. 지금 『노자』는 그 미묘한 차이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미묘하면서도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언제나 조심하라는 교훈이 성립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여기에서는 을본을 따른다. 대부분의 통행본도 '아'로 되어 있다.
성현영에 따르면 이 문장의 교훈은 커 보이는 차이란 실제로는 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차이를 괘념치 않고 선·악과 미·추의 분별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장자』를 읽듯이 『노자』를 읽고 있다.
남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人之所畏, 亦不可以不畏
공손한 대답과 불경스러운 대답, 아름다움과 추악함은 백지 한 장 차이이기 때문에 설령 지금은 공손한 대답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언제 불경스러운 대답으로 바뀔지 모르며, 지금은 아름답다는 칭송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언제 추악하다는 비난을 당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언제나 매사를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좋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지금 문장이다. 곧 이 말은 "성인은 오히려 그것을 어렵게 여기니 그 때문에 어려움이 없이 마칠 수 있다(63)"는 정신의 되풀이며, "전전긍긍하여 마치 깊은 못가로 다가가는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하네(『시』 「소아·소민」)"라는 우환 의식을 계승한 것이다.
「도응훈」은 성왕(成王)과 윤일(尹佚)의 문답을 통해 임금 노릇하기가 얼마나 조심스러운 것인지를 말하면서 이 문장을 소개한다.
성왕이 말했다. "두렵구나, 왕 노릇하는 것이여." 윤일이 말했다. "천지 사이와 사해 안쪽의 사람들은 모두 잘해주면 내 은인이고, 잘못 대해주면 내 원수입니다. 옛날 하·상의 신하들은 오히려 걸·주를 원수로 여기고 탕·무에게 복종하였으며, 숙사(宿沙)의 백성은 스스로 그 임금을 죽이고 신농에게 귀복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모두 잘 아는 바인데 어찌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그러므로 노자가 "남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공손한 대답과 불경스러운 대답이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처럼 신하였던 백성들이 반란자로 되는 것도 순식간의 일이므로 언제나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편 오징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 일은 대단히 많고, 다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배우는 사람에게 근심이 많은 이유다"라고 하였다. 이 말도 맞다.
아득하구나 끝이 없도다
恍呵其未央哉
'황(恍)'은 원래 '망'이다. 이 글자는 '망(望)'의 고자다. 이 글(20)에서 똑같은 글자가 '황(恍)'으로 쓰인 용례가 있으므로(19구) 여기에서도 '황'의 가차자로 본다. 하지만 이 글자를 그대로 '망(望)'으로 보아도 아득하다는 뜻이고, 통행본처럼 '황(荒)'으로 보거나 '망(芒)', '망(忙)', '황(怳)' 등과 통하는 글자로도 볼 수 있다. 왕필은 통행본의 글자를 넓다는 뜻으로 보았고, 하상공은 황란하다는 뜻으로 보았는데 그 뜻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 본문에서는 아득하다고 옮겨 두 뜻을 모두 포괄한다.
'미앙(未央)'은 대부분 끝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이때 '앙(央)'은 '진(盡)'과 같은 글자다(『광아』 「석고 1」).
전체 문맥과 관련해 이 문장의 의미도 분명하지 않다. 해설마다 생각이 전부 다른데 대체로 왕필의 해설을 따르는 것이 나의 관점에 부합하는 것 같다. 그는 이 문장이 "세속과 서로 다른 것이 너무 많다〔遠〕는 것을 탄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뭇사람들은 즐거워하며 마치 잔치 고기를 먹고 봄에 누대에 오르는 듯한데, 나는 덤덤하여 드러나질 않으니 마치 갓난아이가 아직 웃지 못하는 것 같고, 피곤하여 돌아갈 데가 없는 것 같다
衆人熙熙, 若饗於太牢而春登臺. 我泊焉未兆, 若嬰兒未咳. 累呵如无所歸
이 문장 아래로는 계속해서 뭇사람과 『노자』의 길을 따르는 사람의 모습을 비교하는 글이 나온다. 이때 『노자』의 길을 따르는 사람의 모습은 조용하고, 조심스럽고, 담담하고, 어리석은 듯하다. 물론 그런 모습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 『노자』가 하고 싶은 말이다. 임계유는 이 글이 자기를 깎아내리는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자화자찬이라고 하였는데, 그렇게도 볼 수 있다.
'희희(熙熙)'는 즐거운 모양이다. '향(饗)'은 음식을 먹는다는 뜻으로 '향(享)'과 통하며, 또 '향(鄕)'과도 통한다. 갑골문에서 '향(鄕)'은 두 사람이 마주하고서 음식을 먹는 형상이다('卿'이라는 설도 있다). 태뢰(太牢)는 가장 훌륭한 제물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소로 보는 견해도 있고(이 경우에는 小牢가 양이다), 소·양·돼지를 모두 태뢰로 보는 경우도 있다. 또는 연향(宴饗)할 때 솥을 몇 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잔치 의식의 등급이 결정되었는데, 가장 많은 아홉 개의 솥을 사용하는 잔치의 음식을 태뢰라고 한다는 설도 있다. 이 말에 우리 '뢰(牢)'자를 사용하는 이유는 제사에 희생될 동물이 따로 우리에서 사육되었기 때문이다(범응원).
"봄에 누대에 오르는 듯하다"는 것은 "봄에는 음양이 서로 사귀고 만물이 그에 감동하여 자라나므로 누대에 올라 그것을 바라보면 마음이 풀어지는 듯한〔淫淫然〕 것"을 가리킨다(하상공). 보통 "봄의 누대에 오른다〔登春臺〕"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노자』는 "겨울에 강을 건너는 것 같다(15)"는 말에서도 어순을 이렇게 하였다.
'박(泊)'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설문』) 또는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소철). '조(兆)'는 원래 거북 껍질(주로 배껍질이다)이나 소의 견갑골을 불 위에 던져 그 균열 양상을 보고 미래를 예견했던 고대의 점법〔卜〕에서 그 균열된 모습을 나타내는 글자였다. 그래서 이 글자는 전조 또는 조짐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 글에서 조짐이 없다〔未兆〕는 것은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咳)'는 어린아이가 웃는 것을 가리킨다. '해(孩)'와 같다. '누(累)'는 피곤하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피곤하여 돌아갈 데가 없는 것 같다"는 말은 지쳤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적극적 열망도 접어두고 어떤 곳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는 마치 피곤한 공자가 상가집 개로 비아냥거림을 받을 때를 연상시키지만 그렇게 보아서는 뜻이 원활하게 통하지 않는다.
뭇사람들은 여유가 있는데 나만 홀로 버려졌다. 이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바보같다. 세속 사람은 환히 빛나는데 나만 홀로 어두우며, 세속 사람은 똑똑한데 나만 홀로 어리숙하다
衆人皆有餘我獨遺, 我愚人之心也憃憃呵. 俗人昭昭, 我獨若昏呵. 俗人察察, 我獨悶悶呵
'유(遺)'는 버려졌다는 뜻이다(하상공). '용용(憃憃)'은 통행본에 대개 '돈돈(沌沌)'으로 되어 있는데, 모두 어리석은 모양을 가리킨다(고형). '소소(昭昭)'는 빛이 번쩍이는 것이다(왕필). '찰찰(察察)'과 '민민(悶悶)'은 다른 글(58)에서 이미 설명하였다(다음 참조).
이 문장은 역시 뭇사람(세속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글이다. 여기에서 '나'는 언뜻 보기에 불행한 처지에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에게서도 비판받지 않으며,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에 동정을 받을지언정 미움을 사지는 않는다. 불행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안전하다. 밝은 곳이 그늘로 변하면 밝은 곳에 있었던 사람은 추위를 느낀다. 하지만 미리 그늘에 숨은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아쉬울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늘을 춥게 여기지 마라.
없는 듯하되 마치 어두컴컴한 것 같고, 있는 듯하되 마치 멈출 데가 없는 것 같다. 뭇사람들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나만 홀로 어리석고 비루하다
忽呵其若晦, 恍呵其若无所止. 衆人皆有以, 我獨頑以鄙
'홀(忽)'은 없는 것 같아서 잘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반면 '황(恍)'은 있는 듯하지만 잘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회(晦)'는 백서에 원래 '해(海)'이지만 성현영에 따르면 하상공본에는 원래 '회'로 되어 있다고 하였고, 왕진본·사마광본·소철본 등도 역시 '회'로 썼으며, 육덕명에 따르면 엄준본에도 원래 '회'였다고 한다. 이 글자로 보는 것이 더 부드럽기 때문에 이렇게 고친다. 이 문장에 나오는 두 개의 '이(以)'에서 앞의 것은 '용(用)'과 통하고(왕필), 뒤의 것은 '이(而)'와 통한다(마서륜).
이 문장 역시 '나'와 뭇사람을 비교하는 글이다. '나'는 『노자』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다.
나만 홀로 남과 다르게 되고자 하여 유모를 귀하게 여긴다
吾欲獨異於人, 而貴食母
'사모(食母)'에는 논란이 있지만 어떤 견해에서든 생명의 배양과 관련된다. 『예기』 「내칙」에 "대부의 자식에게는 유모〔食母〕가 있고, 사(士)의 경우에는 부인이 직접 그 자식을 기른다"는 말이 있으므로 오징·초굉의 설을 좇아 유모로 본다. 유모는 낮은 신분이지만 젖을 주어 생명을 기르는 사람이다.
『노자』가 앞에서 묘사한 남과 다른 '나'의 모습은 결과이다. 지금 서술하고 있는 것이 노선이다. 『노자』가 남과 다른 것은 지금 밝히는 것처럼 "남과 다르게 되고자 한" 노선의 결과이다. 이 노선의 핵심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유모〔食母〕를 중시한다는 데 있다. 유모는 젖을 주는 사람이므로 『노자』는 허울 좋은 귀족 양반 마님보다는 실속 있는 유모를 택한 것이다. 곧 『노자』는 사회적 영달보다는 개인의 생명을 존중하는 노선을 선택했다. 뭇사람과 달라지기를 원한 『노자』는 허영심을 버림으로써 영원히 배부르게 살 수 있는 풍요로운 밥줄, 젖줄을 찾은 셈이다.
그런데 "남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노자』와 남들과 달라지고자 한 『노자』는 같은가? 앞에서는 남들과 같아져야 한다고 말하고 여기에서는 남들과 달라지고자 하는 『노자』는 정말로 동일한가?
『노자』는 편집된 책이므로 정합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물론 편집자의 의도가 있으므로 되도록이면 정합성을 유지하는 것이 좋겠지만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 이 글도 초간문에는 앞부분만 나오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다. 원래 앞부분만 있었던 글을 편집자가 지금처럼 살을 붙여놓은 것이다. 그 살이 다른 출처에서 온 것이든 편집자 자신의 해설이든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앞뒤의 글이 서로 어긋나게 되었을 수 있다. 『노자』에서 보이는 사상의 비정합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법은 이것이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표면적인 비정합성을 정합적인 것으로 돌리는 해설을 제시하는 것이다. 가령 이 글에서 "남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은 남들이 사는 대로, 주어진 대로 살고자 하는 인순의 원리고, "남과 다르게 되고자 하는" 것은 그 인순 속에서도 내면의 자유를 향유하는 고답의 경계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배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니
배우지 않으면 해로움이 없다
―『좌전』 「소공」 18년
[네이버 지식백과] 배움을 끊으면 걱정이 없다 [絶學无憂]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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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출처 :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7413
|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 ‘예’(라고 대답하는 것)와 ‘응’(이라고 대답하는 것) 사이에 서로 얼마나 가까운가? 선함(아름다움; 이라고 하는 것)과 악함(이라고 하는 것) 사이에 얼마나 서로 같은가? 사람이 두려워하는 바를 (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荒唐(황당)하도다! 이것이 끝나지 않는다. / 뭇 사람들은 (양, 돼지 소를 제물로 바치는) 큰 연회를 누리는 것처럼, 봄날에 누각에 오르는 것처럼 화목하게 즐기는데,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갓난아기처럼 나타나지도 못하고 홀로 머무는구나! 돌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고달프고 고달프구나! / 뭇 사람들은 모두 여유가 있으나, 나는 홀로 남겨져 있다. 나는 마음이 어리석은 사람이로구나! 사리에 어둡구나! / 세상 사람들은 밝고 밝은데 나는 홀로 어둡고 어둡다. 세상 사람들은 잘 살피는데 나는 홀로 답답하다. 나는 바다와 같이 맑구나! 그치지 않는 바람소리 같도다! / 뭇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쓸모가) 있다. 그러나 나는 홀로 고루하여 미련하다. 나는 홀로 다른 사람과 다르다. 그러나 나는 食母(식모)를 귀하게 여긴다.” - 노자, 『도덕경』, 20장 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 善(美)之與惡, 相去若何. 人之所畏, (亦)不可(以)不畏(人). 荒兮其未央哉.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我獨泊兮其未兆, 如嬰兒之未孩. (儽儽)兮若無所歸.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澹兮(其)若海, 飂兮若無止.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似鄙, 我(欲)獨異於人, 而貴食母 |
識字憂患(식자우환, 아는 것이 병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성인이 만들었다는 예법이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는 현실을 볼 때, 노자는 이런 인위적인 학문을 끊으면 예절과 명분의 혼란이 사라져 다스림에 근심이 없다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학문을 익히는 동기는 마치 봄날 누각에 올라가거나 제상에 참여하는 것과 같이 학문을 통해 벼슬과 명예, 이익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그렇습니다.
지식을 가진 자에게 벼슬과 이익이 있는 한, 예법을 익히는 학문은 사람의 욕망을 일으킬 뿐입니다. 이런 현실을 노자는 개탄하면서 자신의 결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노자는 예법을 배우러 다니지 않으니 스스로 외톨이라고 말합니다. 노자가 스스로 선택한 길은 어리석고 촌스러운 삶입니다.
심성을 어지럽히지 않는 이 길이 진정으로 자연의 질서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노자는 食母(식모)를 귀하게 여긴다고 말합니다. 식모는 생명을 살리는 어미를 뜻하니, 만물을 기르는 자연의 도를 뜻합니다.
| ⓒGetty Image |
배움을 끊으라고 할 때는 배움, 즉 깨달음에서 얻어지는 희열보다는 도리어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지식을 버리라는 것이겠죠. “학문은 날마다 더해가는 것이지만, 도는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다.”(도덕경 48장) 자기를 덜어내는 것을 마음공부라고 할 수 있는데, 노자의 마음공부는 단순한 도덕적 성찰이 아닙니다. 인식태도를 이해하고 나아가 전환된 의식을 통해 사물의 실상과 만나는 깨달음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도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정치가 벼슬과 이익으로 백성을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만들었다는 예법 또한 인간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성인의 정치는 자연의 조화를 파괴하는 길이며 고통과 근심을 초래할 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규명한 노자는 홀로 외로운 길을 걷는 결단을 내리고 食母를 지키고자 합니다. 자연의 도는 곧 만물을 낳고 기르는 식모와 같기 때문입니다.
모든 길이 열려 있습니다.
수많은 길이 있지만
내가 걸어가야 길이 되어줍니다.
아무리 좋은 길도
내가 걸어가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한 풀밭이 되고 맙니다.
막힌 길은 뚫고 가면 되고
높은 길은 넘어가면 되고
닫힌 길은 열어 가면 되고
험한 길은 헤쳐 가면 되고
없는 길은 만들어 가면 길이 됩니다.
길이 없다 말하는 것은
간절한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 유지나의 시 “길”
지방선거를 앞두고 크든 작든 공직에 출마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이력을 드러냅니다. 지역과 학력과 경력을 자랑하면서 스스로 그 일에 적임자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학력을 부풀려서 허위로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배움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근현대사를 보더라도 나라와 사회를 망친 사람들을 따져보면 많이 배우고 소위 좋은 학교에서 배운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고, 그러므로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겠죠. 따라서 배움의 정도가 그 사람의 인격과 품성을 다 말해주지 못합니다. 배움을 내려놓으란 말은 배우지 말라는 의미도 되지만 배움의 이력을 자랑하지 말라는 의미도 됩니다.
살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은 대개 자기가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형편에 따라서는 뿌려진 씨앗일 수도 있고 뿌려진 씨앗을 기르는 흙일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지 나의 생각과 행동이 사람과 모든 생명을 기르는 일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직해야 합니다. 마치 노자가 식모를 귀하게 여긴 것처럼. 예수님의 복음이 모든 사람 모든 생명에게 기쁜 소식인 것처럼.
| “내가 “씨 뿌리는 사람” 사람이라면 하느님 나라를 향한 행동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니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실패를 하더라도 결실의 희망을 품고 계속해서 씨를 뿌려야 합니다. 모든 상황이 좋은 흙처럼 될 수 있도록 또한 길 가, 돌 위, 가시덤불을 제거해야 합니다. 내가 “뿌려진 씨앗”이라면, 단단한 길 위, 사탄의 유혹에 노출되기 쉬운 자리에 있더라도 유혹자의 빼앗음에도 견디어야 합니다. 뿌리를 내리기 힘든 돌 위에 떨어지더라도 뿌리를 깊이 내리려고 노력해야 하며,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환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또 다른 욕심이 생기더라도 물리쳐야 합니다. 내가 “씨를 받는 흙”이라면, ‘과연 나는 어떤 밭이 될 것인가?’ 하는 고민과 함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흙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기 위해 자기의 좋은 것을 다 씨앗에게 줌으로써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좋은 흙의 역할입니다. 그것은 나를 희생하여 하느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든, 뿌려진 씨앗이든, 씨가 뿌려진 흙이든 현실을 견디고 이기고, 결국에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혹이 있다면 물리쳐야 합니다. 시련이 다가오면 견디어야 합니다. 욕심이 일어나면 풀어내야 합니다. 장애물이 있다면 넘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맺으려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항상 돌이켜 생각해야 합니다. 그 결실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 예수님이 목숨을 바쳐서 전한 복음이 아니라면, 그 모든 수고가 헛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상황과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 삶의 현실 속에서 모든 사람 모든 생명에게 기쁜 소식을 만드는 일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열매 맺는 길이 될 것입니다. 나로 인해 내가 기뻐하고, 나로 인해 이웃과 동료들이 기뻐하고, 나로 인해 온 세상이 기쁜 소식으로 가득하기를 빕니다. 그 기쁜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중에서 |
<인용>
출처 :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yyhome53&artSeqNo=10602512
안녕하세요?
노자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절학(絶學) 무우(無憂)!
배움을 그치면 근심이 없다는 뜻이고요.
배우는 것을 끊어라, 배우려는 노력을 그만두라는 것이지요.
왜 노자는 이런 이상한 말을 한 것일까요?
노자의 사상은 유가의 사상과 반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가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배워 사회가 밝아지기를 가르칩니다.
하지만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하며 모든 인위적인 것을 배척합니다.
따라서 인간 사회가 만들어 놓은
무형의 관습으로 이루어진 학습 체계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연에서 배우는 것이 진짜 배움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주장한 ‘절학(絶學)’이란 결국 ‘자연에서 배우라’는 말입니다.
자연에서 배우면 우환이 없다는 것이지요.
논어의 첫 문장은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입니다.
배움이 매우 중요함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노자의 도덕경은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입니다.
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더 이상의 도가 아니다, 라는 뜻이지요.
모든 인위를 배격하는 것으로부터 노자는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하지요.
우리는 유년시절을 자연과 같이 보냈습니다.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주변에 자연이 널려있었으니 말입니다.
봄이면 산에 들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꽃을 따러 다니고
여름이면 계곡물에 발가벗고 목욕을 하기도 했고
가을이면 쌓아놓은 낟가리 사이에서 술래잡기를 하기도 했으며
겨울이면 얼음 배를 타다 물에 빠져 옷을 버리곤 했지요.
요즘 아이들은 자연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온통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그리고 네모난 컴퓨터 앞에서
종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자연은 생명입니다.
옛날엔 그 고귀한 생명을 살리려는 마음에 사랑하고 아껴주었는데
요즘 아이들이 즐기는 대부분 컴퓨터 게임은 생명을 죽이는데 목적을 둡니다.
달라도 너무 다르니 문제입니다.
아이들의 인성을 걱정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환경을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 목연생각 : 시골에서 성장한 나의 어린 시절도 자연과 함께였지요.
사계절의 풍경을 모두 보면서 자랐고,
고구마, 옥수수, 복숭아, 대추, 밤 등
먹거리 대부분이 밭이나 자연에서 나왔습니다.
그때는 전화도 귀해서
서로 간에 오가는 정도 편지나 엽서로 하였지요.
겨울밤이면 동네 청년들이 어느 집 사랑방에 모여 놀았고,
처자들은 처자들끼리 모이는 집이 있었습니다.
밤이면 마실을 가는 것이 풍속이기도 했지요.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이라
메르데카컵이나 킹스컵 축구 대회 같은 경기가 열릴 때는
동리 사람들이 라디오가 있는 집에 모여 함께 듣기도 했고요.
대화가 끊긴 지금,
그저 혼자만의 세계에서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살아가는 현실을 보면
무언가 삭막함이 느껴지고
세상이 잘못되는 것이 아닌가 공연한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갔고,
지금 시대도 여기에 맞는 정서와 낭만은 있을 것입니다.
이제 직장을 나왔고, 가정에서도 아이들이 모두 떠난 지금
새삼스럽게 세상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올바른 방향으로 잘 되기를 기도하자는 마음일 뿐입니다.
20일 전에 폴더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바꾸었는데
지금 나의 우선순위는 스마트폰의 기능을 익히는 것이겠지요.
다른 일에 대한 관심은 일단 접을 생각 *^^*
<인용>
출처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8102201033012000001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위학일익 위도일손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학문을 하는 것은 날로 쌓아가는 것이고 도를 닦는 것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무위에 이른다.
‘도덕경’ 48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공자는 ‘학’을 중시해 평생을 배움으로 일관했다. 이에 비해 노자는 ‘도’를 중시해 ‘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펼치고 있다. 이 구절에서 ‘익(益)’은 무언가 찌꺼기를 쌓아간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노자는 20장에서도 절학무우(絶學無憂)라는 말하는데 풀이하자면 학을 끊어버리면 근심이 없다는 뜻이다. 노자의 관점에서는 도를 닦는 것은 바로 인위의 찌꺼기를 날로 덜어내는 것이다. 그 찌꺼기를 덜어내고 또 덜어낼 때 노자가 추구하던 이상적인 경지인 무위에 이른다. 여기서 무위는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뒤이은 구절에서 노자는 참된 무위의 경지에 이르면 모든 일이 저절로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나는 젊은 날부터 노자를 열심히 읽었는데 나에게 있어 ‘도덕경’은 단순한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구도의 지침서였다. 특히 위의 구절을 참 좋아해 ‘우손(又損)’을 나의 호로 삼은 지도 벌써 25년이 넘었다. 구도와 학문을 통합하려는 꿈을 지닌 나에게 있어 ‘학’과 ‘도’의 구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은 하나의 이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익’과 ‘손’이다. 나는 명상을 하면서 늘 내 마음속에 인위적 긴장이나 불필요한 분별심 등이 쌓이지는 않는지 살핀다. 또한 독서를 하면서도 단순히 지식을 쌓아가려고 하기보다는 무지와 편견을 덜어내려고 노력하고 특히 관념의 찌꺼기가 쌓이지 않도록 주의한다. 지금의 시대는 쌓아가는 것을 너무 중시하는 시대다. 물론 필요한 것들은 쌓아야 하지만 불필요한 것들은 덜어낼 줄 알아야 삶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상명대 교수
<인용>
출처 : http://www.ilyoweekl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817
물리학 박사 김선국의 노자(老子) 이야기(18)
[일요주간=김선국 박사] 노자는 지도자들에게 권고한다. 지도자들이 교훈을 통해 도에 가까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
◆ 사사로움이 없으니, 少私
絶聖棄智 民利百倍 (절성기지 민리백배)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로움이 백배나 되고
絶仁棄義 民復孝慈 (절인기의 민복효자)
인을 끊고 의를 버리면 백성의 효성과 자애가 회복될 것이며
絶巧棄利 盜賊無有 (절교기리 도적무유)
교를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있지 않으니
此三者以 爲文不足 (차삼자이 위문불족)
이 세가지는 법도로 하기에는 부족하다.
여기서 3가지는 성지(聖智)와 인의(仁義)와 교리(巧利)이다.
성인의 가르침과 지혜, 인의와 교리는 세상을 지탱하는 것들이지만 노자는 이런 것들 마저도 법도로 세우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런 것들 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것을 노자는 요구한다.
故令有所屬 (고령유소속)
그러므로 뭔가를 덧붙이니
見素抱樸少私寡欲 (견소포박소사과욕)
마음을 깨끗이하고 순박하게 살며 이기심을 버리고 욕심을 버려야 한다.
올바르게 살라고 인과 의를 가르친다. 종교에는 깨달은 이들의 가르침이 많지만 그런 것들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노자는 이야기한다. 가르침은 가르침일 뿐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가르치는 자들이 각색 하고 덧붙여 놨으니 본래의 의미에서 한참이나 멀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종교가 쇠퇴하고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명상이 인기를 얻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술이 발달하고 살기가 편해지면 이를 이용해서 세상은 도둑이 먼저 날뛴다.
최첨단의 IT기술을 이용한 사기꾼들이 설쳐대고 인터넷과 결합한 다단계가 활개를 친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욱 거추장스럽게 하고 인터넷의 노예가 되도록 만든다.
노자는 이런 것에서 벗어나 소박함으로 돌아오고 사욕을 버리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이 힘든 것은 어려운 환경이 아니라 집착 때문이다. 욕심이 없으면 괴로울 일도 없다. 잘 살려는 야망이 없어서 그저 물 흐르는 대로 산다면 삶이 자유로워질 것이다.
번뇌는 욕심에서 온다. 욕심을 버리고 소박하게 사는 삶, 노자는 그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진정 도에 이르려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삶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끝없이 욕망을 자극하는 매스컴과 매스미디어를 대하면서 우리는 욕심을 키운다. 욕심에 사로잡혀 스스로 만든 감옥에 빠진 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노자는 경계한다.
◆ 대지의 어머니, 食母
絶學無憂 (절학무우)
학문을 끊을 수만 있다면 걱정이 없을 텐데
唯之與阿 相去幾何 (유지여아 상거기하)
‘예’와 ‘응’의 구별이나 하고 선(善)과 악(惡)의 거리나 재고 있도다.
善之與惡 相去若何 (선지여오 상거약하)
예(禮)와 비례(非禮), 선(善)과 악(惡)의 구별은
人之所畏 不可不畏 (인지소외 불가불외)
사람이 두려워하는 바이니 나 역시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荒兮其未央哉 (황혜기미앙재)
세상을 바라보니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구나
衆人熙熙 如享太牢 (중인희희 여향태뢰)
사람들은 희희덕거리며 맛있는 요리를 먹고
如春登臺 我獨泊兮 (여춘등대 아독박혜)
즐거이 망루에 오르는데 나 홀로 떠도는구나
其未兆 如嬰兒之未孩 (기미조 여영아지미혜)
나는 홀로 버려져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갓난아이와 같도다.
僂僂兮 若無所歸 (루루혜 약무소귀)
고달프고 지쳤건만 돌아갈 곳도 없어라.
衆人皆有餘 我獨若遺 (중인개유여 아독약유)
사람들은 모두 여유가 있건마는 나는 모든 것을 잃었도다.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아우인지심야재 돈돈혜)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어서 그 마음이 어둡고 어둡도다.
俗人昭昭 我獨昏昏 (속인소소 아독혼혼)
세상 사람들 모두 밝고 명랑한데 나만 홀로 어둡고 아둔하구나.
俗人察察 我獨悶悶 (속인찰찰 아독민민)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 홀로 어두워서
澹兮其若海 兮若無止 (담혜기약해 혜약무지)
바다처럼 일렁이고 바람처럼 흔들리네.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似鄙 (중인개유이 아아독완사비)
사람들은 모두 살아가는 까닭을 지니고 있지만 나는 홀로 무디고 비루하네. 왜 그럴까?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아독이어인 이귀사모)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홀로 천지의 어머니(食母)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식(食)은 먹이고 기른다는 의미이며 사라고 읽는다. 사모(食母)는 우리를 기르고 먹이는 어머니, 즉 대지의 어머니를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서 이 글을 풀어보자.
세상 사람들은 즐겁고 신나게 사는데 노자 자신은 홀로 외톨이이고 재미없게 산다고 스스로를 한탄하고 있다. 세상에는 맛난것 먹으며 재미있고 유익한 일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노자는 홀로 고달프고 지쳐 있다. 모두들 자신의 뜻을 펼치고 업적을 이루며 주변에서 인정받고 성공을 추구하는데 나 홀로 쓸데 없는 학문으로 오히려 어둡고 어두워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처럼 고뇌하고 있다.
세상은 삶의 의미를 아는 듯하지만 나 홀로 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조차 모르고 있다. 오직 나를 먹이시는 우주의 어머니로 인하여 존재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 글은 노자가 스스로를 한탄하는 글이지만 사실은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노자 홀로 깨어있고 도에 가까우며 노자 홀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길은 재미있고 신나지만 도의 길은 그 반대로 어찌할 바 모르는 어둠이다.
그 무지(無知)의 현빈(玄牝)을 찾는 노자는 시대의 유일한 등불이다.
춘추전국시대, 죽음과 배반과 궁핍의 시대, 희망 없음과 황폐한 그 시대에 노자는 진정한 빛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출처 : 일요주간(http://www.ilyoweekly.co.kr)
<인용>
출처 : http://catholicpress.kr/news/view.php?idx=5053
(김유철) 노자와 교회 : 평신도는 ‘내버린 돌’인가? 영광입니다.- 노자 20장 나 홀로 세상 사람과 달라서
사람들한테서 배우기를 그만두면 근심이 없다. ‘예’하고 ‘응’하고 얼마나 다르며, ‘선’과 ‘악’의 차이가 얼마나 되는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나도 두려워하랴? 황당하기가 끝이 없구나. 사람들은 밝고 즐거워 큰 잔치를 베풀고 봄 동산에 오르는 것 같은데 나는 홀로 고요하여 아직 첫 웃음을 지어보지 못한 젖먹이처럼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고 끝없이 돌아가는 모양은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넉넉한데 나는 홀로 아무 것도 없다. 나야말로 바보의 마음이다! 멍청하고 멍청하구나. 세상 사람들은 빛나는데 나는 홀로 어둡고 세상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는 홀로 둔하다. 고요하기가 잔잔한 바다와 같고 끝없이 흐르되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쓰임새가 있는데 나는 홀로 완고하여 쓰일 곳이 없다. 나 홀로 세상 사람들과 달라서 어머니한테 얻어먹고 자라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2003. 삼인)
노자 전체 81장중에서 가장 긴 본문 내용을 지닌 장이다. 노자는 전체가 5000자로써 춘추전국시대를 전후로 나온 경전 중에는 가장 짧다. 참고로 논어는 1만5천자, 맹자는 3만5천자이며, 가장 장문의 경전은 한비자로서 10만자에 이른다. 거기에 비해서 노자는 산문이 아닌 운문에 가까울 정도로 짧고 깊게 자신의 철학을 들려주고 있다.
암튼 오늘의 본문에서는 다짜고짜 “절학絶學-배우는 것을 그만두라”고 한다. 진짜 배움은 사람이나 책이 아닌 ‘자연에서 배우라’라는 말이다. 마치 사람들에게 “하늘에 나는 새를 눈여겨보라. 들에 핀 나리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라”(마태6.25-34)는 예수의 말씀과 데자뷰이기도 하다. 노자는 세상 사람들과 달라서 이래저래 어렵지만 “어머니한테 얻어먹고 자라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라고 20장 본문을 마무리 짓는다. 노자가 어머니라 부르는 대상은 예수에게는 하느님 ‘아빠’와 한 치도 다르지 않다.
2017년 11월 18일 주교회의에서 발표된 보도자료 내용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회장 권길중, 약칭: 한국평단협) 설립 50주년을 맞아 ‘평신도 희년’을 지내도록 승인하였으며, 교황청 내사원은 한국의 평신도들을 위해 전대사를 수여하는 교령을 보내왔다. 한국평단협은 1968년 7월 23일 창립되었으며, 주교회의는 평신도들의 자각과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 적응하는 사도직 활동을 위해 매년 연중 마지막 전 주일(내년부터는 연중 제32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정하고 전국 모든 성당에서 이를 지낸다.’
평신도희년 선포는 기쁘고 좋은 일이다.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천주교회의 기원이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대로 외국 선교사 없이 한국인 자발적으로 이뤄졌으며 그 한국인이란 바로 평신도였음을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더욱이 대외적으로 폐쇄적이고 대내적으로 정치적 요인이 겹치며 초기 평신도의 태반이 순교의 역사를 이어왔고 그런 역사를 배경으로 현재의 한국천주교회가 서 있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고 기리고 있다.
평신도희년이라고 하느님의 은총을 교리화한 전대사도 좋고, 한국평단협이 기획한 희년독후감공모, 자료집 발간도 좋고, 실천사항으로 ‘전월세 안올리기 운동’이나 ‘아시아 교회돕기 사업’등도 실효성이 있든 없든, 모두가 알든 모르든 간에 그 기획의도는 평단협 창립 50주년을 맞는 희년의 아름다운 마음에서 비롯된 일로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천주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하고 새삼 묻는 것이다.
교계제도는 교구를 중심으로 이끌어 나가고, 그 교구라는 제도교회의 구성은 분명 성직자와 평신도이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 주신 각자의 카리스마에 알맞게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루카17,10)이다. 새삼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역사하심임을 알고 있다면 ‘하느님의 일’은 어느 일방이 하는 것이 아니라 미우나 고우나 모두 함께 한 일이고 앞으로도 해야 하는 일이다. ‘새는 좌우날개로 난다’는 말이 자연의 진리이듯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아낌이 있는 곳에 교회의 존립이 빛난다.
“교우촌을 중심으로 한 소공동체적 신앙생활에서는 회장을 중심으로 한 평신도의 역할이 큰 몫을 담당하였다. 특히 교우촌 회장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천주교회가 이어 갈 수 있게 발 벗고 나서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회장들은 신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을 이끌어 나갔다. 회장의 인도 아래 교우촌의 신자들은 다시 힘을 얻고 다른 교우촌과 연락을 주고 받거나 교회의 일들을 서로 돕곤 하였다. 특히 성직자가 없는 상황에서 회장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한국천주교회사2>. 2010. 한국교회사연구소. 149쪽)
성직자가 없던 시절 한국천주교회를 지켜온 것은 평신도 회장들의 힘이 크다. 또한 현재 성직자가 있는 상황 하에서도 평신도 지도자들은 분명히 교회의 한 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교구 홈페이지에서 평신도 지도자에 관한 정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어렵거나 아예 언급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군종교구를 비롯한 16개 교구 모두를 열어보라. ‘위대하신’ 역대 교구장은 있어도 그들과 함께 교구를 이끌어온 평신도 회장들은 없다. 기껏 <기관단체> 이거나 <기타단체> 구석 어딘가에 평협이 링크 되어 있을 뿐,
한국 최초의 성직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보다 앞서 한국천주교회의 문을 열었던 최초의 평신도 회장 복자 최인길 마티아(1765∼1795)는 잊혀졌다. 평신도로 팔레스티나에 살던 젊은 예수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오래전 했던 말은 오늘도 유효하다.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르12,10-11)
[필진정보]
김유철 (스테파노) : 한국작가회의 시인,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이며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이다. ‘삶·예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시집 <천개의 바람> <그대였나요>, 포토포엠에세이 <그림자숨소리>, 연구서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 등이 있다.
<인용>
출처 : https://tip.daum.net/openknow/52054084?q=%E7%B5%B6%E5%AD%B8%E7%84%A1%E6%86%82
제20장
원문:
絶學無憂,
唯之與阿,相去几何? 善之與惡, 相去若何? 人之所畏, 不可不畏.荒兮其未央哉!
衆人熙熙如享太牢,如春登台.我獨泊兮其未兆,如婴兒之未孩;乘乘兮若無所歸.衆人皆有餘,而我獨若遺.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俗人昭昭,我獨昏昏;俗人察察,我獨悶悶.衆人皆有以,而我獨頑且鄙.
我獨異於人,而貴食母.
원문번역:
배움을 막아버려야 근심이 없느니라.
순종함과 아부함이 사이가 얼마나 디며 선과 악의 거리가 얼마나 되던가? 남들이 무서워함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느니라. 황량할손 인간들이 갈길 얼마나 멀고 멀드냐!
많은 사람들은 희희닥닥 제물(祭品)을 즐기는 듯 봄 구경을 하는 듯 하건만 나 홀로 외로이 즐기지 않니하니 아기가 아직 울음을 터치지 않은 듯, 요람을 타고 갈 곳을 몰라 하는 듯 하더라. 사람들은 모두 쓰고도 남음이 있는 듯 하나 나만 항상 부족한 듯 하니 나는 미련한 사람의 마음 같으니! 순수하고 질박하도다.
속세의 인간들은 모두 깨어 있으나 나 만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하고 뭇 사람들은 모두다 분망한데 나만 흐리멍텅해 있는 듯 하고 많은 사람들은 모두 할 일이 있으나 나만 홀로 할일 없는 듯 하더라.
나만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바, “도(道)”를 먹고 살아가노라.
키워드:
善之與惡, 相去若何
선과 악의 거리가 얼마나 되던가? 중국어발음: 산 즈 위 어, 샹 취 뤄 허(shan4 zhi1 yu3 e4, xiang1 qu4 ruo4 he2. 선지여악, 상거낙하?)
人之所畏, 不可不畏
남들이 무서워함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느니라 중국어발음: 런 즈 숴 웨이, 부 커 부 웨이(ren2 zhi1 suo3 wei4, bu4 ke3 bu2 wei4. 인지소외, 발가불외)
俗人昭昭,我獨昏昏;俗人察察,我獨悶悶
속세의 인간들은 모두 깨어 있으나 나 만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하고 뭇 사람들은 모두다 분망한데 나만 흐리멍텅해 있는 듯 하고 중국어발음: 수 런 자오 자오, 워 두 훈 훈, 수 런 차 차, 워 두 먼 먼(su3 ren2 zhao1 zhao1, wo3 du2 hun1 hun1; su3 ren2 cha1 cha1, wo3 du2 men1 men1. 속인소소, 아독혼혼, 속인찰찰, 아독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