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인물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대수(待?), 호는 응계(凝溪)이다. 부친은 성균관 생원시 출신으로 진성감무(珍城監務)를 역임한 옥사미(玉斯美)이다. 보백당 김계행선생
가 족
학 문
저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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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산 원문보기 글쓴이: 군계일학
명 칭 | : | 만휴정(晩休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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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 1리 10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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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축 주 | : | 김계행(金係行, 1431~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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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 | 15세기 말~16세기 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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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건시기 | : | 16세기 말~17세기 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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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유 자 | : | 김해동(관리자 : 김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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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 재 | :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3호, 1986년 12월 11일 지정, 1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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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독서와 사색을 위하여 만년에 건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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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면을 누마루 형식으로 개방하여 자연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고, 양쪽에는 온돌방을 두어 학문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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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휴정(晩休亭) |
만휴정중수기(晩休亭重修記) |
시판(詩板) |
김양근(金養根), 김굉, 이돈우(李敦禹), 유도원(柳道源), 김도행(金道行), 정박(鄭璞) 등의 시가 걸려있다. |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 |
각자(刻字)이다. |
기타 |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 선생당편 개취시의(先生堂扁 盖取是義), 지신근신 대인충후(持身謹身 待人忠厚) 등 선생의 유훈(遺訓)이 게판되어 있다. |
명 칭 | : | 안동김씨 보백당종택(安東金氏 寶白堂宗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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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7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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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축 주 | : | 김계행(金係行, 1431~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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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 | 15세기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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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유 자 | : | (관리자 : 김해동 / 김주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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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 재 | :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9호, 1980년 6월 17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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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행은 무오사화 이후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서 작은 집을 지어놓고 보백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후진을 교육하고 산수를 즐기는 것으로 시종하였다. 묵촌(?村)의 궁벽지고 조용한 산수를 사랑하여 무오년 후에는 항상 드나들며 머물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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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의 소산마을에 살던 김계행이 묵계의 산수를 사랑하여 집을 짓고 들어와 살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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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백당은 집 안으로 들어와 있는 정자라 할 수 있다. 작고 아담한 규모, 아마도 김계행의 미학이 일정 부분 작용한 설계일 것이다. 보백당의 북쪽으로는 사당이 있다. 사당의 동편은 口자 형태의 살림집이다. 口자 형태의 구조 앞쪽으로, 즉 본채의 서남쪽 부분은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조금 돌출되어 있는 구조이고,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은 그 동북쪽으로 조금 물러나 있다. 사랑채는 보백당보다는 크고 화려하다.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남향을 하고 서 있다. 정문 큰대문과 일직선상에 놓여지는 셈이다. 서쪽 2칸은 앞에 폭 좁은 쪽마루를 두고 있는 2개의 방이다. 동쪽 2칸의 앞쪽 1간은 마루방을 이루고 있고, 뒤쪽 한간은 방으로 되어 있다. 쪽마루 서쪽 벽과 마루방 동쪽 벽은 나무판 문으로 차단되어 있다. 파초잎의 푸르고 시원스런 색감과 자태가 사랑채 앞을 막고 서서 공간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하여 준다. 청량하고 유쾌한 분위기가 흐른다. 바깥마당이 평지에 상당히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 느낌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솟을 대문 너머로 앞산의 꼭대기가 멀리 물러나 보이는 것, 뒤울 너머 계명산의 한 산봉우리가 멀리 물러나 앉아 그 능선을 드리우고 있는 것, 그리하여 공간이 한없이 넓고 편안해 보이는 것도 이 느낌을 생산하는데 동참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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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에서 동향하여 서 있는 것이 보백당이다. 본채와 사당은 산기슭 쪽으로 물러나 남면하여 서 있다. 보백당과 본채 사이에는 사당이 있고, 그 동편으로는 口자 형상의 본채가 있다. 본채의 앞쪽으로 용계당이라는 편액이 걸린 사랑이 있고, 본채는 그 뒤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문채는 앞쪽으로 내려와서 넓은 국면을 다 싸안은 울타리를 양쪽으로 거느리고 있다. 통상의 경우보다 아주 넓은 대문 안의 바깥마당에는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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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백당(寶白堂) |
정면의 가운데 칸 처마 밑으로는 김가진(金嘉鎭)이 쓴 보백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글씨는 단아하고 둥글둥글한 모양이다. 현판은 80° 정도의 각을 이루며 10cm 정도 폭의 돌출된 판으로 둘러막았는데, 위쪽의 판은 양쪽으로 머리를 내밀며 봉황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돌출된 판의 표면은 또 인동덩굴을 둘렀는데, 혹시 이것이 인동덩굴 문양이 아니라 봉황의 깃털 문양인지도 모를 일이다. 보백당은 김계행의 호이면서 이 집안에 있는 정자의 이름이다. 김계행은 ‘청백이 자신의 보배’라고 매양 이야기 하고 있는데, 보백당의 보백은 바로 여기에서 온 것이다. |
용계당, 묵은재(龍溪堂, ?隱齋) |
본채의 바깥채를 이루고 있는 사랑채는 용계당이다. 동쪽으로부터 두 번째 칸의 처마 밑에는 용계당(龍溪堂)이라는 편액이, 서쪽으로부터 두 번째 칸 처마 밑에는 묵은재(?隱齋)라는 편액이 판각되어 붙어 있다. 가운데 두 칸의 처마 밑을 각각의 현판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검은빛 판면에 금색 글씨인데, 모두 김가진의 글씨이다. 보백당 글씨의 단정한 품새는 여기 이르면 조금 흩어지고 자유로워진다. 어느 편이 더 낫다고 볼 수 없는 문제지만, 무지함을 앞세워 말해 보면, 잠시 보기는 용계당 글씨 쪽이 나을 것이고, 오래 두고 보기는 보백당 글씨가 낫다고 여겨진다.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도 조금 열려 있다. 열린 문 너머로 동천고택(東川古宅)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
천지정시능조화, 성현우처시공부(天地靜時能造化, 聖賢憂處是工夫) |
용계당 편액 동쪽에 바짝 붙어 있는 기둥 위에는 “하늘과 땅은 고요할 때에도 능히 조화를 부린다.”는 내용의 주련이, 묵은재 편액 서쪽에 바로 다가서 있는 기둥 위에는 “성현이 걱정하는 곳에서 공부는 이루어진다.”는 내용의 주련이 종서로 써진 나무판이 붙어 있다. |
보백당중건상량문(寶白堂重建上樑文) |
유연즙(柳淵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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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휴정 앞 냇물 모습을 보고 김계행이 이름 붙인 마을 | |
묵계는 길안에서 영천 방면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5km 쯤에 있다. 원래 길안현에 속했고, 1914년 오락(五樂)을 합하였으며, 1995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가 되었다. 묵계 1리와 2리로 나누는데 묵계 1리에는 선항리(仙巷里)·서낭댕이, 상리(上里), 하리(下里)·안룻마, 새마을, 구만(九滿)·구마닛골 등 5개 마을이, 묵계 2리에는 오락 1개의 마을이 있다. 원래 거묵역(居墨驛)이라 불리던 묵계마을은 1500년(연산군 6)에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이 옮겨와 살면서 묵촌(?村)으로 고쳐 불렀다. 그가 송암폭포(松岩瀑布) 위에 만휴정(晩休亭)을 건립하고 정자 앞 냇물 모습을 보고 다시 묵계라 불렀다고 한다. 선항리는 묵계리의 북동쪽 언덕 기슭에 있는 남향 마을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피하여 이주한 김계행의 종택인 보백당이 있고, 보백당의 동쪽에 묵계서원(?溪書院)이 있다. 묵계서원은 1706년(숙종 32)에 건립된 것으로 보백당과 응계(凝溪) 옥고(玉沽)를 배향하였다. 그 후, 1870년에 훼철되었으나 1998년에 다시 지었다. 상리는 새마을에서 남동쪽 산기슭에 있다. 새들은 상리의 앞쪽에 있는 넓은 들판이다. 제잉골·재궁골은 상리의 뒷산에 있는 골짜기다. 여기에 안동김씨(安東金氏) 재사(齋舍)인 달수재(達壽齋)가 있다. 하리는 새마을에서 남서쪽 마을로, 마을 뒷산에는 만휴정이 있다. 만휴정은 보백당이 만년에 조용히 쉬겠다는 뜻으로 건립한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팔작지붕이다. 정자 앞 용추 가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라고 새긴 바위가 있다. 구만은 옛날에 도사(道師)가 지나다가 이 마을에 9가구만 살면 잘 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후 조선 말기에 한 선비가 늦도록 국화꽃이 피는 따스하고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에서 국만리(菊晩里)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오락은 묵계 2리에 속하며 묵계의 북동쪽의 넓은 마을이다. 청계(靑溪) 김진(金鎭)이 개척하였으며, 그의 자제인 돈수(遯?) 김인보(金仁輔)가 터전을 더 넓혔다. 그의 자제인 오락당(五樂堂) 김정호(金廷豪)가 이 마을에 다섯 가지 즐거움이 있다 하여 오락이라 하였다고 한다. 오락이란 산, 물, 나무, 물고기, 복숭아를 말한다. 여기에 마을의 입향 시조인 돈수의 신도비(神道碑)가 있으며 마을 중앙에는 안동김씨 감찰공파 종택인 돈수재와 돈목당(敦睦堂) 등의 고가옥이 있다. 또 마을 북쪽 끝자락 봉월산 아래에는 낙빈정(洛濱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묵계의 북쪽에는 벌처럼 생겼다는 봉월산이 있는데, 여기에 청계의 묘소가 있다. |
명 칭 | : | 묵계서원(默溪書院)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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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705 (원소재지 : 안동부 길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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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축 주 | : | 사림(士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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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 | 1687년(숙종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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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시기 | : | 1869년(고종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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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유 자 | : | 사유(관리자 : 김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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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 재 | :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9호, 1980년 6월 17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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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에 강당 및 일부 건물을 건립하였으나 복향(復享)은 하지 못하였다. 1998년 5월 17일에 사림들에 의해 현 위치에 복원되었다. 서원 남쪽 언덕에는 보백당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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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서원은 1687년(숙종 13)에 사림들의 발의로 창건되었다.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21)의 위패는 그의 맑고 깨끗한 삶의 자세를 흠모하는 후대의 선비들에 의해 1706년(숙종 32)에 묘우인 청덕사(淸德祀)에 응계(凝溪) 옥고(玉沽, 1382~1436)와 같이 병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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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3칸을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 온돌을 들인 일반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서원 좌측에는 이를 관리하는 정면 6칸, 측면 5칸의 口자형 주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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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사당, 강당, 누, 재,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청덕사(淸德祀), 강당은 입교당(入敎堂), 누는 읍청루(?淸樓), 재는 극기재(克己齋)이며, 문은 진덕문(進德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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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덕사(淸德祠) |
입교당(立敎堂) |
읍청루(?淸樓) |
진덕문(進德門) |
묵계서원창건기(?溪書院創建記) |
유극화(柳克和)가 지었다. |
묵계서원중건기(?溪書院重建記) |
이상원(李家源)이 지었다. |
묵계서원복원기(?溪書院復元記) |
이헌주(李憲柱)이 지었다. |
묵계읍청루상량문(?溪?淸樓上樑文) |
이상정(李象靖)이 지었다. |
묵계재루상량문(?溪齋樓上樑文) |
이재(李栽)가 지었다. |
극기재(克己齋) |
『논어(論語)』「안연」편의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人) 에서 따온 말이다. |
관련인물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대수(待?), 호는 응계(凝溪)이다. 부친은 성균관 생원시 출신으로 진성감무(珍城監務)를 역임한 옥사미(玉斯美)이다. 보백당 김계행선생
가 족
학 문
저 작
주향자
- 김계행(金係行, 1431∼1521)
조선시대 세종에서 중종대의 문신이다.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보백당’은 그의 시구인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에서 따 온 것으로, “청백을 보물로 삼는다.”라는 의미이다. 부친은 현감을 지낸 김삼근(金三近)이다.
그는 다섯 살 무렵에 부친에게 가학으로 학문을 익혔는데, 매우 영민하여 문장을 금세 익히고 곧잘 암송하였다. 자라나면서 성질이 침착하고 과묵해서 같은 또래의 친구와 어울려도 남달랐기 때문에 집안의 어른들은 보백당이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예견하였다. 그리고 부친은 ‘집안을 일으킬 아이’라며 큰 기대를 걸었다.
10세(1440년)에 비로소 글을 익히게 되었는데, 문리를 통했으며, 배운 바를 부지런히 암송하였다. 이어 12세(1442년) 무렵에는 독서를 즐겨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아 이내 문예에 있어서 크게 성취한 바가 있었다. 보백당은 14세(1444년)가 되어 부친이 비안현감의 임소로 떠나자, 부친을 모시고 비안으로 가서 그곳 향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15세(1445년)에 사서(四書)를 모두 익혔으며, 16세(1446년)가 되던 가을에는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어 17세(1447년) 되던 봄에는 생원회시에 합격하여 비안 관아에서 경사를 축하하는 잔치도 벌였다고 한다. 이어 22세가 되던 1452년에는 증광동당시(增廣東堂試)에서 제2인자로 뽑혔다.
보백당은 30세(1460년) 무렵에 지금의 묵계인 거묵(居?)에 생활 근거지를 삼게 되었다. 31세(1461년) 가을에 동당초시(東堂初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어 32세(1462년) 되던 해 봄에 귀향했다가 6월에 성주교수로 임명되어 이듬해에 부임했다.
보백당과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과의 교유는 41세(1471년) 때에 비롯되는데, 점필재와 함께 『주역(周易)』과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면서 도의를 맺는다.
49세(1479년) 가을에는 식년동당초시(式年東堂初試)에 합격하였으며, 이듬해 3월에는 급제하여 6품직에 올랐다. 이 당시, 점필재가 서울에 우거(寓居)하던 보백당을 내방하였다. 이어 51세(1481년)에는 점필재 및 성희안(成希顔, 1461~1512)과 함께 여러 날 종유하였다.
그리고 희안의 동생인 희증(希曾)과는 교분이 각별하였다. 52세(1482)에 고령현감을 제수 받았는데, 외직에서 청렴하고 자애로운 선정을 베풀고, 매사를 신속히 처리하여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고령 고을에 교화가 이루어지며 기강도 세워지게 되었다.
이후, 보백당은 1484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지제교(知製敎)·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전임되어 천재(天災)와 시폐(時弊), 인사의 불공평 등을 논하다가 권신들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489년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옮겨 승니(僧尼) 제도의 폐지를 청원하고는 여가를 얻어 귀성(歸省)하였다. 이 당시, 연산군의 생모 윤씨 폐위가 이루어지고 조정의 의견이 양분되어 어수선 하자, 보백당은 조정에서 물러 날 뜻을 확고히 정하였다.
1492년 모친상을 탈상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지제교(知製敎)·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이내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이임되었다.
그해 4월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임해 끝내 직임이 바뀌어졌다. 이어 6월에는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돌아와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전임되어 굳이 사양했으나 주상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 이어 9월에는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되어 네 번이나 사표하여 결국 교체되었다.
1493년에 낙향하여 선영에 참배하고 풍산과 묵계를 오가며 한가한 생활을 하였다.
1495년(연산군 원년) 2월에 국장(國葬)의 산역(山役)을 감독하였다. 이어 5월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여 해임되었다. 1497년 대사간(大司諫)으로 시정(時政)을 극력히 간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가납되지 않자, 사표를 내고 이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1498년 작은 정자를 수축하고 「보백당」이라 편액하고는 날마다 사색하며 심성을 수양하는 한편 생도들의 훈육에 전념하였다. 이 당시, 무오사화가 발발하여 보백당도 이에 연루가 되었다고 하여 어세겸(魚世謙)·성희증(成希曾)·조호문(趙好問) 등 10여 인과 함께 체포되어 태형(笞刑)을 받고 석방되었다가 그해 7월에 다시 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
1499년 첨중추(僉中樞)에 임명되었다. 당시 도승지 신수근(愼守勤)과 한치형(韓致亨) 등이 모의하여 보백당의 국문을 주청하였으나, 구원의 손길에 힘입어 무사하였다. 당시 보백당은 동학들이 모두 사화에 의해 희생되어 비참한 심정을 가눌 길 없었다. 이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또한 연산군이 지난 일을 들추어 국문을 명하여, 보백당은 의금부에 5개월 동안 구금당하였다가 방면되어 환향하였다.
이렇듯 보백당은 수년 사이에 세 차례나 국청(鞠廳)에 들어가 신문을 받는 동안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속박과 고통을 받았지만, 태연자약하게 대처하여 연산도 더 이상 가해 행위를 하지 못했다.
1501년 묵계로 거주지를 옮겨 묵계하리 송암폭포 위에 ‘만휴정’을 짓고 소요 자적하였다. 1506년에 중종 반정이 일어났다. 보백당은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회한에 잠겼다. 이후, 그는 경학에 전력하여 성리(性理)를 탐구하고 사색하였다.
보백당은 1517년 87세를 일기로 운명하면서, 자손들에게 “청백을 가법으로 이어가고, 공근(恭謹)을 대대로 지켜가며, 효우(孝友)하며 돈목(敦睦)하라, 교만이나 경박한 행동으로 가성(家聲)을 떨어뜨리지 말라, 상제(喪制)는 정성과 경건을 다하고, 낭비나 허례를 말라.”고 유언하였다.
그는 입조한 수십 년 동안 충간(忠諫)을 다했으며, 「계(啓)」·「차(箚)」·「소(疏)」 등이 많이 전해졌을 것이지만 여러 차례의 변란 과정에서 대부분 산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시호(諡號)는 정헌(定獻)이다. 후일, 조정으로부터 이조판서(吏曹判書) 및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으로 증직되었으며, 부조전(不?典)의 칙령(勅令)도 내려졌다.
- 옥고(玉沽, 1382~1436)
응계가 태어나고 이내 부친 옥사미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응계는 모친에게서 알뜰한 가르침을 받았다. 모친은 그에게 부지런히 학문을 익히도록 권장했을 뿐 아니라 응계 자신도 총명하여 문예가 조숙하였다. 이윽고 길재의 문하에 나아가 본격적인 학문을 익히게 되어 경학과 성리학에 치중하였다.
18세인 1389년(공양양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어린 나이에 급제한 탓에 일시에 화제가 되었으며, 재상가에서는 서로 사위를 맞으려고 다투었다. 이어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 등을 역임했다.
성균관의 교수로 재직할 때에는 제자들에게 훈육을 엄정히 하여 후학들 가운데 학문으로 성취한 자가 많았다. 이를테면,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이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인물들이라고 한다.
벼슬길에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상을 당했다. 모친상을 마치고 응계는 다시 벼슬길에 나갈 뜻을 접어 두고 산수 사이에서 거닐며 시를 읊고자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33세 때인 1414년에 안동부통판(安東府通判)에 임명되어 상하로 예를 다하고 엄격함을 잃지 않았다.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일일이 문건을 뒤척이지 않더라도 귀신처럼 적발해 내어 이속들과 백성들이 그의 신명한 송사척결에 탄복하여 감히 속이려고 하는 자가 없었다.
이어 외직인 대구 부사가 되어서 백성들을 어질게 대하고 만물에게 혜택이 미치도록 하였으며, 청렴결백하고 선한 목민관의 소임을 다하였다. 그런데 대구 고을 관아에는 배설(裵泄)이란 이속이 교활하고 민첩하여 이 고을에 부임해 오는 고을원을 자기 수완대로 능멸하기 일쑤였지만, 그는 응계의 어진 행적에 감화를 받았다고 술회하였다.
이외에 응계가 17~18세 무렵에 대구부에 응거하였을 때, 사인(舍人)이 초라한 그의 행색을 보고 능멸하였는데, 후일 그가 대구부사로 부임하자 몇 년 동안 겁을 먹고 피해 다니다가 급기야 죄를 청하자, 응계는 순순히 용서하는 미덕을 보여 주위 사람들을 감복시켰다고 한다.
또, 한번은 이웃집 아낙이 자기 남정네가 죽었다고 곡하는 소리를 듣고는 곡하는 소리에 슬픔이 담겨 있지 않다는 점에 유의하여 그녀가 사통하던 간부와 짜고 남편을 죽인 범인임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응계의 짐 보따리는 책 상자뿐이었으며, 어떤 자가 응계 부인에게 삼베 한 상자를 보냈더니 부인마저 그것을 받지 않고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청렴결백한 목민관의 자세는 대구 고을의 백성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이후로 응계는 입조하여 여러 차례 언관(言官)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 및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응계는 55세(1436년)의 짧은 일기로 생을 마감하여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하였다. 당시, 세종은 신료들에게 청백리를 천거하라고 하교하였는데, 신료들은 응계를 천거했다고 한다. 뒤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응계에 관한 자료는 실기가 유일하다. 「행장」에 의하면, 애당초 『행적(行蹟)』 1권과 『응계집(凝溪集)』 2권이 있었는데, 전란통에 유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일부 남은 저작인 「선악상반지도(善惡相反之圖)」 및 「음양변역성괘지도(陰陽變易成卦之圖)」 등과 후인들의 기록 등을 중심으로 실기를 작성한 것이다.
성명
:
김계행(金係行) , 1431년 ~ 1521년
본관
:
안동(安東)
자
:
취사(取斯)
호
:
보백당(寶白堂)
시호
:
정헌(定獻)
출생지
:
안동(安東) 불정촌(佛頂村)
출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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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安東)
분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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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醴泉) 직곡(稷谷)
입사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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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7년(세종 29) 생원시(生員試) 합격, 1480년(성종 11) 식년시(式年試) 병과 급제
내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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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외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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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현감(高靈縣監), 성주교수(星州敎授), 충주교수(忠州敎授)
증직및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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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판서(吏曹判書)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다
5세 되던 해 글공부를 시작했다. 부친이 말로 글자를 가르쳤는데, 배우면 금방 이해하고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이에 부친이 기대하면서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울 재목이니, 학문은 염려할 바가 아니다.”고 했다고 전한다.
묵계에 별도의 생활 근거를 마련하다
30세 되던 해 안동부의 길안(吉安) 묵계(?溪)에 별도의 생활 근거를 마련하였다. 터를 잡은 곳은 산림이 울창하고 경관이 뛰어나 일찍부터 왕래하면서 동경해 오던 장소인데, 이 해에 농막을 짓고 만년의 휴식처로 삼고자 했다.
조카인 학조 스님의 무례를 꾸짖다
32세 되던 해 성주향교의 교수(敎授)로 부임하였는데, 학조(學祖) 스님이 무슨 일로 성주에 들렀다가 향교로 직접 가서 숙부를 만나 뵈려고 하였다. 학조는 세조 때 왕의 두터운 신임으로 국사(國師) 대우를 받던 스님으로서, 김계행의 장조카이다.
학조의 뜻을 접한 목사가 스님의 신분을 고려하여 이를 말리며 “국사께서는 수고롭게 거동하시 않으셔도 됩니다. 교관은 제가 청해서 오라고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사람을 향교로 보냈다.
그러나 김계행이 병을 핑계대고 오지 않자. 학조가 부득이 가서 뵐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김계행은 “너는 왕의 총애만 믿고 교만해져 숙부를 찾아와 뵙지 않고 이 숙부보고 너를 찾아오라고 하느냐.”며 매로 꾸짖었는데, 피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 뒤 학조가 잘못을 사죄하고 김계행의 벼슬길에 자신이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뜻을 조심스럽게 내비쳤으나 명분이 없는 일이라 하여 일언지하에 거절함으로써 다시는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하였다.
김종직과 평생을 교유하다
사림파의 영수인 김종직과 평생에 걸쳐 교유하였다. 이 인연으로 무오사화 때 어세겸(魚世謙), 성희증(成希曾) 등 10명과 함께 금부(禁府)에 갇혔다가 장형(杖刑)을 치르고 풀려났다.
이 일은 뒤에도 수시로 그를 괴롭히는 빌미가 되었는데, 심지어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금부에 끌려가 형벌을 치르는 곤혹을 겪기도 하였다.
고령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다
49세 되던 가을 식년 동당시에 합격하였는데, 연만한 나이가 고려되어 바로 육품직에 올랐다가 이어 사헌부 감찰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강직한 성격이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52세 되던 해 고령현감으로 나아갔다.
현감으로 있으면서 정사를 돌볼 때는 엄숙히 하고 백성을 돌볼 때는 자애로왔다. 항상 청렴과 근신하는 태도를 지키며 매사에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해 나갔는데, 그 결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교화가 이루어지고 기강이 바로 서 관과 민 모두가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하였다.
강직한 성품으로 여러 벼슬을 두루 섭렵하다
벼슬길에 있으면서 조정이나 왕실의 병폐에 대해서는 직간을 서슴지 않았고, 또 그 일로 여러 차례 사직과 복직을 반복하였다.
김계행의 이런 강직함은 그가 지낸 관직만 일별하더라도 금방 드러나는데, 홍문관의 경우 부수찬(副修撰), 부교리(副校理), 교리, 응교(應敎), 전한(典翰) 그리고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사간원에서는 정언(正言), 헌납(獻納), 사간(司諫), 대사간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사헌부 장령(掌令)과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및 도승지(都承旨), 그리고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 등 요직을 두로 섭렵하였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과의 교유가 빌미가 되어 모함을 받아 어세겸(魚世謙), 성희증(成希曾), 조호문(趙好問) 등 10여 명과 함께 투옥되어 태형을 받고 풀려났다. 이 일로 그 뒤에도 두 번 더 옥고를 치렀다.
연산군의 폐위 소식을 듣고 복잡한 감회를 토로하다
76세 되던 해(1506) 고향에서 자신이 섬겼던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종묘사직의 대계(大計)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임을 잘 알지만 그래도 10여 년을 섬겨온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며 인간적인 고뇌를 토로하였다.
보백당과 만휴정을 짓다
연산군 초기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 잡을 것을 몇 번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여 있다가 68세 되던 해(1498)에 풍산 사제(?提)에 있는 집 곁에 서재를 짓고 ‘보백당(寶白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보백당이라는 이름은 “우리 집에는 아무런 보배가 없으니, 오직 청백의 마음가짐만이 보배일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라고 한 자신의 시구에서 따왔다.
김계행은 또 30대 젊은 시절부터 길안(吉安)의 묵계촌(?溪村)의 풍광에 심취하여 별장을 지었는데, 특히 71세 되던 해 송암(松巖)의 폭포 위에 지은 만휴정(晩休亭)은 “만년에 휴식을 취하다.”는 이름 그대로,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난 후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삼던 장소였다.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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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金革)
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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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근(金三近)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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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김씨(永嘉金氏) 김전(金乷)의 딸
첫째 부인 서씨와 사별하고, 둘째 부인 남씨와 재혼하다
17세 되던 해 동복현감을 지낸 이천서씨(利川徐氏) 이운(李運)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23세 때 사별하였고, 이듬해 지평(持平)을 지낸 의령남씨(宜寧南氏) 남상치(南尙致)의 딸과 재혼하였다.
첫째 부인이 죽었을 때 김계행은 한양에 있었는데, 부인의 부고를 접하고 급히 돌아와 손수 예천의 용궁(龍宮)에 장사를 지냈다.
첫째 부인 서씨와의 인연
첫째 부인 서씨의 부친은 동복(同福) 현감인 서운이다. 서씨가 처녀로 있을 때 처음 배필로 혼담이 오고간 것은 황희(黃喜) 정승의 아들이었다.
혼담이 성사되자 황희는 혼인을 위해 아들을 데리고 문경현(聞慶縣)에 와서 유숙을 하였다. 그러다가 혼인 날 아침이 밝자 길을 재촉하였는데, 서운과 이웃해 살고 있는 사람 하나가 길에서 뵙기를 청하였다. 그는 서운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 혼인을 방해할 속셈이었는데, 황희가 서씨의 됨됨이에 대해 묻자 다른 것은 잘 모르겠으나 소경이라는 말은 들은 듯하다고 거짓 모함을 하였다. 그러자 황희는 펄쩍 뛰며 바로 사람을 보내 혼인 약속을 파하였다. 이에 서운도 크게 노하였다.
이 때 마침 김계행의 부친이 비안현감으로 있을 때이고, 김계행은 처음 진사가 되어 한양서 비안으로 친영하러 와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서운이 사람을 보내 혼담을 건네 옴으로써 혼인이 이루어졌다.
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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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서원(?溪書院)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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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학파
교유인물
김종직(金宗直), 성희안(成希顔), 성희증(成希曾)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질을 보이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재질을 보였다. 10세에 정식으로 배움의 길에 들었는데, 글의 뜻에 통달하였고 누구의 독려를 기다리지 않고도 부지런히 송독하였다.
또 12세 무렵에는 독서를 즐겨 책이 손에서 떠날 날이 없었고, 입학한 지 3여 년 만에 문학과 예술 방면에 큰 성취가 있었다고 전한다. 14세 되던 해 부친이 비안(比安)현감으로 부임하자 함께 따라가 그곳 향교에서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15세에는 사부학당의 하나인 동학(東學)에 들어가 『중용』과 『대학』을 수강하였다.
김종직과 학문을 논하다
평생의 지기였던 김종직과는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는데, 또한 학문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충주향교의 교수에서 물러나 풍산 고향집에 돌아와 있던 때인 40대 중반 시절에는 당시 상주에 있던 김종직과 서로 왕래하면서 『주역』과 『근사록』을 직접 강론하기도 하였다.
성리설에 심취하다
굳고 명석한 자질에 힘입어 늙어서까지 경학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성리(性理)의 문제에 침잠하여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이치를 깊이 궁구하였다.
문집명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
문집인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는 김계행의 유문과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 모두 4권 2책으로 되어 있다. 초간은 1732년(영조 8)에 이루어졌으며, 1901년(광무 5)년에 중간되었다. 구성은 다음과 같다.
- 세계도(世系圖)
- 권1: 연보(年譜), 시(詩), 소(疏)
- 권2-4: 부록
유성룡이 지은 「서애선생영모록(西厓先生永慕錄)」을 비롯하여 이보(李?)가 쓴 유사(遺事)와 이재(李栽)가 쓴 「행장」이 실려 있고, 이광정(李光庭)이 쓴 묘갈명(墓碣銘)과 다른 사람들이 쓴 봉안문과 축문, 고유문, 교지(敎旨) 그리고 상량문, 기(記), 발(跋)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련인물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대수(待?), 호는 응계(凝溪)이다. 부친은 성균관 생원시 출신으로 진성감무(珍城監務)를 역임한 옥사미(玉斯美)이다. 보백당 김계행선생
가 족
학 문
저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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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산 원문보기 글쓴이: 군계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