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인 명계(明溪) 김계윤(金季潤) 선생의 철학과 사상>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명계(明溪) 김계윤(金季潤 1875∼1951) 선생은 일제강점기 처사(處士)로써, 자(字)는 사범(士範), 본관은 의성(義城), 호(號)는 명계(明溪) 또는 명동(溟東)인데 모두 그가 거주했던 명동(明洞) 마을에 연유하여 칭(稱)한 것이다. 본적은 거제시 연초면 명상리(明上里, 명동리) 4통9호(177번지)이다.
● 조선의 성리학은 18세기부터 국가의 지배 이념으로서의 권위를 점점 상실해 가고 있었다. 기존의 성리학적 사유체계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학문을 모색하고자 하는 시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사조(思潮)속에 거제도는 수많은 유배객들이 다녀간 곳으로, 17세기 말부터 우암 송시열, 죽천 김진규, 몽와 김창집이 귀양살이 한 이후, 노론 계열 우암학파의 학문이 거제반곡서원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런 와중에 18세기에는 퇴계학파의 학문이 유입되어 안동 도산서원을 참배하는 유학자가 생겨나기도 했다(도산서원 방명록 기록). 19세기 중반 영남에서는 퇴계학파를 계승한 이진상의 한주학파가 새로이 형성되었고 면우 곽종석이 한주학파의 문하에 들어가, 다시 자신만의 새로운 학풍을 만들어 갔다. 거제인 명계 김계윤 선생은 20세기 초, 면우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당시 거제도는 서양의 신학문은 물론 퇴계학파와 우암학파의 학풍이 병존하는, 학문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갖추게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일제 초기까지는 국내외적으로 혼란과 격변의 시기였다. 서양의 문화와 종교가 국내로 유입되어 지역에서 날로 확장되는 반면, 전통문화와 유교는 나날이 위축되어 갔고, 국권이 상실되어 일제의 지배를 받는 암울한 시기였다. 이어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적 근대성이 제고되는 흐름 속에서 전통지식의 한문이 단절과 소멸의 길로 접어드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종래의 정신적 지주였던 유교철학은 개화의 물결 앞에서 점차 무너져 갔고 이에 대하여 서양철학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를 지배하여 온 유교철학은 정치적·사회적인 개화기(開化期)를 맞아 그 활동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곧 주리파(主理派)와 주기파(主氣派)의 논쟁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던 유교철학은 개화의 노선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길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 주리파와 주기파를 하나로 묶어 보수주의(保守主義)의 세력을 만듦으로써 자신을 지켜내려고도 했다.
요컨대 당시에는 종래의 유교철학에서 자기의 보존과 개혁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붕괴되는 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러한 시기에, 한주 이진상, 면우 곽종석의 정통 유학(儒學)을 이어받은 명계 선생은, “일본이 망하기를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아는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한다.”며 제자를 가르치고 강학(講學)을 이어 갔다. 선생의 좌우명이 ‘관심을 갖고 베푸는 마음으로 감동을 주자(眷意爲感).‘였고 나를 완성하고 남의 성취를 돕자는 ’성기성물(成己成物)`이 평소의 주관이었다. 그래서인지 명상리 이장을 맡아 당시 세납을 전부 감면케 했고, 거제 향교의 일이나, 지역의 일에 앞장서서 해결했으며, 지역민의 관혼상제에 나아가 예법에 맞는 바를 알리고 손수 실천하였다. 그의 호(號) ’명계(明溪)‘는 선생께서 스스로 말했듯이, 밝은 시냇물(明溪)처럼 학문에도 명(明)을 드러내고, 명(明)으로써 문사(文士)의 붓끝, 무사(武士)의 칼끝, 변사(辯士)의 혀끝의 삼단(三端)을 취하여 쉼 없이 힘쓰고, 의(義)를 명백히 밝혀서 학문의 흐름에 쉬지 말고 정진하라는 뜻을 품고 있다며,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당시 거제도의 상량문(上樑文), 축문(祝文), 제문(祭文), 구묘문(丘墓文), 서문(序文)과 발문(跋文) 등은 모두 선생의 몫이었다.
성리학자가 성현(聖賢)의 책을 읽어 학문을 연마하고 자연을 관찰하여 천리(天理)를 체득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답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리학자는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본질을 윤리에서 찾아 모든 행동을 윤리규범에 맞도록 행동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명계 선생의 나이 50대 중반 이후로는 거제도 물가에서 조용히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면서 지역사회와 함께했다. 1940년대 선생은 유독 시국(時局)을 걱정하는 글들이 많았고 또한 ‘세상의 군자들이 명리(名利)의 실체에만 급급(汲汲)하고 혹은 부득이 그 이름에만 응한다’고 한탄하기도 했으며, 성현(聖賢)의 말을 인용해 ‘고니를 새기려다 실패해도 집오리와 비슷하게는 된다.’는 말은, ‘성현의 글을 배움에, 그것을 완전(完全)히 다 익히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最小限) 선인(善人)은 될 수 있다.’며, 학문에 정진하고 실천하라고 강설했다. 게다가 주자(周子)의 말을 인용해, ‘선비는 현인이 되기를, 현인은 성인이 되기를, 성인은 하늘이 되기를 바란다.’하였으며, “오직 공허한 말만 있고 실천이 없는 것을 학문이라 하겠는가?” 하시며 배움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아실현을 물론, 사회에 공헌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사람들의 ‘비방과 칭찬에 따른 어떠한 근심도 모두 나에게 있다(在我何愁得毁譽)’며 항상 스스로 자신을 돌아봐야한다면서, ‘마음은 돌처럼 단단하고 산처럼 무거워라(心堅如石重如山)’며 진중(鎭重)한 자세로 임하라고 당부했다. 또한 ‘고상한 봉황은 주림을 참을지언정 어찌 곡식을 쪼겠는가? 외로운 소나무는 차라리 꺾일지언정 서리를 걱정하진 않는다(高鳳雖飢焉啄粟 孤松寧折不憂霜)’며, 혼란한 시국과 무너지는 예의범절을 안타까워하며, ‘우국(憂國) 선비의 슬픈 노래 무디기만 하다’고 탄식했다.
명계 선생은 선고(先考)로부터 ‘효제충신 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을 유훈(遺訓)으로 받았는데, ‘착한 일을 많이 한 결과(結果)로서 좋은 일이 자손(子孫)에게까지 미치고, 악(惡)한 짓을 많이 하면 그 죄(罪) 때문에 재앙(災殃)이 자손(子孫)에게 미친다.’는 말씀을 교훈으로 삼았다. 이후 선생은 말년에 자식과 손자들에게 당부하기를, “삼강오륜(三綱五倫)를 실천하고 바른 길로 나아가라. 길이 아닌 곳은 가지마라. 사람의 도리를 다하라. 배우고 깨달았으면 반드시 실천하라.“고 유훈(遺訓)을 남겼다. 유교(儒敎)의 도덕사상에서 기본이 되는 3가지의 강령(綱領)과 5가지의 인륜(人倫)이 ‘삼강오륜’이다. 삼강(三綱)은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고, 오륜(五倫)은 《맹자(孟子)》에 나오는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이다.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과거 오랫동안 사회의 기본적 윤리로 존중되어 왔으며, 지금도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윤리 도덕이다. 선생은 삼강오륜만 지켜도 가정과 국가사회가 온전할 수 있을 거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주렴계(周濂溪)의 통서(通書)에, “성은 무위이고 기는 선악이 있다(誠無爲 幾善惡)”라 하였는데, 선생이 탐독한 근사록(近思錄) 도체류(道體類)편에도 똑 같은 말이 나온다. “진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움직임이 일어나는 찰라의 순간에 선과 악이 나누어진다.(誠無爲 幾善惡)”는 뜻을 음미하였고 움직임의 중요성을 담아, 선생은 사람들에게 행동에 신중할 것을 당부했던 것 같다. 의(義)를 표현함에 있어, 모든 일을 체험(體驗)할 때는 정성을 다해야한다. 다만 두려움에 바른 마음으로 판단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잠깐 동안의 느낌으로 선악을 구분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 주의 깊게 살펴 분별해서 사용해야하고 악의 기미를 억제해야한다. 그리고 선(善)의 기미를 확충하고 모두 다르게 용력(用力)을 다해야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선생이 면우 스승께 올린 글에서 말하길,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道理)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삼가고, 이하 욕망을 자제해 마음공부에 몰두하라. 그래서 삼가고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이하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곳이 공부이니 먼저 저지하라.” 그래야 이후에 살펴볼 수 있다. ‘신독(愼獨)이 곧 계구(戒懼)이며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라고 대학(大學)에서 말한 바를 음미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잡아 가지면 스스로 따라오니, 그 욕망을 자제하거나 천리를 보존하거나 둘을 마치 병행하듯 조심하겠다.”고 적고 있다. 이를 명계 선생이 평생 공부하면서 삼가 자신을 지킨 교훈으로 삼았고 스승과의 약속이 되었다.
명계 선생은 사자서(四子書)와 삼경(三經)으로부터 근사록(近思錄)과 주자서(朱子書)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효경(孝經)과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도 탐독했다고 적고 있다. 거기다가 그의 큰 스승이었던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의 리기심성론(理氣心性論)은 이진상의 심학(心學)을 계승해, 심즉리설(心卽理說)에 토대로 두고 전개되었다. 명계 선생 또한 임종 순간까지 면우 스승의 이론을 줄곧 계승하였고 이를 토대로 학문의 발전을 이어갔다. 면우(俛宇) 선생이 먼 변방 거제도에서 궁벽하게 살아가는 명계 선생에게 당부하길, “가난은 너의 검소함을 빛내고 청렴을 떨치라는 것이고, 병은 네가 건강관리를 잘해 생명을 잘 지키라는 것이다(貧欲汝之昭儉而振淸 病欲汝之攝生而養命)”라 말하며,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단련하라고 당부했다. 이에 명계 선생은 스승의 말씀을 새기며, 소멸되어 가는 유교철학을 끝까지 견지해 나갈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지역 사회에서 한 번도 자신을 내세운 적이 없었고 겸허(謙虛)하게 처신했다. 또한 선생은 말년에 이르러 스승의 도리(道理)로써 오로지 마음을 다해야 한다면서, “나쁜 풍습은 영구히 개혁해야 하지만, 제사를 올리매 조상의 덕을 추모하고 그 근본을 잊지 않도록 예(禮)에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자손이 정성이 있으면 조상의 신령이 있는 것이고, 자손의 정성이 없으면 조상의 신령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조상의 신령을 마땅히 자손이 거주하고 있는 곳에서 구해야 할 것이고, 아마도 구태여 다른 곳에서 구할 것은 없다.” 했다.
도학(道學)은 유교 철학을 일컫는 말인데, 격치성정(格致誠正)을 그 바탕에 두었다. 격치(格致)는 즉,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어 지식을 얻어 선(善)을 밝히고, 성정(誠正)은 즉, 학문을 대하는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몸을 닦아 몸에 쌓이면 덕(德)이 되고 그것을 정사에 베풀면 왕도(王道)가 되는 학문이다. 명계 선생이 이처럼 격치성정(格致誠正)을 강조한 이유는, 이로써 개인의 윤리도덕이나 가치규범이 그대로 확충되어 가정과 사회 국가의 통치규범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선생은 학문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항상 정신이 깨어있는 ‘경(敬)’과 홀로 있을 때라도 방만히 굴지 않는 ‘신독’(愼獨)이 공부의 관건이 된다고 했다. 그가 거주하던 명동리에 삼역재(三亦齋)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고 강학을 한 이유 또한, 성현의 가르침을 깨닫고 기쁘게 따라가 즐길 수 있는 군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그런고로 성현(聖賢)의 도(道)는 선비로써, 만세(萬世)에도 아무 폐단(弊端)이 없을 원기(元氣)라고 강조했다.
명계 선생은 경상도 여러 동문 유학자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일제에 맞서 저항을 해야 한다며, 이에 항쟁의 권유를 받곤 했다. 하지만 그는 다리가 붓는 병과 궁핍한 가족의 생계를 들먹이며 사양했다. 하지만 사실 명분이나 외양보다는 내수를 통한 자강에 비중을 두었고 외세에 물리력으로 대항할 경우 실익을 얻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는 자신의 성리학적 이해체계에 입각한 정합성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선생은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경(敬)과 예(禮), 의(義)에 바탕을 두고, 가문과 지역사회와의 소통성을 유지했다. 또한 신학문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시기에 거제향교에서 유학을 다시 진흥시키고자 10가지 의견을 내놓고, 시대에 맞는 개혁을 하고자 분투했으나 급변하는 시대상황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은 명계 선생의 자취가 희미해졌지만, 그는 우리 거제도의 실질적인 마지막 성리학자였다. 끝까지 도학(道學)의 정통을 지키면서 만년에 이르기까지 이를 성심껏 후인들에게 전수하는 데 힘썼고 마지막 유종(儒宗)의 구실을 했던 참된 유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