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천하영재 백년교육
元 俊 淵
일제 치하였던 1922년에 설립된 모교 공주고등학교가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탄생 백주년은 사람이나 학교나 똑같이 어려운 일이니, 경하하여 맞이할 일이다. 잠시 고교 시절을 더듬어 추억하고자 한다.
내가 입학한 해는 1972년이니 꼭 설립 50주년이 되던 때다. 어떤 기념식을 하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요즘의 학생들보다도 더 ‘대학입시’라는 중압감에 3년 내내 시달렸다는 기억뿐이다. 그런 중에도 이제까지 없었던 체육관 겸 강당이 1972년 11월에 준공된 것은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이듬해인 1973년 4월 9일은 우리나라에 ‘사라예보의 기적’이라는 쾌거가 있었다. 지금은 지도에서 사라진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부에서 우승한 것이다. 좀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중국의 아성을 넘어 세계 제패를 이룬 통쾌한 사건이다. 우승 기념으로 선수단은 도청소재지를 중심으로 순회 경기를 벌였다. 그런데 도청소재지가 아닌 소도시인 공주에도 선수단이 와서 경기를 벌였는데, 그 장소가 영광스럽게도 모교의 체육관이었다. 전무후무한 기쁜 일이다. 선수단의 김창제 감독이 선친의 제자였던 인연으로 특별히 공주도 순회 일정에 넣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강당에서 그런 대단한 경기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배려로 경기가 끝난 다음에 우승의 주역인 이에리사, 정현숙 선수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목례만 교환하였을 뿐 악수도 하지 못했다. 속으로야 악수를 나누고 싶었지만 먼저 손을 내밀 용기는 없었다. 혹시라도 응하지 않으면 무안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그런 생각이 앞섰던 것 같다. 아쉬웠지만 지근거리에서 인사만 나눈 것으로 만족을 해야 했다. 귀한(?) 손을 잡아 본 것 못지않게 가슴은 두근거렸고 기쁨이 충만하였다. 나도 운동을 좋아하다보니 탤런트나 가수를 만난 것보다도 더 황홀하였다고나 할까.
체육관 겸 강당은 우리의 체육시간에 주로 할애되었는데, 체력장을 대비하여 10m 왕복달리기나 윗몸 일으키기 그 외에 재미가 덜한 매트나 뜀틀 운동이 진행되었다. 우리가 원하는 구기 종목의 운동을 한 기억은 별로 없다. 정면의 무대 옆에는 큰 액자 두 개가 걸려있었는데, 하나는 득천하영재교육(得天下英才敎育)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었다. 사실 앞의 것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으나, 뒤에 것은 이 글을 쓰면서 그 내용을 새삼 알게 되었다.
100년의 역사를 지닌 학교다 보니, 걸출한 졸업생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중에 19회 졸업생인 운정(雲庭) 전 김종필 국무총리를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이 ‘비리법권천’ 글씨는 당시 국무총리를 하고 계셨던 운정의 친필이다. 평소 즐겨하시는 휘호를 후배들에게 기증한 것인데, 그 의미는 '비(非)는 이치를 이길 수 없고 이치는 법을 이길 수 없으며 법은 권력을 이길 수 없고 권력은 천(민심)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한비자의 엄한 가르침인데, 운정은 정치인으로서 민심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슴 깊이 간직하였던 것 같다. 정치인이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비자는 순자의 제자인데, 순자는 수즉재주 수즉복주(水則載舟 水則覆舟)라 하여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엎어 버리기도 한다고 하여 민심의 위력을 설파하였다. 청나라 말기 뱃멀미가 심했던 서태후가 만들었다는 돌로 만든 배 청연방(淸宴舫)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민심의 중요성을 굳은 신념으로 간직한 선배의 휘호가 고교생인 나에게는 어려웠던지 그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칭의 자리에 걸려 있는 ‘득천하영재교육’은 맹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 가운데 하나이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가르치는 것이 셋째 즐거움이다’라는 의미다. 수업 시간에 배웠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훌륭하고 어렵지 않아서 또렷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 은사님들은 그 휘필을 보면서 실제로 그렇게 느끼셨을까. 아니면 우리가 영재가 아니라서(?) 즐거움은커녕 힘만 드셨던 것일까. 대학에 40년 남짓 봉직한 나는 연구와 봉사 그리고 교재 연구에 쫒기다보니, 정년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그 깊은 의미를 조금 느껴보았다고나 할까. 강직한 힘이 느껴지는 독특한 글씨체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글씨는 한글 궁체를 웅혼한 기풍으로 개선·발전시킨 독특한 '원곡체'를 개발한 원곡 김기승(原谷 金基昇)님의 친필이란다. 지금도 그대로 걸려 있어서 배우는 학생이나 가르치는 선생님께 격려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두 휘호는 100주년 기념관으로 옮겨져 있었다.
체육관은 리모델링을 하면서 무대의 위치도 달라졌고, 시대에 걸맞게 휘호도 달라졌다. ‘백년의 초석위에 천년을 세우다’와 ‘역사에 빛나는 공주고여 영원하라’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기념식에 참석을 하면서 만감이 교차하였다. 핑퐁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고, 예전의 휘호가 보이는 듯도 하였다. 까까머리가 흰머리로 변한 세월만큼이나 모교의 모습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지금도 초롱초롱한 눈빛을 지닌 영재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꼭 모교가 아니더라도, 우리 지역 고교의 창립 100주년은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며 동시에 우리나라는 교육입국임을 잊지 말고 영원무궁토록 발전하기를 빌어본다.
(대전문학 97. 2022. 가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