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례 문화의 변화 양상
2)개항 및 일제강점기의 상장례 문화
개항을 통해 근대 서구문물을 수용하고 일제의 식민통치를 거치면서 조선이라는 유교적 전통사회의 기반이 무너졌고, 이에 따라 변화하기 시작한 전통적 인상장례는 해방 후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급격하게 변화하게 된다. 사회의 구조적 변화는 의례생활의 변화를 초래했다.
실제로 일반인들의 생활의례인 사례 중 관례는 단발령과 더불어 폐지되었고, 혼례도 상당히 변질되어 유교의례적 성격을 상실했으며, 상례는 심한 변형을 겪으면서도 유교적 성격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고, 제례는 기본적인 형식적 구조를 지키면서도 세부적인 부분에서 상당한 형식적 변화를 겪고 있다.
유교 교단조직인 성균관 향교에서 봄과 가을에 거행하는 석전제(釋奠祭)는 전통적 형식을 비교적 잘 지키고 있는 반면, 일반인들이 가정에서 실천하는 생활의례로서의 전통 상장례는 심하게 변형되거나 소멸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일반인들과 유리된 유림(儒林)들만의 의례인 석전제와는 달리, 전통적 실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일생의례로서의 상장례는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따라 현실적 변화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개항 이후 서구문물의 수입이 이루어지면서 전통적 의례생활에 가장 거시적인 영향을 가져온 요인은 한말 태양력의 본격적 도입에 따른 시간리듬의 변화와 근대화·산업화·도시화에 따른 유교적 전통사회의 구조적 기반 해체였다.
조선 시대까지 전통적 상장례는 모두 음력 달력에 근거하여 거행되었으나, 양력의 도입은 일상생활의 리듬을 재편했고 기독교의 영향에 의해 평일과 일요일의 구분이 이루어졌다. 음력에 따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전통적 제례는 양력에 따라 이루어지는 현대 생활의 리듬에 맞추어 양력 기준으로 제사를 봉행하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평일과 일요일의 구분은 현대적 노동주기로 정착하면서 제사공동체 구성원들의 편의를 위해 일요일에 제사 지내는 양태를 초래했다. 나아가 급격한 근대화·산업화·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대규모 인구이동이 발생했다. 그에 따라 집성촌을 기반으로 한 전통적 사회기반이 약화되고 해체되었는데,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사당과 무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전통 제례의 변형을 가져왔으며, 마을과 선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전통 상례는 이제 병원의 영안실/장례식장과 공동묘지/화장터를 중심으로 하는 현대적 상례로 변모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실마리는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1895년 단발령으로 인해 관례(冠禮)가 소멸하였고, 개항 이후 서구 근대문물의 수용으로 인해 도시를 중심으로 신식 혼례가 유행하면서 전통혼례는 구식 혼례로 격하되고 농촌으로 축소되었다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으며, 1910년 이후 본격화된 일제식민통치 이후에는 상장례에서도 인위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고려 말부터 시작되어 조선 시대에 본격화된 유교적 상장례의 정착은 주자성리학과 『주자가례』 를 이념적 근거와 의례적 기반으로 삼은 사대부들이 주도했다. 그들은 불교식 의례를 몰아내고 유교적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각종 예서(禮書)를 편찬하고 의례 변혁을 의식적으로 전개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 등의 예전(禮典)을 주도적으로 만들어갔다. 그러나 유교지식인들이 주도했던 조선 시대와는 달리, 일제강점기대에는 일제라는 국가권력이 법적 권위와 행정작용을 통해 의례형식의 변화를 강제적으로 유도하는 양상을 드러냈다.
제강점기 전통적 의례의 변화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양상은 서구 기독교식 의례의 도입과 확산과 더불어 가족과 촌락을 중심으로 거행되었던 전통적 상장례 외에 연합장(聯合葬)과 사회장(社會葬)의 출현이 이루어졌고, 조선총독부의 법령에 따라 공동묘지와 화장(火葬)의 확산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새롭게 등장한 연합장과 사회장의 경우에는 유교적 전통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서구 기독교적 방식을 다소 가미한 양태를 보인 반면, 1912년 6월 총독부령으로 공포된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취체규칙은 공동묘지와 화장장 문화를 확산시키는 시초가 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전통적 상장례의 변화를 가져온 획기적 계기는 1934년에 반포된 의례준칙(儀禮準則)이다. 1930년대 당시 세창서관(世昌書館)에서 발행한 『사례편람(四禮便覽)』 부록에 포함될 정도로 기독교적 상례는 사회 일각에서 유교적 상례를 대체하는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으며, 유교적 상장례는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본격적 변모를 시작하였다. 의례준칙은 상복의 간소화와 상장(喪章)의 착용, 장일(葬日)의 제한과 상기(喪期)의 단축, 신주(神主)에서 지방(紙榜) 혹은 사진으로의 변화 등 전통적인 유교적 상장례의 형식을 변화시키고 간소화하는 방향을 구체화했다. 특히 3년→14일, 1년→10일, 9월→ 7일, 7월→7일, 5월→5일, 3월→5일로 바꾼 상기의 단축은 주목할 만하다.
의례준칙이 제시한 변화의 방향은 해방 후 더욱 가속화된다.
<불교 죽음관과 상장례의 콘텐츠화 연구/ 한성열(탄탄) 원광대학교 대학원 한국문화학과 문학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