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여권
1) ㄱㄴㄷㄹㄹ 한글공부가 아니다. 일본 여행 중에 그렇게 긴 줄은 처음이었다. 콩팥에 지름이 십 센티미터 가량의 물주머니를 두개나 가진 나는 소변 참기가 쉽지 않은데 긴 줄은 설상가상이었다. 줄 안에 갇힌 처지라 화장실은 군데군데 보였으나 그림의 떡이었다. 세 번째 마지막 코스를 통과한 나는 급한 마음에 손에 들고 있던 여권을 아기 귀저기대에 놓고는 나올 때 손가방 두 개만 챙긴 것이다. 곧장 여권을 찾았더니 항공권도 덤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2) 깜빡해서 화장실에 두고 온 여권을 누군가 가지고 가버린 것이다. 당신이야 도움을 주려고 가져갔겠지만 여권을 잃어버리고 황망해할 주인공을 한번이라도 떠 올려 보았다면 남의 여권을 쉽게 가져가지는 못했을 거다. 일본은 모두의 안전을 위해 검역이 엄청 강화된 느낌이었다.
3) 여권을 놓아둔 자리가 눈에 선한데 가보고 또 가보아도 여권은 없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가방 속에 여권이 없는 줄 알면서도 가방을 뒤집어 탈탈 털어보았으나 잡동사니들이 내 마음을 더 어지럽게 했다.
오래 전에 들은 얘기로는 일본의 버스 정류장에 두고 온 가방을 3일 뒤에 가서 찾아왔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데 아마도 우리나라의 오지랖 넓은 사람이 좋은 일 한다고 화장실에 있는 여권을 가져간 것이리라.
4) 가이드를 만나 전후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가이드는 뜻밖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일본에서는 아무도 남의 여권을 가져가지 않으니 다시 찾아보라”고 일러주고는 바람같이 휙-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어려울 때는 누군가 옆자리에 있어준다면 조금은 위안이 될 터인데 가이드가 얄밉게 느껴졌다. 단체 팀에 가보려니 여러 사람을 걱정시킬 것 같고, 혼자 있자니 귀 너머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소통이 되지 않아 그야말로 냉가슴벙어리 신세였다. 일단 와이파이가 열려야 지인들에게 내 상황을 알릴 수 있을 터인데 언어 소통이 되지 않으니 방법이 없었다. 면세점의 불빛은 저희들끼리 어울려 맴을 돌고 내 마음도 덩달아 빙글빙글 어지러움만 더했다.
5) 다시 지나가는 가이드를 큰 소리로 불렀다. 여권이 분실물 보관소에 있을지 모르니 찾아가 보던지 구내방송을 하는 곳을 찾아가보자고 제안 했으나 허사였다. 생존 일본어 외에는 통역이 불가능한 사람이란 걸 알고 나니 더 불안해졌다. 일본에서 일문학을 전공했다는 말은 뻥인 것 같았다. 그때부터는 믿는 구석이 없어진 것 같아 계속 한국의 지인들과 문답을 했다. 가이드와 소통이 되지 않으면 함께 간 여행사 사장을 찾아보라는 조언을 따랐다. 반갑게 만난 여행사 사장은 날더러 우왕좌왕 하지 말고 한자리에 머물라하고는 동분서주했다. 행여나 내 이름이 방송에 불리지 않을까 노심초사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다.
6) 작은 구멍이 큰 둑을 무너뜨린다더니 순간의 방심이 내 마음을 감옥에 가두었다. 살면서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는데도 근래에 부쩍 기억력이 떨어진 것 같다. 냉장고에 보관해 둔 식품도 이름표를 붙여 놓아야하고, 그날 그날의 시간별 일정도 휴대폰에 일일이 메모해 두지 않으면 잊는 것이 부지기수다. 오래전의 기억이나 과거 시어머님께 억울하게 당했던 나쁜 기억은 토씨하나까지 생생한데 자꾸만 깜박하는 건망증으로 '최근' 일이 기억나지 않은 걸 보면 알츠하이머병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7) 6·25때, 서울 역에서 가족을 잃은 4학년 어린이가 헤어진 자리에 그대로 기다려야겠다는 마음에 이틀을 지나니 부모가 다시 찾아와서 이별을 면했다는 이야기 등. 기다리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났다. 탑승 시간이 가까워 오니 불안의 강도는 세지고, 일본의 아름다웠던 4대 정원과 염전탐방, 세계적인 미술관 관람 등 소중한 여행 기억은 점점 줄어들어 미지의 시간들이 어둠의 모습으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여권 재발급을 받으려면 주말이 지나야 한다. 일본에서 몇 박을 더해야할 처지라면 비용을 지불하면 되겠지만 단체 여행이어서 일행들이 행여나 나 때문에 비행기를 못 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생각의 끝에는 죄송한 마음이 자꾸만 크게 자라고 있었다.
8) 드디어 여행사 사장이 환한 미소로 다가왔다. 여권과 탑승권을 세관직원이 가져와. 본인에게 직접 전해 주겠다며 기다린다고 했다. 시간이 되면 해결될 것을 국제 미아가 되어 등줄기에 땀이 나도록 마음 졸인 걸 생각하면 바보가 따로 없었다. 잃어버린 여권이 일깨워준 소중한 건강정보는 퇴행성 뇌 질환에 관심 가지기이다. 고혈압 고지혈증 등의 중요한 위험인자를 가지고 있는 내가 치매로 가는 초기는 아닌지 걱정하는 마음으로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첫댓글 제목을 <잃어버린 여권>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은 맞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여권 관리의 소중함을 깨닫는 쪽으로 가면 안 되고요. 자꾸만 깜빡거리는 건망증으로 전체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6번 단락과 연결이 됩니다. 깜빡해서 여권을 들고나오지 못했으니까요. 다시 한번 수정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