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자들 중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대해 "허락한다." "안 된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로 응답하신다고 말합니다. 칼빈도 그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칼빈은 "안 된다." 혹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는 응답조차 우리를 실족시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지극히 선하심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분선 아래에서 칼빈과 함께하는 매일 기도를 읽으며 우리의 기도생활에 잘 적용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가장 좋은 답을 주신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 그들이 내 생명을 엿보았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발자취를 지켜보나이다 그들이 악을 행하고야 안전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시편56편) |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은 신자에게 매우 익숙한 경험이다.
우리는 기도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기다림이 반복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기다린다.
시편 기자는 자신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물러가기를 기도할 때 그러한 확신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시 56:9).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알기에 그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칼빈은 시편 기자에게는 “원수들의 파멸이 가까웠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가시적인 증거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약속의 말씀을 굳게 의지함으로 다가올 시기를 기대할 수 있었고, 인내함으로 그때를 기다리겠노라 결단한다."고 설명한다. 그가 인내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겠노라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의 원수들을 즉각적으로 물러나게 하시지 않을지라도, 그는 자신의 기도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을 확신했다. “그가 믿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기도를 결코 실족시키지 않으신다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다.
이 진리의 말씀은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기도를 실족시키지 않으신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대해 "허락한다." "안 된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로 응답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긍정적인 답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안 된다." 혹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는 응답조차 우리를 실족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염려를 잠재우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응답을 잠잠히 기다리게 한다. 즉 하나님께서 “안 된다"고 응답하실 때조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을 수 있다.
당신의 기도 생활 중에서 하나님께서 즉시 허락하셨던 기도 제목과 “안 된다”고 하셨던 기도제목 그리고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응답하셨던 기도제목을 기억하고 돌아보라. |
도널드 K. 매킴 등, 『칼빈과 함께하는 매일 기도』, p.33.
첫댓글 “안 된다”고 하셨던 기도제목 그리고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응답하셨던 기도제목을 기억하면... 어거지로 내 생각대로 성급하게 움직여서 좋은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는 기도가 나 또는 우리에게 필요함을 느낍니다.
아멘!
아멘22
시편 찬송은
처음부터 개혁파 예배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칼빈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시편찬송과 관련하여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마틴 부서(Martin Bucer)이다. 그는 1523년 로마교에 의해 파문당한 뒤 5월에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이주하였다. 그는 거기서 목회를 하면서 독일어예배를 도입하고 1525년에 만들어진 ‘스트라스부르 독일어 예식서’에서 운율을 가진 시편을 포함하였으며, 1537년과 1539년에는 지속적으로 시편찬송이 편찬되었다.
칼빈은 이미 1537년 1월에 제네바 시의회에 제출한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를 위한 조항’(Articles concernant l’organisation de l’église et de culte à Genève)에서 시편찬송을 언급하였다.
“다른 한편 우리는 교회에서 시편을 찬송하기를 원합니다....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자극할 수 있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이름의 영광을 칭송하게 하는 열심을 가지게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우리의 유익과 위로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인데도 교황과 그에게 속한 자들이 교회에서 빼앗아 간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황은 참으로 신령한 성가이어야 할 시편 찬송가를 그들만의 뜻 없는 중얼거림으로 왜곡시켰기 때문입니다.”
(1) John Calvin, Ioannis Calvini Opera Selecta I, eds. Peter Barth and Wilhelm Niesel, and Dora Scheuner, 5 vols. (Munich: Chr. Kaiser, 1926-1952). 376. (이하 OS로 표기)
[출처] 강용원 교수, 칼빈과 시편찬송
칼빈도 시편 찬송에 있어서는 마틴 부처를 따랐던(?) 것으로 볼 수 있겠네요.
@노베 칼빈의 성과와 업적은 칼빈 혼자만의 것이 아니고 신앙과 신학의 선배, 후배들의 공로도 큽니다.
부써는 부처로 한글 표기하는 것이 옳습니다: 독일어&독일인 Bucer.
부처에 대해서는 아래 위키백과에 잘 나오는 편입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A5%B4%ED%8B%B4_%EB%B6%80%EC%B2%98
<IVP 성경주석: 시편>
56편 두려움과 신앙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3절)···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4절). 이 역설은 이 시의 핵심을 표현한다. 이 상황은 사무엘상 21:10-15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 시에서뿐 아니라 시편 34편(그 뒤에 있었던 묵상으로서, 도망을 하게 했던 것은 삼상 21:12, 13의 명민함이 아니라 기도였음)에서도 논평된다. 이 시편에서는, 다윗이 매우 중요한 인물로 가드에서 볼모로 잡혀서 가택 연금을 당하고 있는 동안의 묵상을 말한다. 이 시는 균형 잡힌 여섯 단락으로 구성된다. 즉, 인간의 적대감의 대상인(1, 2절) 다윗은 하나님의 보살핌의 대상이며(9~11절), 두려움에도 직면하는 신뢰(3, 4절)는 기도 속에서 나오는 신뢰이고(7~8절), 인간에게 압제를 당하는 다윗(5, 6절)은 하나님께 맹세를 하는 다윗이 된다(12, 13절).
두려울 때 어려울 때 힘들 때, 진정한 신앙은 버텨내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베 아멘!
시 56:9에 대한 <칼빈 주석>을 살펴 봅니다(영어본을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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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내가 부르짖으면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라." 여기서 그는 예전보다 훨씬 더 자신감을 갖고 승리를 자랑하며 적들이 물러날 바로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설명했습니다. 그들이 곧 멸망할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약속을 실천한 굳은 의지에서 그는 다가올 시기를 예상할 수 있었고, 인내심을 갖고 이를 기다리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할 때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의 적들을 흩뜨리지도 않고, 자신의 기도가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에 대한 확신일 뿐이라고 믿는 근거는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의 기도를 결코 좌절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확신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면, 그는 불안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사태를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요구를 얻어낼 때 주저하거나 불확실한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들린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교훈적입니다. 일단 이 믿음에 도달한 그는 악마와 모든 불경건한 자들의 군대에게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아멘! 온전한 믿음은 불안을 가라앉히고 사태를 침착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칼빈이 쓰거나 칼빈에 대한 글을 보면, 칼빈 반대자들(이단, 신비주의자, 알미니안 등)이 주입하려는 편견과 달리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내용이 많은 것을 새삼 실감합니다.
네, 저도 그래서 칼빈의 글들을 좋아합니다. 책 속 목사님이자 산생님이시죠^^
기도의 응답이 요원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의 시편이 잔잔한 여운을 남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흘리는 고난의 눈물을 눈물병에 담아놓으시고 마침내 원수를 갚아주시며 신원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아멘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