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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인식에 대한 온정
-나종영 시집 《물염勿染의 노래》 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사람들은 한 시대를 살아가며 이익을 좇는 행동을 최선의 삶인 양 생각한다. 그와 달리 긴 세월을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한결같이 자신을 위한 문학을 하지 않았던 나종영 시인이다. 그 말은 시를 열심히 쓰되 그것으로 인해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두 번째 시집이 출간된 이후 많은 권유와 유혹에도 꿋꿋이 부동하며 이십여 년이 지난 작금에야 세 번째 시집이 나온 것도 그런 맥락과 상통한다. 나종영 시인은 지역 문학뿐만 아니라 ‘광주, 전남’을 넘어 한국 문학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불문하고 어디든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또한 선, 후배를 가리지 않고 다가가는 온정은 많은 문학인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임을 밝힌다. 하여 돌이켜보건대 문학의 올바른 지향은 사람 중심이란 것을 온몸으로 실천해 온 나종영 시인은 시인이기에 앞서 이 시대의 보기 드문 진정한 휴머니스트이다. 또한 우리 사회의 불편과 부당함에 울분을 토로하고 아파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가슴은 여전히 문청 시절처럼 뜨겁다. 그런 일관된 면모를 통해 문학으로 이루려 한 것은 다른 것에 있지 않다. 현재를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고통스럽다 해도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라고 시로써 말해준다. 최근 발간된 《물염勿染의 노래》는 나종영 문학에 내재된 충분성을 말해주는 결과물이다. 특히 광주 담양 권역에 산재해 있는 조선조 호남 사림학문의 근간이 된 누정樓亭 문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역사적인 사실에 천착하여 현재를 살피려 했다는 것도 크나큰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쌓아 둔 많은 시편 중에서 일부지만,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다행인 것이다. 한 권의 시집 속 시편을 넘겨주고는 홀연히 백두산행을 결행한 소회도 특별했음을 밝히는 <시인의 말> “그동안 나는 그냥 시를 쓰는 사람보다도 한 사람 ‘시인’으로서 시대를 살아오기를 염원해 왔다. 사물과 사람에 대한 사람과, 겸손, 겸애와 더불어 이 훼절의 시절에 세속에 물들지 않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내 글이 시대와 세상 앞에 ‘물염勿染의 詩’이기를 갈구해 왔던 것 같다.” 는 말의 진정함마저 겸허란 것을 알 수 있다. 매사에 사물을 대하는 심연이 고스란히 담긴 시를 살펴보자.
이것이 사랑이라면
가만히 무릎을 꺾고 그대 앞에
눈물을 훔치리
이것이 그리움이라면
그대 눈빛 속에
남아 있는 저녁 물빛으로
마른 가슴을 적시리
사랑은 그것이 사랑이고자 할 때
홀연 식어서 가을 잠자리처럼 떠나가므로
나는 깊은 새벽 산기슭에
한 잎 붉은 얼레지로 피어나겠네
이것이 사랑이라면
그대 앞에 꽃잎의 그늘을 어루만지는
시린 물방울,
그것의 침묵이 되겠네.
-<엘레지> 전문
만약에 저 무연하게 다가온 표상이 이미지로 현상되어 서로를 바라본다면 사물성은 직관에 따라 사유하는 반경 안에서 대상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 존재 앞에서는 인간이나 식물성을 가진 엘레지나 동일한 생명성으로 충만한 존재가 된다. 그런 순간 겸허한 마음으로 치환된 사물성은 인간의 마음으로 환기될 수밖에 없다. 가파른 산 능선을 터전 삼아 핀 엘레지는 산만한 군집성을 보여준다. 한 개의 개체로 핀 듯 하지만, 근처를 살피면 많은 개체들이 포착된다. 그 출현은 문득 잊어버린 기억을 되살려 준다. 그런 일들이 간혹 있어 왔다. 산 능선을 타고 오르다 지쳐 여기저기 나뭇잎을 머리에 둘러쓰고 죽은 듯 위장하여 목숨을 부지했던 일마저도 이 땅을 사랑한 것이었음을 “이것이 사랑이라면/ 가만히 무릎을 꺾고 그대 앞에/ 눈물을 훔치리/ 이것이 그리움이라면/ 그대 눈빛 속에/ 남아 있는 저녁 물빛으로/ 마른 가슴을 적시리”라는 그 말만큼 절실한 진실은 없다. 생명성으로 다가온 엘레지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먼 광년을 헤매다 낙하한 운석의 시간처럼 불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는 깊은 새벽 산기슭에/ 한 잎 붉은 얼레지로 피어나야겠네”라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 세상이 혹독한 변절을 강요해도 본성 속에 존재한 근원적인 생명성을 훼절하지 않겠다는 단언은 시간을 초월할 수밖에 없다.
그대는 바람 소리를 놓아두고 떠났다
하얀 눈길 위로 발자국 하나 없어도
그대 가는 길이 훤히 보여 눈이 아프고 시리다
물염정 적벽 소나무에 눈꽃이 일고
강물이 멈춘 어두운 시간에
그대는 홀로 어디쯤 닿아 있는가?
훨훨 버리고 떠난 그대가 남겨둔 솔바람 소리
저 단애를 비껴간 세월은 아직 눈썹달마냥 남아 있는데
흩어지는 눈발을 뒤로 하고
그대는 오늘도 어느 길 위에서 뒤척이는지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는 물염적벽에
그대는 칼끝을 세워 청풍 바람 소리를 새기고
쇠기러기 떼 지어가는 새벽하늘
강물은 굽이굽이 떠나간 그대 흰 옷자락을
혼신의 힘으로 붙들고
멀리 하나둘 등불 켜진 마을
언 강둑 위로 맨발을 끌고 가는
그대의 마지막 잔기침 소리가 들린다.
*물염정(勿染亭) : 화순 이서 물염적벽에 있는 정자
-<물염정*에 가서> 전문
이 시는 화순 이서면에 있는 물염정(勿染亭)을 찾아가 사색에 잠기면서 유혼처럼 남아 있는 시간으로 빠져들어간다. 절정에 다다른 풍경에서 화자의 감각적 사유가 상상력과 더불어 세계의 충동으로 환기한 것이다. 조선조 중종 때 조광조의 결기 푸른 혁명적인 개혁이 남곤 일파로 인해 좌절되면서 기묘사화로 능주에 유배된다. 조광조는 유배당한 20여 일 물염정을 찾아와 마음을 다스리며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는 왕도의 치세와 안민에 대한 고뇌의 시간을 보낸다. 성리학의 대학자인 조광조를 만나기 위해 인근에서 몰려든 사람들에 불안을 느낀 중종은 사약을 내렸고 37세의 나이에 절명하고 만다. 또한 이곳을 찾아온 방랑시인 김병연도 물염정을 찾아와 세월의 무상함을 탄식했을 것이다. 그런 역사의 시간을 잘 알고 있는 화자는 “하얀 눈길 위로 발자국 하나 없어도/ 그대 가는 길이 훤히 보여 눈이 아프고 시리다/ 물염정 적벽 소나무에 눈꽃이 일고/ 강물이 멈춘 어두운 시간에/ 그대는 홀로 어디쯤 닿아 있는가?”라며 묻지만 지난 세월을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껏 많은 사람이 세상의 고통을 생각하며 물염정에서 마음을 다독이며 자신을 돌아봤을 것이다. 화자도 그곳에서 “혼신의 힘으로 붙들고/ 멀리 하나둘 등불 켜진 마을/ 언 강둑 위로 맨발을 끌고 가는/ 그대의 마지막 잔기침 소리가 들린다.”며 몸속 혼탁을 털어내며 진정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더욱 명징해졌다.
비 오고 안개 자욱한 날
세량지 산길에 산벚꽃 피고
물가에 산벚꽃 진다
꽃들은 사람의 눈 밖에서 피고
사람의 마음에서 진다
보라색 손톱만 한 으름꽃이
물안개를 흠뻑 머금었다
이 비 그치면 으름꽃 벙긋 터지겠다
연두가 붉은 꽃들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신생의 봄날
물오른 오리나무
물속에 물구나무 서 있다
연인아, 너 오지 않는 동안에
세량지 물가에 수수꽃다리 피고
수수꽃다리 진다.
*세량지 : 전남 화순에 있는 작은 호수
-<세량지> 전문
꽃이나 사람이나 생명으로 살아 있는 기간은 한정되어 무한하지 않다. 그렇기에 슬픔 같은 안타까움이 순간 일었다가도 무시로 번져오는 생의 위태 앞에서 탐욕도 유한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화자가 시선으로 멈춘 곳은 방죽 안의 잔잔한 수면이었을 것이다. 그곳도 물이 방방하게 차올랐다가 어느 순간 바닥을 드러내곤 했다. 그 불안을 극복한 ‘세량지’의 풍경에서 신생의 시간으로 다가간 것의 이유가 궁금했는지 모른다. 변화는 동일한 조건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불변할 것 같은 ‘세량지’ 주변이 봄기운에 화사해졌고, 빌미는 언제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산벚꽃’에서였다. 꽃이 피었다 지는 변화에도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는지 모른다. “꽃들은 사람의 눈 밖에서 피고/ 사람의 마음에서 진다”는 것을 세상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연은 만물의 소생과 소멸을 한꺼번에 끝내지 않는다. 그 틈에도 부단하게 으름꽃을 피웠다 떨구었고, 자연이 허락한 만큼만 땅속 깊은 곳의 뿌리를 흔들어 오리나무의 키를 키워 그림자만 살며시 세량지 안에 뉘었다. 저토록 작은 호수 안팎에서 자연은 부단하게 변화하게 ‘수수꽃다리’ 꽃이 피고 진다.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한 화자의 봄이라는 시간은 무릇 자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만물 속에 귀속된 인간의 삶도 저와 다르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꽃이 진다 시인아>에서 보여주는 시의성은 세월을 떠안고 살아봐야만 깨달을 수 있는 연륜이 필요하다. 그만큼 피해 갈 수 없는 세상살이를 경험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대에 맞서겠다는 뜨거운 가슴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꽃이 진다/ 시인아” 이 말속에 담긴 의미는 상실감에 대한 안타까움일 것이다. 요즘 들어 더 민감해진 일교차도 연륜에서 터득한 것이었고 봄꽃 피고 지는 것마저도 그냥저냥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엄중한 우주 질서의 결행이란 것을 터득한 것이다.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세상이 가끔은 두려워졌고 언젠가 가파른 난간에서 아찔한 저 아래를 굽어볼 것 같은 변화에도 지나칠 수 없이 민감해진 것이다. 그 세월이란 것도 당연하게 찾아든 새날처럼 그런 날만은 아닐 것이라는 “아침에 물안개 살구꽃 지더니/ 저녁엔 낯익은 먼 발자국 소리,”, “꽃이 진다 붉은 산 물들었던/ 진달래 진다/ 한 잎 두 잎 꽃잎 저무는 날이면/ 시인이 아니어도/ 한없이 울고 싶은/ 사랑아,”를 부르짖는 화자의 속내는 흘러가는 세월의 무망함을 알아챈 것이다. 자연이나 사람이나 무위라는 자연에서 크게 벗어나선 안된다는 신명神命이 귀에 든 것이다.
다시는 여기 편안한 반석에 앉아
입산한 사람들의 혼백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수백 년 아름드리 푸조나무는 말한다
고작 나이테를 세어 역사의 순환을 노래하지 말라고
지리산 범왕리 빗점골 가는 길에
세월을 이기며 버티고 서 있는 푸조나무는
허연 몰골을 한 지천명의 나에게 묻는다
-<푸조나무가 나에게> 부분
지리산은 도시를 빠져나와야 만날 수 있다. 그곳에 당도해서야 최치원 선생이 속세의 잡사를 씻어냈다는 ‘세이암’에 이를 수 있다.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맨 이유가 무엇인가를 깨달아 갈 때쯤 범왕리 오백 년 묵은 푸조나무를 만나게 된다. 누구나 말로만 전해 들어 사람마다 제각각인 현실과는 항상 먼 것이 세상사에 얽힌 일들이다. 이해로 납득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기에 오랫동안 껴안고 침묵해야만 겨우 들을 수 있는 푸조나무의 말, “다시는 여기 편안한 반석에 앉아/ 입산한 사람들의 혼백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는 전언마저 무겁다. 수백 년 지리산을 굽어보며 터득한 생명성이란 오직 한가지 뿐 세월을 거스르지 않듯 진실을 거스르지 말라는 신목이 들려주는 신탁이다. 나이테로만 기억되는 세월에는 그 어디에도 모호한 관념으론 실존할 수 없다는 방증이다. 살고 죽은 것의 모든 것이 사계절 속에서 반복되어 어느 한 시절도 빗겨 가려하지 않았음을 온몸으로 증언한다. 그런 세월을 떠 올리며 이념으로 사람을 나누었던 것에 대한 시절에 대한 질책인 것이다. 현실에서 관계란 것도 따지고 보면 얄팍한 술수 같은 논리로 정의를 호도할 땐 밀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해도 사람에 대한 위중함을 저버려선 안 된다는 인식에서 화자는 푸조나무를 통해 인간의 도리를 생각해 본다. 이곳 지리산에서 수십 년 전 죽음을 맞은 이현상을 거론하려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근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 가를 화자는 긴 세월을 나이테 안으로 새겨 넣고 시침을 떼고 있는 푸조나무를 통해 이 땅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있다. 나라가 흔들릴 때 불평 한번 하지 않던 그들이 아니던가? 왜 그들은 지리산에 깃들어 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는가를 자문하고 있다. 살고 죽은 것도 쉽지 않은 것으로 천명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작은 것들이 모여 더 큰 세상을 도모하는 법이라지만, 호남 들판은 항상 뜨거운 피가 충분하도록 드넓은 품을 내주곤 했다.
<호남 들판을 지나며> 화자는 말없이 하얀 눈에 자리를 내주고 있는 들판을 바라본다. “익산, 전주, 임실, 오수, 남원/ 곡성, 구례구, 괴목, 순천, 덕양, 여수/ 땀 흘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비산비야의 이름들”을 생각하며 “저 마른 들판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걸어갔던 봉준이도/ 껍데기는 가라 외쳤던 젊은 시인도/ 아편을 털어넣고 순절한 매천도/ 저 눈발 내리는 들판을 밟고 앞서갔으리”라며 자꾸만 눈에 밟혀오는 땅 “대전, 논산, 강경, 함열, 김제, 정읍/ 장성, 송정, 나주, 영산포, 함평, 무안, 몽탄, 목포/ 그리고 광주”를 기어이 호명한다. 호남 들판이 사람을 키워냈고 다시 그 땅으로 거둬들였다는 자긍심으로 간혹 세상을 바꾸려 했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뜨거운 바다
노월盧月 달빛에 뒤척이며
청둥의 쇠울음을 우는 바다
저물면서 저물면서 붉은 영혼을 적시는 바다
수만의 동백꽃 생모가지 후둑, 후두둑
물결에 스미는 일몰의 바다
물 건너 고개 넘어 총소리 북소리 사납게
들려왔던 신월리 산비탈
흐린 별빛 아래 발자국 소리
어지럽게 흩어졌던 갈망의 바다
앵무산에서 봉화산으로
불무골 지나 벌교 읍내 쪽으로
시월의 뻘밭을 낮은 포복으로
백 리 길을 밀고 가는 피투성이 바다
갈대숲에 달 뜨는 늦가을이었다가
눈발 내리는 겨울이었다가
봄날 희망의 풀꽃으로 다시 살아오는
와온,
가만가만 가슴으로 불러 보는 어머니
그 뜨거운 이름의 바다.
-<와온바다> 전문
와온은 여수와 순천 그리고 멀리는 벌교까지 이어져 언제나 한 통속으로 살아왔다. 순천만 대대포구에서 고깃배를 띄워 고기떼를 쫓다 보면 어느새 벌교 앞바다를 빠져나가 여자만을 뒤로 하고 먼바다로 나가곤 했다. 그 바다는 온통 밑이 뻘밭이어서 썰물 때 저물어가는 노을은 매번 바다의 상처를 어루만지듯 다독이며 산 그늘을 불러 어둠을 내렸다. 그렇게 거친 하루를 마감한 바닷가 어촌의 마을들은 나른한 몸을 풀어냈다. 그러다 불쑥 이는 가슴 저 밑바닥에는 “물 건너 고개 넘어 총소리 북소리 사납게/ 들려왔던 신월리 산비탈/ 흐린 별빛 아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듯 그날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오직 가슴으로만 들어야 했던 ‘여순 10·19’였다. 몇 날의 사투로는 어림없던 세상을 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와온의 하늘은 언제나 흐리거나 붉어 그맘때면 어김없이 청둥오리 떼가 그 들판을 찾아와 봄이 오기 전 북쪽을 향해 날아갔다.
은목서나무에서 새가 울고 있더라
무우전無憂殿 기와 담장 너머로
노을이 지고, 산그늘 어둠이 내리고
운수암 가는 길 선암매 피지 않았더라
오래된 사랑이란 보여주지 않는 것
한 잎 붉은 사랑도 언젠가 늙은 등걸에 드문드문 피는 것
굽이굽이 길 위에 산수유 피고
길 너머 길가에, 노란 생강나무도 피어
마음이 비어 있는 내 사랑아
그대 그윽한 꽃향기 같은 봄바람은 깊은 향 차밭을 돌아
하현 달빛에 젖고
은목서 나뭇가지에 이름 모를 새가 울고
꽃망울 머금은 선암매 아직 피지 않았더라
*순천 선암사에 피는 수백년 된 토종 매화로 이를 선암매(仙巖梅)라고 부른다
-<선암매> 전문
백 년도 못 사는 인생살이다. 조금이라도 고통이 따르면 사네 못 사네 하는 것이 진정인 양 표정을 짓곤 했다. 그 순간에도 냉정하게 이기적인 생각부터 앞세우는 것인 인간이다. 세사와 무관하게 선암매는 오백 년을 거뜬히 살아남아 봄마다 향기를 진동하여 선암사 경내를 술렁이게 한다. 그런데 때마침 찾아간 계절이란 것도 전생의 업보 같은 인연이어서 쉽지 않다. 하지만 화자는 그런 예비를 철저히 해왔기에 선암매가 피지 않은 것을 의아해한다. 일종의 신앙적인 믿음일 것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선암매를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굳건한 사랑을 위한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좀 더 기다리자는 심사를 강하게 암시한다. 어차피 시간이 문제이지 생강나무꽃도 은목서도 가지에 몽울진 꽃망울로 선암매를 지켜볼 것이기에 그렇다. 그 선암매가 속내 깊은 사랑을 보여줄 것이란 확신에서다. 눈빛에 그렁그렁 맺힌 차디찬 세월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당부일지 모른다.
세상은 공으로 이뤄진 것이 하나도 없다. 들여다보면 그 안을 이룬 것들은 당신의 노고가 무수히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종영 시인의 시에서 무엇을 찾아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대한 탐색은 무망 할 지 모른다. 모든 시 안에 내재된 시적 형용이 인간의 본성 속 온정으로 상당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발걸음을 놓아 다가갈 때마다 그 땅에 묻힌 삶을 지나친 적이 없었다. 무릇 의도하지 않았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당신의 마음으로 왔음을 통감하기 때문 “저문 강물 소리로 누군가 그리운 사람을 부르고 있다”(<저 환한 동백>), “그대 가슴에 박힌 화인火印이여/ 어느 절절한 그리움이 있어 저리 푸르랴”(<명옥헌>)라며 말하는 “미명의 순간에도 해조음이 소름처럼 온몸을 감싸던 마량바다”(<마량>), 담양 병풍산 고개를 오를 때 “첫닭이 울던 어둑새벽/ 병풍산 너머 추월산 산허리를 타고 간 사람”(<마운대미>), “눈보라 이기고 그대 발치 끝/ 거문오름에도 봄이 오리니/ 젖은 꽃잎 시든다고 나 그대 떠난 적 없다.”(<아직 먼동이 트지 않았다고>)라며 온통 아름답지 못했던 지난 세상을 만나는 것이 고통이다. 그때마다 이 땅에 흔적조차 없이 잊혀진 사람들을 호명한다. 지리산 산몬 당을 아직도 구름처럼 떠도는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처녀가 머리채 끌려가며 불렀던” (<산동>), “띠동갑 임오생 당숙뻘 아재/ 4·19 때도 시위대에 앞장서다/ 머리가 으깨져서 한 고생 했다더니만/ 하얀 이팝나무 고슬고슬 피고/ 진달래도 더 붉었던 80년 그해 5월/ 저문 꽃잎처럼 강물에 흘러갔을까?”(<칠득이 아재>), “종로 단성사 막간가수로/ 황성옛터를 불렀던 열여덟 이애리수/ 나라 잃은 설움에 북받쳐/ 달빛에 폐허를 노래한 ‘황성옛터’ ”(<이애리수>), “길은 험해도 강물은 깊어도/ 가야 하리/ 새벽이 올 때까지/ 먼동이 틀 때까지/ 우리 함께 가야 하리”(<길은 멀어도>), 라며 통곡하듯 울부짖는 한 사내의 뒷모습을 상상해 보자. 그가 꿈꾼 세상은 우리에게 오는 줄 알았다. “할아버지가 손녀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콧노래를 부르며/ 푸른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평화로운 세상”, “퇴임한 대통령이 고향에 와서 농사를 짓고/ 이웃들과 막걸리를 나누며”(<그들이 미래를 죽였다>) 사는 대동세상을 그들이 짓밟아 버린 모진 세월이 있었다. 시인이 꿈꾸는 세상은 서로를 마주하며 환하게 웃으며 사는 세상이다.
그 마음을 시로 썼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