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가지마다 맺혔다. 오곡백과를 수확하는 기쁨이 어디 농부에게만 있을까. 애지중지 지은 자식 농사도 결실을 맺는 계절이 가을이다. 볕 좋고 바람 좋은 계절, 좋은 사람과 평생의 인연을 지어주는 게 부모의 마지막 책무라 여기는 사람이 가을엔 더 많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가을이면 유난히 청첩장을 많이 받는다. 가까운 친인척에서 지인들의 자제들까지, 결혼식에 초대받으면 내게도 닥쳐올 일리기에 남의 일 같지 않다.
결혼식장에 가면 신랑 신부에게 덕담으로 앞날을 축복해 준다. 사실은 결혼식 비용은 얼마나 들었는지 집은 전세인지 자가인지 온갖 게 궁금하다. 그들이 스스로 준비한 것은 얼마나 되는지 부모가 보태어 준 것은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내가 오지랖이 넓은 건지 사회가 궁금증을 부추긴 건지 알 수 없다.
해마다 한국소비자원에서 발표하는 1인당 결혼 평균비용과 결혼식 비용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발표된 금액이라는 평균갑에 내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리라.
2013년도 기준 1인당 결혼 평균비용은 5198만 원이라고 한다. 남자는 평균 5414만 원이고 여자는 그보다 조금 적은 4784만 원이라고 하니,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나 같은 사람은 1억이 넘는 돈이 필요하다. 자녀들이 벌어놓든지 부모가 준비하든지 해야 한다는 게다. 남자의 경우 결혼예물과 예복, 결혼식 사회비용 및 주례비용, 결혼식 뒤풀이 비용 등이 들고 여자의 경우 혼수품과 예단, 결혼예물, 예복 드레스 비용 등이 든다.
충격적인 것은 이 예상비용에 신혼집 마련비용은 제외되었다는 사실이다. 주택 구입비용은 자가의 경우 평균 2억7천만 원, 전세의 경우에는 1억5천4백만 원이 소요된다고 하니 이제 갓 직장을 다니는 젊은 사람이 마련하기에는 얼토당토않은 금액이다. 주택은 관례상 주로 남자가 준비하니 군대에 갔다 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재수를 하고 바늘구멍을 뚫고 직장에 들어가도 기뻐할 겨를이 없다. 언제부터 결혼의 조건이 사람이 아니고 집이나 돈, 부모의 경제력이 되어버린 것인지….
공인중개사 사무실은 신혼집을 장만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얼마 전 사무실로 중년의 아주머니 한 분이 오셨다. 작은 아파트를 하나 장만하고 싶다고 했다. 몇 년 전 아파트를 이미 구매하신 분이기에 월세라도 받으려고 하냐고 여쭈었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삼십 대 중반의 아들이 있는데 중매가 들어오는 곳마다 첫마디에 “총각, 집은 마련해 두었소?” 하더란다. 한두 번은 흘려듣다가 집은 아직 없고 전세는 얻어줄 수 있다고 대답하면 만남조차 주선하지 않는다는 답답한 이야기였다. 얼마나 부모 속이 탔으면 모자라는 돈을 가지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싼 집이 있을까 헤매고 다니나 싶어 나마저 답답했다.
몇 해 전에는 남녀 한 쌍이 집을 구하러 왔다. 아직은 삼십 대 초반, 이십 대 후반인 그들이 집을 산다기에 직장이 탄탄한가 보다 했더니 알고 보니 남자 쪽 어머니를 믿고 하는 구매였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사달이 났다. 아들을 장가보내려고 여동생이 벌어둔 돈까지 당겨서 몇억짜리 집을 사는데 여자 쪽에서 아주 조금의 돈을 보태면서 공동명의로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시어머니 될 사람은 결혼을 물릴 수도, 그렇다고 명의의 반을 뚝 떼어주기도 괘씸하다며 난감해했다. 여자 쪽 집안에서 자꾸만 공동명의로 하자고 부추기는 듯했는데 벅수 같은 총각은 사랑에 눈이 멀어 보이는 게 없었다. 집이 도대체 무엇이라고 마음 상하고 본인의 분수를 넘는 과욕을 부리면서까지 가지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날은 집을 소개해 주는 직업에 회의감마저 들었다.
가끔 신혼부부들이 부모님들과 집을 구하러 온다. 내가 주로 거래하는 아파트는 삼십 평형대가 제일 작은 평수이다. 가끔 신부 될 사람 중에는 입을 내밀고 무언가 못마땅해하는 경우가 있다. 집이 작아서 답답하다는 것이다. 이제 갓 살림을 시작하는 사람이 서른 평이 넘는 아파트를 좁다고 하니 신혼집이 얼마나 커야 하냐며 톡 쏘아 준다. 자신들의 힘으로 준비하는 것도 아니면서 감사한 마음 없이 욕심을 부리는 젊은이들을 볼 때면 알뜰한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인다. 메모지 가득 준비된 금액과 전세자금대출 가능 금액, 이자를 고려하며 적정선의 신혼집을 찾아다니는 기특한 젊은 이들이다.
원룸이나 좁은 오피스텔에서 신혼을 시작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은 아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결혼을 준비하는 야무진 신혼부부는 흔치 않은 전세를 구하려고 발품을 판다. 작은 평형의 원룸이나 오피스텔, 빌라의 전세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어 쉽게 구하기 어렵다. 그들이 원룸이나 오피스텔을 구하는 이유는 풀옵션으로 준비된 가전제품과 가구 때문이다. 가전제품과 가구를 구매할 돈과 결혼식 비용을 아껴 전세자금으로 사용한다. 살림은 차차 둘이 벌어 채워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알뜰족들이다. 부모에게 손 내밀지 않고 집을 장만하는 그들은 독립적이고 당당하다. 집은 비록 좁을지 몰라도 열린 사고에 미래는 넓다.
바야흐로 결혼의 계절이다. 축복받는 결혼이란 호화예식장에서 값비싼 드레스를 입고 비싼 음식을 먹으며 이삼십 여분 만에 끝내는 것은 아니지 싶다. 부모의 등골을 빼서라도 신혼집 기둥을 높게 세워야 그 가정이 행복하고 온전히 유지될까. 신뢰를 바탕으로 사람을 보고 미래의 가능선을 보고 조금은 부족한 듯이 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스물여섯 딸아이와 제대 후 복학한 아들 녀석을 보니 결혼비용 마련이 남의 일이 아니다. 몇 번의 계절이 바뀌어야 새 식구를 맞을지 모르겠지만 기쁘게 맞이하고 싶다. 소박한 바람이 나만의 소망으로 끝나지 않기를….
통장 잔고를 헤아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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