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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숨어 있는 용토템 신앙과 불교 사이의 종교전쟁
삼국시대 초기 사찰들은 불교 이전의 태양의 여신 또는 토템동물신을 모신 사당이었던 곳에 세운
경우들이 여럿 있다. 봉덕사(奉德寺)도 그런 경우이다. <삼국유사>에는 동물의 신이한 일이 벌어진
곳에 절을 세우거나 그런 동기로 승려가 되었다는 기록이 상당히 등장한다.
만어사(萬魚寺)는 본래 고래사당이었듯이 석굴암은 용(고래)을 모신 사당에 용신인 태양의
여신을 쫓아내고 불상을 들여놓았다는 '석굴암'의 전신에 관한 내용이 <삼국유사> 어산불영
(魚山佛影) 편의 해석은 앞선 글에서 논했다. 용왕신앙을 굴복시킨 결과 "용왕(龍王)과 나찰녀
(羅刹女)는 온몸뚱이를 땅에 던져 부처에게 계(戒)를 받기를 청했다."라고 기록한 불교의 토속
종교인 용왕토템 정복은 어산불영(魚山佛影) 편 전체에 걸쳐 상세히 나타나 있다.
불교 이전에 석굴암에서 숭상된 것은 선도성모였다. 그러나 <삼국유사>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 편에는 선도성모가 불전을 수리하는데 자신의 좌대 아래에 있는 금을 갖다
쓰도록 비구니의 꿈 속에 나타난다. 이것은 고래토템을 중심한 용왕신앙에서 태양의 여신인 선도
성모 신앙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여 불교를 돕는 여신으로 묘사한 것이다.
"진평왕(眞平王)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比丘尼)가 있어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흥사(安興寺)에
살았는데 새로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어느날 꿈에 모양이 아름답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그를 위로해 말했다. "나는 바로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인데 네게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서 주존(主尊) 삼상(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오삼불(五三佛) 육류성중(六類聖衆) 및
모든 천신(天神)과 오악(五岳)의 신군(神君; 신라 때의 오악五岳은 東의 토함산吐含山, 南의 지리산
智異山, 西의 계룡산鷄龍山, 北의 태백산太伯山, 중앙中央의 부악父岳, 또는 공산公山이다)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모든 함령(含靈)을 위해서 점찰법회
(占擦法會)를 베푸는 것으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도록 하라."
<삼국유사>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 편.
그런데 이 내용 끝에는 흥미롭게도 <삼국유사>가 쓰여지던 고려시대에도 바닷길이 편안하게 하는
용이 황제의 꿈에도 나타났다고 쓰고 있어 용과 선도성모를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
본조(本朝: 고려를 말함)의 굴불지(屈弗池)의 용이 황제(皇帝)의 꿈에 나타나 영취산
(靈鷲山)에 낙사도장(樂師道場)을 영구히 열어 바닷길이 편안할 것을 청한 일이 있는데
그 일도 역시 이와 같다."
위에서 말하는 꿈에 나타난 용이 굴불지(屈弗池)에서 나온 것으로 표현한 그 굴불(屈弗)
<삼국유사> 물계자(勿稽子) 편에서 "갈화(竭火; 굴불屈弗인 듯하니 지금의 울주蔚州)"라고
표현하고 있다. 용왕토템은 불교가 한창 흥성하던 시기에도 "바닷길이 편안하도록 꿈에 용이
나타난다"고 할만큼 해신신앙의 중심이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용왕신 고래사당이었던 석굴암이 어떻게 불상이 들어앉게 되었는지를 <삼국유사> 어산불영
(魚山佛影) 은 다음과 같이 상세히 쓰고 있다.
"용왕이 칠보대(七寶臺)를 내어 여래(如來)에게 바치니 부처는 용왕에게 말한다. '이 대(臺)는 나
에게 필요치 않으니 너는 지금 다만 나찰(羅刹)이 있는 석굴(石窟)을 가져다가 나에게 시주(施主)
하도록 하라.' 용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한다. 이때 여래가 용왕을 위로했다. '내가 네 청을
받아들여 네 굴 속에 앉아서 1,500년을 지내겠다.' 말을 마치고 부처가 몸을 솟구쳐 굴 속으로
들어가니 이내 그 돌은 밝은 거울과 같아져서, 사람들이 그 얼굴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모든 용들이 다 나타났다. 부처는 바위 속에 거하면서 빛을 밖으로 나타내니 모든 용들은 합장하고
기뻐하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고서도 항상 부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이때 세존(世尊)은 결가부좌
(結跏趺坐)하고 석벽(石壁) 속에 앉아 있었는데, 중생들이 볼 때에 멀리서 바라보면 나타나 있다가도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제천(諸天)이 부처의 영상(影像)에 공양하면 부처의 영상도 역시
설법(說法)했다...... 성자함(星字函)의 <서역기(西域記)> 제2권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여래
(如來)가 세상에 있을 때에 이 용이 소 치는 사람이 되어 왕에게 소의 젖을 올렸는데, 올리다가 잘못
하여 꾸지람을 받자 속으로 분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돈을 주고 꽃을 사서 부처님에게 공양했다.
그리고 솔도파(솔堵婆)에게 수기(授記)하기를, '부디 악룡(惡龍)이 되어 나라를 깨뜨리고 왕을
해치게 해 주시오'하고는 석벽(石壁)에 가서 몸을 던져 죽자, 드디어 이 굴 속의 대룡왕(大龍王)이
되어 악한 마음을 일으켰다. 여래(如來)가 이것을 보고 몸을 변하여 신통력(神通力)을 가지고 여기에
오니 용은 부처를 보자 독한 마음이 드디어 그쳐져서 불살계(不殺戒)를 받고 청하기를, '부처님께서
항상 이 굴에 계시면서 저의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했다. 이에 부처가 말했다. '나는 장차 적멸(寂滅)
할 것이다. 그러나 너를 위해서 내 영상을 남겨 둘 것이니 네가 만일 독하고 분한 마음이 생기거든
항상 내 영상을 바라보면 독한 마음이 없어질 것이다.' 부처는 정신을 가다듬어 홀로 석실(石室)로
들어갔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이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또 돌 위를 발로 차서
칠보(七寶)로 삼았다 한다." <삼국유사> 어산불영(魚山佛影) 편
여기에 나오는 <헌화가(獻花歌)>는 고래에서 암소로의 신화적인 변화를 짐작하게 해준다.
"자줏빗 바위"가 나오는데 바다의 고래색갈이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저 꽃 꺾어 바치오리다. <헌화가(獻花歌)>
이러한 "고래타는 여신 - 소모는 노인"의에서 <헌화가(獻花歌)>는<삼국유사>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편의 산화가(散花歌)와 같은 것이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해가 둘이 나타나 월명사(月明師)가 향가(鄕歌)인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바쳤는데 그 가사가 산화가(散花歌)이다.
오늘 여기 산화가(散花歌)를 불러, 뿌린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령을 부림이니, 미륵좌주(彌勒座主)를 모시게 하라.
<삼국유사>는 이 산화가(散花歌)를 부른 곳을 용루(龍樓)에서 불렀다고 그 뜻을 이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용루(龍樓)에서 오늘 산화가(散花歌)를 불러, 청운(靑雲)에 한 송이 꽃을 뿌려 보내네,
은근하고 정중한 곧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어니, 멀리 도솔대선(兜率大僊)을 맞으라.
여기에 나오는 산화가는 분명 불교 이전에 용왕토템 신앙에서 나온 무속적인 노래였고 불교문화
에서 도솔가로 변이시키는 의도가 위의 글에 이어지는 <삼국유사>의 다음 글에서 볼 수 있다.
"지금 민간에서는 이것은 산화가(散花歌)라고 하지만 잘못이다. 마땅히 도솔가(兜率歌)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산화가(散花歌)는 따로 있는데 그 글이 많아서 실을 수 없다."
신라의 수로부인 신화에서 "소 모는 노인이 철쭉꽃을 따다 수로부인에게 주었다"고 하는 내용과
"수로부인이 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갔다 왔다"는 내용은 각각 독립된 듯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소 모는 노인'과 '용을 타는' 행위는 같은 용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성자함(星字函)의 <서역기(西域記)>에서 말하는 용은 소치는 사람이 되어 꾸지람이나 듣고
그러다가 꽃을 돈 주고 사서 부처에게 바쳤다고 쓰고 있다. 다시한번 위의 내용을 옮겨보자.
"옛날에 여래(如來)가 세상에 있을 때에 이 용이 소 치는 사람이 되어 왕에게 소의 젖을
올렸는데, 올리다가 잘못하여 꾸지람을 받자 속으로 분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돈을
주고 꽃을 사서 부처님에게 공양했다."
용(고래)을 타는 여신은 '소 모는 노인'으로 격하 비하되어 있는 것이다. 꽃을 따다 수로부인에게
바친 소모는 노인은 <삼국유사>의 어산불영(魚山佛影)편에서도 나오는데 그 '소 모는 노인'은 꽃을
따다 수로부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바위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것으로 비참한 최후로 그리고 있다.
"소 모는 노인은 솔도파(솔堵婆) 여인에게 '부디 악룡(惡龍)이 되어 나라를 깨뜨리고
왕을 해치게 해 주시오'하고는 석벽(石壁)에 가서 몸을 던져 죽자, 드디어 석굴 속의대룡왕(大龍王)이 되어 악한 마음을 일으켰다." <삼국유사>의 어산불영(魚山佛影)편
여기에서 신라의 바다로 다니는 해신인 수로(水路) 부인은 인도의 아쇼카왕이 지었다는 솔도파성에
사는 솔도파(率堵婆) 여인으로 윤색되어 불교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닷길을 오라는 용' 대신에 '소 모는 노인'으로 윤색 전이된 것은 소를 몰고 돌아오는 이야기를
다루는 <十牛圖>가 본래 고래토템 문화를 불교화시킨 고래토템 정복사상으로 홍보되어 온 것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같은 내용을 필자는 원효대사에 대한 기록에서도 찾아냈다.
<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 편에는 원효대사가 그의 많은 저서들 가운데 <삼매경소(三昧經疏)>
를 지었는데 바다의 해룡(海龍)이 권유했다고 쓰고 있다.
"또한 바다 용(龍)의 권유로 해서 노상에서 조서(詔書)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었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았으므로 각승(角乘)이라 했다."
<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 편
여기에서 원효가 "해룡의 권유로 노상에서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짓고는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았다"는 표현은 대단히 신화적이다. 고래토템에서 소토템으로의 전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불교 이전 해룡토템신앙을 불교화시키는 자주 보이는 '고래'를 '소'로 현실화
육지화를 시켜 격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을 보면 석굴암 스토리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석굴암 그 자체에 대한 장소일수도 있고
석굴암은 이러한 "석굴속의 대룡왕(大龍王)을 굴복시키고 그 자리를 차지한 암자"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가락국의 만어산(萬魚山)에 있던 사당이 사찰로 바뀌기 전에는 용이 바위가
되었다고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기록했다.
"동해의 물고기와 용(龍)이 마침내 화(化)하여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이 되어서 각각 쇠북과 경쇠의
소리가 났다."(이상은 <고기(古記)>에 있다)." <삼국유사> 어산불영(魚山佛影) 편
<삼국유사> 천룡사(天龍寺) 편에는 여성 용을 강조하여 사찰을 세운 내용이 있다. 용은 본래
여성적인 여룡이었던 내용이 그 외에도 <삼국유사>에는 상당히 기록되어 있다. 바다의 귀신고래와
같은 새끼를 키우는 고래가족에게서 비롯된 용의 개념이 선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옛날 단월(檀越)에게 딸 둘이 있어서 이름을 천녀(天女)·용녀(龍女)라 하였는데, 부모가 두 딸을
위해서 절을 세우고 딸들의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천룡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삼국유사> 천룡사(天龍寺) 편
<삼국유사> 혜통항룡(惠通降龍) 편은 혜통법사에게 용이 항복하여 불법에 굴복했다는 내용이다.
"용은 이미 정공에게 원수를 갚자 기장산(機張山)에 가서 웅신(熊神)이 되어 해독을 끼치는 것이
더욱 심하여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했다. 혜통은 산속에 이르러 용을 달래어 불살계(不殺戒)를 주니
그제야 웅신의 해독이 그쳤다." <삼국유사> 혜통항룡(惠通降龍) 편
<삼국유사> 명랑신인(明朗神印)편에는 금광사(金光寺) 절을 지을 때에 "용왕(龍王)이 보시한 황금
으로 탑과 불상(佛像)을 장식했다"라고 하여 용왕이 부처에게 굴복하여 조공을 바쳤다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
<삼국유사> 관동풍악(關東楓岳) 발연수석기(鉢淵藪石記) 편에는 금산사를 세울 때에 불교 승려를
위하여 용왕이 옥으로 된 가사를 바쳤다고 기록하기까지 한다.
"율사가 교법(敎法)을 받고 금산사(金山寺)를 세우고자 하여 산에서 내려와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니, 갑자기 용왕(龍王)이 나와서 옥가사(玉袈裟)를 바치고 팔만권속(八萬眷屬)을 거느리고
그를 호위하여 금산수(金山藪)로 가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 안에 절이 완성되었다."
<삼국유사> 관동풍악(關東楓岳) 발연수석기(鉢淵藪石記) 편
<삼국유사>의 용들은 고래에서 연유하기 때문에 동해가 고향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래잡이 들이
고래 눈을 왕에게 바쳐오는 것은 단순한 물질 공여가 아니라 종교적인 숭엄한 의식이었다.
그래서 용의 눈알을 바쳐오는 것을 "용이 스스로 보주를 바쳐왔다"는 식으로 용을 해친 죄를 피하는
표현을 했다. <삼국유사>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정취(正趣), 조신(調信) 편에는
강원도 동해안 낙산사의 홍연암 관음굴 스토리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홍연암은 바닷물이 법당
마루바닥 아래로 철렁이며 들어오는 곳으로 고래가 드나드는 곳을 의미하고 있다.
"옛날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처음 당(唐)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이
해변 어느 굴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이곳을 낙산(洛山)이라고 이름했으니... 여기에서 의상이
재계(齋戒)한 후 7일 만에 좌구(座具)를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龍天八部)의 시종(侍從)들이 굴 속으로 안내해 들어가므로 공중을 향해 참례(參禮)하니 수정(水精)으로 만든 염주 한 꾸러미를
내준다. 의상이 받아 가지고 물러나오니,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바치므로
의상이 받들고 나와서 다시 7일 동안 재계(齋戒)하고 나서 비로소 관음(觀音)의 참 모습을 보았다."
<삼국유사>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정취(正趣), 조신(調信)
신라에 용토템 숭배를 쫓아내로 불교를 강화한 것은 당나라 유학승들이 돌아와 행한 일들이다.
혜통항룡편은 그런 경우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당시 정공(鄭恭)이 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혜통에게 말했다. "스님이 쫓아낸 독룡(毒龍)이 본국에
와서 해(害)가 심하니 빨리 가서 없애 주십시오." 혜통은 이에 정공과 함께 인덕(麟德) 2년 을축
(乙丑; 665)에 본국에 돌아와 용을 쫓아 버렸다." <삼국유사> 혜통항룡(惠通降龍) 편
분황사의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은 신라의 용을 당나라 사람들이 물고기로 만들어 훔쳐가려던
것을 신라의 왕명으로 되찾아오는 내용이다.
당나라 불교가 삼국시대 용토템을 제압하는 내용은 백제멸망 과정을 기록한 <삼국유사> 남부여
(南扶餘)와 전백제(前百濟)와 북부여(北扶餘) 편에서 당나라 소정방이 용과 물고기를 낚아 용암
이라는 바위 이름이 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분황사 삼룡변어정에서처럼 삼국시대 용들을
격하시키고 정복대상으로 본 것이다.
"또 사자하(泗차河) 가에는 바위 하나가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그 바위 위에 앉아서 물고기와
용을 낚았다 하여 바위 위에는 용이 꿇어앉았던 자취가 있으므로 그 바위를 용암(龍巖)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남부여(南扶餘)와 전백제(前百濟)와 북부여(北扶餘) 편
신라 때에 세워진 경남 의령의 용국사(龍國寺)를 수암사(水巖寺)로 개명한 것도 그러한 트랜드의
연장선에 있다. 水巖이란 사실상 바다의 바위를 의미하여 해룡을 뜻한다. 한국 사찰들의 이름들
가운데 "龍寺" 또는 "龍O寺"라는 이름들은 대개가 신라 초기의 고래토템 숭배의 영향을 받은 이름들
이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 혜통강룡(惠通降龍)에는 혜통이 수달의 신이한 기적을 보고 중이 되었다든지, 영축사
(靈鷲寺)는 매를 피해 새끼 두마리를 안고 우물 속으로 도망친 꿩에 대하여 우물 곁에 세운 사찰이다.
오대산 상원사(上院寺)는 까치와 용의 이야기로 그것은 고래와 태양새 조합의 고래토템시대의 신화
구조를 보여주는 곳이다. 부석사(浮石寺)는 <송고승전(宋高僧傳)>에 나오는대로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올 때 배를 타고 출발할 때 선묘 여인이 의상을 사모하여 바다에 뛰어들어 용(고래)이 되어 따라
왔다는 선묘설화(善妙說話)를 바탕으로 세워진 절이다.
해룡왕사(海龍王寺)를 세운 배경에도 용이 등장한다. 스스로 따라오는 용에 데려온 용까지 용을
굴복하고 종속시키는 내용들이 고려시대 불교 관점에서 쓴 <삼국유사>에는 허다하다. 전후소장
사리(前後所將舍利) 편에는 바다에서 풍랑을 잠재우기 위하여 용까지 함께 데려왔다고 했다.
"옛날 보요선사(普耀禪師)가 처음으로 남월(南越)에서 대장경(大藏經)을 구해 가지고 돌아오는데
바닷바람이 갑자기 일더니 조각배가 물결 사이에서 뒤집힐 것 같았다. 선사는 말하기를, "이것은
신룡(神龍)이 대장경을 여기에 머물러 두려는 것이 아닐까"하고 드디어 주문(呪文)으로 정성껏
축원하여 용(龍)까지 함께 받들고 돌아오니, 바람도 자고 물결도 가라앉았다.... 해룡왕사(海龍王寺)
에는 용왕당(龍王堂)이 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당시 용왕은 대장경(大藏經)을
따라와서 여기에 머물러 있었는데, 용왕당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삼국유사>전후소장사리(前後
所將舍利) 편
태종(太宗) 춘추공(春秋公) 편에도 <신라고전(新羅古傳)>인 향전(鄕傳)을 인용하여 김유신 장군이
소정방 군대를 경상도 상주(尙州) 지방에서 독약을 먹여 죽여 모두 쓸어 묻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고전(新羅古傳)>에는 이러하다.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토벌하고 또
신라마저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이때 유신이 그 뜻을 알아채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모두 쓸어 묻었다. 지금 상주(尙州) 지경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것이
그들을 묻은 곳이다." <唐史>에는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했으니 무슨
까닭일까? 감추기 위한 것인가. 신라고전의 향전(鄕傳)이 근거가 없는 것인가. 만일 임술壬戌년
고구려高句麗 싸움에 신라 사람이 정방定方의 군사를 죽였다면 그 후일後日인 총장總章 무진
戊辰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보면 향전鄕傳의
근거 없음을 알 수가 있다. 다만 무진戊辰에 고구려를 멸한 후에 唐나라에 신하로서 섬기지
않고 만대로 그 땅을 소유所有한 일은 있었으나 소정방蘇定方·이적李勣 두 공公을 죽이기까지
한 일은 없었다."
<삼국유사> 태종(太宗) 춘추공(春秋公) 편.
위에서 보는대로 <삼국유사>를 쓴 일연 김경명은 이 내용을 시기적으로 당나라 군사를 지원
받아 고구려를 무찌른 앞의 일로 보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고전에서
시기는 사건보다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가 있다. 따라서 상주지방의 향전의 내용이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나라 잔병들이 모두 죽었다면 그 보고가 당 조정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치열한 군사적 종교문화적 투쟁이 있었음을 <삼국유사>는 많은
사실들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유사> 혜통황룡(惠通降龍) 편에는 문무대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군선을 침몰
시키기 위하여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 용왕에게 문두루 비법을 배워 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문호왕(文虎(武)王) 법민(法敏) 편에는 "요새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
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왔다"고 했고 명랑신인(明朗神印) 편에는 오히려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했다고 상반된 내용을 쓰고 있다. 아마도 이것 역시 용왕에게 배운 문두루 비법을
당나라에서 배운 것을 거꾸로 용왕에게 전했다고 일연의 <삼국유사>는 얼버무리는 두 다른
내용을 상충시키고 있는 것이다.
"법사 명랑(明朗)이 신라에 태어나서 당나라도 건너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데 바다의 용의
청에 의해,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秘法)을 전하고, 황금 1,000냥(혹은 1,000근 이라고도
함)을 보시(布施)받아 가지고 땅 밑을 잠행(潛行)하여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삼국유사> 명랑신인(明朗神印) 편.
삼국통일 후 당나라 군대가 신라를 넘볼 때에 사천왕사를 세운 배경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삼국유사> 문호왕(文虎(武)王) 법민(法敏) 편에 기록되어 있다.
"요새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명랑이 말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
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道場)을 개설(開設)하면 좋겠습니다." 그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보고한다. "당나라 군사가 무수히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돌고
있습니다."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명랑이 말한다. "여러 가지 빛의 비단으로 절을 가설(假設)하면 될 것입니다." 이에 채색 비단
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고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열두 명으로 하여금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文豆婁)의 비밀한 법(法)을
쓰게 했다. 그때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아직 교전(交戰)하기 전인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서 당나라 군사는 모두 물속에 침몰(沈沒)되었다. 그 후에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하여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 <삼국유사> 문호왕
(文虎(武)王) 법민(法敏) 편
불교가 아닌 용궁에서 배운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 군사를 무찔렀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보양이목(寶壤梨木) 편에는 당나라 불교를 신라에 착종시키기 위하여 용왕토템 신앙을 정복
했다는 의식을 보여준다. "용이 불승을 용궁으로 맞이하게 해서 불경을 외우게 했다"는 식의
불교신앙을 그 이전 용왕토템을 굴복시키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사(祖師) 지식(知識; 윗글에는 보양寶壤이라 했다)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해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서해 가운데에 이르니, 용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더니 금빛
비단의 가사(袈裟) 한 벌을 주고, 겸하여 아들 이목(璃目)을 그에게 주면서 조사를 모시고
가게 했다. 이때 용왕은 부탁한다. "지금 삼국(三國)이 시끄러워서 아직은 불법에 귀의(歸依)
하는 군주(君主)가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本國)으로 돌아가서 작갑(鵲岬)에 절을
짓고 살면 능히 적병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 또한 몇 해가 안 되어서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 것이오." <삼국유사> 보양이목(寶壤梨木) 편
이러한 기록은 특히 당나라 불교를 받아들여여 적병을 피한다는 개념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흥미롭게도 문무대왕이 당나라를 몰아낼 때 적병인 당나라 군선을 침몰시키는 방술을
"용왕의 문두루 비법"과 정면 상쟁하는 구도를 보여준다. <삼국유사> 보양이목(寶壤梨木) 편
에는 용이 쓰러진 배나무를 쓰다듬으니 다시 살아났다는 기록을 보여준다. 불교 이전의
용토템과 수신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던 어느 해에 몹시 가물어서 밭에 채소가 모두 타고 마르므로 보양(寶壤)이 이목(璃目)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온 고을이 흡족하였다. 이에 천제(天帝)가 그를 죽이려 하자 이목
(璃目)이 보양에게 위급함을 고하니 보양법사가 침상 밑에 숨겨 주었다. 이윽고 천사(天使)가
뜰에 와서 이목을 내놓으라고 청하자 법사는 뜰앞의 배나무[梨木]를 가리키니 천사는 거기에
벼락을 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배나무가 부러졌으므로 용이 쓰다듬으니 곧 되살아났다.
그 나무는 근년에 와서 땅에 쓰러졌는데 어떤 사람이 망치를 만들어서 선법당(善法堂)과
식당(食堂)에 안치(安置)하였다. 그 망치 자루에는 명(銘)이 있다."
<삼국유사> 보양이목(寶壤梨木) 편
<삼국유사> 혜통황룡(惠通降龍) 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혜통은 이에 정공(鄭恭)과 함께 인덕(麟德) 2년 을축(乙丑; 665)에 본국에 돌아와 용을 쫓아
버렸다. 용은 또 정공을 원망하여 이번에는 버드나무로 변해서 정씨의 문밖에 우뚝 섰다.
정공은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무성한 것만 좋아하여 무척 사랑했다."
<삼국유사> 혜통황룡(惠通降龍) 편
문무대왕은 죽어 해중대룡이 되겠다고 한 것은 불교 법승들의 반대를 무릅쓴 종교논쟁 가운데
한 말이다.
문무대왕은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했다. "나는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용(龍)이 되어
불법을 숭봉(崇奉)해서 나라를 수호하려 하오." 이에 법사가 말했다. "용은 짐승의 응보(應報)
인데 어찌 용이 되신단 말입니까." 왕이 말했다. "나는 세상의 영화(榮華)를 싫어한 지가 오래
되오. 만일 추한 응보로 내가 짐승이 된다면 이야말로 내 뜻에 맞는 것이오."
<삼국유사> 문호왕(文虎(武)王) 법민(法敏) 편
토속 용토템신앙과 나중에 들어온 불교문화와의 종교적 투쟁은 <삼국유사>의 진성여대왕
(眞聖女大王)과 거타지(居타知) 편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불교 승려가 용왕의 간을 빼먹으려
하고 거타지는 활로 중을 쏘니 여우로 변해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타지는 용왕의 딸과
혼인을 하고 당나라를 방문할 때에 용 두 마리가 거타지가 탄 배를 가호하고 있다. 이 내용은
그대로 <고려사>의 왕건의 조상 작제건 신화로 윤색되었다. 그만큼 신라의 용왕 고래토템은
고려왕조에서 빌려 윤색할 정도로 권위있었던 불교 이전 종교문화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이 오더니 전과 같이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먹으려 했다. 이때 거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중은 이내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쓰러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 치사를 한다.
"공의 은덕으로 내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기를 바라오." 거타가
말한다." <삼국유사>의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과 거타지(居타知)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용녀와 혼인한 왕의 이야기가 있다. 신라의 거타지가 용녀와 혼인한
것과 <고려사>의 작제건이 용녀에게 혼인한 것과 같은 배경이다.
"좌지왕(坐知王) 김질(金叱)이라고도 함. 의희(義熙) 3년(407)에 즉위. 용녀(傭女)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니 국내가 시끄러웠다. 계림(鷄林)이 꾀를 써서 치려 하므로...
이에 왕은 사과하여 옳다고 하고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로 귀양보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삼국유사> 아도기라(阿道基羅) 편에는 서라벌의 왕궁이 '용궁(龍宮)'이라 표현했다. 가섭불
연좌석(迦葉佛宴坐石) 편에는 " "신라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다"고 하여 반월성 외에 용궁(龍宮) 이 따로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석탈해는 용성국에서 와서 신라의 용궁의 왕이 된 것은 바다의 용과 지상의 왕들 사이가 모두
용과 인간의 호환환생하고 사는 곳도 같은 용궁임을 보여준 개념이었던 것을 보여준다.
"용궁(龍宮)의 남쪽(지금의 황룡사皇龍寺다. 진흥왕眞興王 계유癸酉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요, 넷은 용궁(龍宮)의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다." <삼국유사> 아도기라(阿道基羅) 편
<삼국유사> 보장봉로(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편에는 고구려 평양성도 신라의 반월성
처럼 초승달 모양이라 하여 용언성(龍堰城)을 쌓았다고 했다.
"옛 평양성(平壤城)의 지세(地勢)가 신월성(新月城)이라 하여 도사들이 주문(呪文)을 읽어
남하(南河)의 용(龍)에게 명령해서 만월성(滿月城)을 더 쌓아서 용언성(龍堰城)이라 했으며,
참기(讖記)를 지어 용언도(龍堰堵), 또는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라고 했다."
<삼국유사> 보장봉로(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편
석탈해의 부모가 그랬듯이 삼국시대의 용은 인간과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는 것으로 인간과
용의 호환환생하는 사이였다. 백제의 제30대 무왕(武王)이 된 서동(薯童) 왕자는 그 어머니가
연못의 용(龍)과 관계하여 났다고 <삼국유사> 무왕(武王) 편과 법왕금살(法王禁殺) 편에 는
말하고 있다.
문무대왕은 해중대룡이 되었고 김유신은 천신(天神)이 되었다고 한 것은 아메리카 인디안들의고래토템과 태양새 세트의 신라 버젼이라고 필자는 자주 강조해 왔다. 이와같은 문무대왕 고래
해룡과 김유신 천신 개념은 여성에게도 같은 "하늘 태양새 바다 해룡" 토템폴 개념을 볼 수 있다.
<삼국유사> 천룡사(天龍寺)편에 천룡사(天龍寺)의 天龍은 天과 龍이 따로 합쳐진 불교 이전
종교적 개념을 보여준다.
"옛날 단월(檀越)에게 딸 둘이 있어서 이름을 천녀(天女)·용녀(龍女)라 하였다."
<삼국유사> 천룡사(天龍寺)편
수로부인을 용이 태우고 바다로 들어갔다 나오는 <해가>의 배경 신화는 신라인들의 오리지날
용토템 숭배를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다.
<처용가>로 잘 알려진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는 헌강대왕이 동해 울주 해변에서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잃을 지경이 되자 "동해(東海) 용(龍)의 조화"로 보고 지은 절이다.
동해의 고래를 바라보는 의미가 망해사(望海寺)의 '望海'의 의미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11/06/12 오두 김성규 코리안신대륙발견모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