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문화 그리고 삶이 있는 바우길
걷고 싶은 길, ① 강원도 바우길
제주 올래에서 시작된 걷기 열풍이 거세다. 지리산 둘레길, 소백산 자락길, 북한산 둘레길, 남해 바래길, 강원도 바우길 등 걷는 길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이 또한 개발을 위한 개발이 아니냐는 우려가 일 정도이다. 반성은 진화의 한 조짐. 자연과 삶 그리고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는 ‘걷는 길’은 풍부한 이야기와 다양한 표정으로 우리 삶으로 다가온다. 이번 호부터 지역을 대표하는 걷는 길을 소개한다.(편집자)
강원도 바우길
‘바우’는 바위의 강원도 토박이말이다. 또한 바우(Bau)는 바빌로니아 신화에 손으로 어루만지기만 해도 죽을병을 낫게 한다는 건강의 여신이기도 하다. 바우길은 이 길을 걷는 사람 모두 바우 여신의 축복처럼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라는 바람을 담은 길이다. 바우길은 현재 총연장 약 165km, 11구간으로 열려 있다.(2010년 12월 기준) 바우길은 다양하다. 백두대간의 등성마루, 바닷가 소나무 숲, 분단의 상처인 해안의 가시철조망, 현란한 관광지, 깊고깊은 산촌, 포구가 아름다운 어촌을 지난다. 우리 산천, 우리 삶의 어제와 오늘이 그림처럼 또는 날것 그대로 펼쳐진다.
사실 자연을 즐기면서 건강을 챙기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바우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 동네 뒷산으로도 충분하다.
바우길에는 자연과 문화, 역사 그리고 삶이 있다. 우리네 삶의 희로애락이 스민 길이다. 꿈에도 고향 그리던 사임당 신 씨의 그리움, 보부상의 한숨이 거기 있다. 지독한 가난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던 오막살이의 굴뚝 연기,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했던 사람의 아득한 슬픔이 피어오른다. 바다에 남편을 잃은 여인의 통곡이 들리고, 꽁보리밥 도시락을 넣은 책보를 둘러매고 학교 가는 아이의 발자국 소리가 귓속에 아련하다. 시장 사람들의 노동과 취객들의 비틀거리는 발길이 뒤섞여 삶의 곤고함을 일깨운다. 시인 묵객의 풍류와 문자향에 취하고, 설화 속 주인공이 되어 목숨처럼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순정한 가슴이 된다. 예나 지금이나 모양새만 다를 뿐 사람살이의 본질은 매한가지다. 바우길을 걸으면 지나온 삶이 보이고 앞으로 살아내야 할 살림살이가 보인다. 이것이 진정 바우길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솔향기 파도소리로 너울지는 곳
대관령에는 눈, 그 아래는 진눈개비가 내리던 날 바우길 5구간 ‘강릉 바다 호수길’을 걸었다. 강릉 해변의 아름다움은 넓고 깊었다. 왜 일찍 이곳을 모르고 경포호와 경포해변만 찾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 만큼.
바우길 5구간 출발점, 겨울 사천진. 한가롭다. 모래사장은 온통 텃새처럼 사는 갈매기 차지다. 가까이 다가가자 영 못마땅하다는 듯 떼로 날아오른다. 그래, 그건 네 사정이고 나는 좀 걸어야겠다. 물이 들고 나는 모래톱의 촉감은 땅과 물의 중간이다.
사천요트장에서 고샅을 빠져나와 사천진교를 건너자 사천해수욕장이다. 해돋이로를 따라 해송 숲길로 든다. 바람소리에 파도소리가 섞인 솔숲은 순포교까지 이어진다. 순포교를 건너자 백사장이다. 사각사각 중력을 허문다. 인공폭포에서부터는 경포호 입구까지 나무 데크가 놓여 있다. 데크 위를 걷는 문명의 리듬은 명쾌하지만 딱딱하다.
경포호를 왼쪽에 두고 호숫가를 걷는다. 드물게 푸른 잎을 달고 선 버드나무 사이로 갈대가 좌선 삼매에 빠져 있다. 경포대에서 호수를 에돌자 허균 생가로 드는 길이 나온다. 생가의 툇마루에 흐린 겨울 햇살이 고여 있다. 생가 뒤의 솔숲은 해송이 아니라 금강송이다. 대관령의 기운이 서린 듯하다. 생가 뒤쪽은 초당 두부로 유명한 곳이지만 겨울 짧은 해를 탓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경포호를 벗어나서 식당가 쪽으로 발길을 옮겨 잠깐 해찰을 부린다. 몇몇 연인들이 해수욕장 가의 그네에 앉아 체온을 나눈다.
현대호텔을 지나 강문해변에서부터 송정휴게소까지 해송 숲길이 이어진다. 감탄사는 2.5km 정도의 숲길 내내 끊이지 않는다. 안면도의 소나무 보다는 키가 작지만 운치는 더하다. 동해 가에는 방풍림으로 가꾼 솔숲이 드물지 않지만 이렇게 길고 품이 넓은 숲은 없다. 숲길 가 찻길의 아스팔트가 현실 공간이라면 솔숲 길은 이상향으로 가는 길이다. 아니 이 순간만큼은 유토피아다. 솔숲 옆 바닷가의 철조망은 차갑고 슬픈 현실이다. 만약 이 둘 사이에 솔숲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
솔숲은 송정휴게소에서 끝난다. 성큼 어둠이 밀려오면서 파도 소리가 밝아진다. 안목 해변을 지나 죽도봉에서 솔바람다리를 건넌다. 5구간 종착지 남항진이다. 수평선에는 드문드문 오징어잡이 배가 불을 밝히고 검은 바다에서 삶을 건진다.
강문에서 송정까지의 솔숲 길은 우연히 근방을 지나가다가도 불쑥 찾아와 안부를 묻고 싶은 곳이다. 내 마음 속 길의 목록에 또 하나의 길이 쌓였다.
1구간: 선자령 풍차길(11km, 4~5시간)
온통 풀밭으로 이루어진 백두대간의 등성마루를 걷는 길이다. 바람 맛 좋은 선자령 일대와 대관령 양떼목장을 에워 돈다.
2구간: 대관령 옛길(16.2km, 5~6시간)
오로지 두 다리로 대관령을 넘던 길이다.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상행휴게소에서 국사성황당을 거쳐 선자령으로 가는 등성을 넘어 보광리까지 가는 길이다. 대관령 자연 휴양림이 있는 어흘리 일대는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금강송 군락지다.
3구간: 어명을 받은 소나무 길(13km, 5~6시간)
대관령 유스호스텔에서 어명정을 지나 명주군왕릉에 이르는 길이다. 경복궁을 복원할 때 소나무를 베기 전 옛 방식대로 어명을 내리고 베어낸 다음 그 자리에 어명정을 세웠다.
4구간: 사천 둑방길(17km, 6시간)
명주군왕릉에서 해살이마을을 지나 12km의 둑방길을 따라 동해안에 이르는 길이다.
5구간: 강릉 바다 호수길(17km, 6시간)
사천진리 해변공원에서 경포호, 허균・허난설헌 유적공원을 지나 남항진까지 바닷가를 걷는 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바닷가 솔밭을 지난다.
6구간: 굴산사 가는 길(18km, 6~7시간)
남항진에서 강릉 시내를 거쳐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굴산사까지 가는 길이다. 중앙시장, 객사문, 강릉 단오제가 열리는 남대천을 지나는 행로다.
7구간: 풍호연가(20km, 7시간)
굴산사지에서 안인항까지 가는 길이다. 길이 끝날 무렵 하시동마을의 풍호를 지난다. 풍호는 경포호수처럼 파도가 쌓은 모래가 냇물을 막아 만들어진 석호다. 고니가 날아드는 30만평의 갈대숲과 안인해변의 모래언덕 길을 걷는 즐거움이 각별하다.
8구간: 산 우에 바닷길(9.3km, 5시간)
안인항에서 정동진까지 가는 길이다. 줄곧 바다를 보며 걷는 길이다. 길 중간 쯤 아래 바닷가에 낙가사가 있다.
9구간: 헌화로 산책길(16km, 6시간)
정동진역에서 모래시계공원을 지나 심곡마을, 옥계해수욕장을 거쳐 옥계면사무소에 이르는 길이다. 6・25 전쟁도 모르고 지났다는 얘기가 전할 만큼 깊이 숨겨진 곳이었던 심곡마을의 헌화로는 파도와 함께 너울거리는 길이다.
10구간: 심스테파노길(11km, 5시간)
명주군왕릉에서 영동고속도로(강릉휴게소)를 가로질러 위촌리의 송양초등학교까지 가는 길이다. 바우길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병인양요 때 심스테파노라는 천주교인이 골아우마을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을 찾았다. 길 이름이 심스테파노인 연유다.
11구간: 신사임당길(16.4km, 6시간)
위촌리에서 율곡이 태어난 오죽헌, 조선시대 99칸 사대부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선교장, 경포대, 허균・허난설헌 유적지를 지나 강문 진또배기에 이르는 길이다. 영동 지역 역사 문화의 향기가 그윽한 길이다.
글ㆍ사진 윤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