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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납니다. 처음에 2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는 바울과 신라가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루스트라에서 디모데라고 하는 제자가 합류를 했습니다. 이 사람은 1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루스트라에서 엄청난 박해와 고난을 겪을 때 그것을 보면서 예수를 믿은 사람이니 여러분 신기하죠.
우리가 보통 예수를 믿을 때는 저 사람이 예수 믿어서 잘 되고 대우받고 성공하고 정말 뭐가 있기는 있구나 하나님이 계신가 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도 그런 하나님 믿어봐야 되겠다 이렇게 하고 예수를 믿는 법인데 디모데는 정반대였습니다. 바울이 거기서 엄청 얻어맞고 박해를 받고 고난을 당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복음을 깨달은 거예요. 성공과 승리와 축복의 현장에서 우리가 예수를 믿기도 하지만 이와 같이 고난의 현장에서 예수 믿고 어려움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저기에 진짜 진리가 있구나 이렇게 깨닫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은 그래서 의미가 있고 강력한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예수 믿고 기도하는 대로 다 되고 하는 일이 다 형통 한 것만 가지고 하나님 영광을 올리는 게 아니에요.
예수 믿다가 실패도 하고 어려움도 당하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을 놓지 않으면 그것이 엄청난 메시지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는 고난과 실패를 보면서 그 속에서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듯이 말이죠. 어려움 속에서 예수 믿는 사람 저 사람 왜 이렇게 자꾸 아프지 그런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또 깨닫는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게 진짜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끝까지 갑니다. 디모데는 이렇게 예수를 믿기 시작했기 때문에 바울이 어려움 당할 때도 바울의 옆에 있었고, 바울이 죽은 후에도 바울의 뒤를 이어서 사역을 감당했어요. 흔들리지를 않아요.
친구도 내가 잘 나갈 때 내 가치를 알아보고 친구가 된 사람보다는 내가 어려울 때 문명으로 있을 때 아무 힘이 없을 때 친구로서의 가치를 알아보고 친구가 된 사람 그게 진짜입니다.
그런 사람 끝까지 가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잘 될 때 나를 따르고 친구가 된 사람은 의심해 봐야 돼요. 50%는 가짜다. 어려움이 오고 상황이 바뀌면 떠나갈 가능성이 많은 거예요.
디모데는 그런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바울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어요. 이 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보다 더 큰 힘이 됐어요. 이제 바울과 신라 디모데가 다음 목적지로 출발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 오늘 내용입니다. 먼저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자고 제안을 합니다. 이제 한 받아야 되겠다. 3절에 보면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사람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알았으니라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어요. 그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디모데의 마음속에는 유대교 신앙이 흐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어요. 유대인들도 아는 헬라인 아마 그 지역에 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저 디모데는 누구누구 자식이야 누구 아들이야 할 만큼 그렇게 알려진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제 그게 또 문제였어요. 사실은 이때까지는 이때까지는 이 할례 문제가 디모데에게는 큰 문제는 되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할례를 받을 수도 있지만 아버지가 헬라인이니까 그냥 넘어간 거예요. 거기다가 디아스포라 유대라는 땅을 떠나서 있잖아요. 아나톨리아 반도 그래서 그냥 살아가는데 한례받지 않은 반쪽짜리 유대인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것도 문제가 없었어요. 할례가 아무 관계가 없었어요. 바울의 복음을 듣고 예수 믿어서 신실한 제자가 됐어요.
그런데 오늘 그게 문제가 된 겁니다. 이제 사역자가 돼서 떠나는 마당에 뭐가 문제냐 할례받지 않은 것이 문제인 거예요. 왜냐하면 앞으로 당분간 진행되는 바울의 사역은 대부분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느 도시에 가서 회당에 들어가서 거기 모여 있는 유대인 또는 유대인으로 회심한 종교를 바꾼 그 이방인 유한례를 존중하는 유대인들 그 모임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되는데 디모데가 할례를 안 한 거예요. 대부분을 아는 거예요. 제 유대인 피가 섞여 있는데 그 암흑의 아들인데 걔는 할례 안 했어 그 상태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들어가면 바울과 실라는 들어갈 수 있는데 그 회당에 디모데는 안 된다고 할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혹시 디모데가 실수로 들어가면 그다음부터 그게 논쟁이 되고 복음을 전해야 되는데요. 할례를 했냐 안 했냐 이 문제로 실기 행위를 하다가 모든 에너지를 쏟게 생긴 거예요. 바울이 딱 판단한 겁니다.
또 거기 모인 사람 중에는 복음을 받기 위해서 마음을 여는 사람도 있지만 트집 잡으려고 탁 노려보는 유대인들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먹이를 던져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할례가 예수 믿는데 구원받는데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나 사역을 하려고 보니까 이 할례가 사역의 장애가 되는 거예요. 할례 없으면 특히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그래서 바울은 사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반율법적인 사람이다. 저 사람은 할례 그리고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만큼 이 부분에서 자유로운 사람인데 지금은 할례를 행하자고 한 겁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이것이 바울의 유연성입니다.
우리도 이 바울의 유연성을 가져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너무 사고가 경직되고 생각이 경직돼서 중요한 일을 해야 될 때 그것 가지고 에너지를 쏟느라고 정말 중요한 일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질은 지켜야 되지만 비본질은 유연하게 대응하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골베르그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도덕성 발달 발달에 대한 이론이라는 그 논문을 내놨습니다. 이분이 이 도덕성 발달을 쭉 설명하면서 보편적 가치를 위해서는 지역적인 그 가치를 포기할 수 있는 게 최고 수준의 도덕이다. 최고의 도덕 수준이다. 그러니까 도덕 수준이 높은 사람은 앞뒤가 꽉 막혀가지고 자기 주장만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최고 수준에 올라간 사람은 굉장한 유연성을 갖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단계에서는 이 부분을 굉장히 강하게 주장하지만 목숨 걸고 지키지만 어떤 일을 위해서는 이걸 포기할 수도 있는 그런 자유와 유연성을 가진 사람이 최고 수준으로 올라간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다만 이 단계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저항과 비난을 감수하고 감행해야 된다. 왜냐하면 하수들이 세상에 하수들이 자기들이 소중히 여기는 그 도덕의 잣대 어떤 가치의 잣대를 가지고 공격을 하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이 높은 수준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고수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수들의 공격을 감수하는 그런 사람이 돼야 돼요.
여러분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는 뭡니까? 생명입니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건 없어요. 공부보다도 생명이 더 소중해요. 어떤 규칙보다도 생명이 더 소중해요. 그렇지 않습니까? 일단 생명이 소중한 거예요. 민족 어떤 이데올로기 이런 거 저런 거 다 그 단계에서는 소중할지 모르지만 생명보다는 못한 겁니다. 생명이 제일 소중한 거예요.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에요. 그래서 복음이 같이 있는 거예요.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목숨과 같은 거였어. 할례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몸의 표식이에요. 우리로 말하면 세례와 같은 거예요. 그래서 8일 만에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했어요.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유대인 취급을 못 받아요. 이건 엄청난 축복이고 엄청난 가치였어요. 할례자나 무할례자냐 계속 그 논쟁이 있는 거예요.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경지를 만난 사람에게는 할례가 가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거 어떨 때는 정말 중요한 거예요. 그것도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으로 우리 이방인 말고 그런데 유대인으로서 또 어떨 때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어떤 사람에게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가치인 복음을 경험한 사람. 복음을 위해서는 할례를 받기도 하고 할례를 포기할 수도 있는 겁니다. 이게 복음의 수준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논쟁을 몇 가지 논쟁을 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안식일 논쟁입니다. 유대인들의 또 하나 가치는 안식일이에요. 안식일을 지금도 목숨 걸고 지킵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 40가지가 넘는 세부 규정을 만들어 가지고 안식일을 지키는 거예요. 안식일에는 쉬어라. 하나님께만 예비해라. 평소에 일하고 안식일은 쉬는 날이다. 쉰다는 게 뭐냐 그래가지고 100보 이상 걸으면 일하는 거다. 그래서 안식일날도 100보 이상 배가 아파서 화장실을 가도 100보가 넘으면 안 되는 거예요. 100보 몸에서 땀이 나지 않게 해라. 소뚜껑을 들으면 일한 거다. 밥 뚜껑은 일한 건 아니겠죠. 먹고 살아야 되니까.
하여튼 그런 규정을 다 정해가지고 지킬 만큼 유대인들에게는 이 안식일의 생명과 같은 거예요. 절대로 일하면 안 돼요. 지금도 그래요.
근데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이라고 하는 라비가 나타나가지고 자꾸 안식일에 못할 일을 하는 거예요. 어느 날 예수님이 안식일날 회당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손 마른 사람이 있었어요. 손 마른 사람. 그때 유대인들이 지켜보는 거예요. 오늘 잘 걸렸다. 예수라는 저 라비가 저 사람을 고쳐주나 안 고쳐주나 안식일날 고쳐주면 일하는 거니까 오늘 잡아야 되겠다. 마음먹고 있는 예수님 다 파악하고 계셨어요.
근데 예수님이 딱 보실 때는 그날 고쳐줄 수도 있고 안 고쳐드릴 수도 있는 거예요. 안 고쳐주고 그냥 편안하게 하루가 지나갈 수 있는데 예수님에게 딱 걸린 게 뭐냐? 이 사람은 반드시 고쳐줘야 돼. 이 사람은 손 마른 사람인데, 제롬이 인용한 히브리인의 복음서에 의하면 석공 직업이 석공이랍니다. 석공이 뭔지 아시죠? 돌을 막 이렇게 해가지고 그걸 만들어서 건물을 짓는 거예요. 성전도 짓고 집도 짓는 사람인데 손이 말았어 손을 못 쓰는 거야 그러면 석궁으로서는 끝난 겁니다.
그 얘기는 생계가 묘연한 거예요. 가족들도 다 굶어 죽게 되는 거예요. 생명과 관계된 거예요. 그냥 단순히 아픈 게 아닙니다. 예수님 고쳐주기로 마음을 먹으셨어요. 근데 저 적대자들이 나쁜 마음을 먹고 있는 거 두고 보자.
그때 예수님이 그 사람을 불러내서 이렇게 묻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뻔한 대답입니다. 자기에게 적용시키면 거기 있는 사람들도 살리는 게 옳다고 보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그 일을 당했다고 봐요. 어쨌든 이건 너무나 자명한 대답이에요. 예수님이 이 사람을 고쳐줬습니다. 그래서 이제 안식일 논쟁이 붙은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입장도 틀리지는 않아요. 안식일에는 안식일에는 절대 일하면 안 돼. 그냥 아파도 하루 더 참으면 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예수님의 입장이 또 틀린 거 아니잖아요. 생명 먹고사는 문제, 생계가 걸린 사람을 당장 고쳐줘야지 두 가지 가치가 부딪힌 거예요.
양쪽이 팽팽하고 틀리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걸 선택할 것이냐? 더 높은 가치를 선택하라는 겁 그게 뭐냐? 살리는 일입니다. 선한 일입니다. 생명과 관계된 일입니다. 살리는 일 생명과 관계된 일을 위해서는 나머지 하위 가치는 포기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일을 감행하셨어요. 그 일 감행하셨다가 이제 공격을 받기 시작하는 겁니다.
바울도 예수님처럼 이런 입장을 가지고 사역을 감행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명의 복음 사람을 복음을 전해서 사람을 구원하는 그 일을 위해서는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굉장히 유연한 사람이 그래서 필요하면 복음을 위해서는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고 유대인이 되기도 하고 이방인이 되기도 하고 잘못 생각하면 무슨 카멜레온이야 뭐 이랬다 저랬다 해 지적 없이 그게 아니라 정말 이 복음으로 생명 살리는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뭐 무슨 소리를 듣든지 아니면 내가 뭐가 되든지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20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라.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니라
이 유연성을 가진 교회나 성도는 생명력이 넘칩니다. 근데 이 유연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화석화돼요. 신앙이 화석화돼 생명력이 없어 그러고는 거기에 딱 갇혀가지고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끼리 만나면 싸워 유연성이 없으면 싸워요. 자꾸 부딪혀요. 뼈와 뼈가 부딪히는 거죠. 중세 교회가 이런 암흑기에 빠졌습니다. 복음을 위한 유연성을 갖지 않고 어떤 그 교리나 어떤 원칙에만 딱 사로잡히면 그걸 가진 사람들끼리 싸우는 거예요. 그냥 우리끼리 다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는 별 문제가 없는데 조금 다른 사람을 만나면 이제 공격하기 시작하는 거 그리고 쓸데없는 일로 우리가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중세 시대 때는 별 얘기도 다 했다고 그래요. 성찬 포도잔에 포도주잔에 파리가 만약 빠진다면 파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없을까 이거 가지고 고민하면서 이제 두 파로 나눠가지고 싸우는 거예요.
야 성찬이 얼마나 거룩한데 그 성찬주에 기도하면 예수님 피가 되는데 파리가 빠졌으면 파리도 구원받는 거지 뭔 소리야 파리는 무슨 영혼이 없잖아 하면서 그런 걸로 싸우는 거야.
그건 파리가 구원받고 안 받고가 무슨 그게 싸울 일입니까?
바늘 위에 천사가 몇 명이나 올라갈 수 있을까
이거 가지고 이제 서로 막 주장을 하는 거예요. 팽팽합니다. 광고는 설교 전에 해야 되나 후에 해나 그래가지고 어떤 분이 목사님 왜 이 교회는 광고를 설교 전에 합니까?
옛날에 다 설교후에 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옛날에 설교전에 한 적이 있어요. 설교 전에. 그래서 설교전에 하고 설교 끝나고 그냥 찬양으로 딱 이어지면서 은혜로 끝나려고 광고하다 보면 길어지고 그러잖아요. 그랬더니 또 어떤 분이 와가지고 목사님 설교 전에 또 광고를 하니까 어수선해가지고 이 설교에 또 집중이 안 된다는 거예요. 쫙 하다가 설교를 들어야 되는데 그래야 다시 옮겼잖아요. 뒤로 우리가 몇 번 그렇게 옮겼어요. 갔다가 왔다가. 그래서 저는 앞에도 괜찮고 뒤에 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원하면 뒤에서 은혜 받는 사람이 많으면 뒤에 하고 앞에서 은혜 받는 사람이 많으면 앞에 하면 되는 거예요. 하동에 싸울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에 딱 한 번 이런 유연성을 안 가진 사람은 이거 가지고 싸우다가 나중에 신앙도 팔아 먹어요. 이 교회 안 나간다. 내가 그래가지고 더 중요한 생명에 관계되는 것도 버리는 수가 있어요.
크리스찬은 포도주를 마셔야 됩니까? 안 마셔야 됩니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의견이 다양합니다. 내가 이 설교가 이렇게 공중파를 타고 가다가 한국 교단에 알려지면 짤릴 수도 있어요. 징계받을 수도 있어 포도주를 마셔야 되냐 안 마셔야 되냐
여러분 어떻게 생각해요? 어떤 분은 절대로 마시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제 옛날 한불 또는 체코하고 한국어하고 이런 박드나리아 선교 협력을 할 때 제가 여러 독일도 참석하고 체코에도 참석하고 여기 참석했는데 한국에서 온 대표들이 그 현지의 교단에서 만찬을 배설하고 최고의 포도주로 쫙 이제 이건 최고의 대우를 한 거예요.
그 목사님들이 그런데 한 분도 안 마시는 거야. 그러니까 이분들이 굉장히 민망했어요. 그다음부터는 이제 한국이 목사님들이 오면 안 내놔요. 참 아쉬운 일이죠. 그 최고 좋은 걸 안 내놔요. 한쪽에서는 나는 안 마시니까 저 마시는 사람들은 아마 천국 가기 어려울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어떻게 크리스천이 말이야 한쪽에서는 무슨 소리냐고 예수님도 만찬을 마지막 만찬을 포도주로 하셨고 나중에 우리 천국 가면 거기서 또 마시자고 말씀하지 않았냐고 그러니까 지금부터 미리미리 연습해가지고 이렇게 잘 해서 그때 괜히 뭐 약해가지고 그 잔치 분위기 깨지 말고 지금부터 연습하자 이렇게 하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거 가지고 논쟁이 있어요.
또 성찬을 할 때 가령 백포도주로 해야 되냐 빨간 포도로 해야 되냐 프랑스에서도 백포도주를 하는 데가 있어요. 아니 예수님 피가 빨간색이지 하얀색이냐 이래가지고 또 이거 반대하고 또 이쪽에서는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의미가 중요하지 그래서 또 갈등을 하는 거예요.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살리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한 영혼을 살리는 일을 위해서라면 유연성을 가져야 돼요. 없는 것을 만들 수도 있고 있는 것을 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높은 경지의 영성이기 때문. 오늘 바울과 신라 그리고 디모데가 이제 출발하면서 이 요소를 이 장애 요소 할례라고 하는 장애 요소를 과감하게 제거함으로 이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는 그런 경지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유연성이 있기를 바랍니다. 해외에 사는 특히 우리 교인들은 그렇게 막 굳은 사고를 가진 사람은 없다고 생각을 해요. 굉장히 유연한데 또 나이가 들고 나중에 신앙생활하다 보면 막 괜히 고집이 생기게 돼요. 막 자기 것만 옳다고 하고 그러지 말고 그러지 말고 아주 중요한 것 말고는 서로 포용하고 함께 가는 것이 좋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사도와 장로들이 결정한 규례를 지키게 했습니다. 4절에 보면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찍히게 하니
1차 선교 여행 때 복음을 전했던 그 지역을 다시 돌아간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예루살렘 공예에서 결정한 그 규례 그러니까 이방인들에게는 원래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었잖아요. 그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가지고 예수 믿은 게 아니잖아요. 그냥 예수 믿었어요. 구원받았어요.
근데 거기다가 다시 유대인처럼 율법을 지키라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유대인들이 원래 지켰으면 그냥 예수 믿은 다음에도 지키고 싶으면 지켜라 이렇게 하면 되는데, 이방인들에게는 그렇게 강요하지 말자 아주 요긴한 거 음행 그다음에 피채 먹는 거예요. 먹매어 죽인 거 몇 가지만 잘 지키기 위해서 덕을 세우도록 하고 그건 구원과 아무 관계가 없으니까 그냥 그 기본만 지키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 안에 살게 하자라고 하는 규례를 이제 받아가지고 이제 여기에 전해주게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기뻐했어요. 지금 이 루스드라를 비롯한 이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를 가리켜서 갈라디아 교회라고 합니다. 1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복음을 전해가지고 성령 받고 구원받아서 너무 기뻐하는데, 바울이 그 지역을 떠나서 2차로 올 때까지 준비하는 기간에 거짓 교사들이 또 유대인들이 딱 나타나가지고 야 저 바울 가짜야 저거 사이비야 저거 진짜 사도도 아니야 저건 율법을 무시하는 아주 왜곡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야라고 하면서 흔들어 놨어요. 그래가지고 자꾸 헷갈리고 있는데 예루살렘 교회가 결정한 그 규례를 가지고 와서 딱 내놓으니까 이 사람들이 안심이 됐어요.
그렇지 내가 제대로 된 복음을 받았지 내가 잘 믿은 거야. 앞으로 열심히 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제 이 2차 전도여행이 끝나고 한 3년쯤 그러니까 이 기간에서 한 3년쯤 됐을 때 2차 전도여행 거의 마무리되는 그 지점에서 고린도에 있는데 갈라디아 소식이 온 거예요. 그렇게 좋아하고 아유 바울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 복음을 가르쳐줘서 감사합니다. 정말 성령님만 의지하고 살겠습니다.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결단했던 고린도 교회가 다시 흔들린 거 사람은 이렇게 흔들려요. 그래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 거예요. 화석화된 신앙으로 또 돌아가고 있었어요. 바울의 가르침을 의심하고 은혜의 복음을 버리고 영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그리스도인이 된 거예요.
그러다니 막 바울이 화가 나가지고 급하게 편지를 써요. 그 편지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흔들리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 이게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3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처음에 3장 1절에 초성이 이거예요.
어리석도다 편지에 우리가 그냥 말로 너 바보야 이렇게 그냥 말로 들으면 웃어 넘길 수 있는데 이메일이나 편지로 딱 오면요. 굉장히 당황스럽고 열받습니다. 이 편지의 힘이거든요.
근데 3장 1절을 열면서 어리석도다 이디오드라 뭐라 영어로 뭐라고 해 수집 휘대 이 바보 멍청이더라 말이야 뭐 이런 표현이거든요. 딱 이렇게 시작을 하면서 바울의 그 심정을 씁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무 얌전하게 읽었어요. 여기 읽을 때는요. 막 핏대를 올리면서 읽어야 되는 거예요. 이 어리석은 놈들아 갈라디아 사람들 너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힌 그것이 바로 눈앞에 보였는데, 니가 예수 믿고 은혜받은 게 언젠데 벌써 까먹고 말이지 그 게임에 넘어가 가지고 이렇게 됐느냐 성령을 받은 것이 너희가 율법을 그때 지켜서냐 아무것도 지키지 않았을 때 성령 받고 예수 믿고 구원받은 거 아니냐 이 바보들아 왜 그렇게 됐느냐 성령으로 시작했다. 육체로 마치했느냐 이렇게 편지를 쓸 만큼 이 갈라디아 교회가 흔들리게 됩니다.
나중에 갈라디아서를 또 공부할 때 이 부분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공부를 하면 좋겠어요. 어쨌든 이 규례를 딱 전해주니까 일단은 1차적으로 이 사람들이 우리가 이제 제대로 된 복음을 받았구나 앞으로 신앙생활 잘하자 하는 분위기가 딱 일어났어요.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그 결과 큰 부흥이 일어납니다. 오늘 5절에 보면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그 수가 날마다 늘어나니라 여러 교회라고 그랬어요.
이건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 루스드라 교회 이고니온 교회, 더베 교회 이런 교회들 있죠? 이런 전체 교회 갈라디아 교회입니다. 그 교회들 교회들이 믿음이 굳건해졌다. 그리고 수가 늘어났다. 이 두 가지 믿음이 굳건해지고 구원받는 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한마디로 뭐라고 해요? 부흥이라고 합니다. 부흥이 일어나고 그런데 이게 보통 구원이 아니라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나 자고 일어나면 교인 수가 늘어나는 거예요. 그게 지금 갈라디아 교에서 일어난 구원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제목을 큰 부흥이라고 쓴 거예요.
부흥은 첫째는 여러분 여러분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 굳건해지는 거예요. 막 흔들리던 믿음이 다시 이렇게 살면 안 되지. 그래서 더 성령 충만하고 더 하나님께 헌신하고 더 기도하고 막 이런 각성이 일어나는 거예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런 각성이 일어나서 개인적인 부흥이 먼저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그게 일어나야 돼요. 그렇게만 살 수는 없잖아요.
또 그다음에 숫자가 늘어나는 숫자가 각성은 일어나는데 전도가 안 돼 이것도 문제입니다. 전도가 돼야 돼. 근데 이 전도는 그냥 우리가 열심히 나가서 전도함으로 일어나는 부흥 정도가 아니에요.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되지만 부흥의 시기가 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그냥 그 지역사회에 마치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 같은 거룩한 흐름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를 자꾸 가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막 또 괜히 교회가 막 막 반항심도 생기고 교회 가면 뭔가 일어날 것 같은 그런 두려움들이 막 생기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부흥의 시기는 예배당 가까이 끌려서 온 사람들도 딱 들어설 때 여기서 성가대가 찬양대가 연습하는 소리만 딱 들어도 탕자가 집 나갔다가 죽을 고생하고 아버지 집에 왔을 때 눈물이 쫙 흐르는 것 같은 그 감동이 일어나는 그게 부흥의 시기에 일어나는 성령의 감동이 우리나라가 옛날에 그랬어요. 그래서 가만이떼기 하나만 깔고 예배를 드려도 그냥 억지로 사람들 데려다 놔도 그 사람들이 변화가 되는 거예요.
요즘은 그 열기가 식었어요. 다시 부흥의 시기가 와야 합니다. 특별히 프랑스 땅에도 부흥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보내셨고 우리 교회를 세우신 줄로 믿습니다.
여기는 과거에 순교자가 나온 땅이고요. 과거 2천년 동안 교회가 교회에 영광이 있었던 땅이고 종교 개혁이 일어났던 땅이고 지금은 예배당마다 텅텅 비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다 흔들렸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이 일을 시작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은 우리부터 해야 되고 우리부터 부흥이 일어나야 되는데 첫째는 사모해야 되고 둘째는 그 부흥을 가로막는 장애 요소들을 제거해야 돼요.
그래서 구역별로 나누실 때 이 부분에서는 뭘 제거할 것인가 뭐가 문제인가 뭐가 우리 에너지를 뺏어가는가 그걸 다 제거를 하고 생명의 복음에 집중하고 그럼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