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부터 매일신보 정치부장으로 있던 이원영(李元榮)의 회고, '언론비화 50편'(한국신문연구소, 1978, p.95-97)
정치부장으로 있던 1944년 어느 날인가 하루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도서과장이 나를 만나자는 것이었다. 또 무슨 명령이 있으려니 하고 잔뜩 긴장해서 갔더니 그들은 별다른 이야기도 없이 요정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일반적인 世事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별다른 것이 아니겠거니 하고 헤어지려는데 도서과장이 나에게 큼직한 취재활동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부탁이란 소위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을 위해 한국 청년이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한국이 대동아건설에 강력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청년을 고무하는 강연회나 글을 쓰도록 날더러 송진우 안재홍 여운형 홍명희 제씨(諸氏)와 교섭하라는 요지였다. 나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들의 요구를 따르고 말았다.
맨 먼저 계동으로 고하(古下) 송진우 선생을 찾았다. 매일신보 정치부장이란 명함을 내놓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선생님, 총독부에서 할생들의 군대지원을 고무하는 강연이나 글을 써서 신문에 내라고 해서 왔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하고 말씀을 드리니까 “나를 서대문 감옥으로 데려가라지. 나는 글 쓸 줄도 모르고 연설도 할 줄 몰라. 가서 내가 그러더라고 그렇게 전해요”하고 보료에 기댄 채 일어나지도 않고 한마디로 거절하는 것이었다. 고하선생의 당당한 풍채가 놀랍기도 하려니와 나로서도 굳이 글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어-그저 기계적으로 접촉해 본 것 일뿐-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나오고 말았다. 그 때 고하선생의 옷이 파란 색 조끼의 한복차림이었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다음은 당시 平澤 振威에 계시던 민세(民世) 안재홍 선생의 차례였다. 그에게는 정치부의 김모 기자를 보냈다. 그런데 김 기자는 그날로 두툼한 원고를 받아가지고 왔는데 그에 의하면 앉아서 기다리라고 하고 써 주시더라는 것이었다.
여운형씨에게는 다른 정치부 기자를 보냈다. 몽양(夢陽) 선생이 동경에 가는 길이라 서울역에서 만나 차중 인터뷰를 통해 글을 받아 기재했다.
홍명희씨에 대해서는 사정이 달랐다. 그의 아들 기문과는 막역한 친구간 이었으므로 먼저 그를 만나 총독부의 지시내용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그는 아버님이 창동에 계시지만 槐山에 가시고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자고 해서 총독부에는 그렇게 복명(復命)하고 말았다.
이러한 이야기는 잘못하면 한 개인의 명예에 본의 아닌 누를 끼칠 것이기 때문에 그 때의 시국이라든지 그 분들의 개인적인 사정 또는 그 밖의 여러 가지 환경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단지 나 개인의 직접적인 체험이기에 적어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극히 부분적인 이야기가 그 분의 생애를 판단하는 자료이기에는 아주 적당치 못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두려는 것이다.
◆ 여운형의 경우
李基炯, '몽양 여운형', 1984, 실천문학사 235~238쪽
-조선총독부와 각 경찰국 및 보호관찰소는 친일파들과 어지간한 명사들을 유인 협박하여 이른바 ‘대동아성전’에 호응 협조하라고 좌담회와 강연회를 연달아 열었다. 또한 어용신문인『경성일보』와『매일신보』그리고 라디오를 통해 매일같이 법석을 떨었다.......<중략>........
1942년 12월 21일 밤, 몽양은 고이소 총독과 만나 그의 협조요구를 거절하고 관저를 나서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헌병들에 의해 경성헌병대로 연행되었다........<중략>..........
몽양만은 송치 기소되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죄명으로 1년 징역형에 3년 집행유예를 언도받고 1943년 6월에 출옥한다.
출옥 후 몽양은 극도로 쇠약한데다 신병으로 경성요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이때 담당 검사인 도자와(戶澤)가 전향문을 써내라고 세 번이나 덤벼들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다음에는 사상검사 스기모토(杉本覺一)가 그 자신이 기초한 전향문을 보내어 날인을 강요했지만 두 번 다 거부해 버렸다. 그러자 서울지방법원 백윤화 판사가 직접 찾아온다. 그는 “이것은 여 선생 신념과는 아무 관계없는 단순한 형식에 불과하니 날인해달라”고 간청하는 한편, 상부의 엄명이라면서 “만일 응하지 않는다면 다시 구속하여 형을 집행할 방침”이라고 협박조로 나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몽양의 건강을 염려하는 가족과 친척들의 근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모두들 근심에 잠겨 있었다. 몽양은 가족과 친척들의 간절한 권유를 귓전에 흘리며 눈을 감고 묵묵히 병상에 누워 있었다. 마침내 일제의 관헌은 가족의 손에 의해, 그나마 협박과 공갈에 의해 날인된 전향문을 들고 의기양양마해 돌아간다.
이 이른바 전향문 강제극이 있은 후『경성일보』(일어간행) 기자가 와서 5분 가량 면회하고 가더니, “여운형은 성전완수에 적극 협력하고 나섰다. 특히 청년 학생들은 전쟁터로 나아가 목숨을 바쳐 황은에 보답하라고 소리 높이 권고한다.” 운운의 장문 기사를 연 3일간에 걸쳐 연재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것은 여운형을 이용하자는 일제의 새빨간 날조극이었다. 6월 하순 어느 날 아침, 필자는 몽양 자택을 방문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이 바로 이 엉터리 기사의 첫회가 발표되던 날이었다. 방바닥에 놓인『경성일보』를 들고 필자가 물었다.
“선생님, 어찌된 일입니까?”
“글쎄 기자가 쫓아와서 몇 분간 이러쿵저러쿵 하고 가더니 저렇게 났구먼……”
필자도 더 묻지 않았고, 몽양도 더 말이 없었다.
◆ 인촌 김성수의 경우
@@ 仁村과 兪鎭午 / 片片夜話 (동아일보 1974년 4월29일자)
유진오의 회고
학도지원병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 한마디 첨가해둘 이야기가 있다. 지원 소동이 일단락되어 자의든 타의든 학생들이 일본 군대에 입영하는 것이 결정되자 이번에는 모모하는 인사들에게 학병을 격려하는 글을 「매일신보」(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여서 그때 유일한 우리말 신문이던 총독부 기관지)에 쓰라는 명령이 총독부로부터 내려왔다.
나한테 그 명령을 전달해 온 것은 매일신보기자인 김병규(金秉逵)군 이었다. 金은 일본서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나와 편지를 주고받고 하던 수재형의 청년인데 동경제대 불문과를 다니다가 일본서 법문계 학생들(일본학생) 이 학병으로 끌려 나갈 때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와 매일신보 기자를 다니고 있던 사람이다.
金의 말에 의하면 집필자 명단은 총독부 경무국에서 직접 인선한 것으로서 金性洙 宋鎭禹 呂運亨 安在鴻 張德秀 李光洙 나와 그밖에 1,2인 이었다. 그때 조선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다할 수 있는 인물을 총망라하다시피 한 것이었다. 연령으로나 관록으로나 다른 사람들과 비교가 안 되는 내가 그들에 끼어든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경무국에서 직접 인선한 것이라니 어디가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집필은 경무국의 「명령」이라고 金은 강조하였다.
나의 일은 그렇다 치고 글 쓰지 않는 인촌이 문제였다. 金의 말에 의하면 인촌은 끝내 못 쓰겠다 해서 그렇다면 자기(金)가 대필 하겠다 하였더니 그렇다면 쓴 글을 나(兪)에게 보이고 나서 신문에 내라는 대답이었다 한다. 전화로 확인해 보았더니 「창피한 글」이나 안 되도록 잘 보아달라는 인촌의 대답이었다.
같은 말을 해도 즐겨 지나친 표현을 택하는 사람이 있다. 기왕 거족적인 수모와 수난 속에 허덕이고 있는 판에 창피고 안하고가 있을까마는 그래도 최후의 인간적인 체면만은 유지하고 싶다는 것이 그 때의 나의 심경이었다. 인촌도 같은 심정이 아니었던가 한다.
金이 대신 집필해온 인촌 명의의 글을 보니 수재인 만큼 「창피」한 표현은 거의 없는 조촐한 것이었다.
나는 학병에게 주는 말로 『제군의 입영은 조선인의 힘의 증대며 따라서 앞으로 조선인의 지위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취지의 글을 써 주었다.
사실이 아닌 것이 아니고 기왕 입영하게 된 학병들의 운명 속에서 조금이라도 적극적인 의의를 찾아보고자한 것이었지만 나의 글도 끝까지 까실까실한 놈이라는 인상만 일인들에게 주었을까, 결국 구차스런 점에 있어서는 별 수 없는 글이었다.
내가 지금 그때 「명사」들의 학병 격려문이 나오게 된 경위를 말하고 특히 인촌 명의의 글에 관해서는 대필자의 이름까지 밝힌 것은 해방 후 인촌은 그 글 때문에 좌익으로부터 심히 부조리한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병규는 해방 후 좌익에 가담하였는데 金 등이 작성해서 그해 9월 주로 미군기관에 뿌린 「반역자와 애국자」라는 영문 책자에는 인촌 명의의 그 글 (김병규가 쓴 것)과 해방 후에 행한 여운형씨의 연설문이 나란히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일제하의 글을 사용하겠다면 呂씨의 것도 그때 매일신보에 났던 것을 사용하였어야 할 것이고 해방 후의 것을 쓰겠다면 인촌의 것도 해방 후에 것 중에서 골랐어야 할 일이 아닌가.
@@@ 유진오, ‘양호기’(養虎記) 1977, 고려대 출판부 114쪽
학병(學兵)문제에 관해서는 한 가지 더 남겨둘 이야기가 있다. 학병지원소동이 일단락되어 해당학생들이 대부분 학병으로 나가게 되자, 이번에는 모모하는 인사들에게 학병을 격려하는 글을 신문에 쓰라는 명령이 총독부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신문이라야 그 때 우리말로 간행되는 것은 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 하나 뿐이었다.
나한테 그 명령을 전달해온 것은 매일신보 기자인 김병규(金秉逵)군이었다. 김은 일본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나와는 편지 왕래가 있던 수재 타이프의 청년인데, 동경제대 불문과를 다니다가 일본에서 법문계 학생들이 학병으로 끌려나갈 때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와 매일신보 기자로 다니고 있었다.
김의 말에 의하면 집필자 명단은 경무국에서 직접 인선한 것으로 김성수, 송진우, 여운형, 안재홍, 이광수, 장덕수, 나와 그밖에 1,2인이었다. 그 때 조선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을 총망라하다시피 한 것이었다. 모두 나보다 훨씬 연장자들 뿐인데 어떻게 해서 내가 그 축에 끼어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집필은 경무국의 명령이라는 것을 김은 강조하였다.
나는 어떻게든 쓰겠지마는 글 쓰지 않는 인촌이 문제였다. 김은 벌써 인촌을 만난 모양으로, 인촌의 글은 자기(金)가 대필하겠다 하였더니, 정 안쓸 수 없는 것이라면 대필은 하되, 쓴 것을 나에게 반드시 보이고 내도록 하라고 인촌이 말씀하였다고 전하였다. 전화로 확인해 보았더니 ‘창피한 글’이란 안되도록 주의해 달라는 인촌의 대답이었다.
같은 말을 해도 즐겨 ‘창피’한 표현을 쓰는 사람이 있다. 기왕 본의 아니게 쓰는 글이니 창피하고 안창피하고가 어디 있을까마는 그래도 입을 열면 으레 ‘팔굉일우’(八紘一宇)니 ‘어릉위(御稜威)’니 해가며 과잉충성을 일삼는 사람들이 많은데 인촌은 그러한 ‘창피’를 특히 싫어하였다. 죽어도 더럽게 죽지나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김이 대신 집필해온 인촌의 글 아닌 인촌 명의(名義)의 글을 보니 수재인 만큼 염려한 것 같은 ‘창피’한 표현은 거의 없는 조촐한 글이었다. 나는 ‘조선청년의 입영은 조선인의 힘의 증대다’라는 취지의 글을 써서 인촌명의의 글과 함께 김군에게 넘겨주었다.
내가 지금 그 때 학병격려문이 나가게 된 경위를 말하고, 특히 인촌명의의 글에 관해서는 진짜 집필자의 이름까지 밝힌 것은, 그 글 때문에 인촌은 해방 후 심히 부당하고 억울한 비난을 받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김병규는 해방 후 좌익에 가담했는데 김 등이 작성해서 그 해 9월에 주로 미군기관에 뿌린 ‘Traitors and Patriots’라는 팜플렛에는 인촌명의의 그 글이, 해방 후 해방의 감격 속에서 행한 여운형씨의 연설문과 나란히 실리어, 좌익을 치켜올리고 우익을 깎아내리는 데 부당하게 악용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일제하의 글을 사용하겠다면 여씨의 것도 그 때 매일신보에 인촌이나 나의 글과 나란히 발표되었던 것을 사용했어야 할 일이 아닌가.
학생들 사이의 학병거부운동은 여전히 지하로 계속되고 있었다. 이철승군을 비롯한 강경학생들은 경성제대의 이혁기, 기타 각 학교 학생들과 연락해 가면서 모의를 계속하였다.
◆ 조만식의 경우
@@@김삼웅.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 서울:인물과사상사, 2004. p.248~250
조만식선생의 논설은 당시 매일신보 평양지사장 고영한이 날조하여 게재한 것이다. 그야말로 위서가 아닐수 없다. 날조 사실은 몇가지 증언과 기록으로 드러난다.
당시 매일신보에 있었던 평양특파원 김진섭씨가 대한언론회보 2000년 9월1일자 "그때 그시절...녹취한국언론사"에서 <조만식 선생 인터뷰 조작기사 쓴 평양지사장 자살>이라는 대목에서 자세히 증언했다. 다음은 그 요지
----하루는 고영한지사장이 조만식 선생을 인터뷰해오라고 했다. 선생으로부터 어떠한 논평도 들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조만식 선생을 찾아갔다. 마침 평양 따님 댁에 와 계시던 선생을 찾아가 찾아뵌 연유를 말했더니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댁으로 가셨다. 인터뷰에 실패하자 고영한 지사장이 사진기자 한명을 데리고 취재하러 갔다. 사흘즘 뒤 인터뷰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
'조만식=친일파'라고 여기게 된 기사가 실린 것이고, 그 증거자료로 신문스크랩이 제시되었다.
광복후 고영한 지사장을 다시 찾아가 지방에만 있지 말고 서울로 올라가자 했더니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고 했다. 새벽에 찾아가니 고 지사장이 자살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도 뚜렷한 자살이유를 몰랐다. 며칠 뒤 항간에 소문이 돌았다. 직원중에 공산주의자가 한명 있는데 고지사장에게 친일파라고 몰아세우며 협박을 하고 조만식선생 기사 조작으로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국민일보 2002.03,01
기독민족운동가인 고당 조만식 선생(1882∼1950)의 유일한 흠집으로 여겨졌던 ‘학병권유 논설’이 위서인 것으로 밝혀졌다.
친일과 민족반역자 문제에 관한 연구를 계속해온 김삼웅 주필(대한매일)은 최근 ‘출판저널’을 통해 “기독교운동을 통해 민중을 교화시키고 일제의 갖은 핍박과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진영을 지켜온 고당의 친일성 논설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 이에 대한 탐구를 계속한 결과 당시 논설이 게재된 신문사의 지사장이 날조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고당은 1905년 숭실중학에 입학하여 예수를 영접한 후 1919년 3·1운동 당시 평안도 오산학교 교장으로 이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복역하는 등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전도와 교화,독립운동에 힘써왔다.그러나 1943년 11월16일자 ‘매일신보’에 자신의 사진과 함께 ‘학도에게 고한다’는 제목의 학병지원을 주장하는 내용의 논설이 실리면서 변절자의 대열에 끼이고 말았다.
이 글의 내용은 ‘…나는 하루바삐 반도 청년학도가 일거에 모두 가장 활발하게,가장 용감스럽게 지원하기를 적격자 및 일반학도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바이다…생명을 국가비상지추에 반도를 위하여 또는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하여 바치게 된 제군은 얼마나 자랑스러운가…’라는 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김삼웅씨는 “이 글은 당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평양지사장 고영한에 의해 위서된 것”이라며 그 무렵 ‘매일신보’ 평양특파원으로 근무한 김진섭씨가 ‘대한언론인회보’ 2000년 9월1일자 ‘그때 그 시절-녹취 한국언론사’에 밝힌 내용을 근거로 삼았다.
김진섭씨는 회보에서 ‘지사장인 고영한이 자신에게 고당 선생을 취재해 오라고 지시했으나 고당으로부터 시국과 관련한 어떤 논평이나 언급도 받아낼 수가 없었다’며 ‘할 수 없이 지사장에게 고당이 집에 안계시더라고 허위 보고를 했으나 본사의 독촉이 심했던지 다음날 직접 나섰고 사흘쯤 뒤 논설이 실리게 됐다’고 회고했다.
고영한은 해방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김진섭씨에 따르면 ‘고당 논설조작사건으로 해서 그가 많이 자책했고 지사 직원 가운데 공산주의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가 경방(警防)단장도 겸하며 그를 친일파로 단죄하려 해 결국 자살로 과오를 씻으려 했던 것 같다’는 기록을 남겼다.
김삼웅씨는 “고당의 논설을 분석해 보니 당시 친일인사들이 하던 따위의 상투적인 내용들이었다”며 “전시상황에서 민족지도자들의 협조가 급했던 일제가 날조를 서슴지 않는 행위를 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고당은 평양그리스도청년회 총무와 산정현교회 장로를 역임했고 광복후에도 공산주의자의 협조 회유에 굴하지 않다가 6·25 때 평양형무소에서 그들에 의해 살해된 지절의 신앙인이었다.
전정희기자 jhjeon@kmib.co.kr
@@@@@@ 김진섭(언론인, 매일신보 동아일보 등 근무), '녹취 한국언론사' (대한언론인회, 2001년)
하루는 고영한(高永澣) 지사장이 나에게 조만식 선생을 만나 취재해오라는 지시를 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전쟁은 막다른 고비로 치닫는 상황이었고, 이른바 내선일체란 구호를 외치며 징병제, 학병제를 실시해서 거국적 총동원령 체제하에 있었고 한반도에서도 학도병을 한창 뽑아가던 시기였다.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일제는 조만식 선생같은 민족지도자들의 협조가 무척 아쉬웠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취재지시를 받은 나는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시국과 관련한 어떠한 논평이나 언급도 받아낼 수 없으리란 걸 알았지만, 찾아 나섰다. 마침 평양시내 따님댁에 와 계시던 선생께, 찾아온 용건을 아뢰었더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겠냐"하시곤 함구로 일관하다가 댁으로 가셨다. 지사에 들어와 "안계시더라"고 허위보고 할 수 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서울서 내려온 일류 기자가 그것도 못하느냐"고 크게 책망을 들었다. 고영한 지사장은 때마침 들어온 김창문 기자에게 같은 취재지시를 했다. 조 선생 댁은 시내에서 40~50리 떨어진 강서였는데, 김기자와 나는 함께 나섰지만 이심전심이었다. 중도에서 대포만 마시고 또 빈손으로 들어와 호된 기합을 받았다.
며칠뒤, 본사의 독촉이 심했던지, 고영한 지사장이 사진기자 한 명을 데리고 직접 나섰고, 사흘쯤 뒤 인터뷰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 아무리 뜯어봐도 자작 작문기사(作文記事)였다. 당시의 그 기사가 요즘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조만식=친일파'로 매도되는 꼬투리가 됐고, 그 때 신문 스크랩이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는 데 진상은 이러한 것이었다.
격동기, 전환기에 기자의 처세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실감하는 사례이다. 조국광복이 된 후 서울본사에서 근무하다 김창문과 함께 평양에 갔다. 가는 길에 고영한 지사장을 만나, 지방에만 있지 말고 함께 상경하자고 권했더니 내일 아침에 만나자고 해서 헤어졌다. 다음날 새벽에 찾아 갔더니 지사장의 어머니께서 "우리 애가 어젯밤 자살했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도 자살한 뚜렷한 이유를 모른다고 했다. 며칠 지나니까 항간에 소문이 돌았다. 지사직원 가운데 공산주의자가 한 명 있었는데, 당시 경방단장(警防團長)직도 겸하고 있던 고 지사장을 평소 친일파로 몰아세우며 협박을 일삼아서 괴로워했고, 또 조만식 선생의 인터뷰 기사 사건으로 해서 많이 자책하는 것을 보았다는 주변의 얘기들이 무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