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일직 소호리 대구서씨 약봉 후손 세거지
[1] 대구서씨(大丘徐氏)와 달성서씨(達城徐氏)
전고대방(典故大方)이라는 책에 서씨(徐氏)의 정승(政丞) 9인의 관향(貫鄕)을 다음처럼 2 가지로 다르게 표기하였다.
▢徐景雨(仁祖朝,右相,達城人-徐渻長子)
▢徐文重(肅宗朝,領相,大邱人-徐景雨孫,景霌長子貞履次子로景雨子元履에게入養)
▢徐宗泰(肅宗朝,領相,大邱人-徐渻4子景霌長孫文祥子,藥峯玄孫)
▢徐命均(英祖朝,左相,大邱人-徐宗泰子,景霌長子貞履長曾孫,藥峯5世孫)
▢徐志修(英祖朝,領相,達城人-徐命均長子,藥峯6世孫)
▢徐命善(正祖朝,領相,達城人-徐景霌長子貞履弟五子文裕孫,藥峯5世孫)
▢徐龍輔(純祖朝,領相,達城人-徐渻次子景需六世後孫,藥峯7世孫)
▢徐邁修(純祖朝,領相,達城人-徐景霌三子晉履玄孫,藥峯6世孫)
▢徐堂輔(高宗朝,領相,達城人-徐命均次子懋修孫,藥峯7世孫)
‘徐景雨’와 ‘徐文重’의 조손간을 ‘達城人’과 ‘大邱人’, ‘徐命均’과 ‘徐志修’ 부자 사이를 ‘大邱人’과 ‘達城人’으로 달리 표기하였으므로 거기에 별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겠으나, 전통적으로 달성서씨(達城徐氏) 중 약봉(藥峯) 서성(徐渻-文判中樞忠肅公)의 계열을 특히 대구서씨(大丘徐氏)라 하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처지이다.
모든 서씨(徐氏)의 시조는 신라 말 아간대부(阿干大夫) 서신일(徐神逸)이라 한다. 그 중 달성서씨(達城徐氏)의 시조는 서진(徐晉)인데,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등에 오르면서 나라에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지면서 달성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세거하였다고 한다. 서진뿐 아니라 아들 서기준(徐奇俊)과 손자 서영(徐穎)까지 3대가 달성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이 달성서씨는 현감공파(縣監公派), 학유공파(學諭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의 8파로 나뉘어져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전국의 달성서씨는 132,270 가구 총 429,353 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이 달성서씨와 같은 겨레이면서 시조와 족보를 달리하는 대구서씨가 있다. 대구서씨 시조는 서한(徐閈)인데, 고려 때 조봉대부(朝奉大夫)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냈으며 대구에 세거하였다. 대구서씨는 만사공파·전첨공파·첨추공파·도위공파·봉사공파·사가공파·서흥파·춘헌공파·승사랑공파·장원공파·훈련봉사공파·배산파 등 12개 파로 나뉘어져 있다.
이 두 관성(寬姓)은 결국 같은 계열인 서씨 중 소위 경파(京派)는 소윤공파(少尹公派) 대구서씨로, 향파(鄕派)가 판도공파(版圖公派) 달성서씨로 분파한 것이 된다. 이 두 성씨는 근원이 같고 달성이 대구의 옛 이름이기도 하여 혼동되기도 하지만 엄연히 본관이 다르고 대동보(大同譜)도 따로 만들고 있다.
대구서씨는 시조 이후 2~6세의 세계(世系)는 실전되었다고 한다. 7세 서익진(徐益進)은 고려 때 전객사(典客事)를 지냈고, 8세 서의(徐義)는 호조전서(戶曺典書)를 지내다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하자 은거하였다. 9세 서미성(徐彌性)이 새 왕조에 출사하여 안주목사(安州牧使)를 지냈으며, 이후 조선에서 상신 9명, 대제학 6명, 왕비 1명을 비롯하여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으로 번성하였다.
대표적 인물은 세종(世宗)에서 성종(成宗)에 이르는 6대 왕조에서 6조(六曹)의 판서(判書)와 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하고 학자로도 유명한 서거정(徐居正)이다. 그의 종현손(從玄孫-)인 약봉(徐藥峰) 서성(徐渻)은 선조(宣祖) 때 5도의 관찰사(觀察使)와 호조(戶曹)·형조(刑曹)·공조판서(工曹判書)·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으며, 서인(西人)이 주동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고비로 약봉의 일가는 전성기를 맞았다.
약봉의 네 아들 서경우(徐景雨)·서경수(徐景需)·서경빈(徐景霦)·서경주(徐景霌) 가운데 서경우는 우의정(右議政)에 오르고, 경주는 선조의 부마(駙馬)가 되었다. 4형제 중에서도 둘째 서경수와 넷째 서경주의 집이 특히 번성하여 서경수의 현손 서종제(徐宗悌)의 딸이 영조비가 되고, 서종제의 현손 서용보(徐龍輔)가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이 서경주의 집에서만 영의정 6명과 좌의정 1명, 대제학 5명이 나왔다.
특히 서종태(徐宗泰)·서명균(徐命均)·서지수(徐志修)의 3대 상신(三代相臣)과 서유신(徐有臣)·서영보(徐榮輔)·서기순(徐箕淳)의 3대 대제학(三代大提學)이 유명하고, 또 서명응(徐命膺:大提學)·서호수(徐浩修:直提學)·서유구(徐有榘:吏判)의 3대는 모두 문명(文名)이 높았다. 이처럼 이른바 '약봉가(藥峯家)'이라 부르는 서성의 가계는 선조(宣祖)에서 고종(高宗)에 이르는 약 300년간 정계에서 주요 역할을 하였다. 이밖에 한말(韓末)의 개화파(開化派)인 서광범(徐光範)과 서재필(徐載弼) 등을 배출하였다.
[2. 안동시 일직면 소호리 대구서씨 약봉 후손 세거지]
서한(徐閈을 시조로 하고 서해(徐嶰)를 입향조로 하는 안동 세거 명족에 대구서씨가 있다. 시조의 14세손 약봉(藥峯) 서성(徐渻) 이후 크게 번창한 가문이다. 이 대구서씨는 고려 말 개경에 살면서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낸 서의(徐義) 이후 안주목사(安州牧使)를 지낸 서미성(徐彌性) 때부터 줄곧 한양에 살면서 성종(成宗) 때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을 지낸 서거정(徐居正), 중종(中宗)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서후(徐厚),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지낸 서고(徐固) 등 많은 명신을 배출하였다.
한양에 살았던 서고의 아들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는 고성이씨(固城李氏)인 청풍군수(淸風郡守)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사위가 되어 명종(明宗) 초에 소호리에 내려왔다. 무금정 이고는 임청각(臨淸閣) 이명(李洺)의 아들이다.
안동 소호리(현 일직면 망호리) 외가에서 태어난 서해(徐嶰, 1537~1559)의 아들 서성은 대구서씨의 새로운 시대를 연 중흥조로 1586년 문과에 급제하여 6도의 관찰사, 개성유수, 4조의 판서, 의정부참찬,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맏아들 서경우(徐景雨)도 1603년 문과에 올라 우의정을 지냈으며, 셋째 서경빈(徐景霦)은 병자호란 때 과천현감(果川縣監)을 지냈으며, 넷째 아들 서경주(徐景霌)는 선조(宣祖) 부마(駙馬)가 되었다.
서성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된 1894년까지 약 300년간 문과 급제자가 123명이나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는 아들 서경우(徐景雨)가 우의정, 증손 서문중(徐文重), 현손 서종태(徐宗泰), 5세손 서명선(徐命善), 6세손 서지수(徐志修), 서매수(徐邁修), 8세손 서당보(徐堂輔) 등이 영의정, 5세손 서명균(徐命均)이 좌의정에 오르는 등 정승이 9명이 났는데, 그 중 서경우와 서용보를 제외한 7명(영상 6명, 좌상 1명)이 약봉(藥峯)의 제4자 서경주 후손인대, 기타 6조의 판서를 비롯한 많은 고관대작 명신을 배출하였다.
1721년(경종 원년) 서경빈의 현손 서명량(徐命樑)이 서성의 외할아버지인 이고(李股)의 봉제사와 서성의 옛집을 지키기 위하여 낙향하여 후손들이 지금까지 외손봉사를 하면서 일직면 소호리와 명진리 등지에 살고 있다. 중종 때 이고가 사위 서해에게 물려준 소호헌(蘇湖軒)과 서성이 태어난 약봉태실(藥峯胎室)이 일직면 망호리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3. 대구서씨 주요 인물]
대구서씨의 인맥으로는 뛰어난 학덕 문장과 예지로 조선 초기의 법치덕화에 기여한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과 약봉(藥峯) 서성(徐渻)을 들 수 있다. 1420년<세종 2년> 안주목사(安州牧使)를 지내고 달천부원군(達川府院君)에 추봉된 서미성(徐彌性)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서거정은 세종(世宗)과 성종(成宗) 대에 걸쳐 전후 45년 간 벼슬길에 있으면서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거처 두 번이나 대사간(大司諫)에 올랐으며, 문형(文衡)을 26년 간 지내면서 선비를 23방이나 뽑아 훌륭한 인재를 등용시켰다.
세조 즉위 전 사신(使臣)으로 연경(燕京)에 갈 때, 그는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수행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파사보(婆娑堡에)서 자고 있는데, 그의 어머니 권부인<權近의 딸>의 부고(訃告)가 이르렀다. 세조는 사신 길에 상심(傷心)을 덜기 위하여 부고를 숨기려고 했다. 그러나 서거정이 밤에 잠을 자다가 달이 떨어지는 꿈에 놀라 일어나 눈물을 흘리므로 같이 자던 이가 연유를 물었더니, 꿈에 달에 변괴(變怪)가 생겼는데, 달은 어머니의 상징인 지라 집에 노모가 계시는데 꿈자리가 좋지 못해 울고 있다 하였다. 세조는 탄식하기를 그대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켰구나 하며 그제야 부고가 온 것을 알렸다. 후에 세조가 왕위에 오르고 난 후에도 압록강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자네를 들어 쓴 것은 유독 자네의 재주뿐만이 아니라 하고 극진이 우대하였다.
특히 그는 문장과 글씨를 비롯하여 성리학(性理學)은 물론 경학(經學)과 문학. 천문. 지리. 의학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하였다. 신라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시문(詩文)의 정수만을 골라 실은 동문선(東文選)과 동인시화(東人詩話)를 비롯하여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필원잡기(筆苑雜記).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등 수많은 편저서를 남겼는데, 이들은 오늘날 귀중한 역사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선조 때 별시문과에 급제했던 약봉(藥峯) 서성(徐渻)은 5도(五道)의 관찰사(觀察使)와 3조(三曹)의 판서(判書)를 거처 인조(仁祖)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올랐다. 그의 후손에서 3대 상신<相臣-徐宗泰.徐命均.徐志修>, 3대대제학<大提學-徐有臣.徐榮輔.徐箕淳>, 3대문장<徐命膺.徐浩修.徐有榘>이 배출되어 대구서씨의 거대한 인맥을 이루었다.
현모(賢母)로 손꼽히는 약봉의 어머니 고성이씨(固城李氏)는 시골에 살다가 일찍 과부가 되자 아들의 교육을 위해 한양에 올라와 지금의 만리동 약현에 살면서 자식을 훌륭하게 성장시켰다. 일찍이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약봉은 선조조의 고명칠신(顧命七臣)으로 광해군 때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1613년>에 연루되어, 11년간 유배 생활을 하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당대 인재의 제일인자로 손꼽았던 명신이었다.
약봉의 다섯 아들 중 장남 서경우(徐景雨)는 인조조에 우의정(右議政)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그의 아들 원리(元履)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과 숙종 때 좌의정을 거처 영의정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판중추부사가 되었으며 평생 독서에 힘써서 역대의 사적에 정통했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약봉의 둘째아들 서경수(徐景需)의 아들 서상리(徐祥履)가 병자호란(丙子胡亂) 후 심양(瀋陽)에 불모로 가는 세자<鳳林大君,孝宗>를 호종(扈從)하고 돌아와 경주목사(慶州牧使)와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처 승지(丞旨)에 올랐으며 현손 서종제<徐宗悌, 司評文道의 아들>는 딸이 영조(英祖)의 비<貞聖王后>가 되어 영의정에 추종되고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서종제의 현손 서용보(徐龍輔) 순조 때 좌의정(左議政)을 거처 1805년<純祖5年>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영의정에 오르고 후에 영중추부사에 이르러 가세를 더욱 진작시켰다.
약봉의 넷째아들 서경주(徐景霌)의 집안에서는 경주의 증손 서종태<徐宗泰, 병조참의 徐文祥의 아들>가 숙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좌.우의정을 거처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서명균(徐命均)은 1710년<肅宗36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실록청(實錄廳) 도청당상(都廳堂上)을 겸하여 경종실록(景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처 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며 아들 서지수(徐志修)가 영의정에 올라 명문의 지위를 굳혔다.
1772년<영조48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한 서유신(徐有臣)은 영의정 서지수의 아들로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광주부윤(廣州府尹)과 형.호.예조의 참판(參判)을 지내고 한성부좌우윤(漢城府左右尹)을 거처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올랐다. 그의 아들이 순조조에 죽석문집(竹石文集)을 남긴 대제학(大提學) 서영보(徐榮輔)이며, 손자는 헌종과 철종대에 걸처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했던 서기순(徐箕淳)으로 한 집안에서 6대에 걸처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을 배출하여 명문대가의 골격을 이루었다. 한편 대사헌 서문유<徐文裕-徐景霌의 손자>의 손자 서명웅(徐命膺). 증손 서호수(徐浩修). 현손 서유구(徐有榘) 3대가 문장으로 명성을 떨처 학문의 전통을 세웠다. 영조와 정조대에 걸처 북학파(北學派)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진 서명응은 역학(易學) 실학(實學)을 깊이 연구하여 명성이 높았고 역대 국악(國樂)의 악보를 집대성한 대악전후보(大樂前後譜)를 간행하였다. 그의 아들 서호수는 정조 때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80세 만수절을 축하하러 다녀오면서 지은 기행문집인 연행기(燕行記)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농업백과전서(農業百科全書)인 임원경제십육지(林園經濟十六志)를 저술한 서유구는 농정(農政)에 관한 경론 및 상소문을 써서 영농법개혁을 누차 역설했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유예지(遊藝志)를 저술하여 오늘날 국악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서종옥<徐宗玉-서경주(徐景霌)의 증손, 대사간(大司諫) 서문유(徐文裕)의 아들>의 셋째 아들 서명선(徐命善)은 영조말에 임금의 병이 심해지자 세손<正祖>의 대리청정을 반대해 오던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을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정조 초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감(監役) 서종신(徐宗愼)의 아들 서명구(徐命九)는 영조 때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가 과중한 조세(租稅) 부담을 삭감케 하고 지방 관리들의 부정을 엄단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문장과 청백으로 이름이 높았다. 서명원(徐命元)의 아들 서매수(徐邁修)는 1804년<순조4년> 좌의정을 거처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으로 치사(致仕)하고 향리로 돌아갔다가 뒤에 판중추부사에 이르러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서정수(徐鼎修)와 함께 명성을 떨첬다.
1757년<英祖23年> 음보(蔭補)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던 서유대<徐有大-徐逸修의 아들>는 사복시(司僕寺) 내승(內丞)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訓鍊院正)으로 통신사(通信使)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금위대장(禁衛大將)과 훈련대장(訓鍊大將)을 거처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다. 특히 무신으로서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통제사(統制使)에 재임 시 세병관(洗兵館)의 웅장한 현액을 썼다.
영상의 벼슬에서부터 외직인 방백 수령에 이르기까지 6백여 명의 명신 현관을 배출해 낸 대구서씨는 그 외에도 인물들이 초야에 묻혀 학문과 문행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한말에 와서도 개화부국강병을 위하여 헌신한 인사와 구국 운동의 대열에 앞장서서 의장병으로 신명을 바친 훌륭한 인재가 대거 배출되어 명문 대구서씨의 가통을 지켰다.